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2화
-불쾌한 냄새가 나긴 했어. 그게 너였구나.
산페르를 응시하며 말했다.
한동안 눈에 안 보여서 좋았는데.
-너야말로 여기까지 어쩐 일이야? 저 위에서 멍청하게 있어야 할 애가.
-앞에 있는 인간하고 긴히 할 얘기가 있었어.
-가하란하고?
지상으로 내려온 산페르가 가하란 얼굴 옆에 섰다.
-얘기 끝난 것 같은데, 그만 가봐.
-아직 안 끝났어.
거슬린다. 의지가 담긴 불길이 주변을 에워쌌다. 산페르가 코웃음을 쳤다.
-알잖아. 너와 나, 싸워봤자 번거롭기만 하다는 걸.
공중에 생겨난 물방울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불길이 사그라졌다.
-네가 아끼는 인간이야?
산페르에게 물었다.
-아끼던 아이의 핏줄이야.
-핏줄이란 게 큰 의미가 있나? 네가 아끼던 건 없어졌잖아. 그러니 내 일을 방해하지 마.
-떠나가긴 했어. 근데 떠날 때 나한테 부탁을 했거든. 이 꼬마를 돌봐달라고.
-그건 약속이야?
-멋대로 맺은 약속이지만, 난 지킬 생각이야.
불길을 거두었다.
산페르와 드잡이질하는 건 귀찮았다. 근원을 손상시킬 작정으로 싸우는 게 아닌 이상, 저것과 대적할 필요는 없었다.
-갈게. 널 오래 보고 있으면 속이 안 좋아지니까.
-어지간하면 내려오지 마. 널 아끼는 애들하고 위에서 살아. 계속 그래왔듯이.
기회는 언젠가 다시 올 것이다. 저 인간, 가하란이 아니더라도 무한에 가까운 시간을 보내다 보면 길이 열릴 테지.
고요한 하늘로 돌아가려 할 때였다.
“정말로 관심 없으세요?”
시선을 뒤로 돌렸다. 가하란이 앞으로 나서고 있었다.
-뭐가?
“그랑겔에 관한 이야기요.”
-없어.
“아닐걸요. 아까 그 사람에 대해 말했을 때 감정이 느껴졌어요. 인간을 싫어한다고 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아주 변화 폭이 큰 감정이.”
-나한테 감정은 없어. 그런 건 망상이니까.
“추워 보여서 따뜻하게 해줬다고 했죠? 화가 난 거예요. 그 사람과 다시는 얘기할 수 없게 됐으니까.”
-잠깐의 여흥이야. 중요하지도 않았고.
“정말 여흥이었다면 인간을 싫어한다는 말은 의미가 퇴색돼요.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어요.”
-그래서?
“거래요.”
-네가 아까 말한 그 거래?
“네. 저는 알고 싶어요. 안원에 대해서, 정령에 관해서.”
-끝없는 정보의 바다. 네가 말한 그곳에서 알아보는 건 어때?
“아쉽게도 아직은 그 안에서 제가 원하는 정보를 찾아낼 순 없어요.”
집요한 눈동자였다.
윽박질러도, 현혹해도 기어이 본연의 빛을 되찾고 마는 흔들림 없는 눈.
닮았다, 정말로 닮았다.
그랑겔, 그 아이의 눈과.
-아까 말했지. 그랑겔과 넌 닮은 느낌이 든다고. 근데 착각이었어. 그랑겔은 아주 온순했어. 부끄러움도 많았고. 내가 성질을 낼 때면 입을 꾹 다물었지.
가하란에게 다가섰다. 산페르가 막아서려 했으나, 가하란이 고개를 젓자 옆으로 물러났다.
-기본적으로 조용한 애였어. 내가 말하는 걸 허락했을 때만 열심히 말하는 애였지. 너처럼 시끄럽지도, 말이 많지도 않았어.
“나름 과묵해졌다고 생각해요. 혼잣말이 많아지긴 했지만, 그래도 어릴 때처럼…….”
불길을 일으켜 가하란의 입술을 때렸다. 가하란이 눈을 깜빡이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다 달라. 생긴 것도, 성격도, 어투도. 하지만 그 집요한 눈은 닮았네. 그 아이는 마법 공학에 관해 말할 때면 겁을 잃었지. 한없이 즐거워 보였어. 나는 그걸 보며…… 그래, 편안했어.
탁한 하늘색 눈동자를 정면에서 바라봤다.
-다변위상. 가능성은 작다고 했지?
“네. 확신할 순 없어요.”
-약속은 무거워. 특히나 우리처럼 약속에 얽매이는 자들한테는 더더욱.
“생이 끝나는 날까지 연구를 멈추지 않을게요. 원하는 결과가 안 나올 수도 있지만, 도중에 포기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마음대로 해. 기대 같은 건 안 하니까. 인간의 탄생과 끝은 찰나와 같아. 너의 삶은 내 하품보다 짧겠지. 그러니, 마음대로 해.
물러서며 소리 냈다.
