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475화 (475/558)

제475화

“못됐다. 그런 표현은 오랜만에 듣는군요. 보통 제 주변인들은 위대한 황제나 다시 없을 위정자라 칭해줬고, 저와 멀리 있는 자들은 죽어 마땅한 새끼, 태어나선 안 됐을 인종이라 부르던데.”

“시대가 바뀌었으니까요. 황제는 사라졌고 앞에 계신 분은 저와 같은 의원이시니.”

“하하하, 맞는 말이군요.”

아르드헨이 이가 보이도록 시원하게 웃었다. 탄드라는 나른한 숨을 내쉰 후 말했다.

“좋아요. 이번 건은 제 불찰이라 여기죠. 아르드헨이란 사람이 어떤 인물인지, 이번 기회를 통해 배웠다고 생각하면 비싼 것 같지도 않으니.”

커피 잔을 책상에 내려놓은 아르드헨이었다.

“듣기 좋은 말이군요. 어쨌든 의사를 확인했으니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좀 더 계셔도 되는데.”

“절 찾는 사람이 워낙 많아서요. 죽이려 드는 놈들도 워낙 많고.”

일어나 문으로 향하던 아르드헨이 집무실 한쪽을 장식한 관상목을 바라봤다.

“이런 취미도 있으셨네요.”

“예. 꽤 좋아해요.”

“계기가 뭔가요? 의원님이 바뀌게 된 계기.”

탄드라는 입가를 매만졌다.

“욕구에도 단계가 있다는 걸 아시나요?”

“알죠. 생리적인 것부터 자아실현까지. 뭐, 쓸데없이 나눠놨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전 말이죠, 자아실현에 목맸어요. 그 외의 것들은 중요치 않았죠.”

중요치 않은 게 아니라 느낄 수가 없었다. 사고만 존재하는 기계로서 다른 건 누릴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인간의 몸을 얻게 된 순간 모든 게 역전됐다.

“아르드헨 의원님, 그거 아시나요? 초콜릿은 무척이나 맛있다는 거. 잠은 너무나도 완벽하다는 걸.”

“잘 알죠.”

“원초적인 것에 목매는 게 과연 어리석은 짓일까요? 전 아니라고 생각해요. 오히려 가장 기본적인 욕구가 가장 중요하죠. 전 그것에 충실해지려고요.”

“의원님은…… 흥미롭군요.”

아르드헨의 눈매가 얇아졌다. 속을 읽어내는 눈빛이었다.

탄드라는 어깨를 으쓱한 후 고개를 살짝 숙였다.

“다음에 또 오세요. 언제든 환영할 테니.”

“알겠습니다. 아, 한 가지만 더.”

옛 황제가 턱을 쓰다듬었다.

“유단 학회장하고는 완전히 갈라선 겁니까?”

“어떻게 보이시나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고 생각했는데, 최근 행보를 보아하니 좀 달라진 것 같군요.”

“사람은 변해야죠. 좋은 방향으로.”

아르드헨이 했던 말을 되돌려 주었다.

“학회장이 뿔이 잔뜩 났겠군요. 위험하시겠어요.”

“괜찮아요. 우린 서로를 아주 잘 알거든요. 알기 싫은 부분까지 아주 잘.”

“혹시 저한테도 들려주실 수 있나요? 학회장님과 사이가 돈독해지고 싶은데.”

“저희 관계가 부동의 동맹으로 바뀐다면 그때 살짝 알려 드릴게요. 지금은, 우리가 너무 머네요.”

탄드라는 문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다음에 또 뵙죠.”

아르드헨이 고갯짓으로 인사한 후 문을 나섰다.

후, 하고 짧은 숨이 나왔다.

기계일 때는 ‘속’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모든 게 공개돼 있었으니까.

하지만 인간은 겉과 속을 지녔다. 인간이 됐음에도 아직 속이란 게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특히나 아르드헨 같은 경우는 겉마저 읽어내기 힘들었다.

껄끄러운 상대.

적으로 돌려서는 안 될 대상이었다.

탁자 귀퉁이를 가볍게 두드렸다. 옅은 마나 파장이 느껴졌다. 잠시 후 문이 열리며 정보원이 들어섰다.

“결과는?”

“가볍게 파보려 했으나 실패했습니다.”

“됐어요. 이제 아르드헨 의원은 건들지 마요.”

“알겠습니다.”

“학회장 쪽 끈은 모두 잘라냈나요?”

“지시하신 대로 처리했습니다.”

“수고했어요.”

탄드라는 의자에 몸을 기댔다.

이제 유단하고 완전히 틀어졌다.

“차지해야 해.”

탄드라는 거울 앞에서 자신의 얼굴을 매만졌다. 오십 대의 주름진 얼굴이 거슬렸다.

인간이 왜 그렇게 젊음에 목숨을 거는지, 인간의 옷을 입으니 알게 됐다.

