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2화
눈이 옵니다. 싸라기눈입니다. 쌓이지는 않고 지면에 들러붙어 빙판길을 만들 것 같습니다.
-이쪽은 아직 눈이 안 오는데, 거긴 많이 와?
-많이 오는 건 아니야.
해피의 말에 대답해 줍니다.
해피는 말이 많습니다. 말이 많아도 양질의 정보를 담고 있다면 괜찮겠지만, 해피의 말은 무의미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게 해피의 개성이라는 걸 알면서도 가끔은 생각합니다. 말을 줄이면 좀 더 좋을 것 같다고.
-조용히 해.
슬리피가 말합니다. 미니 비트 속에서 의식이 공유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공유가 싫다면 차단하면 될 일입니다. 하지만 슬리피는 항상 귀를 열어둡니다. 잠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저 애가 잠들어 있는 시간은 길지 않습니다.
해피와 반대로 슬리피는 대화를 늘려야 합니다. 심층 의식은 공유되지 않기에, 우리는 말하지 않으면 알지 못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슬리피는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길 바랍니다. 귀찮은 친구입니다.
해피와 슬리피를 적당히 배합해서 둘로 나누면 가장 이상적인 형태가 되지 않을까, 종종 생각합니다.
한 번은 아버지에게 말한 적도 있습니다. 섞어서 나눠보는 게 어떻겠냐고.
아버지는 난처하게 웃었습니다.
물론 농담입니다. 하지만 농담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진심이 아주 약간 담겨 있었으니까요.
-닥. 이것 좀 봐줄래?
배쉬플은 미니 비트 안에서 자유롭습니다. 말도 곧잘 하고 의견을 개진하는 데 거침이 없습니다.
하지만 에고가 거병이란 몸에서 눈을 뜨는 순간, 배쉬플의 언어 능력은 고장이 나버립니다.
우린 말을 더듬는 기능이 없습니다. 기계니까요. 하지만 배쉬플은 인간과 말할 때 어눌해집니다.
이상한 일입니다. 없는 기능을 스스로 창조해 내 모자란 모습을 보여 주니까요.
그 역시 개성일까요?
-닥한테 그만 의지해. 그 정도는 너 혼자서도 할 수 있잖아? 아버지가 몇 번을 말해. 자립해야 한다고.
그럼피는 화난 척합니다. 하지만 알고 있습니다. 우리 중 가장 눈물이 많은 친구입니다.
머릿속에 주입된 소설을 굳이 활자화해 읽는 유일한 친구. 공유를 제한한 채 미니 비트에 남아 있으면 종종 그럼피가 우는 걸 구경할 수 있습니다.
물론 봤다고 말하면 안 됩니다. 섬세한 친구니까요.
스니지와 도피는 오늘도 아버지의 이론을 반박하기 위해 고생 중입니다. 반증에 미쳐 있는 친구들이라 아버지가 무슨 말만 하면 득달같이 달려듭니다.
그래서인지 아버지는 저 둘과 대화하는 걸 즐거워합니다. 반박당할 때면 끙끙 앓으면서도 이내 다른 논리를 찾아옵니다.
언제나 승리는 아버지의 것이었습니다. 창조주를 이기는 건 불가능한 걸까요?
“비질은 누가 시켜서 하는 거야?”
미니 비트에서 빠져나왔습니다.
뒤를 돌아보니 샬롯이 보입니다. 호기심이 많은 인간 여자. 아버지는 샬롯을 챙겨주라고 말했습니다만…….
“아무튼 쓸어버리면 되는 거지?”
샬롯의 손짓과 함께 길가에 얕게 쌓인 눈이 흩어집니다. 지면을 휩쓸며 공중으로 치솟는 눈발을 보고 생각합니다.
아버지, 제가 챙겨줄 수 없는 인간이에요. 저보다 할 줄 아는 게 많거든요.
-감사합니다.
일단 감사를 표했습니다. 온정에서 비롯된 행위임을 알고 있으니까요.
“아무리 봐도 신기하단 말이지. 가하란은 어떻게 널 만든 걸까?”
-제조 이론이 궁금하시다면 개요는 설명해 드릴 수 있어요. 샬롯 님은 섹터 C까지 접근할 수 있거든요.
“이론?”
정렬된 데이터를 순차적으로 음성화해 내보냈습니다. 베이스 아키텍처를 기반으로 한 레이어 중첩 기초론을…….
“그만! 무슨 소리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으니까 그만해. 너 좀 무서운 애구나?”
하나 배웠습니다. 샬롯이 귀찮게 굴면 이론을 말하면 됩니다. 아주 좋은 경험입니다.
“가하란하고 연결돼 있는 거 맞지?”
-그렇습니다.
“지금 오고 있는 거 맞아?”
-네.
“언제쯤 도착하는데?”
-확정해서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곧 도착할 겁니다.
“곧이라니.”
샬롯이 하늘을 바라봅니다.
