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4화
“쓰네요. 이렇게 깨끗하게 치워진 건 오래간만이라 더 쓴 거 같기도 하고.”
아르드헨은 맞은편에 앉아 있는 유단을 바라봤다.
“살다 보면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저보다 시장님께서 더 잘 아실 테고요.”
“맞는 말씀입니다. 근데 이렇게까지 깔끔하게 정리당하면 되레 궁금해지는 법이죠.”
찻잔을 들며 물었다.
“정신 조작, 어디서 얻은 겁니까? 학회의 독자적인 작품인가요? 아니면 특별한 심상 세계를 지닌 마법사라도 발견했습니까? 그것도 아니라면 드디어 마법 공학이 인간의 내면에도 간섭할 수 있게 된 건가요?”
“어렵게 생각하시는군요. 더 쉬운 답이 있지 않나요?”
인사를 나눴을 때와 마찬가지로 은은한 미소를 짓는 유단이었다.
“학회장님은 뛰어난 두뇌를 갖고 계시죠. 빛나는 지성. 참으로 부럽습니다.”
“시장님께 그런 칭찬을 들으니 부끄럽네요.”
“부끄럽긴요, 사실 그대로인데. 저는 아쉽게도 머리 굴리는 재능이 없어요. 그래도 공평하신 신께서는 제게 다른 능력을 하나 주셨죠.”
“무엇입니까?”
“사람을 부리는 거. 제가 그거 하나는 기가 막히게 합니다. 또 부리려면 제대로 봐야 하죠. 가려운 곳을 긁어 주는 손과 같은 사람들은 이 두 눈으로 직접 보고 까다롭게 뽑습니다.”
“그 말씀은…….”
“배신 같은 건 애초에 상정하지도 않았어요. 그러니 정신 조작 쪽으로 마음이 기울더군요. 아시다시피 제가 과거에 그런 쪽으로 관심이 많았거든요.”
유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동조차 없는 눈동자.
웃고 있으나 감정의 티끌조차 느껴지지 않는 얼굴.
아르드헨은 눈앞에 있는 게 사람이 맞는지, 의심이 가기 시작했다.
“예, 관심이 많으셨겠죠. 저도 이 자리에 오르면서 과거 왕성 중심부에 있던 중앙 연구 기관과 케아에 대해 알게 됐습니다. 정말 끔찍한 실험을 많이 하셨더군요.”
“세상 사는 게 다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저는 시장님을 존경합니다. 제가 그려온 이상적인 인간에 가장 가깝거든요. 덕분에 보면서 도움이 많이 됐습니다.”
“하 참, 유능하신 분들은 이게 무서워요. 보는 것만으로도 다 빼앗아 가니까요. 그래서, 이제 어쩌실 생각입니까?”
“능력을 보였으니 이제는 협상할 수 있겠죠.”
유단이 작은 그릇에 쿠키를 담아 내주었다. 아주 맛있을 거라면서.
생딸기가 올라간 쿠키를 입에 넣은 후 천천히 씹었다.
“맛이 좋네요. 갈 때 좀 얻을 수 있을까요?”
“그럼요. 시장님께서 원하신다면 얼마든지 챙겨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걱정되지 않으시나요?”
“걱정?”
“제가 차랑 과자에 독을 탔을지도 모르는데.”
“아이고, 설마 학회장님께서 그런 뒤도 없는 짓을 저지르시겠습니까? 먹고 쓰러지는 순간 밖에 있는 친구가 날뛸 텐데, 그거 감당할 수 있겠어요?”
“솔직히 말하면 어찌어찌 처리할 수는 있습니다.”
“대단하네요, 저 친구가 만만치 않은데. 저도 죽고 테인마저 죽는다면, 다음 날부터 학회로 손님들이 찾아갈 텐데…… 그것도 감당할 수 있고요?”
“그게 문젭니다. 시장님의 손 하나를 잘라내면서 많은 걸 배웠습니다. 턱밑에 정말 많은 칼날이 있더군요. 정보망에 구멍이 없는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고.”
“애초에 망이란 것 자체가 구멍이 숭숭 뚫려 있죠. 낚시는 해보셨죠?”
작게 웃으며 남은 쿠키도 입에 던져 넣었다. 독이 들어 있다고 한들 상관없었다.
애초에 중독되기도 힘든 몸뚱이니까.
“시장님의 힘이 되어 드리겠습니다.”
“힘?”
“예. 능력이야 이미 입증했으니 절차는 건너뛰고, 서로 얻을 걸 얘기해 보죠.”
“좋습니다. 말씀해 보세요.”
“전폭적인 지원을 하겠습니다. 학회가 시장님의 배경이 되는 거죠. 배경이 싫다면 수족처럼 부릴 수 있게 해 드리겠습니다.”
“그거참 탐나는 제안이네요. 원하는 바이기도 하고.”
