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8화
“인간의 표현 중에 이거보다 어울리는 게 없지. 저놈은 건방진 놈이야.”
사슴이 평가한 기펠이었다.
“저 정령은 위험하네. 층 너머를 들여다보고자 하는 욕심이 너무 강해. 저런 정령은 자신의 재미를 위해 무슨 짓을 할지, 예측할 수가 없네.”
기펠이 평가한 사슴이었다.
가하란은 둘 사이를 오가며 들은 내용을 정리했다.
요컨대 서로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사슴은 단정해서 싫어하고 있고, 기펠은 추정해서 기피하고 있었다.
“두 분은 왜 그렇게 사이가 틀어진 겁니까?”
둘에게 질문을 던졌다.
“저놈이 안원에 처음 왔을 때부터 싫었어. 너도 알지? 난 인간을 수없이 관찰해 왔다는 걸. 보면 알아, 저런 인간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해악이야.”
사슴의 말이었다.
“안원에 발을 들이고 얼마간 정신을 못 차릴 때였지. 친절한 정령들이 날 보살펴 줬네. 그러다 저놈을 만났지. 이유도 없이 달려들더니 날 쫓고 죽이려 들었고 그때부터 차곡차곡 악연을 쌓아왔네.”
들어보니 문제는 사슴 쪽에 있었다.
“왜 그러신 거예요?”
“뭐가?”
“이유 없이 공격하신 거요.”
“이유? 건방지다니까. 그거면 됐지.”
“저도 어릴 땐 꽤 건방지지 않았나요? 하지만 사슴님은 절 보호해 주셨어요.”
“그야 넌 그럴 가치가 있으니까. 어릴 땐 장난감으로서, 지금은 날 바깥으로 이끌어줄 연결자로서 가치가 있지.”
수평형 동공이 크게 벌어졌다. 네모난 동공 안에서 음울한 불꽃이 찰랑거렸다.
가하란은 작게 숨을 내쉬었다.
돌이켜 보면 사슴은 다른 인간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샬롯을 구해야 한다고 했을 때도 선뜻 나서주지 않았다.
‘현신’을 약속하고 나서야 모든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렇다.
사슴과 맺은 약속.
그게 아니었다면 지금도 사슴과 얼굴을 맞대고 대화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눈, 날 안 좋게 평가하고 있네.”
“평가가 아니라 되새김질 중이에요. 우리의 첫 만남이 어땠는지.”
“지나간 일이잖아? 난 네가 마음에 들어. 마음에 드니까 하나의 약속을 빌미로 여러 개의 부탁을 해와도 들어준 거고. 기억나지? 저번에 내 힘을 내준 거.”
타챠와 대련했을 때를 말하는 것이리라.
“기억해요.”
“난 이유 없이 내주지 않아. 현신은 그때 그 여자애를 구해주는 대가일 뿐이야. 그걸로 거래가 끝난 거지만, 난 널 계속 도왔어. 왜? 마음에 들었으니까. 괴상하긴 해도 내 이름을 붙여준 첫 인간이니까.”
“알아요.”
“그러니까 내 말을 들어. 저 인간하고 가까이 지내지 마. 그때 네가 구해준 꼬마라면, 나도 반겨줄게. 하지만 저건 아니야.”
“정말 이유 없이 싫어하시는 거예요? 정말로?”
불꽃이 일렁이던 사슴의 눈동자가 고요한 검은색으로 돌아왔다.
“저거하고 연관 있는 놈이 하나 있어. 안원으로 오는 길도 그놈이 열어준 거고.”
사슴이 고개를 들었다. 가하란도 시선을 올렸다. 층층이 쌓인 오색 빛의 하늘이 보인다.
각 층을 노니는 수많은 정령도 보이고.
“가장 오래된 형태들은 이해할 수 없는 놈들이야. 고고한 존재이면서 하는 짓이 죄다 이상해. 하지만 그 괴이한 존재들한테 단 하나의 공통점이 있지.”
“공통점이요?”
“인간에 미쳐 있거나, 인간을 위해 생을 바치거나, 혹은 인간 자체를 관찰하기 위해 자기 근원을 내던지지. 하나같이 인간과 엮여 있어. 뭐, 나도 인간 관찰이 재미있어서 틈새 밖으로 들락거리지만…… 근원을 내던지지는 않아.”
미쳐 있고, 위하고, 내던진다.
가하란은 샬롯과 산카를 떠올렸다.
“내가 말한 놈들은 그나마 나아. 건드리지 않으면 별문제는 없으니까. 하지만 저놈과 맞닿아 있는 건 지독해.”
