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0화
관료의 미덕은 한가로움이다.
바쁜 관료는 옳지 못하다. 관료란 모름지기 한가로울 때 제 본분을 다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레치는 생각했다.
슬슬 은퇴할 때가 된 것 같다고.
“그래, 욕심이었지. 이 나이에 뭘 더 해보겠다고.”
커피를 마시며 생각했다. 자식들 얼굴 본 지도 오래됐다. 장사가 업이라며 가게를 차린 첫째, 아비 따라 관료가 되겠다며 타 도시로 간 둘째.
돌이켜 보면 정 없는 아버지였다.
지금이라도 은퇴해서 아내의 소일거리를 도와주는 게…….
“관리팀장님.”
레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한적함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상념을 날려 보내며 뒤를 돌아봤다.
“소식이 온 건가?”
“그게…….”
눈을 씰룩였다. 눈앞의 부하는 다른 건 몰라도 말 하나는 똑 부러지게 하는 녀석이었다. 가끔 눈치가 없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말을 내뱉는 녀석이 어물쩍거리다니.
부하가 재차 입을 열기 직전이었다.
“레치 군. 이게 대체 얼마 만인가?”
불혹이 넘은 나이.
군이란 호칭과 오래전에 작별했다. 누군가에게 군이라 불리는 것이 치욕스러울 정도가 됐으나, 부하 옆에 있는 남자가 부른다면 ‘군’이든 ‘새끼’든 상관이 없었다.
“기펠 님.”
레치는 자리에서 일어나 곧바로 군례를 올렸다. 군복을 벗은 지 한참 됐으나 기펠 앞에서는 자연스럽게 군례가 나왔다.
“됐네, 됐어. 넥타이 찬 사람이 무슨.”
껄껄 웃으며 좁은 방으로 들어오는 기펠이었다. 레치는 다른 곳으로 모시겠다고 했으나 기펠은 상관없다면서 침대에 걸터앉았다.
“여전히 이런 방을 좋아하는군. 쓸데없는 걸 다 치워내고 필요한 것만 넣어둔 방.”
“하하.”
머쓱한 웃음만 흘러나왔다.
난제를 수없이 해결해 온 두뇌도 파업을 선언해 버렸다. 그만큼 당혹스러웠다. 전혀 예측하지 못한 인물이 나타났으니까.
상원 의원회 최고 원로.
연합 도시를 떠받치는 기둥 중 하나.
기펠이 무릎을 툭툭 치면서 말했다.
“젊었을 땐 사흘 밤낮을 지새우며 말을 타도 괜찮았는데, 이제는 트럭에 타 가만히 있는 것도 힘들어.”
레치는 재빨리 물을 내왔다. 동시에 부하에게 따로 지시해 간단히 먹을 걸 준비시켰다.
“고맙네.”
기펠이 단숨에 물을 마셨다.
레치는 알고 있었다.
늙었다, 힘들다, 예전 같지 않다. 기펠은 이 말을 30년 전에도 입에 달고 살았다. 그런 말을 하면서 15년 전쟁을 치른 인물이었다.
새하얗게 센 머리카락과 수염에서 조금만 눈을 돌리면, 단련된 육체가 보인다.
일흔이 넘은 노인이라고 한다면 몇이나 믿을 수 있을까.
정치계의 원로이면서도 시간 날 때면 정규군 훈련에 동참해 젊은 군인들의 혼을 빼놓는 사람이었다.
지금도 지쳤다고 하지만, 저 손에 검을 들려주면 치안부대 스무 명 정도는 웃으면서 상대할 것이다.
“자네도 그 기분을 맛봤겠지?”
“어떤 기분을 말씀하시는지…….”
“머리꼭지에 하늘석이 떠 있는 기분.”
아.
레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두 달 전쯤이었지. 애들하고 즐겁게 땅굴을 파고 있는데 주변이 소란스러워진 거야. 뭔가 하고 하늘을 올려다봤더니, 글쎄 하늘석이 보이지 않겠나?”
