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5화
눈은 좋다.
제대로 본다는 건 큰 이점이었다.
게다가 가하란은 단순히 제대로 보는 경지를 넘어 정확히 이해하는 것 같았다.
전투의 흐름을 짚어내고 한 걸음 빠르게 대응한다. 싸움꾼이라면 누구나 바랄 능력을 저 아이는 이미 터득한 것이다.
하지만 행동을 수반하지 않는 이해는 무능력하다. 책상머리에서는 이해만으로도 쓸모가 있으나, 찰나가 생사를 가름하는 전장에선 이해만으로는 부족했다.
생각을 현실화할 수 있는 몸의 수행 능력.
가하란은 그게 부족했다.
“사냥꾼인 건 확실하나, 싸움꾼은 아니군.”
사냥은 적의 습성을 파악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원하는 지형으로 사냥감을 몰아넣고, 유용한 자원을 사용해 사냥감의 숨통을 끊는다.
하지만 전투는, 싸움은 사냥보다 변칙적이다.
전쟁에서 치러지는 대규모 전투는 사냥과 닮았으나 개별적인 전투에서는 사냥의 방식이 통하지 않는다.
특히나 인간을 상대로 한 전투에서 가하란은 무력할 것이다.
“체계적인 훈련을 받은 적이 있나?”
“없습니다. 그저 살기 위해 열심히 발버둥 쳤을 뿐이죠.”
“담대한 구석은 거기서 나왔군.”
눈도 좋고 정신력은 더욱 좋다. 난생처음 겪었을 난처한 공격에도 흔들리지 않고 수단을 모색했다.
직접적인 전투가 아닌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전황을 내려다봐야 할 인재였다.
비상한 머리와 훌륭한 눈은 책략에서 더 빛을 발할 테니까.
“원로님.”
생각을 끊어내는 가하란의 목소리였다. 대련이 끝났으니 슬슬 돌아가야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가하란을 바라볼 때였다.
“해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투지가 마르지 않았다.
“자네라면 이미 파악했을 텐데. 안 된다는 걸.”
“예, 알고 있습니다. 이미 경험해 봤거든요. 어찌할 수 없는 무력의 차이라는 걸.”
옷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고 다시금 힘차게 도끼를 움켜쥐었다.
기펠은 호, 작게 웃으며 멀어졌다.
“경험해 봤다는 상대가 누군가? 대인전이 미숙하다고는 하나 다져놓은 틀이 좋아 어지간한 싸움꾼들은 이름도 못 내밀 텐데.”
“제가 무슨 짓을 해도 이길 수 없는 상대. 이 외에 다른 건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무슨 짓을 해도 이길 수가 없다? 그 무슨 짓에는 혹시 이것도 포함된 건가?”
기펠은 검 끝으로 바닥을 가리켰다.
“하늘석을 정면에서 받아내실 분이죠. 아니, 어쩌면 제가 상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날려 버릴지도 모르고요.”
“정면에서 받아낸다, 라.”
기펠은 수염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혹시 동부의 괴물을 말하는 건가? 예전에는 총수였으나 지금은 뭐 하고 사는지 알 수 없는 그 친구.”
“그분은 아닙니다. 그런데 허스 님과 만나보신 적이 있습니까?”
이름을 듣자마자 눈 밑이 파르르 떨렸다. 되뇌는 것만으로도 입맛이 사라진다.
“다른 곳에서 만났다면 참 좋았을 텐데, 하필 전장에서 마주쳤지. 그것도 안둔에서.”
“안둔이라면 얘기는 들어 봤습니다. 15년 전쟁이 가장 치열하게 벌어진 곳이라고.”
“지독한 설원이었지. 서로 움직이는 것조차 부담스러울 정도로 추운 곳. 전략적 요충지도 아니었는데 전황이 이상하게 꼬여서 그곳이 격전지가 됐네. 어제 같은데, 벌써 옛일이 됐군.”
기펠은 설원에서 마주쳤던 총수를 떠올렸다. 자아를 잃어 그저 떠돌아다닐 뿐인 정령들조차 그놈 근처에는 얼씬거리지도 않았다.
희한한 일이었다. 아무것도 감지할 수 없는 놈들이 비껴가니까.
“승패를 물어도 될까요?”
“이미 물어놓고 뭘.”
기펠은 당시를 회상했다.
“보자마자 깨달았지. 저걸 뚫고 지나가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저놈이 밀고 들어오면 전선이 무너지는 건 시간문제라는 걸.”
“제가 알고 있기론 안둔은 몇 년이나 대치 국면이었다고…….”
“내가 선언했거든.”
기펠은 검집을 공중으로 던졌다.