-근원에 각인된 글자. 난 이걸 이름이라 생각하지 않아. 단 한 번도 이게 내 이름이라 생각한 적 없어. 이름은, 내가 만드는 거니까.
고요한 하늘로 올라가며 오랫동안 입 밖으로 내본 적 없는 단어를 꺼내 들었다.
-산오투. 내가 나임을 인식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글자.
저 밑에서 가하란이 소리쳤다.
“다음에 만날 땐 제가 뭐라고 불러드리면 될까요?”
-네 마음대로 해.
뒤따르는 정령들을 품에 안고 고요한 하늘로 올라섰다.
역시 땅은 소란스럽고 어지러워.
자줏빛 하늘을 헤엄치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 * *
“일단은 마무리된 것 같아요.”
가하란은 산페르를 보며 말했다.
-위상 사이를 오가다 보니 겁이란 걸 잊어버렸나 보네. 너 죽을 뻔했어.
“혼자였으면 죽었겠죠. 하지만 아저씨가 제때 와 주셨잖아요.”
-내가 너한테 남긴 흔적을 사방에 뿌리고, 개미들까지 난리 치는데 늦을 수가 있나.
가하란은 하늘 너머에 있을 거미, 산오투를 생각했다.
“산, 그 이름에는 무슨 뜻이 담겨 있는 걸까요?”
-우리조차 알지 못하는 거야. 네 말대로 정답은 비트 안에 있겠지. 신의 뜻도 그 안에 있을 테니까.
“아저씨는 궁금하지 않아요?”
-알아서 뭐 하게. 안다고 달라지는 것도 없고.
어깨에 내려앉는 산페르였다.
“아저씨가 사라졌을 때는 무슨 일인가 했죠. 본류로 넘어오자마자 없어지셨으니.”
-층과 층 사이에 벽이 두꺼워졌어. 이젠 내 멋대로 못 나가. 덕분에 정신 사나운 이웃 주민은 반쯤 미쳐 있고.
“산카 님은 잘 지내세요?”
-궁금하면 저쪽을 향해 계속 달려가 봐. 어느 순간 네 몸을 잘게 찢어버릴 바람이 불어올 거야.
“……잘 지내고 계신 것 같네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바닥에 앉았다.
살기를 내뿜는 가장 오래된 형태와 장시간 마주했더니 머리가 어지러웠다.
“산오투, 특이한 분이네요.”
-넌 항상 위험한 것들과 어울려 다니더라. 아주 문제야.
“신의 생각을 들춰보려면 신과 가까운 존재들을 만나봐야죠.”
말하던 도중 왼팔에 달라붙어 있는 하얀 불꽃이 보였다. 툭 쳐냈는데 떨어지지 않았다.
“이게 뭐죠?”
-약속. 혹은 증표.
“제 몸에 계속 달라붙어 있는데, 괜찮은 건가요?”
-네 의지대로 움직이는 불이야. 너한테 해가 되진 않을 거야. 하지만, 네가 약속을 저버리면…….
산페르 앞에 맑은 물방울이 하나 생겨났다. 물방울 안에는 작은 물고기 한 마리가 들어 있었는데, 이리저리 헤엄치는 모습이 신이 나 보였다.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물방울이 한순간 압축됐다. 안에서 뛰어놀던 물고기는 이전 형태를 알아볼 수 없게 됐다.
-이렇게 되겠지.
“산 채로 타 죽는 건가요.”
-그 무엇도 꺼트릴 수 없는 불이야. 우리가 맺은 약속의 무게. 하지만 그 녀석은 아무런 부담이 없지. 그저 기다리면 될 뿐이니까.
“열심히 해야겠네요. 타 죽지 않으려면.”
착안으로 하얀 불꽃을 들여다봤다. 손가락 크기의 불꽃인데 방출되는 힘의 파장이 아찔할 정도였다.
안원에서야 가볍게 만질 수 있지만, 현실에서 불꽃이 살결 위에 피어난다면…….
“부담스럽네요, 이거.”
불꽃을 외력으로 감쌌다. 다루는 법을 익힌 후에 돌아가야 할 것이다.
외력에 실어 방출하는 것도 될까?
생각난 김에 해봤다.
바깥으로 외력을 뿌리고, 그 위에 불꽃을 실어봤다. 거미줄처럼 사방으로 뻗어나간 외력에 불꽃이 옮겨붙었으나, 멀리 나아가진 못했다.
30cm 전후.
외력을 거두고 머릿속으로 전투 상황을 그려봤다.
“이거 잘못 쓰다가 홀라당 타 버리겠어요.”
하하, 웃으면서 말했다.
점검해야 할 게 많았다.
안원에서야 아무런 부담 없이 다룰 수 있지만, 현실에서는 가연성 물질이 도처에 널려 있었다.
몸이 안전하다고 한들 입고 있는 옷과 주변 물건 역시 안전할까?
또한 하얀 불길로 인해 발생한 열기가 호흡 계통에 부담을 준다면 멋대로 쓸 수도 없다.
불 자체는 안전하다.