기펠이 재차 껄껄 웃었다.
“그렇게 고도를 낮춘 하늘석은 처음이었네. 문헌에서나 보던 현상을 내 살아생전 보게 될 줄이야. 신이 나서 저게 뭔가, 물끄러미 쳐다봤네. 근데 더 놀라운 일이 벌어졌지.”
놀라운 일이 무엇일지, 레치는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가하란이 미리 말해 줬으니까.
“저공비행하는 하늘석이 집결 수도 상공에서 정지해 버렸네. 다들 속도가 느려진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어. 완벽한 정지 상태. 자네가 그날 수도 상황을 직접 봤어야 하는데.”
껄껄껄, 기펠의 웃음이 더는 웃음으로 들리지 않았다. 소리가 채찍이 돼 온몸을 후려치는 것 같았다.
물론 알고는 있다.
기펠이란 사람은 말로 조롱하지 않는다는 걸. 지금 기펠은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것이다.
“난리도 아니었네. 비명이, 비명이. 초록집 앞에서 사람들이 모여 고함을 질렀지. 규명해서 해결하라, 그러라고 뽑아준 건데 뭐 하는 거냐.”
초록집.
상원 의원회가 열리는 집결 수도의 심장, 울타 신전의 별명이었다. 다른 의원들은 촌스럽다면서 절대 입에 담지 않는 이름이기도 했다.
“진땀들 뺐을 거야. 수백 미터에 달하는 돌덩이가 머리 위로 떨어지면 어떻게 될지, 동네 꼬맹이도 알고 있었으니까. 다행히 하늘석은 하루 동안 머물다가 동쪽으로 사라졌지.”
“최대한 빨리 보고를 올리려 했습니다만…….”
기펠이 손을 내저었다.
“어허, 자네를 탓하는 게 아니야. 그때 상황이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그저 자네한테 말해주고 싶었을 뿐이야. 얼마나 좋은가? 인생에 남을 이벤트를 경험하고.”
기펠처럼 생각하는 사람은 전 대륙에 기펠 한 명뿐이지 않을까.
예나 지금이나 ‘호쾌한 기인’이란 별명이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다음날 부랴부랴 각 부서에서 전체 회의가 열렸지. 물론 상원 의원회도 소집됐고. 근데 그 잘난 친구들도 뾰족한 수는 없었어. 당연하지, 하늘석이란 게 어디 인간의 머리로 해석할 수 있는 물건이던가?”
때마침 부하가 간식을 들고 왔다. 으깬 땅콩으로 버무린 비스킷.
기펠의 얼굴이 확 폈다.
“자네, 내 취향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던 건가?”
“모시던 분의 취향은 잊을 수 없죠.”
“이렇게 고마울 때가. 안 그래도 이쪽에 오면 이걸 꼭 먹고 싶었네. 같은 재료라도 역시 현지의 손맛이 중요하지.”
먹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기펠이 비스킷을 하나 내밀었다.
괜찮다고 거절했으나 기펠은 내민 손을 거두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받아서 입에 넣었다.
“어디까지 말했더라? 그래, 해석할 수 없는 물건. 시민들한테 상황 보고를 해야 하는데 막막한 거야. 둘러댈 수도 없지. 하늘석이 떠났으니까 괜찮을 겁니다, 이렇게 말했다가 또 돌아오면? 안 그래도 위성 도시 시장 선거가 코앞이라 민감하던 때인데 난리가 난거지. 그렇게 며칠을 끙끙 앓을 때, 자네가 보낸 서신이 도착했어.”
레치는 마른침을 삼켰다.
국가도 아닌 개인이 하늘석을 통제하고 있다. 20대 초반의 남자이며 하늘석뿐만 아니라 최근 문제가 된 마나 증발 기술도 가지고 있다.
