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9화
“우린 벌레가 아닐세!”
기펠이 외쳤다.
-내가 벌레라면 벌레야. 다른 이유는 필요 없어.
검을 뽑아 든 기펠이 앞을 막아섰다.
“그만두게. 여기서 나갈 테니.”
-아니, 그럴 순 없지. 벌레를 봐버렸는데 그냥 놔주면 찝찝해서 안 돼. 그러니 넌 저리 비켜.
하얀 불길이 기펠을 휘감았다.
가하란은 외력을 두른 손을 내밀어 기펠을 붙잡으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꽃봉오리처럼 변한 불길 안에 기펠이 갇혔다. 안쪽에서 기펠이 입을 벌려 뭐라 말했지만,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다행인 건 하얀 불꽃 안에서도 기펠은 안전했다는 점이다.
불로 된 꽃봉오리가 떠오르더니 저 먼 곳으로 밀려났다.
사방이 하얀 불길로 얼룩진 곳에 가하란과 거미만 남게 됐다.
-인간이란 걸 경험해 봤어. 그러니 알 수 있지. 넌 무척 억울할 거야. 왜 이런 일이 나한테 닥쳤는지, 어이도 없을 거고.
불길이 점점 거리를 좁혀왔다.
도망칠 곳은 없었다. 전력으로 뛴다고 한들 금세 붙잡히리라.
-근데 그건 네 처지야. 나와는 관계가 없어. 난 그냥 내 깨끗한 터전에 벌레가 있는 걸 용납하지 못할 뿐이야.
“못 본 척 놓아줄 수는 없나요?”
-안 돼. 너도 알잖아. 작은 벼룩 하나를 놓치면 집이 어떻게 되는지. 보이는 족족 때려잡아도 아차 하는 순간 바글바글 늘어나는 게 벌레야. 그러니 섬세하게 때려 죽여야지.
“제가 여름철에 잡은 모기도 이런 기분이었을까요?”
-그랬겠지. 그러니 이제 죽어. 너와 같이 온 인간은 안전할 테니 그 점은 걱정 말고.
가하란은 착안을 열어 좁혀오는 불길을 바라봤다. 거미의 시선에 불길이 반응하고 있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조종할 수 있는 것 같았다.
그 말인즉, 시선이 닿는 영역 내에서 저 불을 피할 방법은 없다.
“죽기 전에 질문 하나 해도 될까요.”
입을 열면서 차근차근 외력을 풀어냈다. 그물처럼 늘어진 외력으로 주변에 있는 정령들의 힘을 끌어모았다.
몇몇은 반발했으나 대다수는 외력에 이끌려 왔다.
하얀 불길 역시 외력의 교섭 대상이었다. 외력에 닿은 불길이 흠칫하며 좌우로 갈라섰다. 불에도 의지가 담겨 있는지 붙잡아 당기려고 해도 반발하며 멀어졌다.
-이상한 벌레네.
불길이 멀어졌다.
-날 보던 눈도 그렇고, 내 불을 잡아채려는 그 힘도 그렇고.
호기심이 생긴 걸까?
어쩌면 이대로 보내줄지도…….
-성가신 벌레는 미리미리 처리해 둬야지.
화아악!
멀어졌던 불길이 단숨에 거리를 좁혀왔다. 불의 장벽이 순식간에 다가와 가하란을 집어삼켰다.
가하란은 외력으로 끌어온 모든 힘을 전신에 둘렀다.
이 순간만큼은 착안도 무용지물이었다. 압도적인 절망이 눈앞에 있다는 것 외엔 그 무엇도 확인할 수 없으니까.
몸을 웅크려 불이 닿는 면적을 최소화했다. 외력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살아남을 수 있을까.
안원에서의 죽음은 현실에서의 죽음을 의미했다.
근원이 망가지면 남는 건 고깃덩이인 육체뿐이니까.
이대로 죽을 순 없었다.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려고 그 지독한 시간을 버텨온 게 아니었다.
생각해야 한다.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숨을 한껏 들이마신 후 두 손으로 땅을 움켜쥐었다. 근원의 발현. 이곳은 상상을 구현화할 수 있는 공간이다.
떠올려야 한다. 거병의 거대한 몸체와 체임버를, 그 어떤 공격에도 허물어지지 않을 굳건한 강철을.
지면이 흔들렸다.
솟구친 땅이 잘게 부서진 후 공중에서 응집됐다.
수없이 제작해 온 탈로스와 모듈, 체임버의 형태를 떠올렸다. 그라운드 제로 속에서도 오토마타를 지켜내던 블루아이의 구조를 생각했다.
바스러진 흙들이 주변을 감싸기 시작했다. 흐느적거리며 뭉친 흙들이 이내 반듯한 모형을 이루기 시작했다.
하지만 하얀 불길은 집요하게 틈새를 파고들었다. 온전한 방벽이 완성되기도 전에 침입을 허락해 버렸다.
