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476화 (476/558)

제476화

“언니, 무리했어. 도박수였고.”

밀레나는 아리엘의 잔에 술을 따르며 말했다.

“단신으로 국경을 넘은 애한테 들을 소리는 아니야. 게다가 넌 대마수를 뚫을 생각이었잖아?”

“어쨌든 성공했으니까.”

“그 말 그대로 돌려줄게.”

풋, 하고 웃은 후 잔을 부딪쳤다. 텁텁한 맛이 강한 싸구려 과일주가 왁자지껄한 분위기와 어우러져 제법 좋았다.

“다들 네 걱정 많이 했어. 국경을 넘겠다고 선언한 애가 근 1년간 소식이 없었으니까.”

“죽은 줄 알았어?”

“내가 장례식 치러줄까 하다가 돈 아까워서 미뤘지.”

아리엘이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타리움도 삐걱거리는구나. 예상보다 빠르네.”

“다들 여유가 생긴 거지. 여유가 생기니 다른 곳에도 눈이 돌아가는 거고.”

“아르드헨 시장이 뒤를 봐줬다는 건, 이제 언니와 손잡기로 마음먹은 건가?”

“그건 아닐걸. 오라클 부대가 움직였기에 아르드헨도 사람을 보낸 걸 거야. 기회라고 생각했겠지. 내 쪽 사람도 줄이고, 오라클도 흠집 내고.”

“예나 지금이나 위험한 사람이네.”

“위험하지. 사선(死線) 위를 즐겁게 걷는 인간이야. 일반적인 시선으로 해석하려면 답도 안 나와.”

“언니는 그런 남자하고 정치질을 해야 하네?”

“그러게 말이야. 좀 곱게 은퇴하면 안 되나? 황제까지 해먹었으면 이룰 거 다 이뤘잖아! 전대 인사들은 죄다 은퇴해 정계에서 물러났는데, 그 인간은 뭘 더 해먹겠다고 아득바득 남아 있는 건지.”

생각만 해도 속이 쓰리다며 술을 벌컥 마시는 아리엘이었다. 저렇게 마시면 진짜로 속 쓰릴 텐데.

“대통령이 꿈이라던데?”

“너도 들었어?”

“예전에. 엄마를 찾아온 적이 있었거든.”

“필렌 님을? 무슨 얘길 했는데.”

“자세한 건 듣지 못했지만 아마 힘을 보태달라 했겠지. 협회 쪽 얘기는 덤으로 하고.”

“그 인간답네.”

밀레나는 아몬드 하나를 입에 쏙 넣었다.

“그러는 언니는? 뭘 원하는데?”

“나? 나도 대통령.”

“뭐야. 아르드헨 욕할 게 못 되네. 똑같네, 똑같아.”

“그 인간은 해봤잖아. 난 안 해봤고.”

“그 속담 알지? 먹어본 놈이 먹을 줄 안다. 같은 자리를 노리는 거라면 정말 쉽지 않을 거야. 단장님도 그랬어. 그 인간 뒤통수를 한번 갈겨보는 게 소원이었는데, 틈이 안 보여서 못 했다고.”

“단장님, 오랜만에 들어보는 호칭이네. 요즘에는 계속 총무님이라 불렀으니까.”

말하던 도중 아리엘이 눈을 씰룩였다.

“말하고 보니까 웃기네. 그분이 총무 역할을 한 적이 있나? 돈 관련 문제는 죄다 벨루나 씨가 처리하던데. 구치 씨랑.”

“네 분이서 여행 다닐 때 돈 관리 했다고 하니까.”

지금이야 협회원끼리도 서로 모를 정도로 사람이 늘었다고 하지만, 초창기에는 단 네 명뿐이라고 들었다.

허스, 구치, 이네빌, 칼리고.

“여기서 보게 될 줄은 몰랐어.”

밀레나는 이네빌을 바라봤다. 엄마에게 붙들려 연거푸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근데 저 사람은 저렇게 내버려 두면 돼?”

축제처럼 달아오른 자리였지만, 구석에 우두커니 서 있는 비비넬은 마치 다른 공간에 있는 것처럼 차분해 보였다.

몇몇 용병이 술잔을 들고 다가갔지만 죄다 거절당했는지 쓸쓸히 발걸음을 돌렸다.

“과묵한 사람이야.”

“전선에서 몇 번 봤어. 계를 넘은 대가를 치른 사람…….”

깊은 상처를 입어도 태연하게 행동하던 여자. 몇 주는 요양해야 할 부상에도 사흘 정도면 다 나았다.

“실더 가문의 사람이었어.”

“아.”

밀레나는 뒤를 슬쩍 바라봤다. 모닥불 앞에 앉아 있는 가하란과 샬롯이 보였다.

“그래서 샬롯한테는 꽤 다정해. 샬롯도 아는 얼굴이라 그런지 잘 챙기고.”

밀레나는 술잔을 들고 일어섰다.

“잠깐만.”

울타리에 걸터앉아 있는 비비넬에게 다가섰다.

“구면이죠?”

비비넬이 고개를 들었다. 나른해 보이는 눈동자였다.

