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2화
타린족 무승에 관한 이야기는 수도 없이 들었다. 싸움을 업으로 삼고 패배를 배우기 위해 살아가는 자들.
대마수가 국경 지대에 나타난 해, ‘타챠’란 이름의 타린족 역시 모습을 드러냈다.
무수한 보고서가 상부로 전해졌다. 전사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몇 차례 만나기도 했다.
그때마다 산의 전사는 단호하게 말했다.
“저들을 침범하지 마라. 내가 저들을 감시할 테니 인간들 역시 지켜만 봐라.”
저들.
대마수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상의 끝에 집결 수도는 산의 전사를 내버려 두기로 했다. 타린족이 정치적 문제를 일으킨 적도 없을뿐더러, 자진해서 도시 방위에 힘써준다고 하니 나쁠 게 없었다.
방치해 두는 것으로 도움이 되는 존재.
“……꼬였군.”
레치는 발 앞에 던져진 거병의 팔을 지나 타챠 앞으로 향했다.
“절 기억하십니까?”
“기억한다.”
“이런 곳에서 다시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저희가 파악한 바에 따르면 접경 지역에 있는 오두막에서…….”
“주로 거기서 살지만 가끔 이곳에 들른다. 식량을 가져가야 하니까.”
필렌과 친분이 두터운 걸까.
“저희 소속 거병 부대와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저 바깥에서 진을 치고 있더군. 안으로 들어간다고 하니 길목을 막았다. 나는 다시 한번 말했다. 들어가겠다고.”
“그랬군요.”
“두 차례나 말했지만 그들은 비키지 않았다. 그게 무얼 의미하는 건지 그 인간족들은 모르는 것 같더군. 그래서 알려줬다.”
“인명 피해는…….”
“대전사도 아닌 약자를 죽일 정도로 한가하지 않다. 길을 막은 저 쇳덩이만 잘라냈을 뿐이다.”
손괴죄를 물을 수도 없었다.
레치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인간끼리의 작은 분쟁이 있습니다. 그걸 해결하기 전까지 저희는 이곳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분쟁?”
“예. 저희가 타린의 법도를 무시하지 않듯, 타린 역시 인간의 룰을 이해하실 거라 봅니다.”
산의 전사가 콧김을 내뿜었다.
“내 식당에 반갑지 않은 냄새가 나는 건 불쾌한데.”
“말로 끝낼 수 있는 문제입니다. 하지만 당신이 개입하게 된다면 그땐 말 이상의 것이 사용될 것입니다.”
머릿속으로 계산했다.
대동한 거병 100여 기로 산의 전사를 제압할 수 있을까?
결과는 뻔했다. 제압하는 건 불가능하다. 지치지 않는 두 다리로 거병 사이를 오가며 난도질할 것이고, 그러다 위기가 닥쳐오면 물러날 것이다.
거병의 기동력으로는 산의 전사를 따라잡을 수 없다.
무엇보다 눈앞의 타챠는 ‘위대한 전사’라 불리는 자였다. ‘검은 심장’ 부족에서 붉은 깃발과 가장 가까운 자.
타챠도 알고 있을 것이다.
전투에서 패배할 일은 없다는 걸.
하지만 인간은 전쟁을 치른다.
“타린과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습니다. 부디 헤아려 주시길.”
다른 사안이었다면 부드러운 말과 함께 물러섰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 건은 포기할 수 없었다.
광범위한 마나 증발.
진상 규명에 실패하면 국가적 위기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레치는 타챠를 바라봤다.
시선이 무거웠다. 몸이 짓눌려 바닥을 뚫고 내려갈 것 같았다. 산의 전사와 마주한다는 건 이토록 두려운 일이었던가.
“강단 있는 인간이군.”
타챠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있는 건 가하란이었다.
“나는 너희들의 싸움에 낄 생각이 없다. 이 정도면 된 것 같은데.”
“예, 아저씨.”
아저씨?
산의 전사와 친분이 있는 건 가하란 쪽이었나. 변수에 변수가 더해졌다.
가하란이 눈앞에 섰다. 등 뒤에 서 있던 타챠는 휘적휘적 걸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절 찾아오셨다고 들었습니다.”
“……제 이름도 알고 계셨으니 방문 목적도 알고 있으시겠죠.”
“대마수와 관련된 일이겠죠? 정확히는 당시 벌어진 마나 증발 현상 때문이겠고요.”
“맞습니다.”
레치는 얼굴을 굳히며 말을 이었다.
“곁가지는 필요 없으니 바로 묻겠습니다. 우리가 관측한 그 현상, 가하란 씨가 발생시킨 것입니까?”
“예. 맞습니다.”
