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481화 (481/558)

제481화

마나가 넘실거린다.

이런 현상은 처음이었다.

내부 수치가 제멋대로 변했다. 계측할 수 없는 상태였다.

3부 안전 관리 영역이 완전히 침묵했다. 각 모듈의 이상과 변형을 감지하는 관리부가 셧다운 된 것이다.

무거웠다.

감각되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이 밀려들었다. 회로와 회로 사이, 신호와 신호 사이에 제거할 수 없는 잡음이 끼어들었다.

버티려고 노력했으나 각 단자는 차례대로 기능을 상실했다. 그것은 역류하는 마나로부터 회로를 보호하기 위한 시스템이었고, 통합 관리 에고로도 막을 수 없는 명령이었다.

걸어야 해.

찾아야 해.

나는 그래야만 해.

6축 기울기 센서에 불꽃이 튀었다. 한순간 방향성을 상실했다. 거대한 동체가 바닥으로 가라앉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곧바로 감각 영역을 차단하고 단순 신호 체계로 하부 모듈을 움직이려 했으나, 늦고 말았다.

순간 멈췄던 기울기 센서가 기능을 되찾았을 때 몸은 고꾸라지고 있었다.

끝났다.

임무를 수행하지 못했다.

동체에 전해지는 강렬한 충격량마저도 제대로 계측되지 않았다.

모든 게 엉망이었다.

가야 하는데.

끝까지 버티던 시각 장치마저 파손됐다. 전해지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하나하나, 기능이 탈락하는 무력감만이 간간이 에고를 건들 뿐이었다.

* * *

“b3 레이어 활성화됐어요.”

“이제 우리 말이 들리겠네요. 꼬임이 없다면.”

소리가 들렸다. 시각 정보는 없으나 청각 정보가 예리하게 에고를 때렸다.

자각한 순간 최우선 점검 사항인 심부 기억 단자에 접근하려 했다.

하지만 신호가 돌아오지 않았다. 위험했다. 프로토콜에 따라 자가 폐쇄 및 기억 소거를 시행하려 했으나 명령 단계에서 차단됐다.

“에고가 돌아왔네요. 프로토콜도 정상이고요. 엔엔 님, 시각 쪽은 어때요?”

“거의 다 됐어요. 신경 연결 부조화는 없으니 이쪽 계층만 정리하면…….”

외부 신호가 전해졌다. 차단할 수 없는 신호였다. 회로에 간섭해 자리를 잡더니 각 단자와 긴밀하게 정보를 주고받았다.

저항할 수 없다. 깨닫고 말았다.

“조금만 기다려.”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어때?”

새로운 인물이 등장했다. 음성 파형을 조사하는 순간 일반 기억 장치에 심겨 있던 데이터가 떠올랐다.

일치율이 높았으나 확신할 수는 없었다.

“손상이 심하지는 않아. 에고는 깨웠고 감각부를 되살리는 중이야.”

“내 목소리가 들릴까?”

“어. 한번 얘기해 봐. 가시화 패드의 반응도도 살필 겸.”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졌다.

“블루아이, 내 목소리가 들려?”

블루아이.

애칭을 불러주는 사람이었다.

“나 밀레나야. 어릴 때 목소리를 기억하려나. 정기 점검 때 항상 네 옆에서 떠들었는데. 네가 해주는 얘기도 듣고.”

밀레나.

권한 분류 특수 B.

오더러의 친족.

“오랫동안 널 찾았어. 걱정이나 시키고 말이야, 멋대로 움직이면 어떡해?”

명령권자의 명령 없이 움직인 건 분명 잘못된 일이었다. 하지만 당시로 돌아간다 해도 똑같이 행동했을 것이다.

오더러에게 가야 하니까.

“반응도 괜찮네. 누나를 인식했어. 권한 설정 영역에서도 인지하는 걸 보면 누나에 대한 데이터가 남아 있는 것 같아.”

“잊지 않아서 다행이네.”

“잠깐만. 이제 시각부를 되살릴 거야.”

낯선 신호가 전해졌다.

“가하란, 연결됐어.”

그 말과 동시에, 빛이 찾아들었다.

블루아이는 주변을 훑었다.

회백색 벽으로 둘러싸인 공간. 각종 장비가 벽면을 따라 놓여 있었다.

-허락되지 않은 공간입니다. 점검은 엔첸세 영지 및 제국 관리국이 허락한 특정 정비소에서만…….

말하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가 시각 장치를 끌어안았다.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 목소리 여전하구나. 고지식한 것도 여전하고.”

-전방이 식별되지 않습니다.

