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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병공 진군가-493화 (493/558)

제493화

심한 악취에 윌러는 눈을 씰룩였다. 지방질이 썩어서 나는 특유의 냄새. 시체일까 아니면 다른 무엇일까.

비스듬히 열린 문 안쪽으로 감식용 돌을 던져 넣었다.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일단 마법은 없는 것 같고.

퍼밀리어인 쥐를 주머니에서 꺼냈다. 한쪽 눈이 먼 나이 먹은 쥐지만, 동물적인 감이 기가 막힌 놈이었다.

인간의 눈으로 잡아낼 수 없는 무수한 장치를, 이 작은 친구는 발견해 낼 수 있었다.

문틈 사이로 들어간 쥐가 찍찍 소리를 냈다. 간단한 계약 스크롤로 맺어진 관계. 일반적인 퍼밀리어였다면 작전을 두 차례도 소화해 내지 못하고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늙은 쥐는 달랐다. 벌써 2년째 살아남았다. 인간으로 치면 오늘내일하는 나이. 아마 이번이 마지막 작전이 될 터였다.

조촐한 장례식이라도 치러줘야지, 윌러는 눈을 감은 채 소식을 기다렸다.

툭, 신발을 건드리는 느낌이 났다. 눈을 뜨니 늙은 쥐가 신발에 머리를 박은 채 늘어져 있었다.

목덜미를 잡고 들어 올렸다. 길게 늘어진 꼬리가 흔들리지 않았다. 죽은 것이다.

“고생했다.”

주머니에 쥐를 담았다. 이번 조사가 끝나면 자그마한 무덤 위에 커다란 딸기 두 개를 놓아줄게.

안으로 들어갔다. 어둠에서도 사물을 식별할 수 있는 눈이 주변 물체를 잡아냈다.

방치된 가구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뭐 하던 곳이야.”

조사 대상의 흔적을 밟으며 꼬리잡기에 나선 지도 어언 한 달. 목표는 허술하게 정보를 흘리고 다녔고, 그 난잡한 정보 속에서 쓸 만한 걸 찾기 위해 애를 먹었다.

오늘은 뭐 하나 건졌으면 좋겠는데.

탐색하던 윌러의 눈에 부자연스러운 것이 걸려들었다.

다리 하나가 부러진 탁자. 폐가와 어울리는 형태였으나 다리 밑에 움직인 흔적이 남아 있었다. 누군가 탁자를 밀어낸 것이다.

그것도 반복적으로.

탁자를 치워냈다. 격자로 맞물린 바닥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릴 때였다. 살짝 들리는 부분이 있었다.

혀로 입술을 적신 후 널빤지를 들어 올렸다. 철로 된 덮개가 나왔다.

“열면 온갖 위험한 게 튀어나올 것처럼 생겼네.”

문서를 감춰두기에 딱 알맞은 크기. 윌러는 조심스럽게 감식용 도구를 꺼냈다. 모노클을 끼고 얇은 철사를 덮개 사이로 찔러 넣었다.

금적철을 섞어 만든 키트. 마나를 기반으로 한 장치가 설치돼 있다면 반응할 것이다.

없다.

모노클에도, 키트에도 걸리지 않았다. 덮개를 열면 철침이 튀어나오는 기계적인 장치가 남아 있을 수도 있으나, 그런 건 보고 피하면 된다.

덮개를 열었다.

다행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윌러는 코웃음을 치며 텅 빈 철제 상자를 바라봤다.

고전적인데, 아무래도 동종 업계 사람이 심리적 장치를 해둔 것 같았다.

윌러는 땅에 박힌 길쭉한 상자를 뽑아냈다. 30cm 정도의 상자를 옆으로 치워둔 채, 상자가 박혀 있던 곳을 유심히 살폈다.

왼쪽 벽면의 흙 색깔이 살짝 다르다. 손으로 파내봤다. 이윽고 다른 상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똑같은 크기의 상자.

뽑아내 덮개를 열어봤다. 안쪽에 문서들이 곱게 정렬돼 있었다. 파일 하나를 꺼내 펼쳤다.

“이건…….”

조심스럽게 다음 페이지를 펼칠 때였다.

몸이 완전히 굳었다. 숨조차 쉬어지지 않았다. 자결용 약을 쓸 수조차 없는 상황.

“유능하네요, 시장님의 개는.”

유단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좆 됐네, 윌러는 모든 걸 포기했다. 목표한테 뒤를 잡혔다. 덫에 완전히 걸려든 것이다.

다가온 유단이 손에 든 파일을 거둬갔다.

“이런 장치를 몇 군데나 해놨는데, 당신들은 걸리지 않았어요. 나도 생각을 바꿨죠. 진짜를 가져다 둬야 한다고. 그래야만 내가 미처 인식하지 못한 인간적인 불안감 따위가 은연중 나올 거고, 당신들은 그걸 알아볼 테니까요.”

