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7화
겨울 한기가 사라졌다.
가하란은 감았던 눈을 떴다.
역전된 하늘과 땅이 반겨줬다.
“다른 사람 손에 이끌려 안원에 와보는 건 처음입니다.”
“나도 자네처럼 저항감 없이 문을 넘는 자는 처음 보네. 눈이 뜨인 자. 그건 자네 같은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겠군.”
오랜만에 듣는 표현이었다.
앞서가는 기펠 옆에 서며 질문했다.
“몇 번 들어 봤습니다. 눈이 뜨인 자라고. 근데 여전히 그게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거창한 건 아닐세. 그저 여기와 여기가 활짝 열려 층 너머의 정령과도 쉽게 교류할 수 있는 자들을 가리키는 거지.”
그렇게 말하며 기펠은 자신의 이마와 가슴을 톡톡 건드렸다.
“정령술은 마법과 마찬가지로 개인마다 성질이 다 다르지. 하지만 정령술은 의식이란 과정을 통해 단련할 수 있네. 그게 마법과 다른 점이지.”
머리 위쪽에서 투명한 나뭇가지가 내려오기 시작했다. 지면에 닿은 가지가 파르르 떨리더니 파삭 소리와 함께 부서졌다.
반짝이는 가루로 변한 나뭇가지들이 물고기의 형태로 변해 하늘 중간에 흐르는 강을 헤엄쳐 나갔다.
“눈이 뜨인 자는 의식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 안원에 들어설 수 있지. 또한 안원에서도 미치지 않고 버틸 수 있고.”
“이곳에 처음 왔을 때 온갖 소리에 정신을 잃을 뻔했죠.”
“다들 경험하는 것이지. 지금 자네가 밟고 있는 그거.”
가하란은 고개를 내렸다. 밟혀서 푹 눌린 붉은색 풀이 빳빳해지더니 뿌리를 뽑아내 뛰기 시작했다.
“이곳은 자아를 갖춘 정령들의 집합체지.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들이 사고하는 정신체라 보면 되네. 그러니 시끄러울 수밖에.”
다시 걸음을 뗐다.
“사고의 깊이는 제각각이라 그저 뒹구는 것에 만족하는 정령이 있는가 하면…….”
기펠이 가리킨 곳을 바라봤다.
거대한 돌이 구르고 있었다. 샬롯을 만났던 장소였다.
“단순한 행동에 만족 못 하고 층 너머를 염탐하는 자들도 있지. 그런 정령들은 자신만의 세계가 구축돼 있어서 일반적인 인간의 도덕관으로 이해하려 들면 안 되네. 물론 자네도 알고 있겠지만.”
고개가 끄덕여졌다. 찢어진 책을 닮은 정령이 대표적인 예였다.
걸음을 떼던 도중 몸이 가벼워지는 걸 느꼈다. 고개를 내리니 거대한 민들레 씨가 몸을 떠받쳐 주고 있었다.
“내 친구들일세. 올 때마다 반겨주는 아이들이지.”
기펠이 손을 내밀어 씨앗들을 쓰다듬었다. 까르르 웃는 소리가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자넨 정령을 제대로 볼 수 있지. 제대로 본다는 건 부탁할 수도, 다룰 수도 있다는 뜻이고. 하지만 자넨 정령의 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어. 희한한 일이지.”
가하란도 손을 내밀어 민들레 씨를 만졌다. 보들보들한 촉감. 미소가 나온다.
“어릴 때 샬롯처럼 바람을 다뤄보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죠. 아무리 말을 걸어도 답해주지 않았거든요.”
말이 끝남과 동시에 민들레 씨들이 산개했다. 가하란은 기펠 근처로 몰려가는 씨앗을 바라봤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기펠이 씨앗들과 말을 주고받았다. 코앞에서 이뤄진 대화였으나 가하란은 민들레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바람이 자넬 기피하는 이유가 있었군. 아니, 바람뿐만이 아니야. 다른 모든 정령들이 자넬 싫어해.”
