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7화
“좀 걸을까?”
가하란은 동쪽으로 난 길을 가리키며 말했다. 밀레나는 되묻지 않고 따라와 주었다.
몇 분간 말없이 걸었다.
몸은 데우던 술의 열기도, 시끌시끌하던 사람들의 목소리도 점차 사라져 갔다.
“다들 잘 지내는 것 같아 마음이 놓이더라.”
슬쩍 말문을 열었다. 밀레나가 돌멩이를 툭 차며 말을 받았다.
“테리하고 제니. 내가 장담하는데 둘 다 널 보자마자 펑펑 울 거야.”
“테리 형은 그럴 것 같은데, 제니는 아마 참을 거야. 눈물이 많은 애지만 사람들 앞에서는 잘 안 울거든.”
“듣고 보니 그렇네.”
손안에 감춰둔 반지를 계속 매만졌다. 미루는 성격이 아니라 곧바로 행동에 옮긴 게 후회됐다.
상자라도 준비할걸.
반지 하나만 툭 내밀려고 하니까 여간 머쓱한 게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멋들어진 말도 준비하지 못했다.
세레나데라고 했었지, 가하란은 샬롯이 했던 말을 되새김질했다. 멋없게 오래된 반지를 주고 청혼하는 게 맞긴 한가?
“뭘 그리 골똘히 생각해. 중요한 얘기야?”
밀레나가 걸음을 멈췄다.
“이제 말해봐. 듣는 사람도 없어. 하늘석에 관한 거야? 아니면 비트? 그게 아니면 로키에 대해 따로 할 얘기가 있어?”
둘러댈 말은 많았다. 밀레나가 던져준 선택지를 덥석 물기만 해도 어색하지 않게 대화를 끝낼 수 있을 것이다.
하늘석에 관해 몇 마디 떠들다가 자리로 돌아간 후에 깔끔한 원목 상자를 하나 준비해서 그 안에다 반지를…….
가하란은 생각을 멈췄다.
“누나.”
“말해.”
“손 좀 줘볼래?”
“손?”
의구심 없이 불쑥 손을 내미는 밀레나였다. 상처가 많은 손이었다. 전선을 수없이 오간 전사의 손.
그럼에도 가느다란 손가락이었다.
왼손으로 밀레나의 오른손을 붙잡고 살짝 잡아당겼다. 무심하게 바라보던 밀레나의 얼굴에 물음표 하나가 떠오르고 있었다.
“왜 그래?”
“예전부터 생각했어. 미적 감각이란 게 없다고. 그러고 보면 로키도 그랬지.”
오른손에 쥐고 있던 반지를 천천히 내보였다. 밀레나의 시선이 반지로 떨어졌다.
“…….”
“생각해 봤어. 모른 척 돌아가서 예쁘게 포장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근데, 지금 주고 싶었어.”
가하란은 밀레나의 붉은 눈동자를 직시했다.
“시대가 바뀌어서 청혼하는 방법이 바뀌었을지도 모르지만…….”
조심스럽게 그녀의 약지에 반지를 끼웠다.
“내 남은 시간을 누나와 같이 보내고 싶어. 허락해 줄래?”
밀레나가 말없이 오른손을 거두어갔다. 약지에 낀 반지를 한참이나 보다가 입을 열었다.
“청혼 때 반지를 선물하는 거 맞아. 하지만 오른손 약지가 아니라 왼손 중지.”
“…….”
“그리고 식을 올린 후에는 왼손 약지에 결혼반지를 껴. 오래된 귀족의 예법이지.”
“아버지한테 그것도 배웠어야 했는데.”
“코흘리개 애한테?”
풋 하고 웃던 밀레나가 반지를 뺐다.
“이 반지 말이야, 왠지 낯이 익는다고 했어.”
반지를 들어 올려 안쪽을 살핀다.
“‘사람의 본성이 선하다고 믿는다.’ 맞네, 그 반지.”
밀레나가 말했다.
“이 반지를 전에 본 적이 있어?”
“봤지. 첼 님, 네 증조부님께서 갖고 계시던 반지 맞지?”
“알고 있었구나. 어떻게?”
“스콜라 현장 감독관으로 오셨을 때 이걸 보여주면서 얘기해 주신 적이 있어. 이 반지에 담긴 이야기를.”
밀레나가 반지를 손바닥 위에 올려뒀다.
“넌 이 반지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지 알고 있어?”
“아니.”
“증조부님께서 이 반지를 주실 때 말씀해 주신 게 없어?”
“직접 받은 게 아니야. 수행원을 통해 넘겨받았고, 그때 이런 말을 들었어. 반지 안에 쓰인 글귀에 대해 생각해 봐라, 그게 증조부께서 내게 남기신 숙제였고.”
“총집사님께서 어린 너한테 정말 어려운 숙제를 내주신 거네.”
목소리에 씁쓸함이 담겨 있었다.
“반지에 담긴 이야기, 말해줄 수 있어? 이제는 해답을 듣고 싶어도 들을 수 없게 됐으니까.”