유단이 상자 안에서 서류를 꺼냈다.

“레테에 관한 겁니다. 다른 사람이 본다고 한들 크게 문제 될 건 없죠. 이해하지 못할 테니까요. 하지만 아르드헨은 다르겠죠. 마나 집약이 무얼 뜻하는지, 옛 황제는 눈치챌 거예요. 그도 온갖 실험을 해왔을 테니.”

머리가 멍해진다. 산소가 부족해졌다. 생각이 이어지질 않았다.

아, 여기가 내 묫자리구나.

오래전에 죽은 스토아 치프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스토아 요원의 꿈은 침대에서 죽는 거다, 라고.

빌어먹을.

“괜찮아요. 당신은 죽지 않아요.”

유단이 다가왔다. 동시에 마나 밀도가 높아지는 게 느껴졌다. 아찔한 파장이 온몸을 흔들었다.

“이제는 익숙해졌어요. 영혼 세계를 뒤적거리다 보니 인간의 기억이란 게 뭔지, 조금은 알게 된 것 같거든요.”

뒤통수에 손이 닿았다.

뭘 하려는 걸까.

차라리 깔끔하게 죽여줬으면 하는데.

“수고해요. 그리고 나중에 또 보죠.”

* * *

윌러는 코끝에 손을 댔다.

심한 악취였다. 삭은 지방질이 내는 지독한 향.

인기척이 없는 걸 확인한 후 문틈 사이에 감식용 돌을 던져 넣었다. 반응이 없다.

오늘만큼은 다를 것이란 예감이 든다. 목표가 보인 미묘한 변화. 철저하게 위장한다고 한들,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었다.

이곳에는 무언가가 있다.

확신이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윌러는 기대감을 품었다.

안쪽 주머니를 꺼냈다. 퍼밀리어를 통해 먼저 확인해야 한다.

“……갈 때가 되긴 했지.”

수십 번의 작전을 수행해 온 늙은 쥐가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오늘내일하는 상태였으니 이상할 건 없었다. 주머니에 도로 넣었다. 이번 조사가 끝나면 작은 묘를 만들어 주리라. 커다란 딸기도 두 개 정도 놓아주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길목을 바라보는데 기시감이 느껴졌다. 데자뷔라니, 느낌이 좋았다. 이런 날에는 원하는 걸 발견한다.

흔적을 찾았다. 재빨리 수색했다. 널빤지 아래에서 상자를 찾았다. 하지만 이건 더미다. 심리적 장치를 한 단계 더 걸어둔 것이다.

동종 업계 사람이 확실했다. 어쩌면 스토아에서 배운 자일지도 모른다.

숨겨진 상자를 꺼냈다. 안에 든 건 레테에 관한 것이었다. 물류 이동을 자세히 표시해 둔 것 같은데, 봐도 집히는 건 없었다.

어차피 판단은 내 몫이 아니다. 판단은 윗사람이 할 일.

서류를 챙겼다. 아마 중요한 문건은 아니리라. 인적이 드문 곳이라고 하나 이런 식으로 묻어뒀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니까.

그래도 괜찮았다.

점조직을 파헤치는 단서가 될 테니까. 모든 해결은 작은 실마리에서 시작된다.

서둘러 귀환했다.

지정된 장소에서 하루를 쉬었다. 다시 이동. 세이프 하우스에 도착했다. C 클립. 이곳에서 인원 점검 및 보고가 이뤄질 것이다.

“뭐 해?”

동료가 다가와 물었다. 윌러는 작은 봉분을 가리키며 으쓱거렸다.

“일 잘하던 친구가 죽어서.”

“아, 그 쥐? 오래 버텼지.”

“그러니까.”

동료가 피우던 담배를 봉분 옆에 놓아뒀다.

“들어가자.”

윌러는 봉분을 바라봤다. 딸기는 이따가 놓아 줘야겠네.

C 클립에는 2팀 요원들이 모여 있었다. 다들 간만에 얼굴을 본다. 생사 확인은 이럴 때만 할 수 있었다.

동료들이 정보를 공유하기 시작했다. 한 인물을 추적, 관찰하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그게 학회장 정도의 거물이라면 말할 것도 없고.

“이건 시장님께 올리면 될 겁니다.”

윌러는 발견한 문서를 팀장에게 넘겼다. 팀장은 내용을 살핀 후 고개를 끄덕였다.

“C 클립은 오늘까지만 이용한다. 정리반은 뒷정리하고, 다음 접선지는 밀지로 전할 테니 대기하고.”

팀장이 씩 웃더니 술 궤짝을 꺼내 왔다.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도는 비싼 술들이었다.

“시장님께서 내리신 거다. 신나게 마시고 내일부터 다시 일해.”

