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4화
“내부를 전부 공개할 줄은 몰랐어. 특히 기펠 님께 전부 보이다니.”
아리엘은 걱정된다는 투로 말했다.
“나도 처음 얘기를 들었을 땐 고민했어. 그게 옳은 판단인지.”
밀레나는 아리엘을 향해 손짓했다. 살짝 언 개울 옆으로 새하얀 개구리가 기어갔다. 주둥이엔 이름 모를 곤충이 잡혀 있었다.
“근데 가하란의 얘기를 듣고 나니까 이해가 되더라고. 이해가 되니 안심도 되고.”
“무슨 얘기?”
“누가 공학도 아니랄까 봐 일어날 모든 이벤트를 생각해 두고, 변수에 대응할 방법도 마련해 놨어. 기펠이란 사람의 행동 패턴에서 몇 가지 가능성을 유추해 자체적으로 시뮬레이션도 해봤대.”
“사람은 기계가 아니야. 마법 공학으로 설명할 수 없어.”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근데 가하란, 그리고 그 애들과 같이 생활하다 보니까 사고방식이 달라졌어.”
밀레나는 손가락으로 하얀 개구리의 등을 톡 건드렸다. 놀란 개구리가 재빨리 움직여 굴속으로 숨어들었다.
“방금 그 개구리는 항상 파놓은 굴로 도망쳐. 그래서 굴 주변에서만 행동해.”
아리엘이 다가왔다. 굴에 숨었던 개구리가 고개를 빠끔 내밀었다가 다시 숨었다.
“행동 양식이 있는 거지.”
“사람은 개구리가 아니잖아.”
“맞아, 아니지. 하지만 말이야, 그토록 다르다고 말하는 사람도 자세히 살펴보면 비슷한 행동 양상을 보여. 특별한 이벤트는 자주 일어나지 않지.”
“그렇기에 패턴화할 수 있다?”
“모든 걸 알 수 있다는 건 아니야. 그건 비약일 테니까. 하지만 경향은 분명 찾아낼 수 있어. 가하란의 사고 놀이터에서는 그러한 시뮬레이션이 무수히 이뤄지고 있고.”
“사고 놀이터?”
밀레나는 작게 웃은 후 말했다.
“해피의 표현을 빌려 쓴 거야. 어떤 애는 사고 실험실, 어떤 애는 다각화 정보실, 어떤 애는 자료 집합체라고 불러. 나도 그게 어떤 곳인지 정확하게 알진 못해. 거기에 접근할 수 있는 건 몇몇 유사 정령과 가하란뿐이니까.”
“미니 비트인가 뭔가, 그거구나. 가하란이 말했던 거.”
“맞아, 그거야. 만든 건 가하란이지만 그곳을 관리하고 키워나가고 있는 건 가하란이 만든 아이들이고.”
“기계가 스스로 배워 나간다는 거야?”
“응. 그걸 배움, 학습이라 불러야 할지 아니면 단순한 정보 모음이라 불러야 할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 가하란이 구조는 설명해 줬는데 이해하기가 어렵더라.”
밀레나는 개구리의 굴을 가리켰다.
“지금 이 안에 나뭇가지를 찔러 넣으면 어떻게 될까?”
“개구리가 튀어나오겠지.”
“행위도 알고 결과도 알아. 근데 이 굴 안이 어떻게 생겼는지, 언니는 알 수 있어?”
“들여다보면 알지.”
“들여다볼 수 없다면?”
“그게 중요해?”
뚱한 표정을 짓는 아리엘이었다. 밀레나는 언니의 팔을 잡고 살짝 흔들었다.
“내가 가하란한테 들은 얘기야. 입력값도 알고 출력값도 알지만, 그 중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대. 기계어의 세상이라나 뭐라나.”
“그 애, 아니, 부군께서는 머리가 괜찮은 거지? 어디 아픈 건 아니고?”
“부군이라니, 징그러워.”
“귀족 사회였다면 수도 없이 입에 올리고 살았을 단어라는 거 너도 잘 알면서.”
“알지. 근데 이제는 아닌걸? 그리고 무엇보다 이름을 부르는 게 좋아.”
밀레나는 옅게 웃은 후 말을 이었다.
“어쨌든 가끔 보면 걱정되긴 해. 저러다 내가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세계로 훌쩍 떠나는 게 아닐까, 하고.”
농담이 아니었다.
둘이 있을 때 가하란은 시시한 농담으로 웃겨주는 남자였다. 신작이라며 이상한 요리를 내오기도 하고, 내기하자며 짓궂은 퀴즈를 내기도 한다.
소파에 나란히 앉아 있을 때 자신은 그의 모든 걸 이해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든다.
하지만 소파를, 침대를 떠나 쇠 비린내와 회로의 번뜩임으로 도배된 제작실로 들어갈 때면 그는 아득히 먼 사람이 되어버린다.
물리적 거리는 한없이 가까우나 도저히 메울 수 없는 이해의 거리감이 드리워지는 것이다.
