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479화 (479/558)

제479화

-거리 유지. 안전 확보. 발사 준비. 3, 2, 1.

아르드헨은 눈을 살짝 찌푸리며 거병의 포신을 바라봤다. 길게 뻗은 묵빛 쇳덩어리 끝에 연보랏빛이 모여들더니, 이내 지면과 수평을 그리며 뻗어나갔다.

“대응하는 건 불가능하겠어.”

정말 눈 깜짝할 새였다. 눈꺼풀이 닿았다 떨어지는 그 찰나에 응축된 마나는 일직선상에 놓인 목표물을 관통한 후 사라졌다.

뒤늦게 열풍이 불어왔다. 수행원들이 호들갑을 떨며 의원들 앞을 가로막았다.

“저 양반들 참.”

후끈한 공기를 손바람으로 밀어내며 오라클 소속 거병으로 다가가려 할 때였다.

“위험합니다.”

통제관이 사로에 접근하면 안 된다며 앞을 막았다. 아르드헨은 멈춰 선 후 물었다.

“개량된 무기로도 연사는 힘든가 봅니다.”

“연사를 목표로 개발 중입니다만…….”

“아직은 먼 얘기란 소리군요.”

거병이 움직였다. 달아오른 포신을 물이 가득 담긴 수조에 넣었다. 치익 소리와 함께 수증기가 피어오르더니 물이 끓기 시작했다.

“내열성을 확보해도 식히는 건 별개의 문제인가.”

사로 쪽에서 접근해도 괜찮다는 사인을 보내왔다. 통제관과 함께 거병으로 다가섰다.

거병 후면 허리 쪽에 연결된 커넥터에서 매캐한 냄새가 올라왔다. 자세히 살피니 커넥터를 감싼 외피가 녹아내리고 있었다.

가시화된 마나를 응집해 특정 경로로 사출한다. 불가능에 가까워 보이던 기술을 유단 학회장이 현실로 만들었다.

개량을 거듭한 끝에 사정거리는 900m에 다다랐고 교체형 카트리지를 통해 메인 배터리에 부담도 덜어냈다.

이전에는 포신을 담당한 거병은 사출 후 작전에서 이탈해야 했으나, 이제는 별도의 정비 없이 기동전을 수행할 수 있게 됐다.

여러모로 개선된 것이다.

정비반이 달려와 커넥터를 떼어내는 사이 체임버 덮개가 열렸다. 안에 탄 기사는 바깥으로 몸을 내밀어 의원들에게 경례한 후 다시 체임버 안쪽으로 들어갔다.

“극소 부위 타격이라 아직 대규모 전쟁에서는 사용하기 어렵겠군요.”

아르드헨은 고개를 왼쪽으로 돌렸다. 한나벨 의원이 정비 중인 거병을 보며 말하고 있었다.

“상용화되면 너도나도 ‘벨틴’을 사용할 텐데, 그땐 요격전이 전쟁의 핵심이 되겠죠.”

오라클 전용 포격 장비.

벨틴.

검은색으로 도배된 포신부터 지원 트레일러까지, 포격에 필요한 모든 장비를 묶어 벨틴이라 불렀다.

“상용화라. 아르드헨 의원님께서는 무서운 말씀을 하시는군요.”

“기술 유출은 막을 수 없을 겁니다. 관련자들을 다 죽일 수도 없고, 노획당해 유실되는 부품도 있을 테니까요.”

“그런 일이 벌어지기 전에 연합 도시를 쳐야겠군요.”

“한나벨 의원님께선 전쟁이 좋으신가 봅니다.”

“마냥 좋기야 하겠습니까. 죽어 나가는 사람이 많을 텐데. 하지만 물이 고이면 썩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타리움도 어느새 고인 물이 됐군요.”

한나벨이 조용히 웃었다.

“그나저나 의원님.”

아르드헨은 걸음을 떼며 말했다. 한나벨도 뒷짐을 지며 따라왔다.

“탄드라 의원 말입니다만.”

“아, 정말로 안타까운 죽음이었죠.”

“왜 방치하신 겁니까?”

걸음을 멈췄다. 다른 의원들과 어느 정도 거리를 뒀으니 대화 소리가 들리지 않을 것이다.

“방치요?”

한나벨이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로 대꾸했다.

“저도 알고 의원님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귀찮은 탐색전은 그만두고 본론으로 넘어가죠. 학회장이 뭘 약속했습니까? 무엇을 약속했기에 한나벨, 르용, 질리나, 코폰. 네 의원께서 학회장의 손을 들어준 겁니까?”

“말씀하신 대로 의미 없는 탐색전은 안 하겠습니다. 명단까지 확보하신 걸 보면 둘러대도 소용없을 것 같고.”

쿵, 테스트용 거병이 사로로 들어서고 있었다. 한나벨은 외장갑을 덜어낸 거병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어려운 부탁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아주 잠깐 눈과 귀를 닫아달라는 거였으니까요.”

“그 대가로 뭘 받으신 겁니까?”

“그건 말씀드리기 곤란하군요. 저야 의원님과 친분을 이어 나가고 싶으나, 이번 건만은 어쩔 수가 없어요.”