“그렇지. 돌아가신 분에게 숙제 검사를 받을 순 없으니까.”
밀레나가 반지를 내밀었다.
“본성이 선하다고 믿는다, 넌 이 말을 듣고 어떤 생각이 들어?”
“말 그대로 인간은 선하다, 이렇게 받아들였어.”
“넌 인간이 선하다고 생각해?”
“생각한다기보다 믿고 싶은 쪽이야.”
“정반대네.”
정반대?
가하란은 밀레나의 입을 바라봤다.
“첼 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어. ‘나도 사람이 선하길 바랍니다. 선하길 바라지만, 난 선함을 믿지 않습니다.’ 모순. 그게 첼 님을 대표하는 단어라고 하셨지.”
“선함을 믿지 않는다.”
세나티아 가의 총집사.
어릴 땐 그게 어떤 의미였는지 알 수 없었으나, 이제는 알고 있다.
옛 제국의 기둥들.
정치적으로 정점에 선 자들을 상대했던 게 증조부였다. 아귀다툼의 정중앙에서 평생을 살아온 분.
증조부 눈에는 인간이 어떻게 보였을까?
“이 반지의 원래 주인은 정신 나간 살인마였어.”
“……그게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야. 열두 명의 아이를 살해한 살인마. 그 범죄자가 끼고 있던 게 이 반지였대. 총집사님께서는 당시 해당 사건을 맡은 조사관이었고, 그 사건을 마무리 지으면서 이 반지를 보관하게 된 거지.”
가하란은 반지를 넘겨받았다.
수행원이 반지를 넘겨주며 했던 말은 두 가지였다. 반지의 의미를 되새김질해 보라는 게 첫 번째였고, 두 번째는…….
“하여간 대단하신 분이셔. 꼬맹이한테 이런 얘기가 담긴 반지를 넘겨주면서 고민해 보라고 하다니.”
“……누나.”
“어?”
“내가 이 반지를 받을 때 들은 말이 하나 더 있어.”
“뭔데?”
“이거, 고조부께서 갖고 계시던 반지라고 했어.”
밀레나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농담은 아닌 것 같네.”
“허황된 이야기를 하실 분은 아니시니까. 누나가 들은 얘기는 사실이겠지.”
가하란은 반지를 움켜쥐었다.
“그렇다는 건 증조부께선 당신의 아버지를 직접 재판대에 세웠다는 거야. 살해 현장도 목격한 거고.”
사람이 선하길 바라지만 믿지는 않는다.
“나한테 어떤 말을 해주고 싶었던 걸까?”
가족조차 믿을 수 없는 생물이니 끝까지 의심해라? 아니면 가족의 허물을 덮어줄 수 있을 정도로 권력을 키워라?
“사람은 선하지 않으니 절대 믿지 마라, 그렇게 말씀하고 싶으셨던 걸까.”
반지가 무겁게 느껴졌다. 내막을 알고 나니 이런 걸 선물하려 했다는 게 끔찍할 정도였다.
“미안해, 누나. 다음에…….”
반지를 주머니에 넣으려 할 때였다. 밀레나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손을 내밀었다.
“안 끼워줄 거야?”
“이걸?”
“말했잖아. 결혼반지는 왼손 약지라고.”
가하란은 눈앞에 드리워진 밀레나의 왼손을 바라봤다.
“청혼식도, 결혼식도 넘겨. 너무 오래 기다렸거든. 손가락이 허전해서 더는 못 미룰 것 같아.”
“그래도 이건…….”
“사람의 본성이 선하다고 믿는다. 너는 이 말을 듣고 믿고 싶다고 했지?”
“그랬지.”
“나 역시 마찬가지야. 그리고 내가 살면서 깨달은 건, 때론 눈에 보이는 명백한 사실보다 믿음이 중요하다는 거고. 왜인 줄 알아? 다들 네가 죽었다고 했어. 하지만 넌 돌아왔지. 넌 내 믿음을 지켜줬어.”
누나의 손이 반지를 움켜쥔 손을 살며시 감쌌다.
“총집사님께서 네게 무얼 전하고 싶었던 건지, 반지에 어떤 진의가 담겨 있는지, 그런 건 나한테 아무런 의미도 없어. 중요한 건, 네가 나한테 그 반지를 주기로 했다는 거야. 나는 그걸 꼭 받고 싶고.”
“더 좋은 걸로…….”
“지금 안 주면 앞으로도 안 받을 생각인데? 괜찮겠어?”
얼른, 이라고 말하며 왼손을 가볍게 튕기는 밀레나였다.
가하란은 손가락을 폈다. 감춰져 있던 반지가 보인다. 살인자가 끼고 있었다던 반지.
“가하란. 네 눈은 모든 걸 온전하게 볼 수 있다고 했지?”
가하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착안으로 그 반지를 봐봐.”
왼쪽 착안을 떠서 반지를 바라봤다. 있음과 없음, 점으로 이뤄진 반지가 보였다.
“뭐 안 좋은 기운 같은 게 보여?”