그 쓸쓸함이 싫어 한 번은 카트시에게 마법 공학을 알려달라고 말했다.
거병 정비에 쓰이는 기초적인 것 말고, 가하란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그런 마법 공학을.
카트시는 단언했다.
그건 불가능해, 라고.
“평생 이해할 수 없겠지. 그래도 노력은 멈추지 않을 거야. 그 애가 날 생각했던 만큼, 나도 그 애를 생각할 거니까.”
“다 큰 남자한테 애는.”
“진짜 어쩌지? 입에 붙어버렸어. 너무 어릴 때 봐서 그런가 봐.”
히죽 웃을 때였다. 굴 밖으로 나온 개구리가 어디론가 열심히 뛰어갔다.
“우리 때문에 집을 버렸네.”
“나중에 집 한 채 해줘. 근데 겨울인데도 동면을 안 하네?”
“여기 애들은 좀 달라.”
밀레나는 격납고 쪽을 바라봤다. 가하란과 기펠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이야기가 끝난 걸까?
다가가 말을 걸려고 했는데, 두 사람이 샛길로 빠졌다.
“알 것 같네.”
아리엘이 말했다.
“뭐가?”
“기펠 님의 표정 못 봤어?”
“어, 못 봤어.”
“신이 잔뜩 난 얼굴이셨어. 도마뱀 씨랑 드잡이질할 때 저런 표정이셨지.”
“설마…….”
아리엘이 턱짓했다.
“조용히 따라가 보면 알겠지.”
* * *
“정령술을 다루는 사람과 싸워본 적이 있나?”
기펠이 물었다. 가하란은 손목을 풀며 대답했다.
“타챠 아저씨와 몇 번 대련한 적은 있습니다만, 그걸 정령의 힘이라고 해야 할지는 의문이네요.”
“육체를 강화하는 강신은 신체술과 닮았지. 난 정령을 조금 다르게 쓰고.”
살랑살랑 바람이 불어왔다.
“샬롯하고도 친분이 있다지?”
“예.”
“그 아이는 바람을 세심하게 다루지. 나이를 생각하면 놀라울 정도야.”
산카의 보살핌을 받고 있으니 그럴 만했다. 가하란은 손도끼를 손에 쥐었다.
“투박한 무기를 쓰는군.”
“제게 전투는 곧 사냥을 의미했습니다. 검보다는 도끼나 쇠뇌가 손에 익죠.”
기펠이 허리춤에 달려 있던 검집을 풀었다. 검을 뽑아 들고 검집을 살짝 놓았는데, 공중에 뜬 상태로 기펠의 오른쪽에 위치했다.
왼쪽 착안을 열었다.
점멸하는 점의 세계.
눈으로 기펠을 훑을 때였다.
“자네의 그 눈, 아주 독특하군.”
있음과 없음, 점멸하며 신호를 생산하던 점들이 한순간 자취를 감췄다.
차단당했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착안으로 대상을 바라보면 둘 중 하나였다. 정보화하거나 착안이 읽어내지 못하거나.
기펠은 착안이 읽어내는 걸 감지한 후 모종의 힘을 써서 차단했다.
가하란은 기펠 주변을 살폈다.
무수한 점들이 기펠을 감싸고 있었다.
“정령을 그런 식으로도 사용할 수 있군요.”
파생되는 힘, 즉 정보를 바람이 차단하고 있었다.
“자넨 이 층에 기거하는 정령이 두 종류 있다는 걸 알고 있나?”
“근본에 각인된 이름조차 잊은 채 그저 존재하는 정령과 모든 걸 인식하고 돌아다니는 정령. 이렇게 둘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제대로 알고 있군.”
기펠이 검을 아래서 위로 그었다.
점들이 출렁거렸다. 힘의 파동이었다. 위협적이지는 않아 자리를 고수한 채 다가오는 파동을 맞았다.
시릿한 바람이 몸을 훑고 지나갔다.
“망각한 정령들. 그것들은 마나와 비슷하지. 정령술사들이 이용하는 건 대개 그런 정령들이고.”
손짓에 따라 바람이 춤을 췄다.
가하란은 외력으로 마나를 붙들어 몸을 감쌌다. 불어오는 바람이 심상치가 않았다.
싸아아아, 양옆에 놓인 나무들이 울기 시작했다.
“정령은 층 너머의 존재라 본래라면 이곳에 간섭할 수 없지. 하지만 정령술사들은 고유한 심상 세계를 통해 간섭을 일으켜.”
바람이 휘몰아친다.
기펠의 의지가 바람을 움직이고 있었다.
“어릴 때 끔찍한 정령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 정령은 인간에게 저주를 퍼붓고 있었죠. 물론 말씀하신 대로 간섭은 불가능하기에 아무 일도 없었지만, 어린 제가 보기에는 너무나도 잔인한 일이었어요.”
“이성이 있는 정령들은 예측할 수가 없네. 우호적인 자들도 있는가 하면 적대시하는 자들도 있으니까. 그러니 흘려보내야 하고.”
