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471화 (471/558)

제471화

“봤다고 하니 그건 그렇다 치죠. 근데 내가 계속 말하지 않았나요? 그 애는 지금 여기 없다고.”

“예, 알고 있습니다. 두 달 전, 해더 트럭 한 대와 트레일러 한 대, 그리고 거병 한 기를 이끌고 이곳을 떠났으니까요.”

“잘 아는 분이 왜 계속 여기를 두드릴까.”

이름이 레치라고 했던가, 리치라고 했던가. 대충 들어서 기억이 나질 않는 남자의 목을 향해 모종삽 끝을 겨눴다.

뒤쪽에 서 있던 군인 셋이 허겁지겁 창을 내밀었다. 남자가 눈을 찌푸리며 군인들을 바라봤다.

“예의 없게 무슨 짓들인가? 자네들 생각이란 걸 좀 하게.”

군인들이 움찔하며 창을 내렸다.

필렌은 살짝 미소 지었다.

“사람 사는 건 역시 다 비슷하네요. 윗사람 비위 맞추느라 고생하는 거.”

“죄송합니다. 이 친구들이 젊은 혈기에 나선 거니 이해해 주시길. 아무튼 저흰 귀 정비소에 위해를 가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저, 그 정체불명의 현상을 설명해 주길 바랄 뿐이죠.”

사무적인 웃음으로 화답하는 남자였다.

“이름이 뭐라고 했죠? 레치? 리치?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방금 들은 것도 까먹네요.”

“제대로 기억하고 계십니다. 위성 도시 통합 관리부 3팀 담당자 레치입니다. 아른고개의 푸른기사 님.”

옛 이름을 들먹이는 걸 보면 속깨나 상한 모양이었다.

“우리 팀장은 유능하신 분이겠죠. 똑똑하시고 눈치도 좋으시고. 그러니 내 말을 이해했을 거라 믿어요. 난 이상 현상에 대해 아는 게 없고, 말해줄 것도 없다.”

“저도 필렌 님을 믿습니다. 한때 필렌 님과 마주했던 상대로서 믿지 않을 수가 없죠. 하지만, 정황이란 게…….”

“따라와요.”

모종삽을 땅에 던지고 몸을 돌렸다. 레치가 왼쪽에 붙었다.

“협조 감사드립니다.”

“만족할 때까지 뒤져보고, 없다는 걸 그 눈으로 확인한 뒤에 조용히 돌아가요.”

정비소에 도착했다. 연락을 받았는지 비일과 얀스가 나와 있었다. 부하들도 눈에 잔뜩 힘을 준 채 대기 중이었다.

“열어드려. 싹 훑어볼 수 있도록.”

필렌은 턱짓을 섞어 말했다. 비일과 얀스가 옆으로 비켜서자 레치가 데려온 사람들이 정비소로 진입했다.

“각별히 신경 쓰겠습니다.”

“물건이나 망가트리지 마요. 비용 청구서 받기 싫으면.”

레치를 내버려 둔 채 휴게실로 들어갔다. 뒤따라온 비일이 말을 걸었다.

“지하 창고까지 다 훑어볼 거 같은데, 정말 내버려 둬도 될까요?”

“문제가 되는 건 가하란이 만든 것뿐이야. 그리고 그런 물건들은 싹 챙겨서 떠났고.”

미처 챙기지 못한 주요한 물품은 웍센이 정리했을 것이다. 레치가 바닥을 뒤집고 벽을 허물어도 찾아낼 수 있는 건 없다.

3시간 정도 지난 후, 레치가 휴게실로 들어왔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웃는 얼굴이었다.

“저희 측 설비 관리자의 의견을 토대로 점검을 끝냈습니다.”

“어때요? 뭐라도 건졌나요?”

“위험 설비라 판단되는 건 없더군요. 필렌 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 정비소 내에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거 아쉽게 됐네요. 뭐라도 가져가야 성과를 올리실 텐데.”

“아닙니다. 저야 1차 조사관으로서 역할을 다했으니까요.”

1차라는 말에 눈이 씰룩거렸다. 필렌은 빈 찻잔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1차 다음엔 2차겠죠. 뒤에 또 있나요?”

“관계 조사가 나올 겁니다. 인적, 물적. 이 정비소를 통해 이동된 모든 것들에 대해 면밀한 검증이 이뤄질 겁니다.”

“하나를 내줬으면 그쪽에서도 하나를 양보해야죠. 마당으로 초대했더니 이젠 안방 문을 열라고 하네요?”

“집결 수도의 뜻입니다. 저희는 가하란이란 자에 대해 반드시 알아낼 것입니다. 그가 일으킨 기현상에 전 국민이 두려움에 떨고 있으니까요.”

“골칫거리인 대마수가 사라졌는데 누가 두려워하나요?”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죠. 장벽 역할을 한 대마수의 증발. 이게 동부 타리움이 벌인 프로젝트의 일환이라면, 저희도 대응 방안을 마련해야 하니까요.”