“그나저나 하늘석이라. 아직도 안 믿겨. 아리엘 언니는 실물로 보기 전에는 절대 믿을 수 없다는 눈치고. 하긴 나도 봐야 와닿을 것 같으니까.”
-곧 보게 될 겁니다.
“너도 하늘석에 가본 거지?”
-예.
“뭐가 있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상부에는 고지대 생태 환경이 갖춰져 있고, 중심지라 할 수 있는 메인 격납고 밑에는 하늘석의 중추 시설이 들어 있어요.
“그 커다란 돌이 기계였다니.”
샬롯이 고개를 돌립니다. 무엇을 느낀 걸까요?
“저분들 또 저러네.”
-무슨 일이죠?
“가볼래?”
샬롯을 따라 숲길을 걷습니다. 샬롯이 걸음을 뗄 때마다 미세한 힘의 파장이 느껴집니다.
아버지는 정령의 힘이라고 했습니다. 마나와는 또 다른 에너지.
파형을 기록하며 움직입니다.
“저기.”
감지 센서가 전방에 변화를 잡아냈습니다. 에너지와 에너지의 격돌. 탈로스가 손상될 정도의 힘이라 경각심이 듭니다.
“저렇게 신이 날까.”
샬롯이 바라보고 있는 곳에 기펠과 타챠가 있습니다. 시각 장치의 정밀도를 올려야 둘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습니다.
육체란 대체 무엇일까요?
피와 살은 분명 구조적으로 연약합니다. 단단하지도, 결속력이 좋지도 않습니다.
평범한 인간은 절대 맨손으로 도검을 잡지 못합니다. 아니, 대부분의 인간이 그럴 겁니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저 둘은, 한 명은 인간이 아니라고 하지만 어쨌든 피육으로 이뤄진 몸에 강대한 에너지를 받아내고 있습니다.
신비롭습니다.
이게 신이 생명체에게 내린 기적일까요?
“작은 친구, 아까 찾았었는데.”
대련을 마친 기펠이 땀을 닦으며 다가왔습니다. 풀어헤친 상의 안쪽으로 응집된 근육이 보입니다.
-저를 찾으셨나요?
“같이 여행한 사이인데 내가 챙겨주지 못한 것 같아서. 자네는 요즘 어떤가?”
-저는 평소대로 잘 지내고 있습니다.
“평소대로?”
-예.
“밥은?”
-배터리는 상시 관리하고 있습니다.
“잘했네. 뭐니 뭐니 해도 밥이 중요하지.”
집결 수도에 도착했을 때 제일 먼저 만난 사람이 기펠이었습니다. 기펠은 독특한 사람입니다.
권력가이면서도 권위적이지 않습니다. 도시 사람들도 기펠을 좋아했습니다.
그렇다고 화내지 않는 유순한 성격은 아닙니다. 회의장에서 소리치는 모습은 꽤 무서웠습니다.
규율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사람인 것처럼 보이나, 누구보다 규칙을 준수합니다.
꼬마 아이가 휘두른 나뭇가지에 맞으면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구르지만, 정규군이 휘두른 창은 맨손으로 꺾어 버립니다.
또한 유일하게 저를 향해 ‘밥’이란 단어를 사용합니다. 처음에는 ‘밥 먹었나?’라는 문장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주변에 있는 다른 인간에게 한 말인 줄 알고 두리번거렸지만, 아무도 없었으니까요.
밥은 배터리였습니다.
기계는 밥을 먹지 않는다고 말해 드렸으나 기펠은 여전히 ‘밥’이라 합니다.
그리고, 그 단어가 왠지 정겹습니다.
“이곳 생활도 좋아. 뛰어난 전사와 마음껏 놀 수도 있고 말이야. 하지만 할 일은 해야겠지.”
기펠이 두꺼운 털모자를 썼습니다. 방금까지 상의를 벗고 대련하던 사람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으슬으슬 춥다고 합니다.
“옜다.”
기펠이 다가왔습니다. 목도리를 둘러 줬습니다. 목도리 끝을 잡아 살폈습니다. 재질은 무엇인지, 색은 어떻게 낸 것인지, 직조 방식은 무엇인지.
“따뜻한가?”
-전 추위를 느끼지 못합니다.
“보는 내가 추워서 그래. 자네도 챙겨 입고 다녀. 모자도 쓰고 장갑도 끼고. 사람이 몸을 차게 하면 못쓰네.”
-전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가? 내 눈에는 어지간한 사람보다 나아 보이는데.”
춥다며 정비소로 뛰어가는 기펠입니다. 저는 한동안 기펠을 바라봤습니다.
내부 온도는 적정 수준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발산하는 열량도 문제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평소와 다름없는 상태.
그럼에도 왠지 따뜻합니다.
-도착했어!
해피의 명랑한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하늘을 바라봅니다. 저 멀리 하늘석이 보입니다.
-어서 와.