타챠가 과거에 한 말과 똑같다고 생각할 때였다.
정면에서 힘의 변화량이 감지됐다.
가하란은 재빨리 오른쪽으로 비켜섰다. 묵직한 파공음과 함께 보이지 않는 바람이 지나갔다. 휩쓸렸으면 나자빠져 몇 바퀴를 굴렀을 것이다.
“그 눈 참 특이하군.”
“몇 안 되는 자랑거리죠.”
왼손으로 단도를 꺼내 기펠에게 던졌다. 일직선으로 날아가던 단도가 한순간 힘을 잃더니 바닥으로 꼬꾸라졌다.
“닿으려면 더 힘차게 던져야 할 걸세.”
“괜찮습니다.”
닿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었다.
닿을 필요도 없었고.
기펠의 발치에 떨어진 단도를 향해 외력을 뿌렸다. 보이지 않는 인력이 작용해 떨어진 단도가 꿈틀댈 때였다.
“눈만 특별한 게 아니었군.”
기펠이 검을 그었다. 은밀하게 이어지던 외력이 단절됐다. 조심스럽게 움직이던 단도가 푹 쓰러졌다.
“노안 때문에 앞이 잘 안 보이지만, 이 녀석들 덕분에 걱정을 덜었지. 나 대신 주변을 살펴주거든.”
기펠 주변을 촘촘하게 둘러싼 바람은 외력마저 감지하는 모양이었다.
“그보다 그 힘은 대체 뭔가? 마나도 아니고 정령의 의지도 아니고.”
“저도 잘 모르는 힘입니다.”
“모르는데 다룬다? 거 편리하구만.”
저만치 떨어져 있던 기펠이 순식간에 눈앞으로 다가왔다.
도끼를 들어 떨어지는 검을 막아냈다.
카가강, 벼려낸 날 끝이 갈리고 있었다. 외력으로 몸을 보호하지 않았다면 도끼날처럼 몸 이곳저곳이 베였을 것이다.
힘껏 뿌리쳐 거리를 뒀다.
공격 경로를 읽고 검신을 제대로 막았는데 타격을 입었다.
기펠 주변을 맴도는 바람.
정말 까다로웠다. 형태가 없으나 분명 존재하는 저 힘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정면에서 막아내면 조금 전처럼 당할 것이다. 그렇다고 계속 피할 수도 없었다.
기동력은 기펠이 한참 위였다. 몸을 바람에 실어 날려 보내는데, 착안이 아니었으면 반응조차 못 했을 것이다.
“뒤통수.”
기펠이 말하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 힘의 흐름은 착안이 모두 잡아내니까.
딱!
도끼로 뒤를 막았다. 공격해 온 건 검집이었다. 기펠 손을 떠난 검집은 온전히 바람의 힘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근본조차 잃어 의식이 없는 자들은 내 부름에만 반응하네. 하지만 저 친구처럼 싸움을 좋아하는 자들은, 이런 식으로 날 돕지.”
딱, 타닥!
검집이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였다.
아니, 살아 있는 것이다. 이성을 갖춘 정령이 검집을 무기 삼아 달려들고 있으니까.
처음에는 가벼웠으나 점점 무게가 실리고 있었다. 이제는 한 손으로 막기 버거울 정도였다.
“등이 비었네. 지금 내가 찌르면 자넨 죽어”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다면 뭐라도 좀 해보게.”
시원하게 웃으면서 돌멩이를 던지는 기펠이었다. 허벅지와 종아리, 팔뚝을 집요하게 노리고 날아드는데 무시할 수 없는 공격이었다.
앞에서는 검집이 춤췄고, 뒤에서는 돌이 나왔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착안으로 받아들인 정보가 계속 쌓여나갔다. 대응책을 꾸리기도 전에 공격이 들어오니 머리만 어지러워질 뿐이었다.
“좋은 눈이 꼭 도움이 되는 건 아닐세. 자넨 너무 많은 걸 봐. 머리가 그걸 이해한다고 해도, 자네 몸뚱이는 그걸 수행할 능력이 안 돼.”
맞는 말이었다.
착안과 몸은 별개였다.
머리가 인식 후 판단해 내놓은 결과를 몸이 이행하지 못했다.
착안을 잠시 닫았다. 눈앞의 현상에만 집중해 보려 했다.
그 순간.
“산의 전사와 대련해 봤다고? 아니, 그건 대련이 아니라 지도였겠지.”
기펠이 바로 뒤에 있었다. 착안을 닫은 시점에 찌르고 들어온 것이다.
등에 날카로운 것이 닿았다.
가하란은 격한 숨을 내쉬며 손도끼를 늘어트렸다.
“졌습니다.”
어이없는 한숨이 탁 치고 나왔다. 이 정도로 무력하게 질 줄은 몰랐다.
“설마 이길 생각이었나? 생각보다 염치가 없는 친구였군.”
껄껄 웃으며 손짓하는 기펠이었다. 검집이 살랑살랑 움직여 기펠의 손아귀로 돌아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