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486화 (486/558)

제486화

“저러다 문제 생기겠어.”

아리엘이 움직이려 했다. 밀레나는 아리엘의 손목을 붙잡고 뒤로 당겼다.

그 순간 강렬한 마나 파장과 함께 폭음이 치솟았다. 먼지바람이 주변 일대를 뒤덮었다.

“언니, 괜찮아?”

밀레나는 아리엘을 가린 채 물었다. 아리엘은 얼떨떨한 얼굴로 폭심지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틀었다.

“이 마나 파장…… 네 남편은 대체 뭘 한 거야?”

“대 마수용 장비를 쓴 거 같아.”

“그런 걸 상대국 원로한테?”

아리엘 눈이 커다랗게 변했다.

“괜찮을 거야, 아마도.”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속이 타들어 가는 건 마찬가지였다. 기펠의 기량이 어느 정도인지, 밀레나는 파악하지 못했다.

가하란이 마수 사냥용 장비를 사용한 걸 보면 일반 상식을 뛰어넘었다는 뜻인데…….

“둘 다 방해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

위쪽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타챠가 다가와 있었다.

“저쪽 상황 어때요?”

“꼬마가 무슨 짓을 해도 저 인간에게는 닿지 않을 것이다. 아주 골치 아픈 방식으로 싸우는 자니까.”

타챠가 인정했다. 대전사의 자격을 갖췄다는 뜻이다.

흙먼지가 내려앉았다. 흙과 돌로 이뤄진 장벽 안에서 기펠이 튀어나오더니 단숨에 가하란을 제압했다.

“저 인간에게 배울 것이 많을 거다.”

타챠가 콧김을 내뿜은 후 몸을 돌렸다.

밀레나는 아리엘과 시선을 교환한 후 천천히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기펠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까닥여 맞이해 주었다.

“관객이 있으면 흥이 더 나는 법이지.”

아리엘이 앞으로 나섰다.

“다치신 곳은…….”

“없네. 아주 멀쩡하니 걱정하지 말게. 그리고 설령 다쳤다고 한들 이런 걸로 외교 문제 삼을 정도로 속이 좁진 않으니 염려 놓고.”

“알죠. 기펠 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는 저야 잘 알죠. 하지만 일국의 대표로 오신 이상 저 또한 그에 상응하는 응대를 할 수밖에 없다는 점, 이해해 주셨으면 해요.”

아리엘이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다.

“동부의 사자께 괜한 걱정을 끼친 모양이군. 다음부터는 내 필히 보고하고 움직일 테니 언 마음을 녹여주게.”

“보고라뇨, 당치도 않아요. 저는 그저 양국의 대표, 그리고 중재인의 안위를 걱정할 뿐이니까요.”

아리엘이 가하란에게 시선을 줬다.

“몸은…….”

“괜찮습니다.”

“이런 말씀은 안 드리려고 했는데, 이제 가하란 씨는 아주 중요한 위치에 서게 됐어요.”

“예, 그랬죠.”

그렇게 말하며 손을 뒤로 빼는 가하란이었다. 밀레나는 아리엘의 앞을 가로막으며 씩 웃었다.

“자자, 여긴 내가 정리할 테니까 언니는 좀 쉬어.”

“잠깐만.”

“저기 샬롯 보인다. 샬롯!”

손을 크게 흔들어 하늘을 헤엄치고 있는 샬롯을 불렀다. 폭음을 듣고 무슨 일인가 살피러 온 듯했다.

“대체 무슨 일이야? 바람들이 난리도 아니야.”

“나중에 설명해 줄 테니까 일단 언니 좀 데려가.”

눈짓을 받은 샬롯이 아리엘을 데려갔다. 의심스럽게 바라보는 아리엘에게 손을 열심히 흔들었다.

“아리엘 의원이 이번 일에 많은 걸 걸었거든요. 그래서 신경을 많이 쓰고 있어요.”

“알고는 있었는데, 내가 그 점을 헤아리지 못했군. 내 생각만 했어.”

아리엘이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가하란에게 다가갔다.

뒤로 감춘 손을 앞으로 꺼냈다. 아주 엉망이었다. 손아귀가 다 터져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무식하게 받아내더라니.”

“외력으로 어디까지 견딜 수 있나 확인해 봐야 했거든.”

“언니가 말하는 거 들었지? 네가 다치는 것도, 원로님께서 상처를 입는 것도 안 돼.”

슬리피가 의료 키트를 들고 나타났다.

-손 줘요.

치료가 진행되는 동안 밀레나는 주변을 돌아봤다. 마나가 사납게 날뛰고 있었다. 짧은 전투였는데 여파가 심했다.

슬쩍 기펠을 바라봤다.

마나 폭발조차 여유롭게 받아낸 사람. 동부에만 괴물이 있는 게 아니었다.

