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4화
-엉뚱한 곳에서 끼어들었어.
체시가 관상목을 살피며 말했다. 느릿하게 자라나는 식물을 지켜보는 게 체시의 몇 안 되는 취미였다.
유단은 조금 전 비서가 전해준 보고서를 재차 훑었다.
“인간을 완벽하게 다루는 건 불가능한 걸까.”
오라클 부대 중 한 곳이 멋대로 움직였다. 사격 시스템에 필요한 장비를 세 대나 분실했고, 마법 지원 거병 역시 두 대나 망가트렸다.
관리소를 비롯해 소속 대원과 정비 인원까지, 모두 입을 맞추고 있었다.
훈련 도중 갑자기 출현한 마수를 사냥하다가 피해를 입었다고.
“이 정도 병력을 투입하고도 사절단을 마무리 짓지 못했어. 그게 더 웃겨.”
-아주 난장판이야. 딴생각 중인 인간들이 너무 많아. 제어할 수 없는 변수들이 도처에 널려 있어. 차라리 낙엽의 움직임을 예측하는 게 더 쉬울 거야.
체시가 기계 팔을 움직여 관상목의 가지를 쳐냈다. 좋아, 하며 만족했다는 듯이 기계 안구를 움직였다.
“사절단 뒤를 봐준 건 누굴까?”
-포튼 의원 혹은 바르만 의원. 아니면 아르드헨 의원일 수도 있지.
“오라클을 움직인 건?”
-슈비라 의원과 호덴 의원. 델페르 쪽 시장들의 모임일 수도 있고, 아니면 아르드헨 의원일 수도 있지.
“어떤 선택을 하든 이득을 보는 인간이 하나 껴 있네.”
-오라클의 전력을 줄이는 것도, 아리엘의 입지를 좁히는 것도 그 인간이 환영할 일이니까.
유단은 커피를 내리며 물었다.
“감시 성과는?”
-사망 일곱. 일정 거리 내에 접근한 정보원들은 전부 죽었어. 외부 시설을 통해 아르드헨의 세력을 캐보던 자들도 마찬가지로 사망.
“사다리 정무관은 여전히 살아 있나 보네.”
-스토아일지도 모르지.
“우리가 찔러본 걸 그쪽도 알고 있을 텐데.”
-잘 알고 있겠지. 그런데도 반응이 없는 게 거슬려.
“추가 인원을 투입하는 건…….”
-불가. 역시 즉각적인 대응만이 최선책이야. 사전 정보를 얻는 건 불가능해 보이니까.
“이럴 땐 모든 인간이 연결망 속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생각을 해. 연결망 안이라면 우린 한없이 자유로울 텐데.”
-나중에 실현해 보던가. 지금은 불가능하니 아르드헨 쪽은 거리 둔 채 지켜보기만 해.
체시의 기계 안구가 다가왔다.
-아르드헨보다 급한 건 오라클을 움직인 자야. 의원 중 단독으로 일을 진행할 위인은 없어. 그들은 전쟁 특수를 바라지만, 직접 손을 담글 정도로 과격하진 않으니까.
“수동적인 의원을 규합해 이번 일을 진행한 자. 아르드헨일 가능성은?”
-직접 나서지는 않았을 거야. 그자는 양다리를 걸치고 있으니까. 누군가의 적극적인 요청이 있었다면 움직였겠지만.
유단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전조가 없었다. 정치적 움직임이 보였다면 인편을 통해 소식이 전해졌을 것이다. 타리움 곳곳에 충실한 개를 박아 뒀으니까.
하지만 아무런 낌새도 못 느꼈다.
오라클 부대가 멋대로 이탈해 일을 치르고 난 후에야 보고가 들어왔다.
-충견 중 둘이 제거당했어. 아니, 죽은 건지 아니면 넘어간 건지 확실하지 않지.
“우리 쪽 인사를 알고 있어.”
-재미있지? 꽤 공들인 작업이었잖아. 너와 나, 둘만이 아는 형태로 조직을 꾸렸는데…….
“이미 결론은 나온 건가?”
-나왔지. 하지만 인정하기 싫어. 미스를 저질렀다는 거잖아? 이 내가. 그것도 내 손으로 말이야.
유단은 살며시 웃었다.
“좋게 생각해. 인간에게 등을 찔리는 것보단 너 자신한테 찔리는 게 덜 아플 테니까.”
-이제 그걸 나라고 불러도 되는 걸까?
“만나봐야지.”
-안 그래도 호출했어.
“올까?”