아르드헨은 팔짱을 낀 후 물었다.
“학회장님께서 원하시는 건…… 제가 레테 조사에서 손을 떼는 건가요? 더불어 학회장님 뒷조사도 그만두고?”
“제 뒷조사는 마음껏 하셔도 됩니다. 약점을 찾아 잡으셔도 좋고요. 레테 역시 계속 알아보셔도 됩니다. 단, 사업에 지장이 안 되도록 절 도와주시죠.”
“레테. 그게 학회장님께는 무척이나 중요한가 봅니다.”
“도시 간 마전기 전송. 분배소로 바뀐 삶의 형태가 다시 한번 변모할 겁니다. 분배소 건설이 어렵던 지형에도 마전기가 공급되겠죠. 사람들이 아주 편해질 겁니다.”
“공익을 위해 힘쓰시는 모습, 과연 구세주라 불릴 만합니다. 그런데…… 전 왜 이렇게 찝찝할까요.”
“찝찝한 거 좋아하실 텐데요.”
“끈적끈적한 거 좋아하죠. 하지만 이해하지 못한 것이 끈적거리기만 한다면 영 신경이 쓰여서. 게다가 제가 한 번 덴 적이 있거든요.”
마전기 공급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기반 사업. 이미 동대륙 전역으로 건설에 필요한 자재 운반은 끝났고, 설치만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타리움 중추에서도 호의적으로 바라보는 사업이라 막힘없이 진행됐고.
“제 도시에도 물자가 들어왔더군요.”
“허가만 내려주시면 됩니다. 옛 성도의 시민들을 위해서라도 사업은 진행돼야죠.”
“옛 성도라. 공개된 레테 사업안과 별도로 제가 입수한 것이 몇 개 있습니다. 파편화된 정보라 전체적인 그림은 알아볼 수 없으나, 이것만큼은 확실하더군요. 제 도시가 길목이라는 거. 여기에 레테 기지국을 설치하지 못하면 동부 연결로가 애매해지더군요?”
“예, 그렇습니다.”
“시원하게 인정하시네요.”
“속일 필요가 없으니까요. 전략적 파트너가 될 사이인데.”
“레테. 정말 좋은 사업이긴 한데, 왜 이렇게 거슬릴까요?”
마전기는 마나를 쉽게 다룰 수 있도록 형질을 변화시킨 것이다.
동대륙 전역에 마전기를 뿌린다는 건 동대륙 전역의 마나를 건드린다는 뜻.
“예전에 말이죠, 어떤 남자가 대륙 전역에 괴이한 마법을 설치해 놨습니다. 그 마법은 한날한시에 발동해 이 밑바닥, 뿌리를 진동시켰죠.”
“소문으로만 나도는 그라운드 제로의 원인 중 하나군요.”
“저도 전해 들은 소문이긴 합니다만, 어쨌든 다량의 마나를 움직이는 건 매우 위험하죠. 특히나 제어권이 개인 손에 쥐어져 있다면 더더욱 그렇고요.”
“편익을 위한 사업입니다. 다소 위험해 보일 수도 있으나 마법 공학적으로 안정된 설비인 만큼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거절하면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아니요. 시장님께선 거절하지 않으실 겁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더더욱 거절하고 싶어지는데.”
얘기 도중 뒤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집무실 구석에 서 있던 기계인형이 삐걱 소리를 내며 걸어왔다.
“기름칠이 덜 된 모양입니다.”
“저런 소리를 좋아하는 친구라 고치질 않네요.”
“친구?”
그때였다.
온몸이 굳었다. 눈동자와 입술만 간신히 움직일 수 있을 정도였다.
눈동자를 굴려 왼손을 바라봤다. 끼고 있는 반지가 침묵 중이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이 ‘레거시’는 온갖 마법적인 활동에 반응할 텐데.
게다가 목에 찬 레거시 역시 작동하지 않았다.
유단이 다가오더니 목걸이에 손을 댔다.
“의아하시겠죠. 왜 이게 작동 안 하는지.”
아르드헨은 눈동자를 돌려 유단을 바라봤다.
“이상하군요. 독 같은 건 안 통할 텐데. 저한테 뭘 한 겁니까?”
턱이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터라 어눌한 발음과 들릴 듯 말 듯 한 작은 목소리가 나왔다.
“마법입니다.”
“그 또한 희한하군요. 몸에 감아둔 레거시들이 반응을 안 하는데.”
“다른 것들은 하급품이나, 목에 찬 이 레거시만큼은 꽤 거슬렸죠. 심상 세계를 통해 형질 변화한 마나에만 반응하는 장치. 나타의 순혈족에게만 내려졌던 특상품이죠. 훌륭한 보호 수단이라 마법사들이 까다로워했죠.”