사슴의 날개가 어깨에 닿았다.
시야가 갑자기 넓어졌다. 보이는 모든 것이 선명해진다.
“잠깐만 내 눈을 빌려줄게.”
하늘이 확대된다.
멀리, 저 멀리.
겹쳐 있는 하늘을 뚫고 시점이 저 멀리 나아갔다.
그리고 이윽고, 한 점에서 멈췄다.
“…….”
가하란은 손을 움켜쥐었다. 이를 악물며 공포가 몸을 휩쓸지 못하도록 버텨냈다.
거미였다.
거대한 거미.
전신에 하얀 불을 두르고 유유히 하늘을 거닐고 있었다. 주변에 모여든 정령들이 하얀 불꽃 사이로 스며들었다.
불꽃 사이에서, 정령들은 기분 좋게 웃었다. 온화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왜일까?
보고 있으면 발바닥부터 시작된 원초적인 두려움이 전신을 좀먹으며 올라왔다.
무엇일까?
저 정령은 대체 무엇일까?
의구심을 던질 때였다.
수십 개에 달하는 거미의 눈이 이쪽을 응시했다. 머나먼 곳에서 정확히 시선을 감지해 관찰자를 역으로 들여다본다.
머릿속으로 무언가가 스며들었다.
가하란은 곧바로 착안을 열었다.
점으로 된 세계가 펼쳐졌으나, 거미의 형태는 무너지지 않았다.
대신, 거미가 쏘아 보내는 힘의 파동이 보였다. 작은 점들이 공간을 점유하며 눈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가하란은 외력으로 눈을 통해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오는 힘을 차단했다.
찰나에 불과했으나 온몸이 식었다.
가하란은 손을 들어 올렸다.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눈과 코를 통해 검은 피가 나온 것이다.
“이런.”
사슴이 몸을 돌렸다. 그 순간 거미가 내보내던 파장이 사라졌다.
확장됐던 시야도 다시 원상태로 복귀했다.
가하란은 헛숨을 내쉬며 허리를 접었다. 지면에 머리를 박은 후 머리를 쥐어짜 내듯 얼굴을 찌푸렸다.
머릿속으로 파고들었던 것들이 외력에 이끌려 바깥으로 흘러나왔다.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몸을 망가트리는 힘이었다. 조금만 늦었어도 정신을 잃었을 것이다.
뒤엉킨 머리를 정리하며 고개를 들었다. 눈에 보인 건 사슴 목에 닿아 있는 기펠의 검이었다.
“자네 괜찮나?”
“예, 조금 어지럽지만 버틸 만합니다.”
“그래서 내가 말하지 않았나! 이 정령은 위험하다고.”
그러자 사슴이 대꾸했다.
“실수였어. 난 살짝 보여줄 생각이었는데, 이 꼬마의 눈이 남다르다는 걸 깜빡했어.”
사슴이 주둥이로 검신을 툭 쳐냈다.
“그리고 얘를 이렇게 만든 건 내가 아니야. 너와 관련 있는 그놈의 힘이지.”
기펠이 눈을 씰룩였다.
“거미인가.”
“그래, 거미. 거미가 저것의 형상을 딴 생명체지만, 뭐 어쨌든 거미라 부르자고.”
“그놈은 외부에 관심이 없을 텐데.”
“관심 없지. 근데 자길 관찰하려 드는 놈을 내버려 둘 정도로 아량이 넓진 않잖아?”
“결국 네가 문제를 일으킨 거다. 보지 않으면 될 것을.”
“그러니까 말했잖아, 실수였다고.”
“악의가 아니고?”
“정말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안 드는 인간이라니까.”
힘이 날뛰었다.
가하란은 몸을 일으키며 둘 사이에 섰다.
“그만두시죠. 안 그래도 어지러운데 두 분이 싸우면 정신을 놓을 것 같아요.”
사슴이 눈을 씰룩이다가 날개를 폈다.
“난 간다. 저 망할 인간은 알아서 정리해.”
순식간에 작은 점으로 변해 사라지는 사슴이었다.
“보면 안 될 걸 봤군.”
기펠이 다가와 몸을 부축해 줬다.
“하얀 불꽃을 두른 거미였습니다.”
“그래. 그놈은 그렇게 생겨먹었지.”
“사슴이 말하길 원로님께 길을 열어준 정령이라고 하더군요.”
“그 또한 사실이네. 처음 안원에 왔을 때는 의식을 치러야 했으나, 그것과 만난 후로는 의식이 필요 없게 됐지.”
