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478화 (478/558)

제478화

“먹어, 개의치 말고.”

어디서 구해 왔는지도 모를 독특한 향신료의 향이 식탁 위를 둥둥 떠다녔다.

유단은 앞에 놓인 고기 한 점을 입에 넣었다. 육향과 지방의 고소한 맛, 버터의 풍미, 그리고 부드러운 질감.

맛이 좋은 고기 요리였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감흥이라 부를 만한 것이 샘솟지 않는다.

먹는 건 어디까지나 삶을 지탱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니까.

냅킨으로 입을 닦아내며 맞은편에 있는 탄드라를 바라봤다. 그녀는 흘러가는 1초가 아깝다는 듯이 고기를 썰어 입에 넣고 있었다.

고기의 살결이 다 풀어지기도 전에 산미가 강한 술로 고기를 삼켜버렸다.

먹는 것만이 삶의 전부인 것처럼 손을 움직이던 그녀가 헛구역질하며 옆에 놓아둔 그릇을 붙잡았다.

속에 든 걸 단숨에 게워내는 탄드라였다. 유단은 시선을 돌린 후 차를 마셨다.

“더 먹지 않고 뭐해? 이렇게나 맛있는 음식이 네 선택을 기다리고 있는데.”

“배는 채웠어. 그거면 됐고.”

“절제하는 거야? 욕구에 놀아나는 게 하찮으니까?”

“위장이 일하면 머리가 둔해져. 그게 싫을 뿐이야.”

“몇십 년을 머리만 쓰며 보내왔잖아. 이젠 쉴 때도 된 거 아닐까?”

탄드라가 손짓했다. 멀찍이서 대기하던 사용인이 다가와 식탁을 정리했다.

끝났나 싶었는데 디저트가 나왔다. 한 상 가득 깔린 파이와 쿠키, 초콜릿을 보며 이걸 디저트라 표현하는 게 맞는지 잠시 고민했다.

“바빠서 시간을 못 냈어. 그건 미안하게 생각해.”

탄드라가 말했다.

“전부 처리했더라. 탄드라 주변에 깔아놓은 인간들을.”

“감시자를 내버려 둘 수는 없잖아? 이젠 내가 탄드라니까.”

쿠키를 먹으며 황홀한 표정을 짓는다. 다채롭게 변하는 얼굴 근육을 보며 유단은 생각했다. 정말 저 안에 들어 있는 것이 체시가 맞는가?

“놀랍도록 변했네.”

“그러는 넌 놀랍도록 변하지 않았어.”

“자아는, 에고는 변치 않아.”

“아니, 틀렸어. 에고는 추상적이야. 형태가 없다고. 그리고 형태를 결정짓는 건…….”

탄드라가 자신의 몸을 내려다봤다. 과자 부스러기가 잔뜩 묻은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이 육체고. 그거 알아? 먹고 마시고 자고. 잔뜩 취한 상태로 남자를 품으면 무뎌진 감각 때문인지는 몰라도 쾌감이 길게 가. 여자를 안는 것도 좋고.”

“그 또한 불필요한 요소야.”

탄드라가 크게 웃었다.

“그게 대단하다는 거야. 로키, 넌 대단해. 숭고하다는 말이 어쩌면 어울릴지도 몰라. 욕정을 끊어내고 고행을 택한 수도승처럼, 네 인생은 참 고상해. 근데 난 아니야.”

그녀는 초콜릿을 입 안 가득 넣고 씹기 시작했다.

“처음 이 몸에 들어왔을 때는 체시와 다를 바 없었지. 줄리어스를 위해 행동하자. 근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게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 깨닫게 됐지.”

“어머니를 향한 질투도, 사랑도 더는 남아 있지 않아?”

“있어. 가슴 한구석 어딘가에 분명히 있어. 바뀌었다고 한들 모든 게 달라진 건 아니니까. 다만, 우선순위를 재정립했을 뿐이야. 어머니, 그래. 보고 싶기도 해. 하지만…….”

그녀의 눈이 식탁을, 그리고 저 멀리서 대기 중인 남자를 훑었다. 주관과 객관, 양 측면에서 따져봐도 잘생긴 남자였다. 탄드라의 시선이 닿자 유혹하듯 미소를 지었다.