머뭇거림 없이 인정했다. 레치는 넥타이를 어루만지며 다시 물었다.
“본국은 도시 결성법에 따라 이번 일의 진상 및 진위를 파악해야 합니다. 그러니 협조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위협이 될 수 있는 사안을 방치해 둘 순 없겠죠. 저 역시 오해가 쌓이는 건 원하지 않습니다. 적극적으로 협조해 드리겠습니다.”
협조란 말이 이렇게 달콤했던 적이 있었던가.
무릎에서 힘이 살짝 빠져나갔다.
최악의 경우, 전투가 벌어질 수도 있었다.
르완의 용병과 산의 전사, 거기에 정체불명의 마법 공학을 지닌 공학자까지.
맞붙었으면 여기 있는 도시 측 사람들이 포로가 됐을 것이다.
나아가 인근에서 대기 중인 거병 역시 제압됐을 터였다.
마나 증발 현상이 다시금 일어나면 거병은 거대한 쇳덩어리가 될 뿐이니까.
“다행이네요.”
가하란이 말했다.
“다행이요?”
“전 언제나 안 좋은 결과를 생각해 두고 움직입니다. 타챠 아저씨를 부른 것도, 500m 밖에서 대기 중인 거병의 진형을 파악해 둔 것도 만약을 대비한 것이니까요.”
“…….”
레치는 마른침을 삼켰다.
“잠시 다녀와도 될까요? 돌아오라고 전해야 해서요.”
가하란이 트럭 쪽을 가리켰다.
“그러시죠.”
트럭으로 걸어간 가하란이 안에 있는 여자와 몇 마디 나눈 후 다시 돌아왔다.
“아시다시피 전 동부 쪽 사람입니다. 아주 오랫동안 틈새에 있다가 1년 전쯤에 복귀했고요.”
“예, 그건 알고 있습니다.”
“저는 틈새에서 많은 지식을 얻었습니다. 물론 지식을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도시 제조소의 도움을 받았죠.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야기를 들으며 레치는 시선을 살짝 돌렸다. 1m 남짓한 초소형 거병이 통통 튀듯이 뛰어와 트럭 곁에 섰다.
보고서로만 접한 초소형 거병을 실제로 보게 되니 얼떨떨했다. 기계인형이 아닌, 오토마타까지 갖춘 거병.
“저 아이가 신경 쓰이시나요?”
가하란이 말했다.
“죄송합니다. 워낙 대단한 물건이라 저절로 눈길이…….”
“기술을 제공해 드리겠습니다.”
“예?”
“아까 말했듯 도시의 제조 시설을 이용했으니까요. 이 도시의 제조 시설은 모두 길드 관리하에 있고, 그 길드는 집결 도시 산하 기관이라고 들었습니다. 법에 따르면 허락되지 않는 제삼자가 시설을 사적 이용 시 극형에 처할 수 있죠.”
“잘 알고 계시는군요.”
“이동하면서 도시법을 살펴봤습니다. 옛 제국법과 비슷한 게 많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주요 골자는 같으니까요. 여기나 거기나, 나타 시절에 완성된 법규를 이어받았으니.”
가하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기술을 양도해 드리겠습니다. 그것으로 처리하고 싶은데, 어떻습니까?”
“사법 거래는…….”
“그게 목적이실 텐데요.”
가하란의 눈을 바라봤다. 거짓은 없어 보인다.
“말씀하신 대로 저희 목적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전에 증명이 필요해요.”
“제가 연합 도시의 적이 아니라는 증명 말씀이죠?”
“그렇습니다.”
이제부터는 논리가 아닌 억지의 영역이었다. 본국의 위험 요소가 아님을 증명하라.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강요하는 건 어떻게 해서든 가하란을 데려가야 하기 때문이다.
집결 수도는 단편적인 기술을 원하지 않는다. 마나 증발 장치, 나아가 가하란이 이룩한 모든 걸 탐내고 있었다.
하라면 해야 하는 게 관료의 몫이었다. 레치는 불합리하다는 걸 알면서도 밀어붙일 수밖에 없었다.
“우선 제 입장을 말씀드리죠. 전 서부의 적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지만 소속감이 있는 것도 아니죠. 동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사람이 중요하지, 땅이 중요하진 않거든요.”
“해석 여하에 따라 위험한 발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이니까요. 기술 이전. 이게 제가 양보할 수 있는 적정선입니다. 회로 집약에 관한 전반적인 지식을 공유해 드리죠. 물론 누굴 통해서 기술을 전파할지는 제가 결정합니다.”
“마나 증발 현상에 대해선…….”
“저는 그 기술을 침략 도구로 쓸 생각이 없습니다. 그건 어디까지나 방어책이니까요.”