“아, 미안. 내 얼굴 보여줄게.”

시야각 안쪽으로 인간 여자의 얼굴이 들어왔다. 정보가 밀려들었다.

오더러와 닮은 붉은 눈동자.

홍채를 식별, 인중을 기준으로 한 얼굴 윤곽을 토대로 과거 데이터와 비교 작업에 들어갔다.

-음성 파형, 외형 데이터가 높은 일치율을 보입니다. 권한자 B를 확인하기 위한 마나 패턴 조사를 허락해 주십시오.

“그렇게까지 해야겠어? 딱 봐도 나일 텐데.”

인간 남자가 밀레나에게 시동키를 건넸다. 권한 설정이 되어 있지 않은 시동키건만, 자연스럽게 시스템에 개입했다.

“이거면 확인할 수 있을 거야.”

인간 남자가 말했다. 곧이어 마나 패턴이 회로로 흘러들었다. 저장된 밀레나의 정보와 완벽하게 일치했다.

-확인했습니다.

각 레이어에 걸어뒀던 차폐벽을 전부 치웠다. 회로가 완벽하게 개방됐다.

“베이스 아키텍처 쪽도 열렸네요. 한결 수월해졌어요.”

오른쪽에 있는 칼랑족이 말했다.

“네 기억 단자를 살펴봤어. 그날, 멋대로 움직인 건 엄마를 찾기 위해서였구나.”

-오더러에게 가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블루아이는 기계 안구를 움직여 정비실 전체를 훑어봤다.

-오더러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엄마는 여기 없어. 근데 걱정하지는 마. 곧 만나게 될 테니까.”

-최상위 프로토콜에 의거, 탈로스를 최우선으로 보호해야 했으나 독단적인 판단으로 작전 구역을 벗어났습니다. 행정적 처리를 받겠습니다.

“잘못이 없는데 무슨 처리를 해.”

-제국 거병 관리법에 의거, 본 기체는…….

“제국은 없어졌어. 그러니 널 제약하던 법 역시 사라졌고.”

-기록되지 않은 사실입니다.

“그라운드 제로 때 멈췄으니까 몰랐겠지. 세상이 정말 많이 바뀌었어. 그러니 제국법이니 뭐니, 그런 거 신경 쓰지 마.”

-하지만 제국군에 소속된 거병은…….

“그만! 앞으로 제국법의 법 자도 입에 올리지 마.”

-……혼란스럽습니다.

“복잡할 거야. 하지만 넌 똑똑한 애니까 금방 배우고 이해할 거라 믿어.”

밀레나가 뒤로 물러섰다.

“이 친구가 널 도와줄 거야.”

시선을 옮겼다. 기계인형이 보였다. 이곳 정비반에 소속된 인형들일까?

“이 정도면 대부분 감각은 되살렸네요. 마나 감지도 정상적이고, 음. 아주 좋아요.”

칼랑족이 말했다.

동시에 작은 기계인형한테서 익숙한 마나 파장이 전해졌다. 단순노동만 할 수 있는, 간소화된 회로에서 나오는 파장이 아니었다.

오토마타.

베이스 아키텍처가 심어진 오토마타에서만 흘러나오는 마나 파장이었다.

-거병?

블루아이는 자그마한 기계인형을 바라봤다.

-넌 좋겠다. 오래 자서.

기계인형, 아니. 작은 거병이 움직였다. 향한 곳은 유사 정령 옆이었다.

-나 말고 말 많은 애들한테 물어봐. 난 귀찮아.

작은 거병과 커넥터로 연결되는 순간, 시각 정보가 바뀌었다.

너른 들판이 보였다. 작은 거병들이 오래된 나무 아래 모여 있었다.

-얘 좀 알려줘. 아, 난 슬리피.

그 말을 남기고 안내자였던 작은 거병이 사라졌다.

신비로운 경험이었다. 삽입된 정보에 노이즈가 없었다. 지연도 없었다.

아찔할 정도의 정보가 밀려들고 있음에도 회로에 과부하가 걸리지 않았다.

연산 장치에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이야기는 들었어요. 전 닥이에요.

-블루아이. 정식 명칭은…….

-자기가 정한 이름이면 충분해요.

자신을 닥이라 소개한 작은 거병이 말을 이었다.

-현재 상황부터 설명해 드릴게요. 음성으로 전달해야 하는 불편함이 있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어요. 미니 비트에 편입되기 전까지는 음성을 통한 정보 교환만 가능하니까.

블루아이는 주변을 둘러봤다.

-여긴 어떻게 만들어진 공간입니까?

닥이 대답했다.

