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0화
“위험하니까 가지 말라고 하면 안 갈 거야?”
의미 없는 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밀레나는 내뱉어야 했다.
“누나가 그러길 바란다면.”
가하란이 대답했다. 망설임이 느껴지지 않아 되레 애가 탄다.
“나도 갈게.”
“그건 위험해.”
“넌 그 위험한 곳을 혼자서 다시 가겠다는 거고.”
“…….”
미소 지은 채 가만히 바라보는 가하란이었다. 밀레나는 가하란 옆에 앉아 손을 잡았다.
“네가 봤다는 그 거미, 인간을 벌레 취급한다며.”
“맞아.”
“널 죽이려고 했고.”
“그랬지.”
“그런데도 다시 가겠다고 하면 내가 어떤 기분으로 널 보내야 할까?”
맞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어제, 잠든 가하란의 몸은 비정상적으로 뜨거워졌다.
엔엔의 도움을 받아 찬물을 가득 받아놓은 대야에 가하란을 눕혔지만, 체온은 낮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얼음장 같던 물이 미지근해질 정도였다.
고대의 지식을 품은 카트시도, 올도 가하란 몸에 생긴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안원에서 벌어지는 일은 간섭할 수 없다, 그게 둘이 내놓은 답이었다.
먼저 깨어난 기펠에게 설명을 들은 후에는 머리가 아찔해졌다.
손을 맞잡고 있는데, 눈앞에 있는데 도와줄 수가 없다니.
다행히 가하란은 눈을 떴다. 데일 것처럼 뜨거웠던 몸도 정상 체온으로 돌아왔다.
놀라서 부둥켜안고 설명을 들었다. 밀레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두 번 다시 안원에 가지 말라고.
그리고 돌아온 대답은 “가야 해”였다.
“너 무모한 애 아니잖아. 아니, 무모하더라도 최소한의 대비는 해두잖아.”
깨어난 후, 가하란은 자신의 방에 틀어박혀 하루를 보냈다. 같이 있어 주고 싶었는데 그럴 수 없었다.
생각할 게 있어, 가하란이 무겁게 말하며 문을 걸어 잠갔으니까.
그리고 오늘.
기어이 안원에 가겠다는 말을 다시 꺼내 든 것이다.
“정령의 약속은 무거워. 이건 산페르 아저씨를 통해서도 확인한 사실이야. 그 거미는 날 보내줬고, 다시 오라고 했어. 그러니 가야 해.”
“일방적이잖아.”
“정령한테 상식을 기대하면 안 되니까. 그래도 괜찮아. 그 거미가 날 죽일 생각이었다면, 돌아오지도 못한 채 죽었을…….”
밀레나는 가하란을 노려봤다. 가하란이 입을 벙긋거리다가 웃었다.
“어쨌든 돌아가야 해.”
“지금 당장 갈 필요는 없잖아. 안 그래?”
“아니, 지금 가야 해. 늦기 전에.”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팔을 바라보는 가하란이었다.
“안원에 몇 번 가봤지만 그토록 선명하게 내 의지가, 근원이 발현된 적은 없었어. 거미 역시 그런 내 능력에 흥미를 보인 거고. 느낌이 남아 있을 때 다시 마주하고 싶어.”
밀레나는 가하란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안원으로 돌아가서 그 거미와 다시 만나는 거, 단순한 호기심 때문은 아닐 거야. 이유가 뭐야? 위험을 감당해야 하는 그 이유를 말해봐.”
차분하게 질문했다.
“비트와 착안.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넓어질수록 내 욕심도 조금씩 커지고 있어. 앎에 대한 욕구가 점점 자라나는 거지.”
가하란이 복도를 지나가는 기계인형을 바라봤다.
“오토마타 안에 든 유사 정령. 어째서 그걸 유사 정령이라 부를까? 입에서 입으로 전해질 뿐, 어원은 알지 못해.”
“해답이 안원에 있다고 생각해?”
“안원. 정확히는 가장 오래된 형태들이 알고 있다고 생각해. 아니, 그들도 자세한 건 모를 테지. 그들 역시 신의 피조물이니까. 하지만 그들을 통해 그들이 알지 못하는 것들을 알아낼 수 있을 거야.”
가하란이 고개를 살짝 들었다. 탁한 하늘색 눈동자는 무엇을 보고 있는 걸까?
“누나, 어릴 때 내가 입에 달고 살았던 말이 뭔지 기억해?”
“거병. 그리고 모험.”
가하란이 놀랐다는 듯 바라봤다.