장황한 보고서였으나 요약하면 이런 내용이었다. 상원 의원회가 보고서를 어떻게 해석했을지, 레치는 무척이나 걱정이 됐다.
“하늘석의 기행이 아니었다면 자네는 보고서가 도착한 날에 보직 해임이 됐겠지. 상원 의원회를 농락했다는 괘씸죄까지 적용해 재산을 몰수했을지도 몰라.”
“작성하면서 저도 걱정이 많았습니다. 그자의 말만 믿고 보냈다가 집결 수도에 아무 일도 없었다면…….”
“그자, 가하란.”
기펠이 웃음을 거두었다.
“내가 기억하는 자네는 허언할 사람이 아니었지. 승진욕은 있으나 헛짓거리해서 자리를 따낼 위인은 아니라고 생각했네. 그래서 내가 직접 왔지. 자네 얼굴도 보고, 그 가하란이란 위험인물도 만나봐야 하니까.”
“그렇다는 건…….”
“간만에 책임자로 왔네. 상원 의원회 대표로서 그 친구를 좀 봐야겠어. 시간이 좀 걸린 건 여러 친구를 설득하느라 그랬네. 아! 그리고 동부에서 온 반가운 손님도 봐야지.”
* * *
“그래그래! 안둔에서 정말 자네 부친과 지겹도록…….”
호탕한 웃음과 함께 낯선 목소리가 창문을 비집고 나왔다.
샬롯은 작게 하품하며 눈을 비볐다.
잘 자고 있었는데 바람들이 난리 치는 통에 일어났다. 왜 그런지 되물어도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입을 꾹 다문 채 이동하는 바람을 따라왔더니 정비소 휴게실 앞이었다.
“누가 온 건가.”
새벽이라 불러도 될 법한 이른 아침이었다.
창문을 통해 안쪽을 슬쩍 살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노인이 보였다. 맞은편에는 필렌과 아리엘이 있었다.
필렌의 지인인 걸까?
살짝 열린 창 안쪽으로 바람을 집어넣었다. 세 사람이 나누는 대화를 듣고 싶었다.
벽에 기댄 채 눈을 감고 길게 하품할 때였다.
머리가 찌릿했다. 속삭이던 바람이 자취를 감췄다. 이변을 감지하고 눈을 떴을 때였다.
“어여쁜 아가씨께서 궁금한 게 많나 봐요?”
노인이 옆에 있었다. 창문을 통해 고개만 슬쩍 내민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 심장이 콱 조이는 느낌을 받았다. 반사적으로 바람을 불러 모았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하지만 바람은 갈피를 못 잡고 노인과 샬롯 사이를 방황하다가 이내 사라졌다.
“많이 놀란 모양인데, 진정해요.”
노인이 부드럽게 말했다.
그러자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던 바람들이 다시 부름에 응했다.
샬롯은 바람의 목소리를 들었다. 어떤 애는 두렵다고 했고, 어떤 애는 상냥한 사람이라고 했다.
반응이 극명하게 갈렸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심심하면 안으로 들어와요. 늙은이 혼자 떠들기 심심하니.”
여유롭게 웃으며 창문을 닫는 노인이었다. 샬롯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휴게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모른 척 걸어가 아리엘 옆에 앉았다.
“엿듣는 버릇은 고치는 게 좋아.”
“듣지도 못했어.”
샬롯은 슬쩍 노인을 바라봤다. 눈이 마주친 노인은 기분 좋게 웃어 보였다.
“저희 애가 무례를 범했습니다.”
아리엘이 말했다.
“어릴 땐 다 그러고 노는 겁니다. 나도 어릴 땐 그랬어요. 통합 의회에 몰래 숨어들어서 뭐 하나 엿보고, 작전사 1군사한테 괜히 시비도 걸어보고. 어릴 땐 다 그러면서 크는 겁니다.”
스물이 넘었는데 어리다는 표현이 맞나,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노인이 샬롯을 바라봤다.