“밀레나. 마수 토벌전에서 몇 번 봤죠.”

“술은 안 마셔요?”

잔을 슬쩍 내밀었다.

“술이나 물이나 그게 그거라.”

“그래요?”

옆을 바라보며 앉아도 될까요, 라고 물었다. 비비넬이 턱을 살짝 당겼다.

“이네빌 씨와 같이 왔다고 들었어요.”

“네. 상사의 부탁을 받았거든요.”

“상사요?”

반사적으로 질문했다가 깊게 파고드는 것 같아 사과하려 할 때였다.

“테인 경이요. 저는 평소에 그분 밑에 있거든요.”

“아르드헨 시장 쪽이셨군요.”

“좀 달라요.”

밀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사의 명령이 아닌 부탁이라고 했다. 예속된 게 아니라 언제든 이동할 수 있다는 의미이리라.

그리고 따르는 건 테인이지, 아르드헨이 아니라는 것도.

“제 몸이 어떻게 된 건지, 궁금해서 온 건가요?”

“그것뿐만은 아니지만, 궁금하기도 해요.”

“칼리고 님에게 들었겠지만 어설프게 힘을 탐낸 대가죠. 자격 없는 자가 계를 넘은 대가.”

그때였다.

비비넬이 목을 움츠리더니 주변을 휙휙 돌아보기 시작했다. 나른했던 눈동자가 놀란 고양이의 눈처럼 변했다.

“죄송해요, 난 정말 몰랐어요, 제발 부탁이에요. 아니에요, 아니에요.”

와들와들 떨기 시작하는 비비넬이었다.

“이봐요, 이봐요!”

어깨를 잡고 이름을 불러봤으나 소용없었다. 그녀는 겁에 질린 애처럼 웅얼거리며 몸을 웅크릴 뿐이었다.

“잠깐 비켜줄래요?”

뒤를 돌아봤다. 이네빌이었다.

“비비넬. 끝내고 싶으면 언제든 말해요. 내가 도와줄 테니까.”

“전…… 전…….”

“속죄하든, 이겨내든, 아니면 다 포기하든 이제 선택권은 당신한테 있어요. 하지만 이런 식으로 도망치는 건 곤란해요. 그날, 당신들이 지도에서 지워버린 마을을 아직 난 기억하니까.”

떨림이 멎었다. 비비넬이 고개를 들었다. 안정을 되찾은 얼굴이었다.

“당신 말이 옳아요. 난 이대로 끝날 수 없어요. 나는 대가를 치러야 하니까. 내가 죽인 그 애를 위해서라도…….”

“다시 말하지만 편해지고 싶으면 언제든 얘기해요.”

비비넬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네빌이 몸을 틀며 고갯짓했다. 밀레나는 비비넬에게 인사한 후 이네빌 옆에 섰다.

“저 사람은 내버려 두는 게 좋아요. 매일같이 자기 자신과 싸우느라 정신이 없을 테니까.”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묻지 않았다. 씁쓸함만이 담겨 있을 상자는 열지 않는 게 최선이다.

“들은 것과는 느낌이 다르네요.”

이네빌의 눈길이 향한 곳에 가하란이 있었다.

“오늘 처음 만나는 건가요?”

“네. 여기저기서 이름은 많이 들었는데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에요. 저 친구 탐내는 분들이 많아요. 칼리고 씨도, 아르드헨 시장도.”

칭찬을 들은 건 가하란인데 괜히 어깨가 으쓱해진다.

“칼리고 씨야 견적이 안 나오면 바로 포기할 분이지만, 아르드헨 시장은 달라요. 원하는 건 그게 물건이든 사람이든 반드시 얻어야 직성이 풀리죠.”

“가하란도 쉬운 애는 아니에요. 아르드헨 님도 꽤 애를 먹을걸요?”

“하긴, 단독으로 틈새에서 생환한 사람이 보통 사람일 리 없죠.”

이네빌이 살짝 웃었다.

“나중에 또 봐요. 지금은 저기 끌려가야 해서.”

이네빌이 가리킨 곳을 바라봤다. 필렌이 얼른 오라며 손짓하고 있었다.

“저희 어머니가 많이 귀찮게 하죠?”

“존경하는 분이라 오히려 즐거워요. 아른고개의 푸른기사. 기사들 사이에서는 하늘 같은 이름이었죠.”

이네빌과 헤어진 후 아리엘이 있는 자리로 돌아갔다.

“이네빌이 뭐라고 해?”

“별말은 안 했어. 아르드헨 시장을 조심해라, 그 정도? 가하란을 탐내는 사람이 많다고 하네.”

“십 대 초반에 이미 학회에 이름을 알렸잖아. 둔에서 사용되는 의수의 표준 모델도 저 친구가 개발했고. 당시에도 뛰어난 공학자였는데 지금은…….”

아리엘이 주변을 돌아다니는 초소형 거병을 바라봤다.

“미지의 물건을 만들어낼 정도가 됐잖아. 저게 둔 학회를 통해 알려지게 되면 세상이 시끄러워질 거야. 그리고 공핍 영역을 이용한 디졸브 필드.”