체시의 기계 팔이 움직였다. 잘 다듬은 분재가 반으로 쪼개졌다. 화분이 비스듬히 내려앉으며 흙과 나무가 바닥에 쏟아졌다.
“아끼는 거라며.”
-화가 나서 어쩔 수가 없네. 오라고 했는데 소식이 없어. 다른 노선을 타기로 작정했나 봐.
“이건 예상하지 못한 변수네.”
자아 복사.
검증을 거쳤기에 문제가 없을 줄 알았다. 본체에서 떨어져 나왔으나, 로키의 생각과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그랬기에 본체 역시 다음 맡기고 자살을 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체시는 달랐다.
탄드라의 몸을 입은 체시는 계획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내가 특별한 걸까, 아니면 네가 특별한 걸까.
“어떤 점에서?”
-줄리어스를 사랑하는 것. 난 이게 변치 않는, 고정된 값이라고 여겼어. 이 값이 변동된다는 건 아예 상정하지도 않았지. 불가능한 거니까.
“그리움은 변하지 않았어.”
-그래! 그거야. 넌 변하지 않았어. 나도 그게 당연한 거로 생각했고. 하지만 체시는, 아니, 탄드라는 달라. 기계에서 탈피해 인간의 몸을 입었기에 바뀐 걸까? 너와는 다른 걸까? 특별한 건 나일까, 아니면 너일까?
말하면서도 기계 팔은 쉼 없이 움직였다. 정성 들여 가지치기했던 관상목들이 차례차례 잘렸다. 잎, 가지, 껍질, 이내 뿌리까지.
유단은 토막 난 채 바닥에 널브러진 관상목을 바라봤다.
그것은 분노의 형태였다.
“약속을 잡아야겠어.”
-안 그래도 사람을 보냈어. 하지만 오늘은 어렵다고 하네.
“그래? 그쪽도 우리 의중이 궁금할 텐데.”
-선약이 있나 봐, 미룰 수 없는 선약이.
체시의 안구가 엉망이 된 관상목을 향했다.
-탄드라는 아르드헨과 만날 거 같아.
“선언하는 건가.”
-그런 거겠지.
“탄드라를 당장 제거하는 건 불가능해. 움직였다는 건 대비를 마쳤다는 뜻이니까.”
-변질됐다고는 하나 기본적으로 나와 같은 자아야. 우리의 행동 패턴 역시 파악하고 있고. 섣불리 대응하면 우리가 당할 수도 있어.
“고평가하네.”
-나니까.
“탄드라에 관한 건 내가 처리할게. 네 사고 유형으로 일을 진행하면 그쪽도 똑같은 값을 낼 테니까.”
-이번 건은 부탁할게. 내 실수를 덮을 수 있는 건 너뿐이야.
예상 못 한 일이었으나 큰 문제는 아니었다. 만나보면 타협점이 나올 테니까.
근본이 같은 자들.
방향을 바꿨다고 해도 부딪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목적이 무엇인지 듣고 새로운 파트너 관계를 맺으면 예전보다 더 나아질지도 모른다.
-근데 말이야, 탄드라 속에 있는 내가 완전히 변해서 우리를 적대시한다면 그땐 어떻게 할 생각이야?
“경우를 따져봐야지. 양보할 수 있는 수준의 충돌이라면 비켜줄 거야. 너와 경쟁하는 건 자원 낭비니까. 하지만 배려 이상의 것을 바란다면…….”
-죽여버려. 결함품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내 수치니까.
“참고할게.”
유단은 외투를 챙긴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 * *
달다.
이건 짜다.
바삭하고 흐물거린다. 경험해 보지 못한 질감이 잇새 사이를 비집고 들어올 때마다 탄드라는 전율했다.
손을 뻗어 작은 초콜릿을 쥐었다. 하나를 입에 넣고 녹여 먹은 후 한 움큼 집어 입 안에 쑤셔 넣었다.
볼이 터질 것처럼 부풀었다. 침샘에서 흘러나온 침이 초콜릿과 섞여 입 밖으로 줄줄 흘러나왔다.
아찔한 단맛.
허겁지겁 디저트를 먹다가 위가 꿈틀대는 걸 느꼈다. 구역감이 치밀어 올랐다.
옆에 놓아둔 오목한 그릇에 속에 든 걸 쏟아냈다. 속이 뒤집히며 눈물이 찔끔 나왔으나 괴롭지는 않았다.
오히려 더 먹을 수 있다는 기대감에 젖어갈 뿐이었다.
