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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병공 진군가-495화 (495/558)

제495화

유단이 급하게 천으로 코를 부여잡았다. 하얀 천이 붉게 물들기까지,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괜찮으십니까?”

“괜찮습니다. 피곤해서 그런 겁니다.”

“제가 많이 피곤해 봐서 아는데 그런 식으로 피가 흘러나오진 않습니다. 지금도…….”

붉게 젖은 천을 타고 피가 흘러내렸다. 내버려 두면 과다 출혈로 죽을 기세였다.

기계인형이 다가가 다른 천을 건네줬다. 유단의 안색이 눈에 띄게 파랗게 변했다.

“여기서 죽으면 곤란합니다. 학회장을 죽인 죄로 법정에 서고 싶지는 않거든요.”

“정말 괜찮습니다. 그러니 이만 가보시죠.”

“그 피로 내 이름 쓰고 죽으면 안 됩니다.”

천을 내리며 씩 웃는 유단이었다. 피로 얼룩진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몸을 돌렸다.

웃는 유단을 뒤로한 채 집무실을 나섰다. 대기 중이던 테인이 뒤에 붙었다.

“테인.”

“예.”

“일이 너무 재미없게 풀렸어. 날 끌어낼 목적으로 수작을 부린 걸 텐데.”

“레거시는…….”

“멀쩡해. 내 심상 세계를 건드릴 줄 알았는데 말이야.”

말하며 왼발을 뗄 때였다. 아르드헨은 눈을 찌푸리며 신발을 벗었다.

발가락에 감아둔 실이 끊어져 있었다.

“그럼 그렇지.”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단어를 내뱉었다. 융털, 옥수수, 과립 차, 우중충한 하늘, 무리 지어 가는 개미, 보라색 옷…….

단어와 단어 사이에 이질감이 느껴졌다. 4황자 시절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되뇐 검증용 단어이다.

의미하는 바는 분명했다.

“기억 단절이 있어. 내 안에 뭐가 심어졌는지는 확인할 수 없는데, 뭔가가 있고.”

아르드헨은 집무실 문을 바라봤다.

“레거시를 뚫었다. 저 인간, 볼수록 탐나네.”

테인이 다가오더니 두 팔을 붙잡았다.

“이대로 안전 가옥까지 이동하겠습니다.”

“매뉴얼로 지시해 놓긴 했지만, 바로 이렇게 할 필요는…….”

“눈앞에서 자해하는 걸 지켜볼 수는 없으니까요.”

“다른 거일 수도 있어. 대중 앞에서 성기를 드러내고 괴상한 춤을 춘다, 뭐 이런 거?”

“차라리 그게 낫겠군요.”

뒷짐을 진 채 기다렸다. 테인이 얇은 천으로 손을 묶은 후 정복 상의를 벗어 덮어주었다.

“사람이 순진해서 혀 깨문다는 암시를 걸어놨을 수도 있는데.”

“혀는 좀 짧아져도 괜찮습니다.”

“이 친구가 못 하는 말이 없어.”

마주 오는 사람들에게 눈인사하며 걸었다. 테인은 평소보다 가까운 위치에서 호위했다.

“누가 따라붙었나?”

“없습니다.”

“그게 더 불안한데. 내 머릿속에 대체 뭘 심어놨길래 이렇게 보내주는 걸까.”

“칼리고 씨를 찾아보겠습니다.”

아르드헨은 고개를 저었다.

“서부로 넘어간 후로 연락이 끊겼어. 구치도 마찬가지고.”

“총수님께 도움을 구하는 건…….”

“그 친구가 만능은 아니야. 내 머리에 뭔가 심어졌다고 말하면, 고개를 갸웃거릴걸?”

아르드헨은 걸음을 멈췄다. 노점에서 파는 꼬치가 눈에 들어왔다. 하나 사 오라고 하자 테인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꼭 드셔야 합니까?”

“죽을지도 모르니까. 미리미리 먹어둬야지.”

“그럴 일 없을 겁니다.”

손을 쓸 수 없으니 테인이 든 꼬치 고기를 입만 움직여 뽑아 먹었다.

“맛있어. 그래, 아직 맛보지 못한 게 한가득한데 죽으면 아쉽지.”

“벨루나 씨를 호출할까요?”

“호출하는 것보다 내가 가는 게 빨라. 어디 있지?”

“도턴 남부입니다.”

“멀리도 있네. 해더 트럭을 계속 갈아타고 가면…….”

“한 달 정도 걸립니다. 중간에 산지가 많아서 해더 트럭만으로는 이동이 불가하고요.”

“대체 누구야? 그런 산골에 연구 기관을 박아놓은 놈이.”

“누구겠습니까?”

“누구긴, 잘생긴 나겠지.”

아르드헨은 질겅질겅 씹히지 않는 힘줄을 꿀꺽 삼켜 버렸다.

“주술사님도 수배해 봐. 어디서 꽃구경 중이실 테니까.”

“연락한다고 한들 오실까요?”