하지만 불로 인해 일어난 여러 작용이 인체를 압박할 수도 있었다.
“그래도 용로 대신 이걸 쓰면 제작이 수월해지겠어요.”
전투는 변수가 많아 사용하기 어렵지만, 통제된 환경에서는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것이다.
용융점이 높아 그간 다룰 수 없었던 광물도 하얀 불길이라면 녹여낼 수 있을 터였다.
-알아서 잘하겠지만 그래도 조심해. 직접적으로 그 녀석의 힘을 다루는 거니까.
“만약을 위해서 아저씨도 물방울 한 개만 주시면 안 될까요? 불나면 사용하게요.”
-난 그런 거 못 해. 증표를 내리는 건 그 녀석의 고유한 힘이야.
“그래요?”
팔뚝 위를 뛰어다니던 불꽃이 팔에 돋아난 혈관 사이로 스며들었다.
몸이 따뜻해졌다.
외력으로 안쪽에 스며든 불꽃을 끄집어냈다. 외력으로 붙들 동안은 외부에 있지만, 놓는 순간 몸 안으로 녹아들었다.
“관리는 쉽겠네요.”
긴장이 탁 풀렸다. 힘껏 기지개를 켠 후 산페르를 바라봤다.
“요즘 뭐 하고 계세요?”
-가끔 널 구경하고, 다른 시간에는 안원을 돌아다니고 있어. 위상이 제멋대로 날뛰고 난 후 이쪽도 많은 게 바뀌었으니까.
“산오투 님이 그러더라고요. 문을 열면 나갈 수 있다고. 과거 나타에서도 비트를 이용해 층과 층의 경계를 허문 일이 있었어요.”
-이곳에 있는 것들이 층 너머로 뛰쳐나가게 된다면, 그때가 인종이란 게 사라지는 날이 될 거야.
“다들 제멋대로 날뛸 테니까?”
-그렇지. 악의는 없어. 그냥 재미나서 여기저기 헤집고 다닐 거야. 그 장난에 인간들이 쓸려나갈 테고.
“문. 이건 마법 공학이 아닌 정령술을 연구해야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산테, 그놈과 같이 있는 아이가 많은 걸 알고 있지. 안원에 관한 건 그 아이한테 맡겨. 넌 네가 할 수 있는 일에만 집중하고.
산테와 같이 있는 아이.
“타챠 아저씨를 말하는 건가요?”
-산의 아이도 그놈과 가깝긴 하지. 하지만 산의 아이는 그놈을 섬기는 거고, 내가 말하는 건 인간 아이야.
“인간 아이요?”
-너도 알 텐데. 너희 쪽에서는 마도사라 불리는 아이.
마도사.
그 이름으로 불리는 건 단 한 명뿐이었다.
“퀼비언.”
-밖에 있는 아이들은 ‘위상’과 ‘틈’을 같은 뜻으로 사용하지만, 너는 아니라는 걸 몸소 체험했잖아. 층과 층, 틈의 문제는 그 아이한테 맡겨. 정령과 도깨비에 관해서는 우리보다 더 잘 알 테니까.
“실제로 만난 적은 없지만, 정신체인 퀼비언 형은 예전에 한 번 봤어요. 브라인 님의 기록 보관서 안에 계셨죠. 그러고 보니 소식이 끊긴 지도 꽤 됐네요.”
밀레나가 말하길 마도사와 민 교수, 브라인은 바라라의 신성한 땅을 찾기 위해 떠났다고 했다.
그리고 몇 년째 소식이 없다고.
브라인은 신성한 땅에서 기억을 되찾았을까?
브라인을 떠올리니 자연스럽게 셀베이아도 생각났다. 부모와 같은 사람들이었다.
무사하다는 얘기는 들었으나 얼굴을 직접 보고 싶었다. 할 얘기도 너무나도 많고.
“돌아가야겠네요.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요.”
가하란은 산페르를 바라봤다.
“아, 그리고 조만간 다시 올게요. 아저씨한테 부탁할 일이 있거든요.”
-싫은데.
“듣지도 않고선.”
-그냥 싫어. 난 지켜만 볼 거야.
“그러지 말고 도와주세요. 상시 연결, 그걸 실험 중이거든요. 성공한다면 아저씨를 다른 형태로 현신시킬 수 있어요.”
-다른 형태?
“거병이요. 유사 정령이 아닌 정령으로 명령 체계를 확립하는 거죠. 몇몇 문제가 있겠지만…….”
-끔찍한 소릴. 난 쇳덩이에 들어가는 거 싫어.
산페르가 눈앞에서 사라졌다.
“사슴님은 좀 위험한데.”
눈알을 굴리다가 밑에 있는 흰개미가 보였다. 저기, 하고 말을 붙이기도 전에 개미들이 사라졌다.
-미친놈은 상대 안 해.
-우린 이어주기만 할 거야.
-넌 산의 아이를 본받아야 해. 그 아이처럼 순수해야 해.
귀에 맴도는 잔소리에 가하란은 머쓱하게 웃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