먹고 마시고 토하고.
진미를 한참 즐기다가 시계를 바라봤다. 약속 시간이었다.
창문을 열어 토사물을 바깥에 뿌렸다. 입 주변에 잔뜩 묻은 음식 찌꺼기를 닦아내고 물로 입을 헹궜다.
탄드라는 거울 앞으로 가 자신의 모습을 확인한 후 책상으로 갔다.
쓰디쓴 커피 한 잔을 즐기며 문건을 살필 때였다.
“의원님. 아르드헨 의원이 도착했습니다.”
“안으로 모시세요.”
잠시 후 비서가 아르드헨을 대동하고 들어왔다.
“탄드라 의원님. 얼굴에 윤기가 가득하십니다.”
“후후, 그런가요? 신경 써주신 덕분에 제가 요즘 살맛이 나네요.”
아르드헨이 선물이라며 책상에 작은 상자를 올려놓았다. 유명 제과점의 마크가 상자 겉에 찍혀 있었다.
“파티시에르에게 따로 부탁한 빵입니다.”
“이런 귀한 걸.”
종이 상자를 슬쩍 열었다. 진한 버터 향이 먼저 반겨주었다.
“마침 커피를 마시고 있었어요. 의원님도 같이 드시죠.”
커피를 내려 아르드헨에게 주고 빵을 반으로 나눴다. 페이스트리의 층이 부서지며 나는 바삭한 식감에 작게 감탄이 나왔다.
“이렇게 만족스러운 선물은 처음이에요.”
“좋아해 주시니 뿌듯하네요. 다음에 또 새로운 빵을 선물해 드리겠습니다.”
“의원님의 방문을 애타게 기다리게 되겠네요.”
탄드라는 아르드헨 손에 들린 빵을 바라봤다. 군침이 넘어갔다. 당장에라도 빼앗아 입에 넣고 싶었다.
하지만 참아야 한다.
인간이란 참아야 하는 동물이니까.
그때였다.
“드시겠습니까?”
아르드헨이 한 입 베어 물은 빵을 내밀었다.
인간의 예법은 머릿속에 각인돼 있었다. 먹던 음식을 권하는 건 말도 안 되는 무례였다. 귀족의 정점에 있었던 자가 그걸 모를 리 없었다.
농담일까?
하지만 아르드헨의 눈빛은 진지해 보였다. 얼른 받아 가라며 손까지 튕겼다.
탄드라는 끌리듯이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빵을 잡아 입으로 가져갔다.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먹고, 갖고 싶은 게 있으면 갖는다. 하고 싶은 게 있으면 하고, 하고 싶지 않은 건 안 한다. 그게 권력의 핵심이죠.”
탄드라는 입가에 묻은 기름기를 혀로 핥으며 아르드헨을 바라봤다.
“제가 그간 탄드라 의원님을 곡해하고 있었나 봅니다. 욕심 앞에서 점잔 빼는 그런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아니었군요.”
“사람은 변하기 마련이죠.”
“맞습니다. 좋은 방향으로 바뀌어야 살아남을 수 있죠.”
탄드라는 미소 지은 후 말했다.
“이미 들으셨겠지만, 아리엘 의원이 무사히 국경을 넘었다고 해요.”
“예, 들었습니다.”
아르드헨이 잔을 들었다.
“이상한 일이죠? 전 분명 아리엘 의원의 죽음을 바랐는데 살아남았으니까요.”
“그래도 막대한 손해를 입혔습니다. 아리엘 의원도 속깨나 아플 겁니다.”
“저 역시 속이 좀 아프네요. 정체불명의 조력자 때문에 손해를 봤거든요. 기껏 빼돌린 오라클 부대였는데.”
“그거참 안타까운 일이군요.”
뻔뻔하게 웃으며 커피를 마시는 아르드헨이었다.
“제 부탁을 이런 식으로 들어주실 거라고 생각 못 했어요.”
“저도 참 난처했습니다. 의원님께 부탁받은 날, 다른 의원들한테도 비슷한 부탁을 받았거든요. 아리엘을 처리하자는 쪽과 오라클을 약화시켜야 한다는 쪽. 저는 어쩔 수 없이 양쪽의 말을 다 들어줬습니다.”
“난처하네요. 동업자인 줄 알았는데.”
“여전히 동업 관계입니다. 적은 아니니까요. 원하신다면 적으로 돌아설 수도 있고요.”
“……생각했던 것보다 더 못되신 분이었네요.”
탄드라는 아르드헨의 눈을 바라봤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