“저를 싫어해요?”
“정확히 말하면, 자네 몸에서 나는 냄새가 너무 싫다고 하는군.”
손목을 코에 대고 잠깐 맡다가 실질적인 냄새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어쩌면…….
“짐작되는 바가 있나 보군.”
“예. 어릴 때부터 제 곁에 붙어 계시던 분의 성격이…… 좀 거치셨거든요. 그분의 냄새를 싫어하나 봐요.”
기펠이 다가왔다. 검집으로 몸을 툭툭 쳤다.
그러자 작은 알갱이가 떠올랐다.
“이거로군. 현실에서는 확인할 수 없지만, 안원에서는 확실하게 보여. 그래, 이 냄새의 주인이 정령들을 기겁하게 만들고 있어.”
검집을 움직이자 작은 알갱이들이 뒤를 따랐다.
“어디 한번 보자고.”
기펠이 검집을 크게 휘둘렀다.
무수한 알갱이들이 사방으로 퍼져나가 이내 눈에 보이지 않게 됐다.
가하란은 고개를 들었다.
얼음으로 된 강을 휘감으며 나아가는 뱀. 수없이 봐왔던 불을 두른 뱀이 그 큰 눈으로 이쪽을 바라봤다.
“이런, 저 성질 더러운 놈이 반응할 정도라니.”
기펠은 눈을 찌푸렸다. 동시에 검집을 땅에 꽂았다.
“좀 더워질 텐데, 그래도 참게.”
세로로 찢어진 뱀의 눈이 조금 커졌다고 생각한 순간, 뱀의 주둥이에서 불꽃이 쏟아져 나왔다.
화르륵, 폭포수처럼 떨어진 불길이 가하란과 기펠을 집어삼켰다.
검집에서 시작된 얇은 막이 불길을 막아냈다.
가하란은 착안을 열어 현상을 확인하려 했으나 사방에서 힘이 날뛰는 터라 해석하기 어려웠다.
“뜨끈하지?”
기펠이 웃으면서 말했다.
쏟아지는 불길도 기펠이 형성한 막을 뚫지 못했다. 온도가 올라가 더워지긴 했으나 위험한 수준은 아니었다.
“성질이 더러워도 발작하는 경우는 없는데, 자네 몸에 밴 냄새가 어지간히 싫었던 모양이야.”
“전에도 몇 번 절 잡아먹으려 했었죠.”
“근데도 여태 살아 있었나?”
껄껄 웃는 기펠이었다.
몇 분간 지속되던 불길이 이내 사라졌다. 기펠이 검집을 뽑아내자 막이 사라졌다.
가하란은 주변을 둘러봤다. 모든 것이 새카맣게 변해 있었다. 생명력이 넘실거리던 공간이었는데.
“염려 말게. 금방 복구되니까.”
기펠이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켰다. 검게 타들어 간 곳에서 풀잎이 비죽 솟아났다.
그게 시작이었다. 눈 깜작할 사이에 주변 일대가 알록달록하게 변했다.
“안원에서의 생사는 경계가 없이 맞닿아 있지. 죽음이 곧 탄생이고, 탄생이 곧 죽음일세. 아니, 이 또한 인세의 표현이겠지. 죽음과 삶 자체가 이들과 연관이 없어.”
풀들이 뿌리를 다리 삼아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날아온 날개 달린 돼지가 뿌리를 입에 물었다.
돼지 주둥이에서 발버둥을 치던 뿌리가 이내 돼지의 몸을 휘감더니 고치로 변해 땅으로 떨어졌다.
기괴한 풍경이었으나 안원이기에 납득이 됐다.
“그나저나 그 냄새의 주인은 어떻게 생겨 먹었나? 나도 안원을 꽤 오랫동안 돌아다녀서 지독한 자들과 안면 정도는 있는데.”
기펠이 검집을 어깨에 툭 올렸다.
