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3화
하늘석이 집결 수도 상공에서 멈췄을 때 느낀 건 호기심뿐이었다. 어찌할 수 없는 재해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으니까.
뒤이어 작은 거병, 닥이 나타났을 때는 호기심과 더불어 약간의 두려움이 몸 안에서 피어났다. 닥은 이해의 범주 안에 있는 것이었으므로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무섭군요.”
기펠은 막연한 두려움 앞에서 헛헛한 웃음을 지어야 했다.
무엇으로 이루어졌는지 감조차 잡히지 않는 하늘석 내부. 재해의 상징이 정말로 인간의 통제를 받고 있었다.
실물로 확인하니 가슴 깊숙한 곳에 와닿는다.
“걱정하시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나란히 서서 걷고 있는 남자, 가하란이 말했다. 얼굴에 새겨진 옅은 흉을 바라보다가, 가하란의 하늘색 눈동자를 응시했다. 먹구름이 낀 것처럼 탁한 하늘색.
“내가 무얼 걱정하는지 아는 것 같군요.”
“이런 게 머리 위에 떠 있으면 백이면 백 똑같은 생각을 할 테니까요.”
“아주 훌륭한 경고였어요. 도시의 머리들이 허겁지겁 회의를 소집하고 난리를 치고, 볼만했죠.”
“말로는 부족할 거라 생각했습니다.”
기펠은 작게 웃었다.
“말보다는 머리 위에 뜬 돌이 직관적이긴 하니.”
통제실이라 부르는 공간에 들어섰다. 티끌 하나 묻어 있지 않는 회색 벽이 반겨주었다. 희한한 곳이라고 생각할 때였다. 벽에 빛이 스며들더니 이내 외부 풍경이 보였다.
“신기하군요.”
“거병의 시각 장치를 이용한 것입니다. 인간의 신경망에 전달하는 대신 벽에 투사하는 거죠.”
기펠은 벽면을 만져봤다. 보이는 건 울창한 나뭇잎인데 손끝에 전해지는 건 까칠한 돌의 질감이었다.
“공중에서 지상의 모든 걸 살펴볼 수 있겠군요.”
“그렇습니다.”
“이거, 대여해 줄 수 있나요? 두어 달 정도만 빌려준다면 대륙 통일도 꿈이 아닐 것 같은데.”
벽을 툭툭 치면서 가하란을 바라봤다. 표정 변화 없이, 더 말해보란 듯이 지켜보고 있었다.
껄껄 웃으며 농담이라고 말했다.
“이 밑에도 뭔가가 있는 것 같은데, 보여줄 수 있나요?”
기펠은 바닥을 가리키며 말했다.
꽉 막혀 있는 것처럼 보이나 바람이 드나들고 있었다.
“아래 있는 건 보여드릴 수 없습니다.”
“부정하진 않는군요. 아래에 뭔가가 있긴 한데, 그거참 궁금하네요.”
틈을 비집고 들어간 바람이 돌아오지 않았다. 소멸한 걸까, 아니면 단절돼 뜻이 연결되지 않는 걸까.
“다 살펴보셨나요?”
기펠은 턱을 쓰다듬었다. 저 친구 눈은 보이지 않는 걸 보는 모양이군.
“마음껏 살펴보고 싶은데 뜻대로 되질 않는군요.”
“원로님께서 부리시는 아이들은 하늘석 바깥으로 내보냈습니다.”
“역시나 그 아이들을 느낄 수 있나 보군요. 공학인들은 대개 정령과 멀어지던데.”
“철들기 전에 친해진 덕인지 지금까지도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원로님처럼 부릴 수 있는 건 아닙니다만.”
“정령술사 중에서도 눈이 안 좋은 친구들이 많아요. 그에 비하면 아주 훌륭한 성과죠.”
뒤쪽에서 소리가 났다. 돌아보니 다리가 여섯 개 달린 기계인형이 쟁반을 들고 걸어오고 있었다.
여섯 개의 다리가 움직이고 있음에도 찻잔 속 물은 흔들리지 않았다.
기펠은 찻잔을 든 후 기계인형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자세 제어가 훌륭하군요.”
“제작 초기에는 문제가 많았죠. 상하 이동에 의한 반동을 제어하는 게 쉽지 않았거든요.”
“집으로 초대하고 싶네요. 어린 집사들의 선생으로 제격일 것 같아요.”
“필요하시다면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그거 아나요? 늙을수록 염치가 없어진다는 거. 사양하지 않고 고맙게 받을 테니 꼭 챙겨주시길.”
흐뭇하게 웃으며 차를 마셨다.
“디졸브 필드라고 했죠? 마나 증발을 일으킨 기술.”
“예.”
“생각해 봤어요. 도심지에 그런 현상이 발생하면 어떻게 될까. 아마 한 시간이 채 안 되어 도시 꼴이 처참해지겠죠.”
