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3화
“하나만 더 확인해도 될까요?”
레치는 악수한 손을 놓으며 위를 바라봤다.
“아까 부른다고 한 게 저겁니까?”
대답은 없었다. 대신 미소가 돌아왔다. 레치는 가하란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상원 의원회에 전하겠습니다. 가하란 씨가 개인 일정을 끝낸 후 집결 수도로 찾아올 거라고.”
“약속드리죠.”
“하지만 반발이 있을 겁니다. 최대한 설득해 보겠으나 저는 권한이 없습니다. 보시다시피 현장 일선에서 일을 처리하는 끈 떨어진 관료니까요.”
레치는 근방을 둘러보며 말했다.
“인근 지역에 제재가 들어올 수도 있습니다.”
“감시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이상의 행동은 막아주세요.”
막지 못하면 훗날 벌어질 일들은 각오하세요, 레치 귀에는 그렇게 들렸다.
저공비행 하는 하늘석.
가하란은 병기로써 쓸 생각이 없다고 했으나 누가 그 말을 믿을까.
공학에 대해 아는 게 없으나 저만한 무게가 하늘에서 떨어지면 어떤 참사가 벌어질지, 쉽게 예측할 수 있었다.
“설득이 안 되면 협박이라도 해보죠. 대신, 가하란 씨가 제게 힘을 실어주세요. 이번 일을 일임했으니 그 정도는 해줘야 합니다.”
말 이상의 것이 필요했다.
그때였다. 하늘을 가리던 하늘석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떠나는 방향을 응시했다.
저긴…….
“집결 수도로 돌아가시죠. 도착했을 때 레치 씨의 말을 무시하는 자는 없을 겁니다.”
“가장 단순하면서도 확실한 방법이군요.”
하늘석이 향하는 곳은 집결 수도의 상공이리라. 수도에 거주하는 수십만의 인구가 공중에 멈춰 선 하늘석을 바라보고 있을 때 상원 의원회에서는 두려움 가득한 원성이 오가리라.
“그리고 이 아이도 데려가세요.”
가하란이 손짓하자 초소형 거병이 곁으로 왔다.
-안녕하십니까.
거병이 말했다. 가까이서 보니 위화감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정말로 이 작은 동체에 오토마타를 비롯한 거병의 모든 공학 장치가 들어 있는 것인가.
“‘닥’입니다. 현장에서 제게 전할 것이 있거나 상황이 안 좋게 돌아갈 시 이 아이에게 부탁하세요. 저와 대화할 수 있을 겁니다.”
“집결 수도와 이곳은 한참 떨어져 있어서 통신 같은 건…….”
고대의 신물이라 불리는 하늘석.
그리고 마나 증발과 초소형 거병.
상식을 벗어난 기술이 눈앞에 널려 있는데 통신쯤이야, 라는 생각이 들어 입을 다물었다.
“가하란 씨가 우리의 적이 아님에 감사해야겠군요.”
초장거리 통신.
정보의 신속한 전달은 사회 전체를 바꿔 놓을 것이다. 핵심 기술을 쥐고 있는 가하란이 어느 국가에 협력하느냐에 따라 전쟁 양상도 바뀔 테고.
이젠 설득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 사람을 반드시 잡아야 한다.
“이곳 주민분들이 불편을 겪는 일은 없을 겁니다. 제가 책임지고 해결할 테니까요.”
“그 말을 듣고 싶었습니다.”
“동부에 볼일이 있다고 하셨죠? 언제쯤 출발하실 생각이십니까. 저희가 호위를 맡겠습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호위는 괜찮습니다.”
레치는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하늘석을 바라봤다.
“그렇겠군요.”
“하늘석이 돌아오면 그때 출발할 생각입니다. 수도 상공에 하루 정도 머물다가 돌아올 테니, 나흘 후겠네요.”
집결 수도까지 말을 타고 한 달 정도 걸린다. 배터리 제한이 없는 해더 트럭이 존재한다고 해도 나흘 만에 왕복하는 건 불가능했다.
아니지, 하루 머문다고 했으니 사흘이겠군.
소름이 끼친다. 만약 하늘석이 전쟁 물자로 사용된다면 그 어떤 군대가 기동전을 치를 수 있을까.
국경이 뚫렸다는 소식이 전해지기도 전에 수도 상공에 하늘석이 위치하리라.
개인이 이런 무력을 소유해도 되는 건가? 그런 질문은 무의미한 것이었다.
중요한 건 가하란의 통제 권한 아래 하늘석이 놓였다는 점이니까.
그라운드 제로 이후 연합 도시는 눈부신 마법 공학 발전을 이루었다.
동부에서 흘러들어온 마전기 이론을 근간으로 분배 시설을 지하에 매립, 수도에서는 각 가정에서 손쉽게 배터리를 충전할 수 있게 됐다.
삶의 질이 달라졌다.