“왜?”
“아니, 반쯤 우스갯소리로 한 건데 바로 말할 줄은 몰랐어.”
“테리하고 제니한테 물어도 바로 말할걸? 넌 어릴 때 그 말을 항상 하고 다녔으니까.”
작게 웃던 가하란이 귀 뒤쪽을 매만졌다.
“핀들론 할아버지가 해주던 얘기를 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 그 좁은 골목에서도 나는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지도 삼아 모험했어. 항상 꿈꿨지, 넓은 세계를 바라보는 그날을.”
부끄럽다는 듯이 말하는 가하란이었다.
“지금도 그 마음은 변함없어. 새로운 걸 보는 것, 새로운 걸 아는 것. 단순한 호기심…… 어쩌면 그게 본질일지도 몰라. 물론 다른 이유를 갖다 붙이면 여러 개를 댈 수 있겠지만, 누나와 계속 얘기하다 보면 결국 답은 호기심이 될 것 같아.”
가하란이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허락을 맡으려면 그럴싸한 이유가 필요하겠지? 유사 정령의 베이스 아키텍처를 도식화하는 것과 정령을 이해하는 것, 이 두 개가 맞닿아 있을지도 몰라. 가장 오래된 형태들조차 알지 못하는 생성의 비화를 알게 되면…….”
밀레나는 눈을 슬며시 감았다. 한숨이 길게 뿜어져 나왔다.
“이럴 때면 은근슬쩍 내가 이해 못 하는 마법 공학 얘기로 빠져나가려고 하더라.”
“꼭 그런 건 아니야.”
“그 뉘앙스면 그럴 때도 있다는 거네?”
“아니라고 하면 그건 거짓이니까, 딜레마네.”
밀레나는 붙잡은 손에 힘을 줬다.
“이유와 필요성. 내가 납득하지 못한다고 한들 넌 기어이 가겠지.”
“누나가 가지 말라고 한다면…….”
“말을 해서 들어먹을 애였으면 애초에 말을 꺼내지 않았겠지. 그렇지?”
안다.
가지 말라고 하면 안 갈 것이다.
일말의 후회도, 아쉬움도 남기지 않은 채 마음을 접을 것이다.
가하란은 그렇게 해줄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 역시 그랬을 테니까.
“다치면 안 돼.”
“최대한 노력해 볼게.”
“노력은 쓸모없어. 그냥 다치지 마. 알겠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가하란이었다.
밀레나는 붙잡고 있던 손을 놓으며 방을 나왔다.
“상태는 어떤가?”
복도 벽면에 기대고 있던 기펠이 잰걸음으로 다가왔다.
“좋아요. 몸에 문제도 없는 것 같고.”
“그거 다행이군. 내가 괜한 짓을 해서…….”
밀레나는 기펠에게 잠시, 라고 말한 후 복도 끝으로 갔다. 뒤따라온 기펠이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가하란이 조금 이상해요.”
“이상하다?”
“추진력이 좋은 애예요. 하지만 계획 없이 움직인 적은 없어요.”
“무슨 말인가?”
“가하란이 다시 안원에 가려고 해요. 그것도 오늘 내로.”
“안원에?”
기펠이 눈을 찌푸렸다.
“이유가 뭔가?”
“호기심과 몇몇 이유를 말하긴 했지만, 그게 전부가 아닌 것 같아요. 저한테도 말하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어요.”
“…….”
“제가 왜 이 얘길 꺼냈는지, 아시겠죠?”
“일을 저질렀으면 책임을 지라는 건가.”
밀레나는 고개를 살며시 숙인 후 다시 들어 올렸다.
“저한테는 저 애가 가장 중요해요. 무엇과도 바꿀 수 없어요. 제가 돕고 싶지만, 방법이 없어요. 그리고…….”
“나한테는 방법이 있지. 근데 가하란이 허락했나?”
“아니요. 절대 따라오지 말라고 했어요.”
“그렇다면 나 역시 들어줄 수 없네.”
“원로님.”
기펠이 고개를 저었다.
“자넨 그 노괴를 직접 보지 못했기에 말할 수 있는 게야. 봤다면 이리 당돌하게 나서지 못했을걸세. 그건, 절망의 본모습이니까.”
“가하란이 그 위험한 괴물을 다시 만나려고 해요. 그것도 돌아온 지 하루 만에! 이해할 수 없어요. 설득하려 했지만 안 돼요. 느꼈어요, 가지 말라고 한다면 지금 당장은 그만두겠죠. 하지만 제 눈길이 멀어지는 그 순간, 저 애는 혼자 가버릴 거예요. 그러니 지금…….”