도시 생활은 마전기로 시작해 마전기로 끝이 나게 돼 있었다. 국가 시설부터 개인의 삶의 질을 결정짓는 의체까지, 모두 마전기를 기반으로 한다.
마전기는 마나를 이용해 생산하니, 마나가 증발해 버리면 마전기 역시 사라져 버릴 것이다.
마법 공학품이 일시에 정지해 버린다. 증발 현상이 일주일 이상 지속되면 사회가 뒤집힐 것이다.
“디졸브 필드는 어디까지나 방어 수단입니다.”
“방어라는 건 여러 해석이 가능하죠.”
“제가 기술 원천을 쥐고 있는 한 악용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와 비슷한 말들을 나는 수없이 들어왔어요. 정말 수없이 들어왔죠.”
기펠은 쟁반에 찻잔을 올려뒀다. 기계인형이 부드럽게 움직여 뒤로 물러섰다.
“나는 말이죠, 수고로운 일을 정말 싫어해요. 품이 많이 드는 걸 질색하죠. 가장 단순한 형태로, 가장 쉽게 해결할 수 있는 걸 선호해요.”
“그러시군요.”
“그래서 계속 생각해 봤어요. 미지의 하늘석을 다루는 자, 상식을 넘어선 기술을 손에 쥔 자. 뛰어난 인재임은 확실하나 결국 사람이죠. 사람은 속내를 알 수 없다는 게 문제고.”
기펠은 옆구리에 찬 검집을 툭 건드렸다.
“그러니 대답해 봐요. 이걸 뽑아 걱정의 싹을 잘라내는 게 좋을지, 아니면 사람을 믿는 게 좋을지.”
“저는 원로님께서 어떤 답을 내릴지 알고 있습니다.”
“그래요?”
“예. 원로님은 저를 믿으실 겁니다. 그렇기에 저 역시 원로님을 초대한 것이고요.”
“내가 방금 말하지 않았나요? 사람은 속내를 알 수 없다는 게 문제라고.”
“전 원로님을 믿습니다.”
“그거 이상한 말이군요. 오늘 처음 본 날 믿다니.”
“실제로 뵙는 건 오늘이 처음이나, 원로님에 관한 건 수없이 전해 들었습니다.”
“전해 들은 거로 사람을 평가하면 나중에 큰일을 겪을 텐데요.”
“믿음이란 건 결국 인식한 결과 아닐까요? 인식한 주체를 믿을 수 있다면, 그들이 내놓은 결과 역시 믿을 수 있죠. 그걸 믿지 못한다면 전 세상 모든 것을 의심해야 하는데, 그러긴 싫거든요.”
기펠은 검병을 살며시 쥐었다.
“내가 그 믿음을 배신해 보려 하는데, 어떤가요?”
“배신보다는 가늠이란 단어가 더 정확해 보이네요. 원하신다면 하셔도 괜찮습니다. 단, 피곤해지실 겁니다.”
검집에서 검을 살짝 뽑아냈을 때였다.
눈앞에 벽이 생겨났다. 이음새가 없는 벽이었다. 천장에서 내려온 건지, 바닥에서 솟구친 건지 알 수 없었다.
그야말로 돌연 생겨났다.
그와 동시에 사방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구동계가 내는 자잘한 소음.
슬쩍 돌아보니 자그마한 기계인형들이 통로에 기웃거리고 있었다.
손바닥보다 작은 인형부터, 성인 신체보다 큰 인형까지.
각자 맡은 역할이 다른지 형태가 모두 제각각이었으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하나의 명령을 받았다는 듯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기펠은 손이 근질거렸다.
호승심이 생겨났다.
마음 내키는 대로 신나게 날뛰고 싶었다.
하지만.
“친절한 친구에게 몹쓸 짓을 할 수는 없지요.”
검병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바로 앞에 있는, 찻잔을 가져다준 기계인형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뒤돌아서니 벽은 사라지고 가하란이 보였다.
“방금 그 벽은 정말 신기하네요. 소리도 없이 생겨나고.”
“마나를 이용한 구조화입니다. 하늘석 내부에서만 가능한 기능이죠.”
가하란이 손짓하자 의자가 생겨났다. 기펠은 감탄하며 의자를 가리켰다.
“만져봐도 되는 건가요?”
“앉으셔도 됩니다.”
의자에 손을 댔다. 질감은 벽면을 만졌을 때처럼 거칠었다. 체중을 실어 앉아봤다. 형태가 무너지거나, 반발력이 생기진 않았다.
“가시화된 마나가 이토록 안정적이라니.”
“원리를 연구 중이지만, 저 역시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하늘석에 대해 모든 걸 깨우치진 못했군요.”
“비밀이 많은 친구니까요.”