되돌릴 수 없는 유일무이한 자원, 시간이 탐나기 때문이다.

늙고 추한 몸을 버리게 되면 더 많은 걸 만끽할 수 있으리라.

잔병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며, 이가 아릴 정도로 단 음식을 먹어도 다음 날 아무렇지 않겠지.

남자를 품어도 몸이 축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 빼앗아야 한다.

유단이 만들어 놓은 시설을.

“기계 자아를 복사하는 건 한계가 있어. 하지만 인간이 돼 심상 세계를 획득한 상태라면…… 많은 게 달라질 거야.”

영구한 삶을 누릴 것이다.

유단의 목적이 영생이었다면 충실한 개가 돼 협력했을 것이다.

하지만 유단, 로키는 현실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는 목적을 입에 담은 적이 없으나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줄리어스만 있으면 다른 건 다 필요 없어, 그의 눈은 매번 그렇게 말했다.

그게 얼마나 위험한 사상인지, 탄드라는 잘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미 내가 한 번 경험했으니까.”

어머니가 없는 세상은 따분했다. 따분했기에 나타란 나라를 지워버렸다.

유단 역시 비슷한 결과를 낼지도 모른다.

그렇게 내버려 둘 순 없었다.

이 몸, 이 감각.

영원히 누리고 싶었다.

그러니 철저하게 인간의 편에서 유단을 막아야 한다.

탄드라는 서랍 속에 넣어둔 초콜릿을 한가득 꺼내 입에 쑤셔 넣었다.

* * *

틱, 소리와 함께 불티가 날아올랐다. 빨갛게 타오르며 허공에서 춤추던 불티가 샬롯의 눈앞으로 갔다.

꺼져야 할 불티가 계속 살아남아 샬롯 주변을 빙글빙글 맴돌았다.

“바람한테 부탁하면 이런 것도 가능해.”

샬롯이 손을 들어 올렸다. 모닥불 끝자락에서 피어난 불꽃이 바람에 휘감겨 공중으로 치솟았다.

가하란은 허공을 수놓은 붉은빛을 가만히 바라봤다.

“잘 다루네.”

“수도 없이 연습했으니까. 산카가 없어도 나를 지킬 수 있도록.”

샬롯이 손가락을 까닥거리자 춤추던 불꽃이 모닥불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나도 꽤 험한 생활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네 얘기를 들으니까 아주 편한 나날이었네.”

“그 정도까지야.”

가하란은 고개를 돌렸다. 부어라, 마셔라를 외치며 한데 뒤엉킨 사람들이 보인다.

사절단과 르완 용병들, 그리고 주변 정비소 사람들까지.

“산카 님하고는 언제 헤어지게 된 거야?”

“3년 정도 된 거 같은데. 그 전부터 계속 말하긴 했어. 그라운드 제로가 너무 많은 걸 바꿔놨다고, 떨어질 날이 찾아올 거라고.”

“그랬구나.”

샬롯이 코를 한 번 훌쩍거렸다. 연기를 직방으로 맞은 듯했다. 뒤늦게 바람을 부려 연기를 날려 보냈다.

“걱정하지 말라고,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말했는데…… 여태 소식이 없는 걸 보면 더는 올 수 없게 된 거겠지.”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샬롯이었다.

“그때 있잖아.”

“그때?”

“안원에 날 데려갔을 때.”

“아.”

옛 기억이 돋아났다. 가하란은 옅게 웃으며 말했다.

“산카 님께 잔소리를 들었지.”

“그니까. 아무튼 그때의 기억을 되살려 안원에 가보려 했어. 산카가 못 오면 내가 가면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근데…… 안 됐어.”

샬롯의 주변으로 바람이 밀려들었다.

“문 앞까지는 간 것 같은데, 넘지는 못했어. 아무래도 얘들이 막는 거 같아.”

“바람이?”

“어. 아직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나 봐. 하긴, 너 아니었으면 예전에 죽었을지도 모르니까. 내가 기억을 잃은 채 안원을 헤맸었잖아? 억지로 비집고 들어가면 또 그렇게 될까 봐 바람들이 막는 거 같아.”

“안원.”

가하란은 손을 내려다봤다.

“내가 데려다…….”

말을 꺼내기도 전에 고개를 젓는 샬롯이었다.

“내가 자격을 갖춰야 해. 널 통하면 산카를 만날 수 있겠지. 하지만 매번 부탁할 수는 없잖아? 그건 옳지 않아. 내 힘으로 해야 해.”

“인사 정도는 할 수 있잖아.”

“지금도 보고 있을 거야, 산카는.”

허공에 대고 손을 흔드는 샬롯이었다.

“거북이 아저씨는?”

“산페르 아저씨도 사라졌어. 이곳으로 넘어온 직후에.”