넘실대는 불꽃이 다시금 육체에 닿았다. 정신력의 한계치까지 동원해 끌어모은 외력이 순식간에 증발하고 있었다.
열기가 올라간다.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뜨거웠다.
내열 장갑을 끼지 않은 채 허공 용로를 맨손으로 만지는 기분이었다.
온몸이 자글자글 익어가는 게 느껴졌다.
그 고통이, 정신을 더욱 예리하게 만들었다.
다듬고 매만진다.
불길이 침범할 수 없는 완벽한 구조를.
-너는 왜 사서 고생하니.
-그러게 말이야.
-근데 얘가 죽으면 산의 아이가 슬퍼하겠지?
-그건 보기 싫어.
작은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가하란은 간신히 눈을 뜨고 앞을 바라봤다. 백색 개미들이었다.
그 옛날 타챠의 법구를 만졌을 때 봤던 백색 개미가 주변에 가득했다.
-이어줄게, 우리가. 잇는 건 우리 전문이니까.
흙으로 된 체임버 안으로 스며들던 불길이 한순간 사라졌다. 가하란은 눈동자만 움직여 백색 개미를 바라봤다.
틈이 사라졌다.
흙을 덧대고 접붙일 때 나타나는 미세한 흠에 개미가 메워졌다.
몸을 갉아 먹던 하얀 불길이 완전히 사라졌다.
가하란은 탁한 숨을 내뿜으며 웅크렸던 몸을 폈다. 손바닥으로 몸 이곳저곳을 만졌다.
펄펄 끓는 물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뜨거웠으나, 감각은 살아 있었다.
현실이었다면 호흡 곤란으로 이미 죽었을 것이다. 안원인 게 천만다행이었다.
“고마워요.”
-널 잃으면 산의 아이가 슬퍼할 거야. 우린 그게 싫은 것뿐이고.
돌아가게 되면 음식을 산더미처럼 만들어 타챠에게 선물하리라.
“밖에 있는 저 하얀 거미, 인간을 싫어하는 거겠죠?”
-들어서 알잖아. 벌레 취급하는 걸. 근데 벌레 중에서도 익충이 있고 해충이 있는 거 알지?
“저는 해충인가 보네요.”
쓴웃음이 나왔다.
“설득할 방법이 없을까요? 여기서 죽긴 싫거든요.”
-지금이라도 돌아가.
“마음 같아서는 떠나고 싶은데, 그게 안 돼요.”
몸이 붙들려 버렸다. 안원에서 현실로 복귀할 때 기이한 부유감을 느끼며 눈을 떴는데, 지금은 애를 써도 깨어나질 못했다.
하얀 거미가 문제인 것 같았다.
-저거 성질 더러워. 게다가 집요해. 눈에 보인 건 어떻게 해서든 처리해야 돌아갈 거야.
콰아앙!
흙으로 된 체임버가 크게 흔들렸다.
-몸 쓰는 걸 싫어하는 애인데, 직접 때리고 있네. 너라는 벌레가 어지간히 싫은가 봐.
“열정적이네요. 벌레가 이 정도로 노력했으면 살려줄 법한데.”
쿠웅, 또다시 진동이 전해졌다.
상상으로 구현해 낸 거병. 어느 정도의 강도를 지녔는지 알 수 없었다.
충격이 계속 가해지면 결국 해체될 것이다.
익충과 해충.
하얀 거미는 인간을 구별해서 대하고 있었다. 기준이 무엇일까? 기준에 부합하면 살길이 열릴지도 모른다.
결국 실마리는 대화에 있었다.
무력으로 상대하는 건 불가능하니 지력으로 대항해야 했다. 지식이 아닌 지혜, 어쩌면 잔머리.
“얘기 좀 하시죠!”
크게 소리를 질렀다. 하얀 불길마저 완벽하게 차단한 공간. 소리가 새어 나갈 수 있을까?
아니지.
이곳은 숨 쉬지 않아도 되는 영역이다. 공기란 매질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소리가 전달된다는 건…….
-아직도 살아 있네.
거미의 목소리가 머릿속으로 파고들었다.
“덕분에 몸이 뜨뜻해졌어요.”
-튼튼하네. 자부심을 가져도 좋아. 하지만 네가 그럴수록 난 널 반드시 죽여야겠다는 생각만 들어.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도 끔찍한데 이상한 능력까지 갖췄다? 박멸해야지.
쿠웅!
몸 전체가 들썩거렸다.
가하란은 빨갛게 익은 피부를 바라봤다. 여긴 심상 세계와 다를 바 없었다.
의지력이야말로 모든 것의 기반이 된다. 눈을 감고 침착하게 숨을 골랐다. 컨디션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를 상상하며 몸을 가다듬었다.
눈을 떴다. 붉게 익은 살결이 본래 색으로 돌아왔다. 몸을 옥죄던 열기도 이젠 참을 만해졌다.