“어릴 때 정을 봐서 한 번만 살려달라고 해. 그리고 밑에 애들한테 전해. 둔에 설치해 둔 세이프 하우스 전부 폐기한다고. 집결지도 재설정할 거야. 한 두어 달 긴 휴가라고 해둬.”

“알겠습니다.”

“만약 내가 죽게 되면 후임 시장으로 루네를 밀어줘. 꺼벙한 면이 있지만 멍청하진 않으니까.”

“그런 건 죽은 다음에 생각하시죠.”

“이 친구야, 죽은 다음에 어찌 생각하나.”

“그러니 생각하지 마십시오. 안 벌어질 일이니까.”

아르드헨은 저 멀리 있는 학회 건물을 바라봤다. 신물이라 불리는 레거시가 작동하지 않았다.

학회장의 개인적인 능력일까, 아니면 학회가 개발한 특수한 설비가 있는 걸까.

어느 쪽이든 욕심이 난다.

“두 대를 맞았으니 예의상 한 대 정도는 돌려줘야 하는데.”

“참으시죠. 무엇이 트리거가 될지 모릅니다.”

“근데 워낙 깔끔하게 맞아서 그런가, 신선하네. 이렇게 당해본 건 칼리고 그 인간이 내 뒤를 쑤실 때 빼고는 처음이야. 인간……치고는 대단해.”

테인이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마음에 걸리는 거라도 있으십니까?”

“아니야. 아주 잠깐 사람의 껍데기를 입은 기계 같다고 느껴져서.”

아르드헨은 목을 좌우로 꺾은 후 다시 걷기 시작했다.

“잠시 둔을 떠나 있자고. 머릿속에 뭐가 들었는지 알아낸 후에, 우리 학회장님과 오붓하게 대화해야지.”

다음 대면이 벌써 기대가 된다.

* * *

웁, 유단은 연이어 올라오는 신물을 계속 게워냈다. 맑은 위액에 피가 섞여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기능이 정지하는 거야?

체시가 옆에서 물었다.

“그럴지도.”

유단은 손을 뻗어 천을 잡았다. 입가를 닦고 쓰러지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눈에 보이는 건 시뻘겋게 물든 여러 개의 천이었다. 저 많은 피가 이 몸에서 흘러나왔단 거지?

-오후 모임은 취소해야겠네. 그 꼴로 나가면 네 입지가 위험해져.

“메모지 좀.”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글씨를 쓴 후 체시에게 넘겼다. 기계인형에 옮겨 탄 체시가 메모지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전했어.

“고마워.”

-고맙다는 말을 들을 정도는 아닌데. 아무래도 기능적인 문제가 너한테 생긴 것 같아. 심적으로 힘들다, 이런 상태인가?

“정확한 표현이야.”

사물이 흐릿했다.

눈을 감고 숨을 골랐다. 반작용이 이토록 심할 줄이야.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저번보다 증상이 심해.

“인간의 내면은 수치화할 수 없지. 직접 들여다보기 전까지 예측할 수도 없고.”

-몸에 걸리는 부하를 예단할 수 없으면 그 힘은 사용해선 안 돼. 무질서, 무분별. 가장 위험한 것들이니까.

몇 차례에 걸친 검증으로 안전성을 확보했다고 믿었다. 다른 인간들의 뇌를 헤집어서 기억을 건드는 일. 약간의 피로감만 있을 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이상 징후가 나타난 건 일반인이 아닌 아르드헨의 부하에게 힘을 썼을 때였다.

이명이 찾아왔다. 강렬한 어지럼증과 함께 몸에서 기운이 빠져나갔다.

그때 알았다. 적용하는 대상에 따라 반발력이 다르다는 걸.

그럼에도 버틸 만한 수준이었다.

아르드헨 역시 참아낼 수 있는 수준의 대가를 치르면 된다고 생각했다.

오판이었다.

옛 황제의 심상 세계를 건든 대가는 너무나도 컸다.

-활력 징후가 엉망이야. 반쯤 죽었다고 보는 것도 괜찮겠어.

대꾸할 힘조차 나지 않았다.

인간의 몸을 빼앗고, 심상 세계를 획득함으로써 부가적으로 얻은 편리한 능력인 줄 알았는데.

“이용 가치가 있는 인간에게는 쓸 수 없어.”

-이번이 마지막이었다고 생각해. 어쩌면 사용할 때마다 대가가 커지는 것일 수도 있어. 네 마법은 본래 네 것이 아니잖아. 그 몸에 각인된 힘이지.

“그건 알 수 없어. 심상 세계가 육체에 귀속되는지, 아니면 정신에 엮여 있는지 그 누구도 알 수 없으니까.”

-하지만 넌 몸을 얻은 후에 마법을 얻게 됐잖아? 간결하게 생각해. 그 몸의 원주인이 누렸어야 할 마법이라고. 타인의 심상 세계를 통해 마법을 사용한다? 우리가 활동하던 시대에도 금기시되는 방법이었어. 애초에 성공할 수도 없고, 한다고 한들 심상 세계가 어그러져 죽게 되니까.