운영비라는 명목으로 옛 제국 금화가 손에 굴러 들어왔다. 충성심은 돈에서 나온다, 우리 황제님은 그 말을 착실하게 지켜주었다.

“어디가?”

동료가 불렀다. 윌러는 바람 좀 쐬고 오겠다고 말한 후 지하실을 벗어났다.

건물 옥상으로 올라갔다.

빵 굽는 냄새가 은은하게 올라왔다. 정겹게 웃으며 걷는 시민들을 지켜보다가 담배를 꺼내 들었다.

담배?

이상한 일이었다. 내가 담배를 피웠었나?

손이 떨렸다. 의지와 상관없이 담배에 불을 붙였다.

어떻게 된 거지?

“이건 제가 피우죠.”

뒤에 유단이 있었다.

언제?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대로 굳어버렸다. 다가온 유단이 손가락 사이에 낀 담배를 넘겨받아 입에 물었다.

한 모금 빤 후 깊게 내뱉는다.

“독하네요. 인간의 기호 식품은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익숙해지다 보면 이해하는 날이 오겠죠.”

눈동자만 움직일 수 있었다.

세이프 하우스 주변으로 평상복 차림의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보폭과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훈련받은 자들이다.

“도주 통로는 막아 뒀습니다. 당신에게 투자한 가치가 있었어요. 유능한 사람. 내가 좋아하는 인간이죠.”

“어, 어, 어떻…….”

겨우 말을 꺼냈다.

이럴 순 없었다. 뒤를 밟히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신이 남겨준 표시를 따라왔어요. 덕분에 다른 집결지도 정리했고요. 아르드헨, 정말 무서운 사람이네요. 둔 안에 내가 모르는 집단이 이리도 많았다니.”

“아…… 아…….”

“당신은 죄가 없어요. 그저 암시에 따라 움직였을 뿐이니까요. 인식하지 못하고 저지른 일이니 당신은 배신한 게 아니에요. 그러니.”

푹, 갈비뼈 사이로 부드럽게 파고든 칼이었다. 헛숨이 입안에 맴돌았다.

“그 쥐새끼랑 같이 그만 쉬어요.”

몸이 처진다.

까맣게 변해가는 시야에 마지막으로 잡힌 건, 세이프 하우스로 진입하는 사람들이었다.

* * *

“그래. 둔은 앞마당이라 이거지.”

아르드헨은 앞에 놓인 명단을 바라봤다. 재편성한 스토아 2팀이 하루아침에 증발했다.

세이프 하우스는 물론 주요 거점 중 세 곳이 사라졌다.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배신자가 발생했다는 것.

“나이를 먹긴 했어, 그렇지?”

아르드헨은 테인을 바라봤다.

“조금 쉬시죠.”

“아니, 쉴 때는 아니지. 집결지 순서와 일자로 바뀌는 암호문으로 봤을 때, 딴마음을 먹은 건 이 친구네.”

아르드헨은 종이에 ‘윌러’라 쓰고 원을 그렸다.

“괜찮은 친구였는데 말이야.”

“접선자를 알아보겠습니다.”

“아니, 인력 낭비하지 말자. 우리 사람이었잖아. 어떤 식으로 일 처리했는지, 내가 가장 잘 알아. 아주 깔끔하게 정리했을 테니 남는 건 없을 거야.”

아르드헨은 펜으로 윌러의 이름을 콕콕 찍었다.

“근데 말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단 말이지. 어째서 나한테 몸을 돌린 걸까. 득 볼 게 없는데 말이지.”

가족들을 이용한 협박은 아닐 것이다. 감시망에 걸려든 게 없으니까.

무엇이 요원의 마음을 흔든 걸까.

“정신 조작. 명맥이 끊긴 케아의 연구진들이 학회에 붙은 걸까?”

“가능성이 있습니다.”

“무섭네, 무서워. 배신했다는 인식조차 못 한 채 단서를 남겼을 수도 있어. 연구 개발이 꾸준하게 이뤄졌다면 말이지.”

아르드헨은 2팀 명단을 테인에게 넘겼다.

“뒷수습해 줘. 가장을 잃은 슬픔이 돈으로 해결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돈으로 어느 정도는 희석할 수 있으니까.”

“사인은…….”

“개발 중 사고. 납득하지 못하면 나랑 약속 잡아줘. 설명해야지.”

“제가 하겠습니다.”

“이 친구야, 내 밑에서 열심히 일한 애들이야. 얼굴에 침 맞는 것도 내가 해야지.”

아르드헨은 시계를 바라봤다.

“슬슬 올 때가 됐는데, 승전보와 나팔을 준비하느라 늦나?”

그때였다. 비서가 문을 두들긴 후 안으로 들어왔다.

“학회 쪽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학회장이 할 얘기가 있다고.”

“왔네.”

아르드헨은 웃으면서 일어섰다.

“패배자답게 울상을 지으며 가보자고.”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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