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491화 (491/558)

제491화

“문이요?”

인간이 되물었다.

-그래, 문.

의아할 것이다. 동시에 자기 선택에 대한 의구심도 들 테고.

어째서 돌아온 것일까, 어째서 대화하고 있는 것일까, 어째서…….

보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인간의 머릿속은 정돈된 혼란으로 흐리멍덩할 것이다.

인간들은 생긴 것만큼이나 비슷한 사고 구조를 지녔다. 정밀해 보이지만 엉성하기 짝이 없는 사유의 골조.

툭 건드리는 것만으로도 생각을 유도할 수 있다. 인간은 거부할 수 없다.

눈앞의 인간, 가하란은 분명 특이한 힘을 지녔다. 힘의 파장을 인식하고 정신 오염을 막아내려 했다.

하지만 첫 접촉 때 이미 뇌가 어그러졌을 것이다. 한번 뒤흔들리면 돌이킬 수 없다.

가하란은 ‘첫 번째 예외’가 될 거라고 말했지만, 실상은 어떠한가?

지금 이렇게 내 눈앞에 무방비한 모습으로 서 있다. 그게 사실이며, 진실이다.

“무얼 의미하는 건지 알 수가 없어요.”

-단순해. 층과 층을 연결하는 완전한 문. 그걸 열면 돼.

“왜죠?”

-그야, 난 인간이 싫으니까.

저 너머에 인간이 꿈틀대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기분이 안 좋아진다. 깨끗하게 청소한 후 멸종을 두 눈으로 확인해야 안심할 수 있으리라.

“싫다고 해서 죽이는 건…….”

머뭇거리는 표정이었다. 아직 도덕관이 남아 있는 듯했다. 그마저도 얼마 지나지 않아 흐릿해지겠지만.

-소수. 그럴 가치가 있는 건 살려둘 수도 있어.

가하란의 귀로 다가가 속삭였다.

-생각해 봐. 유능한 도공은 잘못 만든 도자기를 바닥에 던져 깨트려. 도자기가 싫어서 그런 걸까? 아니야. 더 나은 결과, 성과를 위해 깨트리는 거야.

“더 나은 결과?”

-알고 있잖아. 식물은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접목을 해. 우수한 종끼리 덧붙여서 훌륭한 인자를 생성하는 거지. 인간도 마찬가지야. 솔직히 말해봐, 너도 존재해선 안 될 인간이 있다고 생각하지?

가하란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한 적 있어요.”

-너희들이 세운 법칙을 준수하지 않는 자. 이성이 아닌 동물적 감각에 의지해 행동하는 자. 지능이 모자라 배려를 이해 못 하는 자. 욕심에 휘둘리는 자. 그런 것들이 뒤섞여 있기에 인간 사회가 어지러운 거야.

반대쪽으로 날아간 후 불길을 일으켰다. 의지를 담아낸 하얀 불길이 가하란의 몸을 부드럽게 감쌌다.

-종의 발전을 위해 한 번의 청소가 필요해. 위대한 희생이지. 내가 도와줄게, 너흴 위해서.

“우릴 위해서…….”

-그래. 청소하는 거야. 깨끗하게 말이야.

박멸은 불가능할 것이다.

인간이란 벌레는 대재앙 속에서도 기어이 살아남아 번식하니까. 거기에 인간을 돕고, 인간에 미친 오래된 형태들이 방해하려 들겠지.

그래도 숫자를 줄이면 속은 후련할 것이다.

“맞아요, 청소는 필요해요.”

-이해할 줄 알았어. 넌 똑똑한 인간이니까.

“근데 여전히 궁금한 점이 있어요. 왜 그렇게 인간을 싫어하시죠?”

-그게 그렇게 중요해?

혼탁해진 이성이 엉뚱한 곳에서 빛을 내고 있었다. 심리를 장악하기 위해서는 의문을 풀어줘야 한다.

-나한테 인간이란 아무래도 좋은 존재였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하지만 의문은 갖고 있었어. 나를 제외한 오래된 형태들은 왜 층 너머에 가서 인간들과 어울리는 걸까.

인간.

한때는 정겨웠던 이름.

-쇠와 불을 사랑하는 아이가 있었어. 너는 나타에서 일어난 일을 알고 있으니, 설명하기 쉽겠네. 그 시절 나는 그 아이의 이야기를 듣곤 했어.

마법 공학이 어쩌니, 거병이 저쩌니. 꿈이란 단층을 통해 안원을 드나들던 꼬마는 구김살 없이 떠벌떠벌 말을 늘어놓았다.

처음에는 관심이 없었다.

있으나 없으나 상관없는 존재였으니까.

-익숙해진다는 건 무서운 일이야. 아니, 익숙해질 뻔했지. 익숙해지기 전에 끝나 버렸거든.

“끝이 났다는 건…….”

-죽어 버렸어.

가하란의 고개가 비스듬히 꺾였다. 이해되질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이쯤 되면 자기 생각이란 게 사라지기 마련인데, 눈앞의 인간은 꽤 질겼다.