가하란이 곁으로 다가와 앉았다.
“김새긴 했지만, 그래도 물어보죠. 내가 무섭지 않나요? 이래 봬도 칼을 꽤 잘 쓰는데.”
“실력만 보면 두렵습니다. 타챠 아저씨와 박투를 벌일 수 있는 사람이라니, 처음 들었을 땐 정말 놀랐어요.”
“그대가 믿는 사람 중에 하나가 타챠인 것 같군요.”
“예. 타챠 아저씨께 원로님에 관한 걸 들었습니다.”
“뭐라고 하던가요?”
“들은 대로 말씀드리자면, ‘인간 주제에 정직하다’ 입니다.”
웃음이 터져 나왔다.
“산의 전사께서 그리 말했기에 날 믿는 건가요?”
“교차 검증이 필요하죠. 제가 원로님을 이곳으로 초대한 가장 큰 이유는, 닥이 원로님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기펠은 눈을 반쯤 감으며 물었다.
“그대는 기계가 한 말을, 기계의 판단을 믿나요?”
“예. 믿습니다.”
“위험하지 않을까요? 기계인데.”
“오류가 있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건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종교 측이 들으면 기겁할 말이군요. 방금 한 말을 발전시키면 신앙에 닿으니까요.”
“언짢으셨다면…….”
기펠은 손을 내저은 후 입을 열었다.
“나는 신을 믿어요. 하지만 신의 뜻이란 게 있다면 그게 인간이 아닌 만물 모두에 적용될 거라 여길 뿐이죠.”
기계인형이 비스킷을 가져왔다. 땅콩 분태가 잔뜩 발린 비스킷을.
“내 취향을 아주 잘 아는군요.”
“닥이 전해 줬습니다.”
“이런 자잘한 것들이 하나하나 모이면 어떤 게 되는지, 살다 보니 깨닫게 되더군요.”
대다수의 정보는 값어치가 없으며, 쓸 만한 정보는 접하기 어렵다.
하지만 간혹 먼지와도 같은 자투리 정보를 통해 실체에 접근하는 자들이 있다.
“날 믿으니 초대했다, 이해했어요. 그렇다면 내가 초대에 응한 이유 역시 알겠군요?”
“중재인을 맡겠습니다.”
기펠은 만면에 미소를 띠었다.
“그럴 만한 실력도, 능력도 있다는 건 알겠어요. 하지만 정치는 결이 좀 달라요.”
“아리엘 의원이 저희의 입이 돼줄 것입니다.”
“티안의 핏줄이라면 나쁘지 않군요.”
“원로님의 직인이 더해진다면 더욱 좋아질 테죠.”
“도장이야 챙겨 왔다지만 여전히 확신이 안 서는군요. 집결 수도는 내가 틀어막을 수 있어요, 하지만 타리움은 어떻죠? 아리엘 의원이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나요?”
“모자란 것이 있다면 제가 지원할 겁니다.”
“이제는 수도나 다름없는 둔 하늘에 하늘석을 가져다 둘 건가요?”
“필요하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해결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개인적인 일인가 보군요.”
“그렇게 되길 바라는 일입니다. 개인적인 수준에서 끝나면 정말 좋겠네요.”
하늘석의 주인이 걱정할 만큼의 일.
“동부에도 골치깨나 아픈 일이 있나 봅니다.”
가하란은 대답 대신 모호한 미소를 지었다.
“15년 전쟁. 전쟁 초기는 정말 끔찍했어요. 옛 제국은 내실을 다지기 위한 명분으로, 우리는 도시 병합을 위한 하나의 책략으로 전쟁을 이용했죠. 지긋지긋해요. 전투는 좋지만, 전쟁은 좋지 않아요. 전투는 이유 있는 자들의 명확한 죽음으로 끝나지만, 전쟁은 이유 없는 자들이 죽어 나가니까요.”
“전쟁을 막을 순 없겠지만, 최대한 늦추고 싶습니다.”
“옳은 말이에요. 사람이 통치하는 한 전쟁은 계속 일어날 테니, 최대한 늦추는 수밖에 없겠죠.”
기펠은 가하란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대가 중심에서 완충재 역할을 해줘요. 온갖 귀찮은 일을 떠넘길 테니 각오하고.”
“집결 수도의 뜻, 감사히 받겠습니다.”
“하늘석의 주인, 석주(石主)가 있는 한 전쟁은 없을 거라고 내 전해두죠. 그러니 동부의 골칫거리를 해결하세요. 필요한 게 있다면 지원해 드릴 테니.”
기펠은 웃으면서 의자에서 일어났다.
“일이 끝났으니 연장자로서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편히 말씀하세요, 일이 끝났으니.”
“그럼.”
기펠은 가하란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자네 싸움 좀 하나?”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