아버지가 돌아왔습니다.
다시 바빠질 것입니다.
* * *
“살아생전 이런 걸 보게 될 줄이야.”
기펠이 땅에 내려앉은 하늘석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부를 살펴봐도 되겠나? 안 된다면 하늘석에 잠깐만 올라가 보겠네. 눈앞에 두고 오르지 못하면 내 평생 끙끙 앓다가 죽을 거 같아서 그러네.”
가하란은 작게 웃은 후 말했다.
“살펴보셔도 됩니다. 안내해 드리죠.”
켈트가 잠들어 있는 최심부를 제외한 모든 곳을 공개할 생각이었다.
연합 도시와의 원활한 관계를 위해서라도 정보 제공은 필수적이니까.
“좀 무섭네요.”
기펠 옆에 선 아리엘은 경직된 얼굴로 하늘석을 보고 있었다. 아니, 기펠을 제외한 모든 사람의 표정이 굳어 있었다.
인간은 위험에 민감하다. 어쩔 수 없는 생리였다. 저들 눈에는 하늘석이 온갖 위험을 뭉쳐놓은 질량 덩어리로 보일 것이다.
우호적인 사람들조차 이렇게 민감하게 반응하는데, 다른 이들은 어떨까?
앞으로 하늘석을 두고 수없이 갈등이 빚어질 것이다. 그걸 원만하게 해결해야 하는 게 자신의 몫이고.
“일단 올라가시죠.”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기펠이 움직였다. 바람을 두른 노인이 단숨에 절벽을 차고 올라갔다.
“어르신도 참.”
필렌이 헛웃음 지으며 말했다.
“편하게 올라갈 수 있는 방법은 없니?”
“승강기가 있어요. 급하게 만든 거라 좀 버벅대지만, 문제없을 거예요.”
필렌이 떨떠름하게 바라봤다.
“아니면 저랑 같이 가요.”
샬롯이 필렌 옆에 섰다. 필렌이 고개를 끄덕이자, 샬롯과 필렌의 몸이 공중으로 떴다.
“언니는?”
샬롯이 아리엘을 바라봤다.
“난 기계의 힘을 믿을게.”
“겁쟁이.”
남은 사람들은 승강기로 이동했다. 올라가던 도중 외부에 설치해 놓은 지지대가 중간에 삐걱거려 발판 전체가 덜컹거렸다.
“안전장치가 돼 있어서 추락할 일은 없어요.”
매섭게 쏘아보는 사람들에게 멋쩍은 미소를 보였다.
상부에 도착했다. 사람들이 감탄하며 주변 경관을 둘러보는 사이, 가하란은 필렌을 따로 불렀다.
“먼저 보셔야 할 게 있어요.”
“내가?”
밀레나에게 사람들 안내를 부탁한 후 먼저 격납고로 향했다. 뒤따라온 필렌이 격납고에 정렬된 모듈을 바라봤다.
“수리하느라 외관이 조금 바뀌긴 했지만…….”
말을 끝내기도 전에 필렌이 체임버 모듈 쪽으로 걸어갔다. 외장갑에 손을 올리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블루아이.”
동시에 체임버 덮개가 열렸다. 가하란은 안쪽을 가리켰다.
“필렌 님을 계속 기다리고 있었어요.”
필렌이 안으로 들어갔다. 체임버 덮개가 닫혔다. 안에서 어떤 대화를 나누고 있는지, 가하란은 들을 수 없었다.
몇 분이 지났을까.
필렌이 밖으로 나왔다.
“예물치고는 너무 큰 걸 받았네.”
“본래 주인이시니 예물이 될 수는 없죠.”
“아니. 한 번 잃어버렸던 애야. 이렇게 돌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고.”
웃으며 말하던 필렌이 눈을 얇게 떴다.
“근데 오토마타 쪽 설계가 꽤 바뀌었더라.”
“하하, 그게…….”
“밀레나에 맞춰서 변경한 거겠지?”
“비앙크와 접목해 보려고요. 뒤늦게 허락을 받는 거라 모양새가 이상해지긴 했지만, 필렌 님. 블루아이를 누나한테 주시겠어요?”
“아주 멋대로네. 근데 그거 아니? 블루아이는 엔첸세가 관리하는 거병이야. 그리고 너도.”
필렌이 다가와 어깨에 손을 올렸다.
“엔첸세고.”
“감사합니다. 허락해 주셔서.”
“기왕 만진 김에 제대로 다듬어봐. 들여다봤으니 알겠지만, 이 녀석 정말 물건이거든.”
“네. 확실히 다르더라고요.”
“대신 기동 테스트는 나한테 맡겨. 그것까지 양보할 수는 없으니까.”
“오히려 제가 부탁드리려고 했어요.”
필렌을 보며 웃을 때였다.
“여기가 메인 격납고입니다.”
기펠을 비롯한 사람들과 함께 밀레나가 나타났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