기펠이 검을 흔들어 보였다.
“이게 증표가 됐으니까.”
증표.
가하란은 기펠의 검을 잠시 바라봤다.
“자네는 의지만 있으면 안원에 올 수 있다고 했지?”
“예.”
“난 다르네. 이 검이, 이 증표가 있어야 여길 드나들 수 있지. 검집을 쥐게 한 것도 그러한 이유이고.”
작은 개울 앞에 멈춰 섰다. 여기서 잠시 쉬자며 기펠이 자리에 앉았다.
돋아난 팔로 땅을 짚고 전진하는 물고기를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저 하늘 너머, 시야의 저편에 하얀 거미가 있다.
“제가 본 게 무엇인지,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설명이야 어렵지 않네. 그 거미 역시 노괴일세.”
“이름을 아시나요?”
기펠이 고개를 저었다.
“알지 못해. 그놈은 그저 나에게 증표를 내려주고 안원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도록 힘을 보태줬을 뿐이야.”
가하란은 거미의 형체를 떠올렸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두려움이 밀려왔다.
“보는 것만으로도 위압감을 느꼈습니다. 그냥 막연히 두려웠어요.”
“나도 그랬네. 어찌할 수 없는 죽음이 내 앞에 있는 것 같았지. 이겨내고자 칼을 뽑아 들고 연신 휘둘렀지만…… 그놈 눈에는 춤추는 것처럼 보였겠지.”
기펠이 혀를 찼다.
“첫 대면 이후로 본 적이 없었네. 그저 증표만 남기고 사라졌어. 원하는 게 있었다면 말을 했을 텐데 말이야.”
“이해하기 힘들죠, 정령들의 행동은.”
가하란은 눈가를 매만지며 물었다.
“그 거미가 노괴라는 건 어떻게…….”
“나와 친분이 있는 정령들이 알려줬네. 재미있게도 정령들의 반응은 정확히 반반이었다. 한쪽은 그 사슴처럼 지독한 놈, 끔찍한 놈, 가까이해선 안 될 놈이라고 했네.”
“다른 한쪽은 상냥한 정령이라고 했나요?”
가하란은 하얀 거미 곁에서 행복하게 웃던 정령들을 떠올렸다.
“맞네. 다정한 친구라고 했지. 정령들이 친구라는 단어를 사용한다는 걸, 나는 그때 처음 깨달았네.”
“인간과 닮았네요. 이유 없이 좋은 사람, 이유 없이 싫은 사람.”
“하지만 깊게 파고들면 모두 이유가 있기 마련이지.”
기펠의 말을 들으며 정령에 대해 곱씹어 볼 때였다. 거미 형태를 한 정령.
떠오르는 게 하나 있었다.
옛 나타 왕조를 멸망으로 몰아갈 뻔한 또 하나의 사건.
당시 현신시켰던 정령의 모습이 불을 두른 거미의 형태라고 했었다.
우연일까?
고민하던 찰나였다.
몸이 짓눌렸다. 윽, 하고 신음이 절로 나왔다. 기펠 역시 기이한 힘을 느꼈는지 검집을 쥔 채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온다.”
그 말과 동시에.
-벌레가.
눈앞에 거대한 거미가 나타났다.
하얀 불길이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불길은 물 위를 미끄러져 숲으로 빨려 들어갔다. 하늘을 노닐던 정령들이 다가와 불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몸을 뒤로 날렸다. 코앞까지 다가온 하얀 불길이 뿌리를 뽑아내 뛰고 있던 정령을 집어삼켰다.
“아아아악!”
다른 정령과 달리 그 정령은 비명을 지르며 몸을 비틀다가 이내 사라졌다.
식은땀이 났다.
-조용히 있다가 갈 일이지.
음성이 천둥처럼 내리꽂혔다.
귀를 틀어막지 않으면 고막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외력을 끌어올려 온몸에 둘렀다.
“원로님!”
“난 괜찮으니 걱정 말게!”
대답한 기펠이 거미를 바라보며 외쳤다.
“무엇이 문제인가! 우리한테 왜 이러는 것인가?”
-그때 그 인간이네. 너는 허락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하지만 저건 아니야.
반들거리는 수십 개의 눈이 가하란을 향했다.
-벌레도 살아야 할 이유가 있겠지. 그건 이해해. 내 눈에만 안 띄면 어둠 속에서 무슨 짓을 하든지 별 상관없어. 하지만 말이야.
하얀 불길이 거세게 일었다.
-눈에 보였으면 치워야 하지 않을까? 깨끗한 환경을 위해서라도.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