격변이라 표현할 만한 기술의 변화였다.
하지만 가하란이 손에 쥐고 있는 마법 공학 이론과 비교하면…….
머리를 굴리며 앞으로의 일을 계산할 때였다.
희미하게 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초록색 연기가 보였다.
이어서 묵직한 종소리가 도시 외곽을 흔들었다.
순차적으로 이뤄진 보고 체계.
레치는 가하란에게 양해를 구한 후 수행원들과 함께 2차 방벽으로 향했다.
“보고드립니다. 접경 지역을 관통 중인 무리를 발견, 150명 정도이며 거병 네 기를 동반했습니다.”
보고 인원 뒤쪽으로 군인들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현장 책임자는 이미 1차 방벽으로 이동한 후였다.
“동부 타리움입니다.”
“그 숫자로 전쟁을 하려는 건 아닐 테고.”
“첨병대가 접근 중이니 곧 본대에 소식이 전해질 겁니다.”
“소식이 들어오는 대로 전해주게.”
“예!”
레치는 방벽에 올라 망원경을 눈가에 댔다. 저 멀리 1차 방벽이 보이고, 그 너머로 자그마한 거병이 식별됐다.
거병들이 잠시 멈춰 서더니, 청색 깃발을 어깨에 꽂았다.
“……사절단?”
국가 간 교류가 끊기고 핫라인마저 사라진 시대. 사절단의 표식인 청색 깃발 자체가 낯설게 느껴졌다.
첨병대가 동부 측 사절단과 접촉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거병 한 기와 10명 정도만 따로 떨어져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봐야겠군.”
호위대와 함께 1차 방벽으로 향했다. 국경 3방책 담당관의 이름이 칼슨이었던가? 언젠가 연회에서 마주했던 얼굴을 떠올렸다.
“레치 님.”
1차 방책 안쪽에서 대기 중인 칼슨과 만났다.
“일이 있어 나왔다가 신호를 봤습니다. 동부에서 온 사절단이 맞습니까?”
“예. 타리움의 아리엘 시장입니다.”
“아리엘이라면…….”
“게스할트. 티안의 그 남자를 기억하시겠죠?”
“아! 그 양반의 딸. 소식은 몇 번 듣긴 했지.”
동부 사절단이 1차 방벽으로 진입했다. 레치는 정면에 선 아리엘을 흘깃 바라봤다.
“3방책 담당관 칼슨입니다. 갑작스러운 사절단 방문이군요.”
칼슨이 나섰다.
“대마수가 사라졌으니 다시 교류를 시작해야죠.”
“반가운 소식입니다만, 사절단이라 함은 목적이 있어야 하죠. 단순히 교류로 끝낼 것이었다면 시장님께서 직접 오셨을 리 없고요.”
“집결 수도의 뜻을 알아보려고요.”
“집결 수도의 뜻이요?”
“상원 의원회만이 제 질문에 답해줄 수 있을 것 같네요. 정식으로 저희를 환대해 주시겠어요?”
“이것 참.”
칼슨이 고개를 돌렸다. 상위 책임자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눈치였다.
레치가 앞으로 나섰다.
“게스할트 장군과는 오래전 안둔에서 마주했었죠.”
“그러셨군요. 성함을 여쭤도 될까요?”
“레치입니다.”
“안둔의 보급관. 아버지께서 자주 말씀하셨죠. 그 보급관만 없었어도 안둔의 설원 전쟁을 금방 끝냈을 거라고.”
인사치레는 끝냈다.
레치는 아리엘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상원 의원회에 참석 권한은 없으나 의견 정도는 전할 수 있습니다. 집결 수도의 뜻이 궁금하시다고 하셨죠? 그전에 동부 타리움의 뜻을 제게 말씀해 주시죠.”
아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단순한 질문을 하러 왔습니다.”
“그게 무엇이죠?”
“서부는, 집결 수도는 동부와의 전쟁을 준비 중입니까?”
전쟁.
어린아이도 쓰는 단어지만 그 말이 타리움 중심축에서 나왔다면 무게감이 다르다.
“농담은 아니겠군요.”
“농담 한번 하려고 사절단을 끌고 접경 지역을 넘지는 않죠. 오는 길에 이런저런 일도 있었고.”
보고자의 말에 따르면 대동한 거병들의 외장갑 상태가 안 좋았다고 한다.
도착하기 전 전투가 있었다는 뜻이다.
“저희가 습격했다고 여기시는 건…….”
“내부 소행이었어요. 저는 전쟁을 바라지 않지만, 다르게 생각하는 자들이 타리움에 있는 것 같아요.”
“위험한 말씀이군요. 타리움은 전쟁을 원하는 겁니까?”
“난잡한 상황을 명확히 하려고 이 사절단을 꾸렸어요. 집결 수도의 의지에 따라 오랜 휴전이 끝나게 될지도 몰라요.”
레치는 눈을 찌푸렸다.