“자네도 혹시…….”

기펠이 짓궂게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 밀레나는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전 제 수준을 잘 파악하고 있어요.”

“필렌 경의 피를 이어받았다면 재능이 뛰어날 텐데.”

“아직 한참 멀었어요.”

뒤쪽이 시끄러워졌다. 하늘석에 있는 모든 사람이 몰려든 것 같았다.

“다른 분들께는 제가 설명할게요.”

“내가 괜한 소란을 일으켰나 보군.”

“아니에요. 분명 이유가 있으셨겠죠.”

묵례한 후 가하란에게 다가갔다.

“손은?”

“멀쩡해.”

“이따가 설명해 줘. 원로님께서 아직 하실 얘기가 있는 것 같으니까.”

눈빛을 주고받은 다음 몸을 돌렸다.

* * *

“야무진 아가씨로군.”

“예, 말씀하신 대로 정말 굳센 사람이죠.”

가하란은 슬리피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소독부터 마무리까지 깔끔하게 끝내놨다.

기펠이 멀어지는 슬리피를 보며 말했다.

“저 아이였어, 날 노리고 마나를 방출한 게.”

“솔직히 명령하면서 아주 약간 걱정되긴 했습니다. 혹시라도 다치시면 어쩌나, 사고가 나면 어쩌나.”

가하란은 기펠을 바라봤다. 주홍빛이 도는 의복은 먼지 하나 묻지 않았다.

“불필요한 걱정이었네요.”

“내가 말하지 않았는가. 마음껏 해도 된다고.”

하하, 웃음이 나왔다.

“당장 동원할 수 있는 수단을 모두 써봤습니다. 나름 머리도 굴려보고요. 하지만 실력의 차 앞에서 잔재주는 쓸모가 없었네요.”

“아니야, 아니야. 시도는 정말 좋았네. 수단을 노출하고 이목을 끌어 빈틈을 노린다. 기초적인 병법을 아주 잘 지켰어. 다른 사람이었다면 아마 첫 번째 공격에서 크게 당했을 거야.”

기펠이 다가와 어깨를 붙잡았다. 손바닥 질감이 정제된 철 같았다.

“그래서 말인데 자네가 부딪쳐 봤다던 그 사람하고 비교하면 어떤가?”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전 그분의 손가락 하나도 이겨 내지 못했습니다.”

“손가락?”

“예.”

“동부에는 총수 말고도 그런 괴물이 또 있다는 건가? 허허, 이거 참.”

“사실 인간이 아닙니다.”

“인간이 아니다?”

“예.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이것뿐입니다.”

“허 참. 인간이 아니다, 라. 그렇다면 산의 전사와 그 인간이 아닌 자를 비교하면?”

“타챠 아저씨가 들으면 분명 흥분할 테지만…….”

가하란은 목소리를 최대한 낮춰 말했다.

“타챠 아저씨도 그분의 손가락을 건드는 건 쉽지 않을 겁니다.”

“혹시 자네가 말하는 그분과 자리를 만들어 줄 수 있겠나? 내 뭐든 해줄 테니까 말만 해보게.”

“저도 원로님의 부탁을 들어드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불가능합니다. 저도 만날 수 있을지 없을지, 만난다고 해도 살아남을 수 있을지 없을지 알 수가 없거든요.”

“친분이 있는 게 아닌가?”

되묻던 기펠이 아, 하고 소리를 냈다.

“틈새에서 만난 인연이군.”

“예.”

“아쉽구만. 죽기 전에 다른 강자들을 만나보고 싶었는데.”

“총수님과 재회하시는 건…….”

“그건 싫네. 그자와는 전투 자체가 성립이 안 되니까. 무의미한 짓에 시간을 쏟을 순 없지.”

겪었기에 알 수 있다. 기펠은 대륙을 통틀어도 손에 들 강자일 것이다.

그런 사람이 기겁하는 상대라니.

오래전, 구치 아저씨와 함께 있던 랜더 아저씨. 그 사람이 총수라는 걸 이제는 알고 있다.

자상한 사람.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인상은 그게 전부였다. 물론 산페르가 계속 랜더를 가리켜 ‘기괴한 놈’이라고 말하긴 했지만.

“총수님은 그 정도로 강합니까?”

세계를 종말 끝자락에서 건져 올린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그분의 무력을 두 눈으로 확인한 적은 없었다.

어느 정도이기에 기펠이 넌더리를 내는 걸까.

“무적. 그 고상하고 허무한 말이 어울리는 유일한 인간이지. 물론 무적이라 해서 상대법이 없는 건 아닐세. 나처럼 그자를 피해 가면 그만이거든. 그자의 권역을 벗어나면 살아남을 수 있지. 물론, 쉽지 않은 일이지만.”