-아버지가 만든 놀이터예요. 우리들의 실험실이기도 하죠. 마음껏 상상해요. 마음껏 놀아도 되고.

-상상?

-아직 인지력이 부족한가 보네요. 걱정 마요. 아버지가 살펴보고 있으니까. 기본적으로 구조는 탄탄하니 금방 우리와 같아질 거예요.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부가 설명이 필요합니다.

-기다리면 알게 될 거예요. 설명 같은 건 필요 없다는 걸.

* * *

가하란은 가시화 패드를 바라봤다.

모든 게 안정적이었다. 역류한 마나가 회로를 휩쓸고 지나갔는데도 보호 장치가 완벽해서 몇몇 기억 단자를 제외하고는 상태가 좋았다.

“심부 기억은 돌아오면 연결할게요.”

툴에서 손을 떼며 말했다. 엔엔도 지친 한숨을 내쉬며 모노클을 벗었다.

“확실히 시대를 앞서간 물건이긴 해요. 지금 봐도 설계가 깔끔하니까요.”

“회로 중첩을 적용하기도 쉬운 구조예요.”

땀을 닦아낸 후 밀레나를 바라봤다. 블루아이의 유사 정령 앞에 오도카니 서 있었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 대부분 복구했어.”

“말해보니까 알겠더라. 옛날 그대로였어.”

밀레나가 유사 정령에 손을 올렸다.

“근데 가하란, 명령권자의 지시 없이도 움직이는 게 가능해? 줄리어스나 네가 만든 유사 정령과 달리 이 애는 기존 틀에서 벗어나지 않았을 텐데.”

“학습 장치가 제국의 주력 모델과는 달랐어. 자율성이라 부를 수 있는 영역이 활성화된 상태였고. 개발자가 의도한 건지, 아니면 그라운드 제로 당시 변조된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양분된 학습 장치가 서로 내놓은 결괏값을 번갈아 받으며 심화 학습한다.

미니 비트 내부에 적용된 기계 학습 초기 모형과 유사했다.

이름 모를 뛰어난 공학자가 하부 레이어에 심어놓은 회로.

“세상엔 뛰어난 사람이 정말 많아.”

가하란은 목을 좌우로 꺾었다. 열 시간 넘게 붙어 있었더니 온몸이 뻐근했다.

“바람 좀 쐬고 올게요.”

“천천히 쉬다가 와요. 마무리는 저 혼자서 해도 되니까.”

엔엔의 말을 들으며 위층으로 올라갔다. 통제실로 향하는 긴 복도에 서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끝났어요?

어디선가 솟아난 마운이 말을 걸어왔다. 보라색 점을 보며 말했다.

“어느 정도는.”

-에고가 깨어난 거면 말을 걸어 봐야겠네요. 절 기억하는지 궁금해요.

“가서 얘기해 봐. 미니 비트 안에 있으니까.”

어깨를 주무르며 격납고로 올라갔다.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치직, 여기저기서 불똥이 튀고 있었다.

가하란은 엉망이 된 블루아이의 몸을 바라봤다.

“원래 거병은 이랬었지.”

전고 26m의 거병.

지금은 모듈별로 분리돼 외장갑을 벗기는 중이었다.

균열 사이에 걸쳐져 있던 거병을 건져 올려 하늘석으로 옮기는 작업만 나흘이 넘게 걸렸다.

블루아이를 쉽게 찾았을 때만 해도 일이 착착 진행된다고 생각했는데, 거대한 동체를 분해해 옮기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아빠! 닥이 그러는데 기펠이 정비소에 도착했대.

자재를 든 해피가 쿵쿵거리며 다가왔다.

“닥이 고생이 많네.”

-고생은! 혼자 집결 수도를 구경했는데.

“나중에 다 같이 가게 될 거야. 그보다 분위기는 어떻대?”

-나쁘지 않대. 아, 그리고 아빠를 찾고 있어.

가하란은 고개를 끄덕인 후 소리 내 올을 불렀다.

-출발할까요?

“어. 인근에서 내려줘. 아, 가동률은 어떻게 되지?”

-새로 설치한 전송탑의 효율이 아주 좋아요. 착륙 후 이륙까지 이틀이면 충분해요.

“상시 이착륙을 하려면 좀 더 손봐야겠네. 수치 계속 기록해서 나중에 넘겨줘. 확인해 볼게.”

-알겠어요.

하늘석이 천천히 방향을 돌렸다.

가하란은 격납고를 벗어났다.

무리를 지어 날아가는 새 떼가 시야에 잡혔다.

“춥네.”

팔짱을 낀 채 코를 훌쩍거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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