“돈, 토지, 권력. 제가 아무리 계산서를 내보려 해도 견적이 나오질 않습니다. 네 의원께서 왜 하필이면 학회장의 손을 들어준 것일까.”

한나벨이 소리 내 웃었다.

“의원님께서도 느끼셨을 겁니다. 탄드라 의원이 변했다는 걸.”

“사람은 변하기 마련이죠.”

“변화 자체가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탄드라 의원은 좀 어수룩하게 바뀌었어요.”

“어수룩하다?”

아르드헨은 턱을 쓰다듬었다.

얼마 전에 만난 탄드라는 아주 솔직한 인간이 되어 있었다. 욕구에 충실한 인간. 삶의 기조가 변했다고 한들 그간 이뤄온 토대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탄드라는 유능한 인간이었다. 학자의 두뇌로 정치를 이해하며 노련하게 입지를 굳혀왔다.

타리움 핵심 의원이란 자리는 요행으로 얻을 수 없으니까.

“화재 사건 후 탄드라 의원과 몇 번 정도 만나셨습니까?”

한나벨이 물었다.

“두 번 만났죠. 병실에서, 그리고 최근에는 집무실에서.”

“저희는 열 번 정도 회동을 했습니다.”

“호오, 전혀 몰랐습니다.”

어깨를 으쓱거리면서 말하자, 한나벨이 눈웃음 지었다.

“다섯 차례 이상 저희가 만났다는 것 정도는 파악하셨을 테죠. 하지만 정확한 횟수와 회동 내용은 얻지 못했을 겁니다. 의원님의 그림자들은 정말 유능하지만, 숫자에는 한계가 있으니까요. 저희가 의원님의 감시 대상 밖에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이래서 제가 정계를 못 떠납니다. 뛰어난 분들이 계속 나타나시니 지루할 틈이 없어요.”

“하하하, 어쨌든 열 번의 회동은 서로를 가늠하기 위한 자리였습니다. 학회장이 넌지시 말했거든요. 당신들 눈으로 직접 확인한 후에 선택하라고.”

“탄드라 의원, 꽤 괜찮은 사람 아니었습니까? 사업 파트너로도 손색이 없고.”

“맞습니다. 좋은 사람이었죠. 하지만 계속 보다 보니 알게 되더군요. 정밀함 사이에 틈이 보였어요. 원래 탄드라 의원은 한 발짝 물러서는 사람이었죠. 자신의 모자란 부분을 정확히 알기에 욕심내지 않고 때를 기다리는 현명함이 있었어요.”

“그런 사람이었죠. 제가 최근에 만났을 때만 해도 그래 보였고요.”

“저희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사람이 솔직해졌을 뿐 능력에는 변화가 없다고. 근데 말씀드렸다시피 만나는 횟수가 늘어나다 보니 흠집이 보이더군요. 물러서는 게 아니라 앞으로 한 걸음 더 내밀었어요. 자신의 뛰어남을 주체 못 하는, 좀 모자란 인간처럼요.”

유단과 탄드라.

양쪽에 발을 걸치고 있던 의원들이 깔끔하게 탄드라를 포기해 버렸다.

유단의 매력적인 제안과 탄드라의 무능함이 이뤄낸 결과.

의아한 일이었다.

5년이 넘는 세월 동안 탄드라 의원을 지켜봤다. 그녀는 쉽게 무너질 인간이 아니었다.

이토록 허술하게 끝났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저희도 놀랐습니다. 익히 알던 탄드라 의원이 맞긴 한데, 뭔가 좀 이질적이었으니까요. 의원님께서도 여러 차례 탄드라 의원과 얘기를 나눴다면 아마 알아차렸을 겁니다.”

“그것참 기묘하네요. 화재라는 게 한 사람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정도로 큰일은 아닐 텐데.”

“뭐, 저희가 알지 못하는 내적인 문제가 있었겠죠. 같이 가기엔 좀 위태로워 보여서 조금 거리를 뒀습니다. 그사이, 학회장님이 아주 말끔하게 정리하셨고요. 그분은 참 보기와 달리 일 처리가 빨라요.”

파아앙!

열풍과 함께 소리가 덮쳐왔다.

마나 밀도를 높였는지 두 번째 발사는 거병의 몸체가 크게 움직였다.

“탄드라 의원이 추진하던 레테 사업. 그게 예정보다 빠르게 진행됐더군요.”

“시민들이 편리하게 마전기를 사용할 수 있다니 늦출 이유가 없겠죠.”

“그 역시 학회장이 바란 것입니까?”

한나벨은 대답 대신 턱짓을 했다.

“그건 저분한테 들으시죠.”

정복을 갖춰 입은 유단이 수행원과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 한나벨이 다음에 뵙겠다며 자리를 비켰다.

“오늘은 운수가 좋네요. 그토록 뵙고 싶었던 분이 제 발로 찾아오시고.”

탄드라 사망 후 두 달이 지났다. 사건의 중심인 유단을 만나보려 했으나 약속조차 잡을 수 없었다.