“거북이를 닮으셨어요. 손바닥에 올릴 수 있을 정도로 작게 다니실 때가 많지만, 본체는 어찌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하죠.”
“혹시 이름을 알고 있나? 모를 확률이 높긴 하지만.”
이름은 공유해도 문제없는 정보였다.
“산페르입니다.”
“……정말인가?”
“예.”
“정령들이 싫어할 만하군. 가장 오래된 형태 중 하나라니. 그보다 노괴(老怪)와 어릴 때부터 함께했다고?”
기펠이 걱정이 한가득 담긴 눈동자로 몸 이곳저곳을 살피기 시작했다.
“어디 빼앗긴 곳은 없나? 내장은 다 붙어 있고?”
“멀쩡합니다.”
“천만다행이군. 노괴와 엮여 좋게 끝난 인간은 몇 없는데. 그 노괴가 자네한테 무언가 요구한 적 없나?”
“가끔 눈을 빌려달라고 했습니다.”
“설마 빌려줬나?”
“네.”
“근데도 멀쩡하고?”
가하란은 눈을 크게 떠 보였다.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말과 함께.
“자넨 정말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야. 그 눈도 특별하다는 말로 끝낼 성질이 아닌 것 같고. 마음 같아서는 내막을 알고 싶지만, 말해줄 생각이 없겠지?”
“죄송합니다. 눈에 관한 건 아직…….”
“괜찮네, 괜찮아. 우리 사이가 좀 더 돈독해지면 그때 가서 말해주게. 나중을 위한 즐거움으로 남기면 되니까.”
그때였다.
기펠이 손을 뻗어 가하란을 밀쳤다. 어, 하는 사이에 몸이 뒤로 밀렸고 그와 동시에…….
콰앙!
무언가가 공중에서 떨어져 내렸다.
충격파와 함께 삭풍이 몰아쳤다.
“정신 못 차리고 또 왔네?”
“이런 개잡놈을 봤나! 오랜만에 본 친구한테 거친 인사라니.”
“난 너 같은 친구 둔 적 없어. 그러니까 곱게 좀 죽어. 내 꿈자리가 뒤숭숭하니까.”
“정령이 꿈이란 걸 꾸다니. 내 살다 살다 그런 헛소리는 처음 듣는군.”
다시금 광풍이 몰아쳤다.
가하란은 양손을 들어 앞을 막았다. 외력을 둘러도 바람이 비집고 들어왔다.
코앞 상황도 분간이 되질 않았다.
하지만 간간이 들려오는 목소리가 귀에 익었다.
자세를 잡고 실눈을 떠서 앞을 봤다.
기펠과 마주 보고 있는 건 사슴이었다. 얇은 날개를 활짝 펴 몰아치는데, 기펠은 뒤로 물러서며 검으로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쳐냈다.
쾅, 콰강!
공중에서 폭음이 터져 나왔다.
착안으로 잡아낸 힘의 변화량은 섬뜩할 정도였다. 안원에서의 기펠은 또 층 너머와 다른 사람이었다.
“저기!”
목청을 높여 소리 질러봤으나 둘에게 닿지 않았다. 방법을 찾아보다가 두 손에 시선이 갔다.
근원의 발현.
맞부딪치는 둘 사이를 바라보며 양손을 내밀었다.
구현해야 할 건 거대한 팔.
익숙한 감각이 찾아들었다. 두 팔이 주변 환경과 동화된 느낌이 들었다.
“두 분 다 일단 말로 하시죠.”
양손을 움켜쥐며 땅에서 거목의 뿌리를 뽑아내듯 들어 올렸다.
그러자.
쿠그긍, 지면이 갈라지며 거대한 팔이 솟구쳤다. 장벽이 돼 둘 사이를 가른 팔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너, 여기 있었어?”
날개를 접으며 순식간에 다가온 사슴이었다. 동시에 기펠도 검을 든 채 거리를 좁혀왔다.