“일단 죽지는 않았어. 거기에 시간도 벌었고. 아르드헨은 분명 눈치챘을 거야. 자기 몸에 들어 있는 벌레를 찾아내기 위해 둔을 떠나겠지.”

-눈치채지 못하고 둔에 계속 있을 수도 있어.

유단은 힘겹게 웃었다.

“난 그 인간을 존경해. 기억 누락이 있다는 걸 반드시 알아챌 거야. 둔을 떠나는 게 내가 원하는 것임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이동하겠지.”

-가장 껄끄러운 장애물을 치운 대가이니 이 정도는 감내해야겠네?

유단은 상체를 일으키며 체시를 바라봤다.

“대가 없는 결과는 없지.”

천천히 일어나 책상 서랍에 넣어둔 서류를 꺼냈다.

“이것도 처리해 줘.”

아르드헨의 마나 각인과 지장이 찍힌 문서. 레테 기지국 설치를 허가하는 서류였다.

-아르드헨이라면 이것도 신경 쓸 텐데.

“상관없어. 하루면 되니까. 아르드헨보다 딱 하루만 빠르면 돼.”

분배소가 위치한 곳에 연결만 하면 된다. 다른 도시는 이미 설치가 끝났으니, 옛 성도가 잠깐만 문을 열어주면 모든 게 마무리된다.

“정말 오래 걸렸네.”

-인간의 몸은 시간을 가장 정밀하게 측정하는 기계야. 나는 시간이란 걸 잘 모르겠는데.

“느끼고 싶으면 옮겨줄 수 있어.”

-아니, 난 됐어. 탄드라라는 예시를 보고 나니까 흥미가 사라졌어. 넌 변하지 않았지만, 난 변했지. 무엇이 우월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난 변하는 게 싫어. 내게 첫 번째는 언제나 줄리어스여야 해. 그게 바뀌는 건 끔찍해.

기계인형이 끼긱 소리와 함께 몸을 홱 돌렸다. 고장 난 몸을 이끌며 바닥에 놓인 쓰레기를 줍기 시작했다.

체시가 떠난 것이다.

유단은 의자에 몸을 기댄 채 밖을 바라봤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폭설이었다. 세상을 다 덮어버릴 하얀 눈.

“지치네.”

켜켜이 쌓여가는 하얀색을 바라보다가 슬며시 눈을 감았다.

* * *

“정말 괜찮겠어?”

-걱정하지 마세요. 전에도 말했듯 전 부술 수 없어요. 물리적으로도, 마법 공학적으로도.

밀레나는 고개를 끄덕인 후 카트시를 상자에 담았다.

“금방 찾으러 갈게.”

-늦게 와도 돼요. 오랜만에 로키, 체시랑 수다 떨면 되니까.

“위험해지면 바로 신호 보내. 가하란하고 내가 갈 테니까.”

-그래요. 아, 마운은 잘 달래줘요. 기껏 용기를 냈는데 내버려 두고 간 걸 알게 되면 화낼지도 모르니까.

“안 그래도 지금 가하란이 붙잡고 있어. 너 혼자 떠난 걸 눈치 못 채도록.”

-잘했어요. 위험한 곳에 같이 갈 필요는 없으니까요. 아, 전 위험하지 않아요. 같이 가면 걔만 위험해질 뿐이지.

상자를 닫은 후 타챠에게 넘겨줬다.

“던지진 말아주세요.”

“날 뭐로 보고.”

한 손으로 상자를 들어 올린 타챠가 아리엘 옆에 섰다. 아리엘 뒤쪽으로 사절단이 보였다.

처음 왔을 때와 달리 연합 도시 정규군의 보호 아래 떠날 준비를 마쳤다.

접경지대를 지나 동부의 영토까지 연합 도시의 정규군이 함께 갈 예정이었다.

온전한 평화 협정을 위해서.

정규군과 함께 있는 기펠과 눈이 맞았다. 눈인사를 보낸 후 아리엘을 바라봤다.

“금방 따라갈게.”

“알겠어. 그보다 정말 괜찮겠어? 카트시를 유단에게 넘기다니.”

“의중을 알아봐야 하니까. 유단이 인간으로서 그러한 행동을 한 거라면…… 내버려 두는 게 맞는다고 봐. 가하란도 같은 생각이고.”

“인간.”

“하지만 인간적 욕심이 아닌 다른 무엇을 계획 중이라면, 그게 뭐가 됐든 막을 거야. 그라운드 제로는 한 번으로 족해.”

준비 끝났습니다, 사절단 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눈발이 더 심해지기 전에 출발해야겠다.”

“몸조심해.”

“도마뱀 씨랑 기펠 님이 함께 가는 거니까 문제는 안 생길 거야.”

아리엘이 다가와 밀레나를 안았다.

“너야말로 몸조심하고.”

“응.”

“남편분한테도 전해줘.”

“알았어.”

사절단이 떠났다.

밀레나는 멀어지는 사절단을 바라보다가 하늘석이 위치한 숲으로 뛰어갔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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