사고가 이어지면 견뎌낼 수 있다.
가하란은 흙으로 된 체임버 벽을 바라봤다. 침을 삼킨 후 작은 구멍을 뚫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하얀 불길이 파고들었다. 가하란은 조심스럽게 불꽃에 손을 담갔다.
치이익, 살점이 타들어 가며 소리를 냈다. 냄새도 올라왔다. 첨예한 통증이 팔을 타고 올라와 머리를 찔렀다.
아프다. 너무 아파서 비명조차 나오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비트를 맨손으로 쥐었을 때보다는 나았다. 가하란은 고통의 극한을 이미 경험해 봤다.
살점을 태우고, 얼리고, 짓이기는 비트에 비하면 열감만 남아 있는 하얀 불길은 견뎌낼 수 있는 아픔이었다.
견딜 수 있다.
온몸이 불에 타 죽게 될 거라는 명료한 사실이 한순간 흔들렸다. 고통이 점차 사그라들었다.
피부를 태우고 지방을 녹이던 불길이 어느 순간 간지럽게 느껴졌다.
부들부들한 솜을 만지는 기분이었다.
가하란은 익고 녹아내려 뼈가 드러난 오른팔을 바라봤다.
이건 실체가 아니다. 몸은 저 바깥에 있다. 인식하지 말고 재구성하자.
눈을 한 번 깜빡이고 나니, 팔이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가하란은 작게 뚫어둔 구멍을 넓혔다. 불길이 한순간에 밀려들었다.
온몸에 불이 달라붙었으나 뜨겁지 않았다. 보드라운 감촉에 기분 좋은 웃음이 나올 뿐이었다.
왜 정령들이 하얀 불길 안에서 온화하게 웃었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아늑하다.
그리고 따스했다.
상상으로 구축한 거병의 뼈대를 날려 보냈다. 하얀 불길은 이제 피부 위에서 살랑거렸다. 후, 하고 불어내니 거품처럼 꺼지기까지 했다.
-너.
가하란은 고개를 들었다. 거대한 발을 들어 올린 채 우뚝 멈춰 선 거미가 보였다.
“따뜻하니 좋네요.”
외력을 풀어냈다. 반발하며 비켜서던 하얀 불꽃들이 이제는 외력에 이끌려 왔다.
불꽃으로 이뤄진 하얀 구체를 만들어 거미한테 날려 보냈다.
구체가 거미의 눈앞에서 반짝이는 가루로 변해 사라졌다.
“얘기할 수 있을까요? 전 죽을 수 없거든요.”
-어떻게 한 거지?
“견뎠어요. 견디니까 친근해지더라고요. 주변에 있는 저런 정령들처럼.”
가하란은 하얀 거미 주변에 있는 정령을 가리켰다.
-인간에겐 한계가 있어. 한계란 정해진 수치야. 넘어서면 부러지지. 내 의지는 인간이 견뎌낼 수 없어.
“언제나 예외는 있습니다.”
-나한테 예외란 없어.
“제가 첫 예외가 될게요.”
-…….
거대했던 거미가 한순간 줄어들었다. 주먹만 한 크기로 변한 거미가 눈앞으로 다가왔다.
-넌 뭐야?
“그렇게 질문받으니까 대답하기 어렵네요. 일단 인간이고, 이름은 가하란입니다.”
-왜 날 보고도 괜찮은 걸까? 내가 허락하지 않은 인간은 날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터져 나가야 하는데 말이야.
“지금도 눈에 보여요. 절 공격하려는 의지가. 전 최선을 다해 그걸 피하는 중이고요.”
착안으로 인식한 힘의 루트를 외력으로 거둬낸다. 대화하면서도 집중력을 발휘해 이뤄낸 작업이었다.
-내가 모르는 눈, 내가 모르는 힘, 내가 모르는 벌레.
“집을 더럽힐 생각은 없어요. 그러니 놓아주실래요?”
-널 내버려 두면 귀찮아질 거 같아. 예전에 너처럼 날 귀찮게 한 인간이 있거든. 그 인간 때문에 안 좋은 경험도 했고.
“안 좋은 경험이란 게 혹시…… 층 너머로 현신한 일인가요?”
-알고 있구나.
역시나.
인간을 벌레로 여기는 정령이니, 벌레로 가득한 세상에 뚝 떨어지면 기겁할 것이다.
-내가 널 어떻게 해야 할까?
처음으로 의사를 되물었다.
“전 무슨 수를 써서도 살 겁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요.”
-그게 네 의지라는 거지?
눈앞에서 기웃거리던 거미가 코앞까지 다가왔다.
-가봐. 그만 어지럽히고. 대신, 다음에 한 번 더 와.
툭, 거미의 앞다리가 이마를 건드린 순간.
“하아, 하아,”
가하란은 거친 숨을 내뿜으며 상체를 세웠다. 눈앞에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밀레나, 그리고 기펠이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