“서로 정치적 입장 때문에 여기 온 걸 안다. 그러니 상호 쓸데없는 손실을 보지 말자. 만약 그대가 무력행사를 하면, 난 전력을 다해 도망친 다음 그대가 아끼는 사람들을 죽일 것이다.”
괴물은 정면에서 상대할 수 없다.
그러니 인간의 비열한 방식을 동원하는 수밖에.
“치졸하다고 생각하나?”
“아니요.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원로님께선 지켜야 할 것이 있었으니까요. 저도 명예보단 실리가 중요합니다.”
“다행히 총수도 명예 같은 건 안중에도 없는 양반이었지. 나와 협약을 맺었네. 서로 참전하지 않기로.”
손을 까닥거렸다. 바람이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바람과 바람이 연결되며 몸이 가벼워지고 주변 것들이 예리하게 느껴졌다.
“난 괴물을 이겨낼 정도로 강하진 않네. 하지만 괴물을 귀찮게 할 수 있을 정도는 되지. 난 그걸 아주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고. 농담이 아닐세. 내 자랑거리 중 하나니까.”
검집을 날려 보냈다. 검집을 든 바람은 콧노래를 부르며 가하란을 두들겨 팼다.
“아까와 달라진 게 없는데?”
잘 막아내고 있긴 하지만 체력전으로 끌고 가면 지치는 건 가하란이었다.
“원로님, 거친 방법을 써도 되겠습니까?”
“안심하게. 자네가 무슨 짓을 하든 난 괜찮을 테니까.”
“그럼 믿겠습니다.”
“얼마든…….”
쐐애액, 눈앞으로 손도끼가 날아들었다. 바람으로 쳐내려고 했는데 이상한 게 감지됐다.
도끼날이 샛노랗게 달아올랐다.
강렬한 파장이 뻗쳐 나왔다.
심상치 않았다. 바람으로 쳐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느낄 때였다.
노랗게 물든 도끼날이 파랗다 못해 새하얗게 변하더니 이내…….
쿠아앙!
눈앞에서 폭발했다. 응축된 마전기가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기펠은 뒤로 물러서며 바람을 부렸다. 바람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오는 잔여 에너지는 검으로 밀어냈다.
“하하! 자넨 정말 재미난 짓을 하는군!”
시선을 들어 올렸다.
주의력을 빼앗은 다음 도약이라.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하지만 이쪽의 무기를 망각한 게 아닐까?
왼손을 휘저었다. 바람이 소용돌이치며 공중에 뜬 가하란을 향해 달려들었다.
물어뜯기면 살갗이 베이는 정도로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사나운 바람이 가하란의 다리 밑까지 치고 들었을 때였다.
쿵, 소리와 함께 가하란의 몸이 내리꽂혔다.
공중에서 이차 도약?
카앙!
면전으로 치고 들어온 사냥용 단도를 검으로 막아냈다.
“자네, 바람도 다룰 줄 아나?”
“마법 공학입니다!”
“그래?”
검집이 뒤에서 달려들었다. 가하란의 오른쪽 의족에서 마나 파장이 느껴졌다.
신체술을 사용한 것처럼 신형이 미끄러져 뒤로 물러섰다. 허공을 가른 검집이 몸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너도 꽤 즐기고 있구나.”
검집을 담당한 바람이 웃음을 남기고 가하란에게 달려들었다.
딱, 따닥!
좌우에서 짓쳐 드는 검집을 쳐내며 오른쪽으로 도는 가하란이었다.
다음 수를 엿보는 것 같았다.
“근데 지금 보니 자네는 신체술을 안 쓰는 것 같은데, 아니. 못 쓰는 건가?”
“비슷한 건 사용할 줄 압니다.”
신체술을 사용해 단련한 자들은 일시적으로 마나를 체내에 붙잡아 둔다. 마나란 자원을 인체 곳곳에 분배해 폭발적인 힘, 초월적인 감각을 얻어내는 게 신체술의 기본 원리였다.
그런데 가하란은 체내에 마나를 붙들지 않았다.
마치 옷처럼 외부에 둘렀다.
기이한 사용법이었다.
미지의 힘을 이용한 것일까?
“마나 폭발과 의족을 사용한 참신한 이동. 재미난 구경이었네. 근데 이제 끝난 건가?”
“아니요! 이제 준비가 끝났습니다.”
“준비?”
의아해할 때였다.
기펠은 작은 바람이 물어다 준 경고에 고개를 홱 돌렸다.
자그마한 거병 둘이 거대한 쇠뇌를 들고 있었다. 사출부에 예리하게 다듬어진 볼트가 여섯 개 장전돼 있었다.
크기로 봤을 때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물건이 아니었다.
“자네 정말…….”