“아니.”
“그러면 그걸 끼면 병에 걸린다거나, 아니면 재수가 없어질 거라는 정보는?”
“그런 건 없어. 이건 그냥 은으로 된 반지일 뿐이야. 아주 오래된 반지.”
“그래, 그거야. 오래된 망자의 한 같은 건 없어. 그건 네가 나한테 주기로 한 평범한 반지야.”
착안을 닫았다.
눈에 들어오는 건 투박한 은반지였다.
여기에는 어떤 이야기도 없었다.
있는 건, 아끼는 사람을 위하는 마음뿐이었다.
“정 마음에 걸리면 나중에 온갖 보석을 박은 큼지막한 반지를 하나 더 주든가. 보란 듯이 자랑하고 다닐게.”
“누나한텐 그런 화려한 보석도 어울릴 거야.”
“……진지하게 받지 마. 부끄러우니까.”
“아니. 난 진심이야.”
왼손으로 밀레나의 왼손을 떠받치고, 반지를 살며시 밀어 넣었다.
“치수를 재서 준비한 것처럼 딱 맞네, 그렇지?”
“그러게.”
“세나티아와 엔첸세. 가문명은 어디 걸 받고 싶어?”
“세나티아 가에서 일한 거지, 그 가문의 혈족은 아니었으니까.”
“그러면 엔첸세로. 한물간 귀족의 이름이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나아. 가하란 엔첸세. 좋네.”
“근데 가문명은 당대 가주만이 내릴 수 있는 거잖아. 필렌 님의 허락이 없어도 돼?”
“내 마음이야. 우리 식구들은 오래전부터 내가 관리해 왔고.”
가하란은 밀레나의 왼손을 붙잡았다. 반지의 감촉이 손바닥 안에서 느껴졌다.
“나야말로 숙제 하나를 해결한 기분이야.”
밀레나가 말했다.
“그래?”
“신경 쓴 적은 없어. 우리 사이가 말로, 명시적인 무엇으로 꾸밀 필요는 없으니까. 있는 것 자체로도 감사하고 만족하니까. 근데…… 막상 반지를 보니까 기쁘더라. 욕심이란 게 있었어, 나한테도.”
“역시 좀 더 예쁜 걸로…….”
“다음에. 다음에 줘. 지금은 이게 좋아.”
손을 붙잡은 채 정비소로 돌아왔다.
사람들은 여전히 먹고 마시고 떠들고 있었다. 통괄 도시에서 연락이 올 때까지 기다리면 될 뿐이니 다들 마음 편하게 노는 것이다.
“줬어? 준 거야?”
인기척도 없이 다가온 샬롯이었다. 집요한 눈으로 밀레나의 손을 바라본다.
밀레나가 머쓱하게 웃으며 손을 내보였다.
“부럽네.”
“너도 혼담 꽤 들어왔잖아. 부러우면 하나 받지 그래?”
“어정쩡한 남자는 싫어.”
샬롯이 단호하게 말했다.
“무엇보다 산카의 눈이 뒤집힐걸. 그러니 적어도 산카의 허락을 받아낼 수 있는 정도의 사람이어야 해.”
가하란은 그 말을 들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말도 안 되게 어려운 일이라고.
“그럼 이제 한 쌍의 부부네? 뭔가 이상해. 밀레나 언니가 결혼이라니. 아! 식은? 청혼 반지는 전했으니까 이제 성대하게 식을 올려야지.”
밀레나가 고개를 저었다.
“식은 됐어. 하더라도 나중에.”
“왜?”
“처리해야 할 일이 많으니까. 찜찜한 상태로 축하받고 싶지 않아.”
“……하긴. 그 망할 놈이 남아 있지. 칼리고 아저씨와 연락이 되면 도움을 받을 수 있을 텐데.”
“최근에 소식 받은 적 있어?”
“아니. 구치 아저씨하고 같이 사라졌어. 바쁜가 봐.”
가하란은 모여 있는 사람들 쪽을 쭉 훑으며 말했다.
“사람의 손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우리가 해결해야 해. 그리고 우리한텐 그럴 능력이 있으니까 문제없어.”
“뭐, 넌 이유 있는 자신감이니까 인정할게.”
샬롯이 기지개를 켰다.
“나한테도 숨기고 있는 게 많다는 거 알아. 섭섭하지만 당장은 묻지 않을게. 대신, 나중에 날 좀 더 신용할 수 있게 되면 그때 알려줘.”
“지금도 믿고 있어.”
“말만이라도 고맙네. 아무튼 둘이 잘 놀아.”
샬롯이 손을 흔든 후 자리를 비켰다. 가하란은 밀레나와 함께 모닥불 근처에 앉았다.
“곧 시작되겠네.”
“연락이 오면 움직여야지.”
“푹 쉬어두자. 움직이기 시작하면 쉴 틈이 없을 테니까.”
어깨에 머리를 기대오는 밀레나였다. 가하란은 틱틱 소리를 내는 모닥불을 바라보며 작게 웃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