그때였다.
기펠이 눈을 홱 돌리더니 가하란이 있는 방으로 뛰어갔다. 밀레나도 뒤이어 달려갔다.
눈에 보인 건 침대에 얌전히 누워 있는 가하란이었다.
“이런.”
기펠이 검집을 움켜쥐었다.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한동안 집중하던 기펠이 허탈한 숨을 내쉬었다.
“거둬갔어.”
“네?”
“그 노괴가 나한테 준 증표를 거둬갔네. 그게 없으면 안원에 가기 위해 의식을 준비해야 하네.”
“당장 필요한 게 뭐죠? 제가 준비할게요.”
“하루아침에 할 수 있는 게 아닐세. 빛 내림 받은 정령술사의 도움이 필요한데, 수소문하는 것부터가 일이야.”
“하늘석이라면 금방 찾을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다급하게 말하다가 눈앞에 솟아난 주황색 점을 바라봤다. 올이 차분한 목소리를 냈다.
-하늘석의 기초 생산 라인과 부유 기능을 제외하고는 다른 기능은 잠시 정지 상태예요. 즉, 이동 명령은 받을 수 없어요.
“뭐?”
-최상위 명령권자의 지침이에요. 변경을 원한다면.
주황색 점이 가하란 이마 위로 이동했다.
-가하란을 통해 말씀해 주세요.
너무나도 이상했다.
무언가 잘못됐다는 느낌이 들었다.
왜 이렇게 서두르는 걸까?
게다가 방해받지 않으려고 하늘석까지 걸어 잠갔다.
“밀레나!”
엔엔이 다급한 얼굴로 나타났다. 누워 있는 가하란을 바라보더니 이내 인상을 썼다.
“기어이 갔나 보네요.”
“네. 얘기도 없이 혼자 갔어요.”
엔엔이 험악한 눈으로 기펠을 바라봤다.
“전 당신을 존중해요. 하지만, 가하란한테 문제가 생긴다면 그 존중이 다른 것으로 바뀌게 될 겁니다.”
기펠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갑자기 검을 뽑아 들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주변을 둘러봤으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잠깐이지만, 노괴의 기척이 느껴졌네.”
-에너지 변동은 없어요.
“하늘석의 시스템이 대단하다는 건 잘 아네. 하지만 세상에는 그 뛰어난 회로도 감지하지 못하는 게 있지.”
기펠이 천천히 검을 꽂아 넣었다.
“자네 말대로 가하란이 말하지 않은 게 있는 것 같군.”
밀레나는 누워 있는 가하란의 손을 붙잡았다. 과거에 열병을 앓았던 가하란을 돌봤을 때처럼, 간절하게 바라며 손에 힘을 줬다.
-너무 걱정하지 마요.
느긋한 음성에 고개를 돌렸다. 사족 보행 기계에 본체를 실은 카트시가 슬그머니 다가왔다.
기계 안구가 가하란의 얼굴을 훑었다.
-다른 건 몰라도 밀레나를 실망시키는 일은 없을 테니까. 또한 설명하지 않은 것에도 이유가 있겠죠.
카트시의 안구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곧 돌아올 거예요.
* * *
-금방 올 줄 알았어.
안원으로 되돌아온 인간을 보며 말했다. 가하란. 인간의 이름을 기억해 보는 건 얼마 만일까.
“약속했으니까요.”
인간, 가하란이 말했다.
-그래, 약속했지. 다시 보기로. 근데 서두를 필요는 없었는데.
사뿐히 가하란 앞에 내려앉았다. 망가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형태를 바꿔서.
불길에 이끌린 작은 친구들이 까르르 웃으며 주변을 맴돌았다. 해야 할 일이 있으니 잠시 물러나 달라고 부탁했다.
-나와 마주하는 거 두렵지 않아?
“두려워요.”
-그런데도 다시 왔네. 어째서지?
“알아야 하니까요.”
-무엇을?
“그건…….”
인간의 주변을 빙빙 돌며 관찰했다. 자그마한 인간의 심상 세계는 이미 얼룩졌을 것이다.
아마 인간은 자신이 선택해서 돌아왔다고 여기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소질이 있어. 이전의 아이도 가능성을 보였지만, 문을 활짝 열기에는 부족한 거 같아. 근데 너라면…….
가하란의 눈앞으로 다가갔다.
경계심이 사라진 눈.
-날 위해서 문을 열어줄 수 있을 것 같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