입을 열기 직전이었다.
바람이 찢겨나갔다. 볼트가 다가온다. 기펠은 면을 점유하며 다가오는 볼트를 바라봤다.
피하려면 피할 수 있었다.
이미 봤으니까.
직선상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찝찝했다.
예고된 경고.
가하란은 말하지 않아도 될 것을 말했다. 대련이기에 친절하게 알려준 것일까?
아니, 그럴 리가 없다.
기펠은 두 다리를 지면에 박은 채 정면에서 날아오는 볼트를 검으로 쳐냈다.
카아앙!
검신이 뒤흔들리며 불꽃이 튀었다. 공격을 막아낸 직후였다.
기펠은 가하란 쪽을 바라봤다.
검집이 붙들렸다. 아니, 검집을 매개 삼아 놀던 바람이 붙잡혔다.
놀라웠다. 물체가 아닌 것도 붙잡을 수 있는 건가?
시선이 마주쳤다. 가하란의 눈동자가 슬며시 움직였다.
볼트를 날린 것도, 바람을 제압해 이목을 끈 것도…….
기펠은 입가를 씰룩였다.
뒤늦게 바람이 소식을 가져다주었다. 50m 정도 떨어진 곳에 또 다른 초소형 거병이 있다고.
위치를 확인하려고 고개를 튼 순간, 마나가 휘몰아쳤다.
“노인을 상대로 너무하는군.”
* * *
파아아앙!
슬리피가 마전기를 방출함과 동시에 흙먼지가 치솟았다.
가하란은 손도끼를 쥔 채 전방을 주시했다.
사용 가능한 모든 자원을 썼다.
사냥용 볼트와 외력으로 기펠의 집중력을 떨어트린 후 감지 범위 밖에서 원거리 사격을 했다.
대 마수 전용 장비들.
인간에게 사용할 스펙이 아니지만 상대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눈앞에서 마나 폭발을 일으켰는데도 옷에 먼지 하나 묻지 않은 기펠이었다.
어설픈 수단으로는 건드리는 것조차 불가능할 것이다.
착안마저 가려버리는 힘.
어렴풋하게 확인해 본 바 기펠이 순간적으로 일으킨 힘의 변화량은 타챠와 동급이었다.
물론 변화량 자체가 강함의 척도는 아니지만, 주의해야 할 수치임은 분명했다.
이번에는 통했을까?
단말기와 미니 비트를 통해 아이들에게 다음 지시를 내리려 할 때였다.
자욱했던 먼지가 한순간 사라졌다. 상승 기류에 실려 위로 흩어지는 먼지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내렸다.
“…….”
가하란은 미간을 찌푸려야 했다.
돌무더기가 솟아올라 있었다.
족히 2m는 되어 보이는 장벽.
착안으로 바라봤다. 흙과 돌덩이 사이사이에 힘이 흐르고 있었다. 바람과 닮았으나 다른 힘이었다.
시선을 옮겼다.
새카맣게 그을린 영역이 보인다. 응축된 마전기는 저 벽을 뚫지 못하고 방사된 것이다.
마수의 질긴 외피도 단숨에 녹여버릴 출력으로는 부족한 건가.
흙과 돌덩이 사이를 메우고 있는 정령의 힘. 그게 마전기에 대항력을 지닌 듯했다.
“시도는 좋았네. 하지만 공격자의 거리가 멀면 멀수록 대비할 시간이 생기지.”
“0.12초의 세계를 대비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몇 없지 않을까요?”
“많지는 않겠지. 하지만 자네 앞에 그 많지 않은 인간 중 하나가 나타난다면, 자넨 아쉬워하면서 곱게 죽을 생각인가?”
가하란은 손도끼와 단도를 교차시키며 앞을 막았다. 떨어진 곳에서 얘기하던 기펠이 눈 깜짝할 사이에 검을 내리긋고 있었다.
“그나저나 그 도끼는 몇 개나 갖고 있는 건가? 나한테 이미 하나 선물했고.”
“아직 두 개 더 있습니다.”
“그것들도 펑펑 터지나?”
“다른 것들도 터트릴 수 있죠.”
“과격한 친구였군.”
기펠이 검을 거두었다. 가하란은 마른침을 삼키며 자신의 발을 내려다봤다.
스멀스멀 올라온 진흙이 발을 붙잡아 둔 상태였다. 몰아치는 정보량을 제어하기 위해 착안을 잠시 닫았더니 생긴 일이었다.
“바람만 다루시는 줄 알았습니다.”
“난 친구들한테 부탁할 뿐일세. 그 형태가 각기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지.”
기펠이 가까이 다가와 씩 웃었다.
“자네, 나한테 시간 좀 내게.”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