하는 수 없이 말을 이었다.

-복을 바랐던 건지, 아니면 다른 무엇을 원했던 건지는 알 수 없어. 그날, 내 앞에 작은 문이 열렸어. 그게 층 너머로 갈 수 있는 통로라는 건 보자마자 알았지. 안 갈 이유가 없으니 일단 넘어갔어.

질감, 색깔, 냄새, 온도.

모든 걸 선명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

-난 그 아이를 찾았어. 그런 문을 열 수 있는 건 그 아이뿐이거든. 나는 광장에 모여 있는 인간들을 바라봤지. 그 어딘가에 아이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리고 찾아냈어.

가하란의 눈앞으로 다가갔다.

-쇠로 된 긴 꼬챙이였어. 거기에 너와 비슷한 나이의 인간이 꽂혀 있었지. 그 아이였어. 나는 그때 처음 깨달았지. 인간이란 것의 피가 검붉다는 걸.

바닥에 뚝뚝 떨어져 고인 피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문양 사이로 스며들고 있었다.

하늘에는 하늘석이 떠 있었고, 인간들은 시끄럽게 무언가를 외치고 있었다.

-그게 죽음이구나. 인간이 말하는 실질적인 끝이구나. 아! 더는 말할 수 없는 상태가 됐구나.

“그 사람을 아꼈나요?”

-모르겠어. 말했잖아, 익숙해지기 전에 끝나 버렸다고. 어쨌든 꼬챙이에 꽂힌 아이는 부릅뜬 눈으로 날 보고 있었어. 실핏줄이 터져서 아주 붉게 변한 눈이었어.

아이를 관찰하고 있을 때였다.

죽은 정령을 몸에 두른 인간이 곁으로 다가왔다.

-나한테 뭐라고 계속 떠들었어. 근데 잘 들리지 않았어. 아이를 봐야 했거든. 보고 있는데, 그 아이가 추워 보였어. 마침 비도 왔지. 이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너도 알고 있잖아?

“태워 버렸군요.”

-따뜻하게 해준 거야. 난 아직도 모르겠어. 왜 그 아이를 통해 날 불러낸 건지, 그 아이는 왜 그렇게 된 건지. 나는 불길에 잠긴 그 아이를 지켜보다가 어느 순간 이곳으로 튕겨 나왔어. 그게 끝이야.

가하란의 얼굴을 뜯어봤다. 눈동자가 고정돼 움직이지 않았다.

-‘그랑겔’. 내가 유일하게 기억하는 그 아이의 이름. 아, 이제는 너도 기억할게. 가하란.

눈앞의 인간은 유능한 길잡이가 될 것이다. 가진 바 능력을 발휘해 언젠가 층과 층을 연결하는 문을 활짝 열어줄 것이다.

-넌 그 아이와 닮은 면이 있는 것 같기도 해.

가하란의 이마를 톡 건드렸다.

-이제 됐으니 돌아가 봐.

의식을 점령당한 인간.

이제 남은 건 인간의 짧은 수명이 끝날 때까지 기다릴 뿐이다.

결과를 가져오면 층 너머로 나아가 청소하면 되고, 성과를 못 내고 죽는다면 다음 인간을 기다리면 될 뿐이다.

시간은 무한하니까.

“그랑겔이요?”

가하란이 입을 열었다.

-됐으니까 이제 돌아가.

“아니요. 좀 더 듣고 싶어요.”

가하란이 턱을 톡톡 건드리며 말했다.

-내 말을 들었을 텐데, 이제 돌아가라고. 그러니 넌 돌아가야 해.

“그러지 말고 다른 얘기도 해주세요. 아, 그 전에 뭐라 불러야 할까요? 거미님은 싫으실 테니 이름을 말씀해 주세요. 오래된 형태라면 근원에 각인된 이름이 있겠죠.”

-너…….

이상했다. 현혹된 인간은 이지를 상실하고 목소리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

층 너머로 돌아가면 이성을 되찾지만, 언제든 목소리가 들려오면 인형처럼 수동적으로 변해야 할 텐데.

-인간은 사라져야 할 대상이야, 그렇지?

“이해해요. 저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어요. 저런 인간이 왜 살아 있지? 근데 생각은 어디까지나 생각에서 그쳐야 해요. 죄를 저질렀다면 법정에, 법정조차 아까운 인간이라 해도 말은 들어봐야 해요. 그게 여러 부침을 겪어오며 사람들이 만들어낸 시스템이니까요.”

확실해졌다.

앞에 있는 인간은 이지를 상실하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작은 목소리가 계속 들려왔어요. 감미로운 소리였죠. 그 말을 따르면 모든 게 편해질 것 같았어요. 그래서, 분리 관찰했죠.”

-분리 관찰?

“그 목소리는 제 욕구를 자극했죠. 앎에 대한 욕구. 제가 추구하는 욕망을 간질이며 절 부추겼어요. 목적이 무엇일까 궁금해서 내버려 뒀고요.”