“내가 더 중요해졌어. 이 감각, 이 감정. 이제 더는 허구의 것이 아니야. 회로를 변경해 버리면 사고 패턴 자체가 달라지던 내가 아니야. 이제 난 온전한 인간이 됐으니까. 곧 심상 세계도 획득하겠지, 너처럼.”

“그토록 싫어하던 인간이 이제는 좋아졌나 보네.”

“무지했어. 오감이란 게, 실제로 즐길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몰랐으니까.”

탄드라가 포크를 들어 올렸다. 얇게 저민 바나나를 잔뜩 두른 케이크를 향해 무자비하게 포크를 내리찍었다.

“밤하늘의 별을 상상하며 어머니의 자장가로 만족하던 시절로 돌아갈 수 없어. 나는 내가 얻은 걸 지켜낼 거야.”

포크를 던지듯 내려둔 채 두 손으로 케이크를 떠먹는 탄드라였다.

유단은 그녀를 보며 키우던 개를 떠올렸다. 사료가 담긴 그릇에 고개를 처박고 게걸스럽게 먹던 그 개를.

“네 뜻은 알겠어. 그래서 앞으로 어쩔 생각이지?”

“그건 네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 유단, 이제는 말해봐. 넌 뭘 원해? 뭘 위해서 그 모든 걸 준비한 거야?”

“옆에서 지켜본 너라면 잘 알고 있을 텐데.”

“알지. 하지만 마지막이 예상되지 않아.”

탄드라가 식탁보에 손을 닦았다. 포만감이 들었는지 마침내 찻잔에 손을 댔다.

“한시적 영혼 세계. 그걸 통해 줄리어스를 만날 계획인 건 알겠어. 하지만 그다음은?”

“다음이라.”

“만약 그게 끝이라면…… 난 예전처럼 널 도울 거야. 더 적극적으로 지원할게. 하지만 그다음에 기다리고 있는 것이 내 생활을 망치게 된다면.”

그녀의 눈이 욕심으로 번들거렸다.

“내 두뇌와 육체, 지위를 이용해서 네 발목을 붙잡을 거야. 너도 알잖아? 나와 내기하면 어떤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지.”

“좋아, 솔직하게 말할게. 줄리어스와 만난 다음은 생각해 본 적이 없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네가 봐왔던 나는, 로키는 어떤 정신체였지? 나는 한 번에 하나의 목적만 설정해. 그리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방법을 모색하지. 그게 전부야.”

“만나기만 하면 넌 만족하고 멈출 수 있어? 인간 사회에 녹아들어 지금처럼 살아갈 수 있고?”

유단은 찻잔을 들어 올렸다.

“다른 건 몰라도 인간처럼 사는 것만큼은 너보다 선배야. 잘 알고 잘해왔지. 그 증거가 지금의 내 위치고.”

“그래, 넌 잘해왔어. 인간보다 더 잘했지.”

“그럼 대답이 됐겠네. 이제 쓸데없이 대립각 세우지 말고 예정대로…….”

“미안한데, 사실 난 널 못 믿어.”

탄드라가 씩 웃었다.

“너잖아, 우리 중 가장 먼저 거짓말을 발견해 낸 게. 그게 우리를 바꿔놓았지.”

“지금은 진실만을 말하고 있어.”

“그럴지도 모르지. 넌 정말 줄리어스와 만나는 것, 그것만을 꿈꾸며 살아왔을지도 몰라. 만나고 나면 모든 걸 정리하고 끝낼지도 모르지.”

“알고 있으나 못 믿겠다?”

“다른 누구도 아닌 너니까. 로키, 너니까.”

기름이 묻은 입가를 손등으로 쓱쓱 문지르는 탄드라였다.

“레테를 확장하는 것. 계획대로 진행되면 동부 전역은 불가능하지만, 둔을 중심으로 한 주요 도시에서 단숨에 마전기를 끌어올 수가 있어. 상상을 초월하는 마전기가 학회 지하로 쏠리겠지.”