“저는 믿습니다. 하지만 집결 도시의 생각은 다를 것입니다.”
“설득해 주시죠. 제 협조는 여기서 끝맺음할 생각입니다.”
가하란이 한 걸음 다가섰다.
“해결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서부가 아닌 동부에. 준비도 끝마쳤으니 슬슬 떠나야 하고요.”
“떠나기 전에 집결 수도에 들르시는 건 어떨까요?”
“제 일을 마무리 지은 후에 찾아가겠습니다. 안 그래도 연합 도시의 마법 공학이 궁금하니까요.”
“의견 조율은 불가할까요?”
“말씀드렸다시피 이게 제 마지막 제안입니다. 거절하신다면…….”
가하란의 목소리가 천둥처럼 크게 들렸다. 거절하면 연합 도시에, 집결 수도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걸까?
광범위한 마나 증발 현상이 서부 전역에서 일어난다면 그라운드 제로 때처럼 대혼란이 찾아들 것이다.
이제 사람들은 마나와, 마법 공학과 뗄 수 없는 삶을 살게 됐으니까.
“도망쳐야겠네요.”
가하란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도망이란 단어에 살짝 얼이 빠졌다.
“국가를 상대로 대치할 생각 없어요. 객기 부릴 마음도 없고요. 제가 발악하면 여기 있는 분들이 다치겠죠. 그건 원하는 바가 아닙니다. 그러니 안전하게 도망칠 겁니다.”
“저희는…….”
“장담하는데, 막을 수 없을 겁니다. 여기 있는 모두가 동부로 넘어가게 될 것이고요. 물론 협상 내용은 연합 도시 전역에 퍼질 겁니다. 머니페니를 통해서요. 집결 수도가 억지를 부려 중요 인적 자원이 동부로 넘어갔다, 뭐 이런 식으로 소문이 나겠죠.”
다수결로 통치자가 결정되는 국가에서 저런 소문은 너무나도 위험했다.
안 그래도 이목이 집중된 사안이었다. 게다가 머니페니를 통해 이야기가 전파된다면 서부 전역에 소문이 돌기까지 보름도 걸리지 않을 것이다.
“가능하시겠어요? 저분들의 발목을 잡는 게.”
가하란이 타챠와 필렌을 바라보며 물었다. 레치는 울고 싶어졌다.
“협상안을 받아들이세요. 제가 귀국의 위험 인자가 아님을 높으신 분들에게 설명하시고요.”
“그분들은 납득하지 않을 겁니다.”
“죄송하지만, 레치 씨는 선택권이 없습니다. 협상안을 제공하는 건 어디까지나 제가 신세 진 분들을 위한 거니까요.”
“당신이 이대로 떠나면 당신에게 협력한 사람들, 특히 주변 정비소와 제조소 쪽 사람들이 아주 불편해질 겁니다.”
“그렇게 되겠죠. 그리고 그걸 막아내는 게 레치 씨의 몫이고요.”
“그건…….”
레치가 말을 끝내기 전, 가하란이 고개를 들었다.
그림자가 땅을 잡아먹고 있었다.
레치는 불길한 예감을 받으며 목을 꺾었다.
상공을 가로질러 지나갔던 하늘석이 다시 돌아왔다. 그 거대한 동체가 금방이라도 추락할 것처럼 가까이 떠 있었다.
하늘석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
이해 불가한 물질에 통하는 단 하나의 사실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사실이 거짓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어떻게…….”
가쁜 숨을 몰아쉬며 정지한 하늘석을 바라보다가 다시 가하란에게 시선을 주었다.
우연 같은 게 아니다.
가하란의 표정은 평온했다. 머리 위에 하늘석이 있는 게 지극히 당연하다는 듯이.
“저는 레치 씨를 믿겠습니다. 기술 이전은 제 볼일이 끝나고 나서, 선배님, 아니 웍센 님을 통해 이행하겠습니다. 그때까지 윗분들을 잘 설득해 주세요.”
하늘석이 고도를 높였다.
짙게 드리워졌던 그림자도 서서히 옅어졌다. 그늘에 잠겼던 가하란의 얼굴이 다시 밝아졌다.
그 밝은 얼굴이 산의 전사만큼이나 두렵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저런 게 수도 중심지에 떨어지면 어떻게 될까요.”
레치는 힘없는 목소리를 냈다.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저건 무기가 아니니까요.”
“그 누구도 그 말을 믿지 않을 겁니다.”
“괜찮습니다. 믿음은 중요하지 않아요.”
가하란이 손을 내밀었다.
“뒷정리 부탁드리겠습니다. 레치 씨.”
레치는 그 손을 붙잡을 수밖에 없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