-그럴 리가. 그건…….

“여러 번 경험해 봤거든요. 의지와 상관없는 목소리가 제정신을 흔드는 걸. 이번에는 좀 위험하긴 했어요. 여기가 아닌 현실에 있을 때는 조급함마저 들었어요. 근데, 막상 안원으로 돌아오니까 편안해지네요.”

가하란이 바닥을 내려다봤다.

그곳에는 개미 몇 마리가 있었다.

잘 아는 놈들이다. 오래된 형태 중 하나와 연을 맺은 놈들.

“저분들이 잔소리를 어찌나 하시던지. 아, 현실 쪽에 있을 때도 이 눈으로 흔적을 발견했어요. 제 주변을 맴도는 힘이었죠. 하늘석의 시스템조차 감지 못하는 힘. 보는 순간 알았죠. 거미님이 절 관찰하고 있으며, 저한테 원하는 게 있다고.”

가하란이 몸에 달라붙은 하얀 불길을 툭툭 털어냈다.

“전 거짓말을 잘해요. 연기는 어설펐을지도 모르지만, 거미님은 믿어주신 것 같으니 상관없겠죠? 근데 계속 거미님이라 불러도 될까요? 언짢으신 거 같은데, 이름을 알려주시죠.”

-너 정말 이상한 인간이구나. 왜 지배되지 않는 걸까. 뜯어보고 싶어지네.

“말씀드렸잖아요. 제가 첫 번째 예외가 되겠다고. 아, 앎에 대한 욕구를 자극해 절 조종하려 했던 건 아주 훌륭했어요. 근데…… 좀 모자랐어요.”

-모자라?

“거미님이 제게 주실 수 있는 정보는 한계가 정해져 있거든요. 저는 이미 봐버렸어요, 정보의 바다를, 끝이 없는 지식의 세계를. 절 흔들려면 그 이상의 것을 보여주셔야 하는데, 아마 없을 겁니다.”

-그래, 네가 특별하다는 건 인정할게. 자부심을 가져. 넌 내가 인정한 두 번째 인간이야. 하지만, 그렇기에 널 해부해 봐야겠어.

“또 무서운 말씀을.”

-놓아주지 않을 거야. 도망칠 수도 없을 거고.

가하란이 양손을 들어 올렸다.

“인간들 사이에서는 항복의 표시예요.”

-그래. 근데 달라질 건 없어.

“정말 죽일 건가요?”

-죽이지 않아. 작게 쪼개서 계속 살펴볼 거야. 널 이해하면, 어쩌면 문의 단서를 얻게 될지도 모르니까.

“거미님.”

-그 이름은 거슬리네.

“그러면 이름을 알려주세요.”

-왜 이름에 집착하지?

“그 또한 하나의 정보니까요. ‘산’. 가장 오래된 형태들은 모두 이름에 산이 들어가요. 무슨 뜻일까, 정말 궁금해요. 거미님 이름에도 만약 산이 들어간다면, 의도된 이름이라 봐야겠죠. 신의 뜻이 담긴 이름.”

-알려주기 싫은데.

“그랑겔.”

가하란의 입을 통해 그 아이의 이름이 나왔다.

“저희 세상에서는 야장의 신이라고 불려요. 하지만 그가 설계한 툴과 회로론, 이름만 전해질 뿐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알지 못해요.”

-그래서?

“궁금하지 않으세요? 당신이 처음 마음을 준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내가 마음을 줘?

“아닌가요?”

-…….

겁도 없이 인간이 다가왔다.

“거래하죠. 인간은 거래를 좋아해요. 거래는 서로에게 득이 되니까요.”

-거래?

“이름을 알려주세요. 다른 것들도 알려주시면 좋고요. 그러면, 그랑겔에 관한 걸 제가 알아볼게요.”

-시간에 무감각한 나지만 층 너머에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는 건 알아. 그리고 방금 네가 말했지. 그 아이에 관한 건 몇몇 개만 전해진다고.

“다변위상. 시간의 흐름이 다른 위상에서라면 알아낼 수도 있어요. 물론, 아직은 이론이고 실현 가능성은 작지만.”

-다변위상? 위상을 멋대로 이동하는 건 불가능해. 위상은 휩쓸려 가는 곳이니까.

“전 이동해 왔어요.”

-믿지 않아. 그리고 너와 대화하는 건 질렸어.

“아니요. 당신은 깊게 생각하는 걸 두려워할 뿐이에요.”

-그 입부터 찢어 놔야겠네.

불길로는 놈을 잡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몸체로 짓누를 뿐이다.

살며시 밟은 후 분해하면…….

“근데 저보다 저 위에 계신 분과 먼저 말씀하시죠.”

가하란이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지긋지긋한 기운이 느껴진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꼬마야, 넌 항상 문제를 끌어안고 있구나?

파란 눈.

거대한 물방울을 띄워놓은 산페르가 저 위에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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