“전 상상이 되질 않네요.”

“바다를 보지 못한 자에게 바다를 설명할 순 없네. 물이 많다, 그 말로는 바다를 표현할 수 없지. 자네는 아주 좋은 눈을 갖고 있으니 기회가 된다면 살펴보게. 보면 알게 될 거야. 괴물은 마주하는 게 아니라 피해야 한다는 걸.”

기펠의 눈빛이 서늘했다.

괜스레 긴장됐다.

“그보다 내가 자넬 붙잡고 이러고 있는 이유를, 자넨 물론 알고 있겠지?”

가하란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중재인은 억제력을 갖고 있어야 하니까요. 하늘석이란 훌륭한 교섭 수단이 있지만, 적이 제 목을 노리고 오면 하늘석으로 방어할 순 없겠죠.”

“맞네. 자네가 서부와 동부, 그 두 나라의 중간 다리 역할을 하려면 위엄을 갖춰야 하네. 정치판이었다면 피와 세 치 혀가 위엄의 척도였겠으나…… 자네 같은 경우는 단순한 힘, 그게 가장 우선시되어야 해.”

가하란은 목덜미를 매만졌다.

당장 전면에 나서지는 않겠지만, 아리엘이 타리움으로 돌아가고 이야기가 진전되면 언젠가는 사람들 앞에 나서야 할 것이다.

반기는 자들도 있을 것이고, 침묵한 채 지켜보는 자들도 있을 것이며, 견적을 내보는 자들도 생길 것이다.

저놈의 목을 자르는 데 어느 정도의 수고가 들까, 그런 견적을.

틈을 보인다면 쉽게 손을 쓰리라.

“자넨 사람을 믿나?”

“믿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위엄을 갖추게. 믿음은 건들지 못하는 것에서 나오지. 내 오랜 경험이니 아마 틀리지 않을 걸세.”

기펠이 눈을 예리하게 떴다.

“쉽게 죽어선 안 될 일이야. 이 돌덩이가 이상한 곳에 넘어가면 아주 골치가 아프거든.”

“원로님께선 절 믿으십니까?”

껄껄 웃으며 다시금 어깨에 손을 올리는 기펠이었다.

“자네가 말했지 않은가? 날 평가했다고, 다른 자들의 눈을 통해 날 가늠해 봤다고. 나 역시 그러했네. 산의 전사는 아주 까다롭지. 그자는 함부로 이름을 알려주지 않고, 또한 알려준다고 한들 이름을 부르게 해주지 않아. 왜 그런지 아는가?”

“자세히 듣지는 못했습니다.”

“영혼이 얽히는 걸 꺼리는 게야. 타린족은 이름에 혼이 깃든다고 믿지. 그렇기에 인정한 자에 한해서 자신의 이름을 부를 수 있게 해.”

기펠이 고개를 왼쪽으로 돌렸다.

저 멀리 한데 모여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그 까다로운 양반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걸 허락했네. 그것도 여기 모인 아주 많은 사람에게 말이야. 집단을 인정했다는 거지.”

“원로님께서는 타챠 아저씨의 눈을 믿으신 거군요.”

“나는 사람을 잘 안 믿네. 하지만 전사의 눈은 믿지. 고결한 전사의 눈을 믿지 못한다면, 세상에 믿을 것이 있겠나?”

고결한 전사.

아주 잠깐 밥 내놓으라며 씩씩거리던 타챠의 모습이 떠올랐다. 괜스레 웃음이 나온다.

“타챠 아저씨가 들으면 좋아하실 거예요.”

“좋아하기는커녕 아주 당연하다 여길걸?”

“아, 그렇겠네요.”

기펠이 어깨를 빙글 돌리더니 차고 있던 검집을 내밀었다. 의미를 알 수 없어 가만히 지켜봤다.

“안원에 가본 적이 있나?”

“예.”

“오호, 제대로 길을 열었군. 휩쓸린 건가, 아니면 의식을 치르고 간 건가?”

“처음에는 휩쓸렸고, 그다음부터는 제 의지로 갔습니다.”

“의지? 의식을 치르지 않고?”

가하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넨 보면 볼수록 재미난 친구야. 그럼 길게 설명할 것이 없겠지.”

기펠이 검집을 툭 튕겼다.

“잡게.”

망설임 없이 검집을 쥐었다.

“두어 시간 정도 걸릴 테니 그동안…….”

가하란은 주변에 있는 아이들을 불렀다.

“이 친구들이 경계를 설 겁니다. 다른 사람들한테도 사정을 설명할 거고요.”

“경계까지야. 이 하늘석에 뭐 위험한 게 있다고. 그냥 몸이 식지 않게 모포나 좀 덮어주면 되네.”

기펠이 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슬쩍 다녀오도록 하지.”

(다음 편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