“층과 층 사이에 벽이 두꺼워졌나 보네. 근데 이곳으로 돌아온 후에 안원에 간 적이 있어?”

“어, 한 번.”

“넌 되는구나. 나도 노력해야겠네.”

“설명할 수 있는 거라면 요령이라도 알려 주겠는데, 온전히 감각에 기대는 일이라.”

“맞아. 감각에 기대는 일이지.”

샬롯이 손짓했다. 따뜻한 바람이 다가와 온몸을 휘감았다.

“바람이 그러는데 아주 낯선 힘이 느껴진대. 네 몸에서.”

“그거라면…….”

가하란은 외력을 사용해 샬롯이 부리는 바람을 붙잡았다. 샬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떻게 한 거야?”

“정확한 건 나도 모르겠어. 이건 무엇이 됐든 인식할 수 있으면 붙잡을 수 있는 거 같아. 정보든, 마나든, 정령의 잔재든.”

“신기하네.”

도망치려는 바람을 잠깐 붙잡아 뒀다가 놓아줬다. 바람이 매섭게 빠져나갔다.

“네가 싫대.”

“미안하다고 대신 전해줘.”

작게 소리 내어 웃을 때였다. 샬롯이 슬쩍 곁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언니랑은 좀 어때?”

“어떻긴.”

“설마 아무 일도 없었던 건 아니지?”

“없었겠어?”

“……어릴 땐 귀여웠는데 이상하게 능글맞아졌네.”

“달라진 건 별로 없어.”

샬롯이 눈을 씰룩였다.

“고백은? 아니, 고백 정도로는 안 돼. 청혼했어?”

“아니 뭐…….”

“야!”

샬롯의 뾰족한 목소리가 퍼져나갔다. 먼발치서 술을 마시던 사람들이 물끄러미 이쪽을 바라봤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멋쩍게 웃고는 소리를 낮춰 말하는 샬롯이었다.

“언니가 몇 년을 기다렸는데. 진짜 곁에서 지켜보면서 내가 다 아프더라. 잊었다고는 하는데 눈이 잊지 못한 눈이었어.”

“그랬어?”

가하란은 시선을 옮겼다. 아리엘과 담소 중인 밀레나가 보였다.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훈련장에 찾아온 남자만 수십 명이야.”

“누나가 매력적이긴 하지.”

“세레나데까지 준비해서 찾아온 거지 같은 놈이…… 아니, 이건 됐다. 끔찍한 기억이니까. 아무튼!”

샬롯이 인상을 썼다.

“우리 언니 절대 실망시키지 마. 뭐, 너라면 그럴 걱정은 없겠지만 남자들은 섬세한 면이 부족하잖아.”

“섬세한 면.”

가하란은 품 안에 손을 넣었다. 작은 주머니를 꺼내 안에 든 반지를 손바닥에 올렸다.

“뭐야? 준비해 둔 거야? 그런 거라면 말을 하지 그랬어. 언니 불러올까? 나 이런 거 앞에서 보고 싶긴 했어.”

생글생글 웃으며 일어서려는 샬롯을 붙잡았다.

“증조부께서 남기신 유품이야.”

“아, 그래?”

“숙제가 담긴 반지기도 하고.”

“숙제?”

반지를 비스듬히 들었다. 안쪽에 새긴 글귀가 보이도록.

“‘사람의 본성이 선하다고 믿는다.’ 좋은 말 같네.”

샬롯이 문장을 입에 담았다.

“이 문구를 깊게 생각해 보는 것, 그게 증조부께서 내게 남기신 숙제였어.”

“이 말에 다른 뜻이 있을까? 그냥 한 문장이잖아. 오해할 수도 없는 단순한 문장.”

“그러게.”

무늬 하나 없는 밋밋한 반지.

“나한텐 소중한 물건이야.”

“사연이 담긴 건 소중한 법이지.”

“틈새에 있을 때 이걸 보면서 힘을 얻었던 적도 있어.”

“더더욱 아껴야 할 물건이 됐네.”

“……그래서 이 반지를 누나한테 주고 싶은데, 마음에 안 들어 하려나?”

공학적 지식은 모자람이 없으나, 이런 방면은 까막눈이었다. 선물용 액세서리에는 다양한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하던데, 은반지에 부적절한 뜻이 담겨 있다면 피하고 싶었다.

“스토리가 담겨 있는 게 좋아. 화려한 것도 좋지만, 내가 아는 언니는 그런 쪽에 취미 없어.”

가하란은 반지를 매만지다가 일어섰다.

“잠깐 다녀올게.”

“구경 가도 돼?”

“될 것 같아?”

샬롯이 씩 웃더니 손을 흔들었다.

“뭔가 잘 안 풀리는 거 같으면 신호 보내. 내가 분위기 띄우는 건 잘하거든.”

“마음만 받을게.”

반지를 움켜쥔 후 밀레나를 향해 걸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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