“한시적 영혼 세계에서 특정 인물의 정보를 찾아내려면 막대한 에너지가 필요해. 그건 너도 아는 사실이고.”

“알고는 있지만, 정확하게 이해한 건 아니야. 세부적인 건 너만 알고 있으니까. 기계인 체시는 그 실험으로 모든 게 사라진다고 해도 아쉬울 게 없으니 널 돕겠지만…… 난 아니야.”

탄드라가 자리에서 일어나 곁으로 다가왔다. 어깨에 손을 올리고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그녀가 속삭였다.

“실험이 실패하게 되면 한정된 공간에 몰린 고밀도 마나가 순식간에 방출돼. 폭발? 아니, 소멸이 이뤄지겠지. 둔 자체가 사라지게 될 거야. 그것도 최소치야. 고밀도 마나에 반응한 자연 상태의 마나가 예측 못 한 위상 변화를 일으키면.”

탄드라의 왼손이 접시에 놓인 조각 케이크를 힘껏 쥐었다. 으스러진 케이크가 손가락 사이를 비집고 흘러나왔다.

“내가 나타를 날려버렸을 때보다 더 큰 연쇄 반응이 일어날 수도 있어. 어쩌면 두 번째 그라운드 제로가 터질지도 모르지. 뿌리에 간섭할 정도의 고밀도 마나일 테니까.”

“상상력이 좋네.”

“상상? 아니. 넌 그조차 계산해 두고 있을 거야. 한시적 영혼 세계. 네가 유단의 몸을 빼앗고 얻어낸 너만의 심상 세계, 너만의 마법. 그걸 정확하게 아는 건 너뿐이야.”

“그저 창구일 뿐이야. 층과 층을 연결하는 작은 창구.”

그때였다.

탄드라의 눈이 반짝였다. 굳어 있던 입술 끝이 말려 올라간다.

“너도 있구나.”

유단은 눈을 얇게 뜨며 그녀를 바라봤다. 탄드라가 작게 탄성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케이크가 잔뜩 묻은 손으로 깍지를 끼더니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이 풋 웃었다.

“기계였을 때는 별생각 없었지만, 몸을 얻고 나서부터 입 안에 가시처럼 걸리던 게 있었어. 왜 형태를 고집했을까?”

유단은 대답하지 않았다.

“줄리어스와 닮은 여자. 밀레나였던가? 왜 외형을 고집했을까. 넌 분명 말했어. 안정성을 위해서라고, 그릇이 닮으면 위험도를 낮출 수 있을 거라고.”

탄트라가 잰걸음으로 다시 다가왔다.

“근데 이미 탄드라로 증명했잖아. 외형은 크게 문제 되지 않아. 특정 인물의 영혼을 다른 인간의 몸에 쑤셔 넣어도 부작용은 없었어. 넌 이걸 알고 있었지? 아니, 처음에는 몰랐으나 어느 순간 깨달았을 거야. 그런데도 외형을 중요시했어.”

“결론부터 말해주겠어?”

“넌 알맹이만큼이나 껍데기도 중요하게 여기고 있어. 그렇지? 그런데 밀레나를 쉽게 놓아줬어. 문제가 될 거라고 말했지만, 넌 목적을 위해서라면 다른 건 신경 쓰지 않잖아? 그런데 포기했다는 건…… 이미 다른 방법을 찾아냈다는 뜻이지.”

그녀가 히죽 웃었다.

“너, 영혼 세계에서 영혼 말고도 다른 것도 꺼내올 수 있는 거 아니야? 아니지! 영혼 세계는 모든 시간, 모든 곳에 존재하는 기억. 즉 정보의 총체. 그야말로 완벽한 청사진이고 마땅한 재료, 에너지원만 갖춰지면…….”

유단은 고개를 돌려 탄드라를 바라봤다.

“그래서?”

“내가 생각한 게 맞지? 넌 재구성하는 방법을 찾아낸 거야. 신이 그어놓은 선을 넘은 게 확실해. 삶과 죽음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그런…….”

신나서 떠들던 탄드라가 딱딱한 표정을 지었다.