“잠깐만요. 두 분 다 진정하세요.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흥분을 가라앉히시고.”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또 투지를 피워냈다. 만류하지 않았다면 한바탕 날뛰었을 것이다.
“이 돼먹지 못한 놈과 아는 사이인가?”
기펠이 물었다. 사슴이 발끈해서 뭐라 하기 전에 가하란이 먼저 말했다.
“안원에서 절 도와준 정령입니다. 저는 사슴님이라 부르고 있고요.”
“사, 사슴님?”
기펠이 눈을 와락 찌푸리며 사슴을 보다가 이내 소리 내 웃었다.
“아주 잘 어울리는 이름이야. 나도 사슴이라 부르면 되겠군.”
“그 입 다물어. 그리고 난 사슴님이 아니야. 그냥 어쩔 수 없이 이 꼬마가…….”
말을 쏟아내던 사슴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됐고. 너, 저 재수 없는 것하고는 무슨 관계야? 왜 저것하고 같이 붙어 다녀?”
‘저것’이라 지칭된 기펠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층 너머에서 도움을 주시는 분이에요. 그러니 그만 좀 노려봐요.”
“넌 참 이상한 것하고 잘 어울리는구나. 오래된 형태도 모자라서 저런 것하고도 다니고.”
“저런 게 아니라 기펠 님. 제 체면도 생각해 주세요.”
“자그마한 놈이 체면은 무슨.”
사슴이 기펠을 쏘아봤다.
“그 목은 다음에 딸 테니 얌전히 있어. 네 목을 오늘 쳐버리면 가하란이 약속을 계속 미룰 것 같으니까.”
“약속?”
“현신. 이 애는 가능성을 품고 있어.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틈이 아닌 온전한 현신을…….”
사슴이 중간에 입을 닫았다.
검집이 가하란과 사슴 사이에 놓였다.
“가하란, 자네가 무슨 이유로 그런 약속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들어주지 않는 것이 좋을 게야.”
“네가 무슨 권리로? 그리고 우리와의 약속은 네까짓 게 끊어낼 수 없어. 이미 얽혔으니까.”
또다시 긴장감이 감돌았다.
가하란은 검집을 살며시 밀어내며 둘 사이에 섰다.
“우선 두 분 다 저와 먼저 얘기하시죠. 그게 나을 것 같은데.”
가하란은 힘겹게 웃으면서 둘을 바라봤다.
* * *
“두 사람 다 문제없는 거지?”
재차 확인하는 아리엘이었다. 밀레나는 걱정할 필요 없다고 말한 후 아리엘의 등을 살짝 밀었다.
“그렇다니까 그러네. 걱정 말고 먼저 돌아가. 여기 정리 끝나면 금방 따라갈 테니까.”
“남아서 경과를 지켜볼게.”
“언니는 사절단 대표잖아. 돌아가서 해야 할 일이 많지 않아? 사절단분들도 다 기다리고 있을 텐데.”
“……제발 부탁할게. 문제 안 생기도록 해줘. 삐끗하면 전쟁이야. 농담이 아니라.”
“알고 있어. 정말 문제 안 생기도록 할게. 내가 곁에 있잖아?”
말하는 사이 보라색 점이 옆에 솟아났다.
-저도 있으니 안심하세요.
아리엘은 굳은 표정을 풀며 옅게 웃었다.
“알겠어. 돌아갈 준비 끝내놓을 테니까 두 분을 무사히 데려와. 그리고 네가 말한 것들도 대비해 놓을게.”
“응. 부탁할게.”
하늘석에 올랐던 사람들이 모두 지상으로 내려갔다.
남은 건 밀레나뿐이었다.
지하로 돌아와 누워 있는 두 사람을 바라봤다. 안원에 간다는 얘길 듣긴 했는데, 별문제 없는 거겠지?
“넌 정말 가만히 있질 못하는구나.”
밀레나는 가하란의 손을 붙잡으며 아무 일 없길 기도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