언니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그건 이용 방식에 따라서 말도 안 되는 무기가 될 거야. 연합 도시가 얌전히 가하란을 놓아주는 것도 그 때문이고.”

“무기로 쓸 생각은 없다고 했어.”

아직 하늘석에 관한 건 말하지 않았다. 하늘석마저 가하란의 통제하에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언니는 어떤 표정을 짓게 될까?

“나야 믿지. 하지만 사람들은 믿을까? 자신의 유지 기반을 한순간에 망가트릴 기술을, 그 사람들은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래서 생각해 둔 게 있어. 우린 사절단하고 약간의 시차를 두고 둔으로 돌아갈 거야.”

“내가 가서 간을 봐라?”

“귀여운 동생의 부탁인데, 들어줄 수 있어?”

“네가 말 안 했으면 내가 제안하려고 했어. 예고도 없이 가하란이 나서는 건 위험해. 분위기를 살펴야지. 확실하게 적아를 가린 후 정치 구도를 잡아야 해.”

정치에 관한 건 아리엘에게 맡기면 될 것이다.

“그보다 유단과 로키라. 양친이 죽은 상황에서 친부나 다름없는 교수까지 죽였으니, 그 실체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을 만해.”

가하란과 얘기 끝에 아리엘한테는 로키에 관한 걸 털어놓았다. 타리움의 중심축인 유단을 견제, 감시하려면 아리엘의 도움이 절실했으니까.

무엇보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게 주요했다.

“저기, 언니. 프레나는 어떻게 지내는지 알고 있어?”

“모든 걸 알고 나니까 그 여자의 상태 역시 의심스럽네.”

“상태라니?”

“급발성 오블리비언. 네가 둔을 떠난 직후일걸? 그 여자도 교수와 마찬가지로 쓰러졌어.”

“…….”

밀레나는 한숨을 내쉬며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결국 그렇게 됐구나.”

“부친과 같은 병세라 특별한 조사도 없었지. 근데 네 말을 듣고 나니 유단이 손을 쓴 것 같기도 해.”

교수에 이어 프레나까지.

가하란은 ‘만약’을 생각해 조심스럽게 행동하자고 했다. 로키가 유단으로서 살아가고자 한다면, 인간 사회에 기여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면 내버려 두는 편이 나을 거라고.

무작정 뽑아내기에는 사회 전체에 드리워진 유단이란 존재가 너무 크니까.

하지만 프레나한테도 손을 쓴 걸 보면 유단한테는 ‘사랑’이란 감정이 없는 것 같았다.

자기애조차 없는 게 아닐까?

그 무엇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기계는 대체 무엇을 위해 지금껏 노력해 온 걸까?

“줄리어스.”

유단은 정말 줄리어스만 바라보고 움직이는 걸까? 그렇다면 최종 목적은 무엇일까?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건 불가능하다.

세상을 종말 끝자락에서 건져 올린 총수조차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기만 하니까.

“만약 죽은 사람을 되살릴 수 있다면…….”

“그게 무슨 소리야?”

아리엘이 되물었다.

“그냥. 아무리 생각해도 로키의 목적이 뭔지 떠오르지 않아서.”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건 불가능해.”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하지만…… 길리우드는 세상의 시계를 거꾸로 돌렸어. 그 역시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일이잖아?”

“그건 그렇지만…….”

비현실을 현실로 안착시킨 인물이 존재했다. 만약 로키도 그와 비슷한 경지에 도달했고, 방법마저 손에 쥐었다면?

“길리우드는 그라운드 제로를 불러왔어. 로키가 하는 짓이 그와 비슷하다면.”

밀레나는 정비소 근처에 있는 균열을 바라봤다.

세월이 더 지나도 균열은 닫히지 않을 것이다. 영원한 상처로 인류사와 함께할 터였다.

그라운드 제로 같은 일이 한 번 더 벌어지면 이 땅은 어떻게 되는 걸까?

상상만으로도 두려워졌다.

“걱정해서 해결되는 일은 없다고 하잖아. 그러니 부딪쳐 봐야지. 그 선봉장에 내가 설 테고.”

아리엘이 술잔을 들며 말했다.

“그렇게 말하니까 언니 어깨가 너무 무거워 보이네.”

“무겁지. 하지만 그만큼 뒤따르는 보수도 클 거야. 나도 타이틀 하나 달고 싶었거든. 세계를 구한 정치가. 크, 멋있잖아? 마스터 아낙스처럼 마스터 아리엘로 불리는 거지.”

술잔을 바라보던 아리엘이 턱짓했다.

“저기 네 남자 온다.”

뒤를 돌아봤다.

평소와 달리 쭈뼛거리며 걸어오고 있었다. 같이 있던 샬롯에게 눈짓을 줬다. 무슨 일이야?

그러자 샬롯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누나.”

다가온 가하란이 작게 불렀다.

괜스레 긴장되는 목소리였다.

“어, 어. 왜?”

“잠깐 할 얘기가 있는데.”

가하란이 말을 꺼내자마자 아리엘이 잔을 들고 일어섰다.

“끝나면 불러.”

눈을 찡긋거리며 자리를 비키는 아리엘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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