“레거시 내력은 저도 몰랐던 건데, 잘 알고 계시는군요.”
“그럼요, 알고 있죠. 알고 있고말고요. 이걸 제작한 사람이 제 어머니니까요.”
“…….”
이번만큼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타와 어머니. 부합되지 않는 정보들이 머릿속에서 서로 부딪쳤다.
-키워드를 몰랐다면 우리도 해제할 수 없었을 거야.
기계인형이 말했다.
우리라는 말이 무척이나 위험하게 들렸다.
“당신은 정말 뛰어난 인간입니다. 같은 조건이었다면 정말 까다로웠을 겁니다. 하지만, 당신과 난 큰 차이가 있어요. 난 당신을 아주 잘 안다는 겁니다. 황제는 너무나도 공개된 존재니까요. 특히나 당신의 성향을 파악할 만한 자료와 일화는 수도 없이 많았죠.”
유단이 목걸이를 풀었다.
“그라운드 제로가 벌어지던 해였나요, 아니면 그 전해였나요? 당신은 봉기한 민중들 앞에 나섰어요. 성난 군중들 앞에 나설 생각을 하다니. 정말 위험한 발상이에요. 동시에 효과적이죠. 그래요, 당신은 위험을 감내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필요하다면 직접 나서죠. 그렇게 수없이 문제를 해결해 왔고요.”
“……내 팬이었군요.”
“열성적으로 조사했습니다. 당신이 말한 수리공에 대해서도. 그리고 인정했습니다. 당신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인물이라는 걸. 그때부터 당신만을 생각했어요.”
“부담스럽네요. 근데 난 여자가 좋아요. 게다가 재혼할 생각은 없습니다. 얼굴도 안 보고 지내지만, 자식도 있고.”
“지금도 여유를 잃지 않죠. 아니, 당신은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해요. 죽음과 너무 가까이 지낸 인간. 죽음 자체를 두려워하지 않아요. 죽어서 이루지 못하는 걸 아쉬워할 뿐.”
“됐고, 얼른 죽입시다. 하지만 뒷감당은 아주 고될 테니 준비해 두시고.”
유단이 웃었다. 이 방에서 마침내 마주한, 아주 감정적인 웃음이었다.
정말로 기쁜가 보네.
“아니요. 저한테 필요한 건 시간입니다. 당신을 죽이면 시간이 없어져요.”
“그래서요?”
“잠깐만 뒤로 물러나 계세요. 제가 바라는 건 그뿐입니다. 일이 다 끝나고 나면, 제가 이룩한 모든 걸 가지세요. 대통령, 그거 하시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전 필요 없으니까요.”
“뭘 할 생각입니까?”
“사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신만이 알겠죠. 그래요, 신.”
“뿌리를 흔들 생각인가요? 그만두는 게 좋을 텐데. 층을 넘어 계에 손을 대는 순간 내가 말한 수리공과 면담해야 할 겁니다. 그건 정말 추천하지 않아요.”
“저는…… 순간이면 됩니다. 다음은 관심 없습니다. 길리우드는 변화된 세계 이후를 꿈꿨죠? 전 필요 없습니다. 정말, 찰나면 되니까요.”
“찰나로 뭘 할 수 있죠?”
유단은 대답하지 않았다.
방금 한 말에 거짓은 없으리라. 학회장은 ‘목적’을 이룬 후 다 내려놓을 생각이다.
하지만 목적에 다다르는 길 중간에 그라운드 제로 같은 대재앙이 놓여 있다면…….
유단의 손이 정수리에 얹어졌다.
“잠시만 저를 놓아주세요. 그거면 됩니다.”
“내 정신을 뒤흔든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습니다. 내 수하들은 우수하거든요.”
“압니다. 그리고 전 확신합니다. 이 모든 걸 당신은 눈치챌 거라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하고요.”
정수리를 툭 치는 느낌이 들었다.
“이따가 뵙죠.”
* * *
아르드헨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전략적 파트너. 일단 생각은 해 보겠습니다. 하지만 허가를 내는 건 좀 더 생각해 보죠.”
“알겠습니다.”
생각보다 쉽게 수긍했다.
원하는 게 다른 거였나?
슬쩍 반지를 바라봤다. 변화가 없다. 목걸이 역시 반응이 없었다.
“오늘은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러시죠.”
“아, 우리 애들 몸값은 이것과 별개로 상담하시죠. 돈이라도 두둑하게 받아내야 그놈들이 귀신이 돼 찾아왔을 때 덜 미안할 테니.”
“이미 준비해 뒀습니다.”
“의외네요.”
“얻을 만큼 얻었으니까요.”
말하던 유단이 급하게 고개를 내렸다. 유단의 코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피로 때문에 찔끔 나는 코피가 아니었다.
우수수, 끈적한 점성을 지닌 핏물이 연이어 떨어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