“단언컨대 집결 수도는 전쟁을 원한 적이 없습니다. 우린 서부의 미개척지를 탐사하는 것만으로도 손이 남아나질 않아요.”
“그 발언을 상원 의원회에서 문서화해 주시면 됩니다. 평화 협정서. 그게 제 목적이에요. 영원한 평화는 없겠죠. 하지만 지금은 전쟁할 때가 아니라는 걸 양국 다 알고 있어요. 그렇죠?”
이번엔 아리엘이 한 걸음 다가섰다.
“어떠신가요? 레치 님께서 지금 당장 평화 협정서를 내주신다면 저흰 이대로 돌아갈 겁니다. 그럴 권한이 있으신가요?”
“없습니다. 말씀하셨듯 상원 의원회에서 결정할 일이죠.”
“그러니 저희는 집결 수도로 가야 해요. 공식적인 환대를 받으면서.”
“그건 지금 당장 정할 수 없습니다.”
“억지 부리지 않을게요. 휴식할 공간만 제공해 주세요. 그러면 상부에서 허가가 떨어질 때까지 기다릴 테니.”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위급한 사안이니 최대한 빨리…….”
말을 끝내기 전이었다.
뎅, 소리가 귀를 먼저 때렸고 이어서 쿵 하고 눈앞에 무언가가 떨어져 내렸다.
놀라서 뒤로 물러섰다. 주변 군인들은 창대를 높이 들었고, 울타리 위 군인들은 쇠뇌를 당겼다.
“멈춰!”
칼슨이 소리쳤다.
레치는 흙먼지를 손바람으로 치워내며 앞을 바라봤다.
산의 전사였다.
이자가 왜 여기에?
“안전한 곳에 틀어박혀 있어야 할 애가 왜 여길 온 거냐!”
타챠가 호통을 쳤다. 누굴 향해 한 말인가? 레치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아리엘 입에서 시선이 멈췄다.
“몇 년 만에 봤는데 한다는 소리가 그거예요?”
아리엘이 성큼 발을 내디뎌 타챠 앞에 섰다. 시선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릴 텐데, 아리엘은 아무렇지 않은 듯했다.
“도마뱀 씨야말로 왜 여기에 있어요?”
“해야 할 일을 하고, 대전사의 부탁도 들어줄 겸 이곳에 있었다.”
“나도 내가 해야 할 일 때문에 이곳에 왔어요. 그러니 됐죠?”
“대전사는 너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다.”
“협회장님이 절 생각해 주시는 건 정말 고맙지만, 전 애가 아니잖아요.”
아리엘이 타챠의 손가락을 붙잡았다.
“마침 잘됐네요.”
“뭐가?”
“경호를 부탁드릴게요.”
“귀찮…….”
산의 전사가 갑자기 움찔했다. 턱을 들어 주변을 살피다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레치도 시선을 위로 올렸다.
하늘에서 여자가 떨어지고 있었다.
아저씨, 라고 외치며 떨어진 여자가 전사의 머리를 부둥켜안았다.
경악스러운 일이었다.
겁도 없이 저런 짓을 벌이다니. 금방이라도 괴성을 지르며 난리 칠 줄 알았는데, 타챠는 모든 기운을 빼앗긴 것처럼 어깨를 늘어트렸다.
가볍게 흔들리던 꼬리마저 축 늘어졌다.
“샬롯, 이 망할 꼬맹이도 같이 왔군.”
“어엿한 숙녀한테 망할 꼬맹이라니. 아저씨, 그래선 여자들한테 인기 없어요.”
“나는! 부족에서 제일가는!”
뭐라 외치던 타챠가 몸을 홱 돌렸다.
“피곤해졌어. 돌아가겠다.”
“어딜 가요?”
“너희들끼리 알아서 해라. 너희에게 위해를 가할 자는 이 자리에 없을 테니, 내가 없어도 되겠지.”
타챠가 주변 군인을 노려봤다.
명백한 경고였다.
샬롯이란 여자를 대동한 채 걸음을 떼던 타챠가 빙글 몸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너희도 그 꼬마와 연이 있군.”
타챠가 손가락을 들어 도시 쪽을 가리켰다.
“가하란이 저곳에 있다.”
산의 전사가 한 말에 누구보다 큰 목소리로 반응한 건 매달려 있는 샬롯이었다.
“가하란이 정말 살아 있어요? 정말요?”
“그래. 그러니까 그만 소리쳐라.”
“밀레나 언니는요? 같이 있어요?”
“그래.”
“얼른 가요!”
어디선가 거센 바람이 불어왔다.
눈을 뜰 수조차 없었다. 바람이 가라앉고 주변을 살폈다. 타챠와 샬롯은 사라지고 없었다.
“이건 무단으로 이탈한 게 아니라 납치당한 겁니다. 그러니 사절단의 뜻을 오해하진 말아주세요.”
아리엘이 불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