“아가씨는 이름이…….”
“샬롯이에요.”
“샬롯. 난 기펠이라고 해요.”
기펠?
어디서 들어본 이름이었다.
기억 상자를 뒤적거리다가 금세 떠오른 이름 하나에 몸이 경직됐다.
“……죄송합니다. 제가 실수했습니다.”
상대는 연합 도시의 상징이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이었다. 외교 문제로 번질 수 있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아찔해졌다.
이런 거물이었으면 미리 좀 말해주지. 하긴, 말할 새도 없었구나.
이상한 일이었다.
정계 거인이 움직였는데 호위 인력이 단 한 명도 없다니. 마실 나온 동네 어른인 줄 알았다.
“주눅 들지 마요. 해코지하러 온 사람 아니니까. 그나저나 그 바람들. 아가씨를 아주 좋아하던데, 어릴 때부터 같이 커왔나요?”
“아, 네. 주변 환경에 따라 새롭게 찾아오는 애들도 있지만, 이 애들은 어릴 때부터 함께해 왔어요.”
샬롯이 주변에 맴도는 바람을 바라볼 때였다. 기펠이 손을 살며시 흔들었다.
그러자 근처에 있던 바람들이 전부 기펠에게 몰려갔다. 곁에 남아 있는 건 알갱이라 불러야 할 정도의 자그마한 바람뿐이었다.
“아가씨를 많이 아끼네요. 이런 소질은 오랜만에 봐요.”
손에 쥐고 있던 보물을 눈뜬 채 빼앗긴 기분이었다. 기분이 살짝 상했으나 미소를 지었다. 상대는 정계 거물이니까.
“안 찾아갈 건가요?”
“그래도 되나요?”
“그럼요. 어서 가져가요.”
상대가 먼저 한 도발이었다. 이런 걸로 외교 문제 삼지는 않겠지.
그래도 모르니 일단 아리엘을 바라봤다. 아리엘은 슬쩍 필렌을 응시했다.
“여전하시네요. 애들 놀리시는 거.”
“이런 맛에 사는 거 아니겠나.”
껄껄 웃는 기펠이었다.
때마침 필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이 떨어진 것이다.
샬롯은 있는 힘껏 바람을 당겼다. 곁에 머물던 알갱이들이 주변 바람을 몽땅 소집했다.
맹렬한 바람이 불어야 했다
가구들이 휘청거릴 정도의 바람이.
하지만 기분 좋은 산들바람만 몸을 훑고 지나갔다. 바람들은 여전히 기펠 곁에 머물렀다.
“어떻게 하신 거죠?”
몸이 땀으로 뒤덮였다. 짧은 시간에 정신력을 쏟아부은 대가였다.
“언젠가 위협이 될지도 모르는 아가씨한테 방법을 전해줄 수는 없어요. 미안해요.”
기펠이 손가락을 튕겼다. 묶여 있던 바람들이 풀려나 주변을 맴돌았다.
충격적이었다.
마치 산카를 눈앞에 둔 기분이었다. 물론 현신한 산카와는 비교할 수 없지만.
“근데 누가 그러더군요. 가끔은 끌려다니는 게 도움이 된다고.”
기펠이 말했다. 무슨 의미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일단 새겨들었다.
“동부에는 빛나는 원석들이 많군. 가하란이란 친구도 분명 이 아가씨만큼이나 윤이 나는 원석이겠지?”
기펠이 필렌을 보며 말했다.
“원석이라 부르기 민망하죠. 그 애는.”
“그렇다는 건…….”
“이미 완성돼 있으니까요.”
“허, 그렇긴 하군. 원석이란 비유가 잘못됐어. 운 좋게 손에 굴러 들어온 게 아닌 스스로 거머쥔 거니 원석은 아니지. 자네 말이 맞네.”
기펠이 창문을 바라보며 말했다.
“근데 그 친구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건가?”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