“처리해야 할 일이 워낙 많아서요.”

“탄드라 의원이 담당하던 일이 전부 학회 쪽으로 넘어갔더군요.”

“그분이 이전에는 학회 소속이었으니까요. 저희가 처리하는 게 도의적으로 맞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도의적, 그만큼 변질된 단어도 없죠.”

아르드헨은 유단의 눈을 바라봤다.

“의원들께 무엇을 약속했나요?”

“그분들이 원하는 걸 드리기로 했습니다.”

“그게 뭔지 무척이나 궁금하군요. 저도 받을 수 있을까요?”

“죄송합니다만 의원님께는 드릴 수 없습니다.”

“수량이 한정돼 있나 보군요. 그거참 아쉽습니다.”

아르드헨은 팔짱을 낀 후 먼 하늘을 바라봤다.

“저번에 제가 한 충고, 잊지 않으셨겠죠?”

“잘 기억해 두고 있습니다. 말씀하신 선이란 게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어쨌든 그 선을 넘지 않으려고 조심 또 조심 중이니 염려 마시길.”

“전 학회장님의 뜻이 저 하늘에 닿길 기원하고 있습니다. 학회에서 내놓는 기술들이 대중에 퍼질수록 살기 좋은 땅이 오고, 시대가 오니까요. 전 말입니다…… 망가진 걸 통치하고 싶지 않아요. 강성한 대국의 주인이 되고 싶습니다.”

“전에도 그렇게 말씀하셨죠.”

“그러니 학회장님, 부디 열심히 해주세요. 저 대신 많이 노력해 주세요. 하지만 망치면 안 됩니다. 제가 가져야 할 것들에 흠집이 생기면 몹시 화가 날 테니까요.”

해더 트럭 한 대가 눈앞을 지나갔다. 긴 트레일러에는 분배소 설치에 필요한 핵심 부품들이 실려 있었다.

“레테에 필요한 물건들이군요.”

“마전기 수급이 원활해질 겁니다. 또한 도시 간 마전기 전송 역시 가능해지겠죠. 마나 정제에 어려움을 겪는 지역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다시금 유단 학회장님의 이름이 시민들 입에 오르내리겠군요. 정말이지 부럽습니다.”

아르드헨은 멀어져 가는 헤더 트럭을 응시했다.

“저도 예전에는 재미난 실험실을 몇 개 소유하고 있었죠. 그중에는 사람의 뇌, 그리고 심상 세계를 연구하는 곳도 있었고요. 세뇌나 인격 변화, 기억 추출 같은 걸 오랫동안 파고들었는데 딱히 재미를 못 봤습니다.”

“그러셨군요.”

“다른 의원분들이 말씀하시길, 탄드라 의원이 미묘한 변화를 보였다더군요. 제가 만났을 때는 조금 솔직해진 정도였는데, 그 후로 아주 많이 변한 듯합니다.”

“저도 의원분들을 통해 들었습니다.”

“혹시 탄드라 의원의 머리를 건드리셨나요?”

웃으면서 질문했다. 유단 역시 웃으면서 대답했다.

“아니요. 저한테 그런 기술은 없습니다.”

“그거 아쉽군요. 그러고 보면 학회장님 주변 분들은 고생을 많이 하네요. 예전의 덴스 교수부터 프레나 양과 탄드라 의원까지. 아! 그러고 보니 디온 사령관이 임종 직전까지 만났던 게 학회장님이셨죠?”

“그분이 절 아끼셨거든요.”

“덴스 교수님도 당신을 아꼈겠고요.”

“하하, 그랬을 겁니다.”

유단이 아르드헨을 바라봤다.

“전 앞으로도 아르드헨 의원님과 가까운 사이로 지내고 싶습니다. 절 아끼시는 마음이 느껴지거든요.”

“부담스럽군요. 하지만 좋습니다. 전 학회장님을 믿으니까요. 더 큰 일을 해낼 거라는 믿음이 저한테 있어요.”

가볍게 악수를 나눴다.

“혹시나 해서 드리는 말씀인데, 절 처리하려면 공을 들여야 할 겁니다. 저 깐깐한 친구를 뚫어야 하니까요.”

아르드헨이 조금 떨어져 있는 테인을 가리키며 말했다.

“처리라니, 무서운 말씀을 하시네요. 전 의원님이 오랫동안 절 지켜봐 주셨으면 합니다.”

“그래요?”

“예. 전 앞으로도 의원님 눈에 거슬리는 짓은 안 할 겁니다. 그러니 의원님도 절 지켜봐 주세요. 때가 되면 좋은 선물을 남겨 드리겠습니다.”

유단이 인사한 후 통제실 쪽으로 걸어갔다.

떨어져 있던 테인이 다가왔다.

“테인.”

“예.”

“보통 선물은 드린다는 표현을 쓰지?”

“예, 그렇죠.”

“남겨드린다. 이건 뭔 말일까?”

아르드헨은 짧게 혀를 찼다.

“정무관들 불러들여. 공익사업이라는 레테에 뭔 짓을 해놨는지, 좀 들여다봐야겠어.”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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