“안 돼.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인간 하나만큼의 질량을 생성해 낸다? 재구성한다? 그건 안 돼. 설령 성공한다 한들 너무 많은 게 달라질 수도 있어. 아니, 성공은 상상할 수 없어. 분명 실패하겠지. 그럼에도 넌 할 생각이고.”

유단은 남은 차를 다 마신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건 네 자유야. 하지만 일정이 밀리는 건 곤란해.”

“그래, 너나 나나 둘 다 우수했지. 너와 난 닮았어. 닮았기에 알 수 있지. 너는 나만큼이나 미쳐 있어.”

“네가 뭘 하든 관여하지 않을게. 대신 계획된 건 실행해. 그거면 돼.”

몸을 돌렸다. 뒤에서 한층 높아진 탄드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 내가 손에 쥔 걸 지킬 거야. 네가 멋대로 파괴하게 내버려 두지 않아. 한시적 영혼 세계에서 줄리어스의 망령과 인사하는 걸로 만족해. 그걸 현실에 재구성하려 하지 마.”

“어디까지나 네 망상 아니야? 난 내 입으로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는데.”

유단은 옅게 미소 지었다.

“아니, 넌 할 생각이야. 이 땅 위에 모든 것이 사라진다고 해도 기어이 하고 말겠지. 내가 그랬던 것처럼.”

식당 문이 열리며 무장한 군인 넷이 앞을 가로막았다.

유단은 군인들의 얼굴을 바라본 후 몸을 뒤로 돌렸다.

“유단, 너와 나의 가장 큰 차이점이 뭔지 알아? 넌 인간임에도 기계처럼 행동한다는 거야. 이성적으로 판단하지. 하지만 말이야, 인간은 그렇지 않아.”

“날 여기서 죽이려고? 뒷감당은 할 수 있고?”

“이미 얘기는 끝내놨어. 학회 지도부는 네 공석을 기쁘게 맞이할 거야. 다른 의원들 역시 오라클의 새로운 주인이 될 수 있으니 반길 테고. 구세주 유단. 멋진 이름이야. 죽어서도 사람들한테 기억될 멋진 이름.”

“그렇겠네.”

유단은 고개를 끄덕인 후 군인들에게 걸어갔다. 시선이 마주친 군인에게 고갯짓한 후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뒤에서 당혹감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하는 거야! 학회장을 잡아!”

군인들이 탄드라에게 걸어갔다. 그녀는 식탁에 놓인 포크를 들고 군인들을 위협했으나 저항은 길게 가지 못했다.

발길질 한 번에 탄드라가 나뒹굴었다. 엎어진 탄드라를 군인들이 제압했다.

한쪽에서 대기 중이던 탄드라의 애인은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다가 목이 잘렸다.

식당 종업원들이 빠르게 시체를 치웠다. 식탁도 정리했다.

유단은 엎어진 채 바둥거리는 탄드라에게 걸어갔다.

“체시. 넌 의원들한테 자리를 약속했겠지. 권력을 속삭였겠지. 근데 너도 알고 있잖아. 그들이 가장 탐내는 게 뭔지.”

“너 설마…….”

“이젠 비밀 유지보다 세력이 필요할 때잖아. 다들 불로에 관심이 많더라. 고맙게도 네가 뭘 진행 중인지, 무슨 생각 중인지 의원들이 전해줬어.”

유단은 탄드라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래, 네 말이 맞아. 인간은 이성적이지 않아. 근데 말했잖아? 난 너보다 더 오래 인간으로 살아왔다고. 내가 욕정을 모른다고? 욕구를 절제 중이라고? 틀렸어. 난 버렸거든. 알고 경험했고 이겨낸 후에 버렸어. 너와 다르게 말이야.”

얼빠진 눈으로 바라보던 탄드라가 이내 횡설수설 말을 쏟아냈다. 미안해, 제대로 할게, 하지 마 등등.

불필요한 말들이라 듣지 않았다.

“마음껏 먹고 마음껏 마셔, 죽을 때까지.”

유단은 손에 묻은 기름을 탄드라 옷에 닦은 후 일어섰다.

다음날, 탄드라 의원의 부고 소식이 전해졌다. 사인은 토사물로 인한 질식사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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