필렌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봐요. 목격담이 많다고 했잖아요? 그 마수들이 어딜 목표로 뛰어들었는지 잊었어요?”

“압니다. 이곳과 주변 도시를 향해 달려들었죠.”

“잘 아시네요. 당신들 의견대로라면 그 기현상을 가하란이 일으켰고, 그 덕분에 마수가 사라졌다면…… 가하란이야말로 귀국의 영웅이죠.”

레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겠군요. 그러니 만찬에 초대할까 합니다. 영웅으로서.”

“트집 잡을 게 있으면 죄인으로 끌고 가고, 없으면 영웅으로 끌고 가겠다?”

“끌고 가는 게 아닙니다. 초대죠.”

필렌은 티스푼으로 식탁을 툭툭 내리쳤다.

“대놓고 욕심을 내니까 뭐라 할 말이 없네. 어떻게 해서든 가하란의 기술을 국가에 귀속시키겠다?”

“도시법에 의거해 일정 수준 이상의 마법 공학은 도시, 혹은 집결 수도의 관리를 받아야 합니다.”

“가하란은 귀국의 시민이 아닌데.”

“마법 공학에 한해서는 속지주의라.”

“일정 수준의 마법 공학이라 했는데, 그 수준을 결정짓는 건 누구죠?”

“저희 쪽 전문가가 판단합니다.”

“거참, 편리한 법규네요. 내가 이 자리에서 싫다고 하면, 뭘 할 생각이죠?”

“적법한 절차를 거부하면 도시법에 따라 강제력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무력으로 뭔가를 하시겠다?”

필렌은 티스푼으로 창밖에 있는 거병들을 가리켰다.

“우리 애들이 이 도시에서 날뛰면 피해가 막심할 텐데, 감당할 수 있어요?”

“괜찮습니다. 이미 주변에 타격대가 배치돼 있습니다. H-32 제압 그물 80세트. 거병 120기. 르완의 용병을 상대하면 분명 저희 측에도 피해가 생기겠지만, 장담하죠.”

레치가 식탁에 손을 올리며 얼굴을 가까이 댔다.

“이 정비소에 살아 움직이는 건 단 하나도 남지 않을 겁니다. 단 하나도.”

“살벌하네요. 부담스러우니까 얼굴은 치우고.”

“필렌 님의 우아함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뒤로 한 걸음 물러선 레치가 넥타이를 고쳐 맸다. 여기나 동부나, 넥타이쟁이들은 상대하기 껄끄럽다.

“가하란이 뭘 했는지 난 아는 게 없어요.”

“그런 것 같군요.”

“하지만 모른다고 해서 그 애를 내줄 생각도 없고요.”

“필렌 님께서 아끼는 사람이라. 정말 부럽군요.”

“부러울 것까진 없고.”

필렌은 창밖을 보았다.

두 달 전 가하란이 떠날 때 특별히 남긴 말은 없었다. 정리해서 돌아오는 날, 그때 설명하겠다고 했으니까.

그때만 해도 짧은 일정이라 여겼는데, 벌써 두 달이 지난 것이다.

예상 못 한 일이 생겨 일정이 길어진 걸까, 아니면 본래 계획했던 대로 소화해 내고 있는 걸까.

마침 하우스가 팔을 벅벅 긁으며 창문 앞을 지나갔다. 일이 뜻대로 진행되지 않았다는 신호.

레치가 담담하게 말했다.

“르완의 용병분들께서 멀리 산책하러 나가시더군요. 걱정돼 저희가 호위를 붙였습니다. 지금쯤이면 안전하게 복귀 중일 거니 걱정 놓으시길.”

“보기보다 수완이 좋네요.”

“누굴 상대 중인지 잘 알고 있으니까요. 필렌 님을 모시는데 이 정도는 해야죠.”

쓴웃음을 흘렸다.

가하란에게 미리 경고하는 것도 실패. 타국 영토 안에서 멋대로 행동할 수도 없었다.

용병단을 움직이면 적대적 행위로 간주, 피를 보게 될 테니까.

“20년 전에는 신사들이 많았는데.”

“염려하는 일 안 생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제국이 있던 시절, 우리 관료들은 ‘노력’이란 말을 참 자주 썼죠. 그놈들에게 노력은 안 하겠다는 뜻이었데, 여긴 어떤가요?”

“노력해 보겠습니다.”

레치가 짧게 인사한 후 물러날 때였다.

밖이 어두워졌다. 소란이 일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밖으로 나왔다.

“저거 왜 저래.”

필렌은 스치듯이 낮게 나는 하늘석을 바라봤다. 떨어지는 게 아닐까 걱정될 정도였다.

“조사반 호출해!”

“이미 연락해 뒀습니다.”

도시의 관료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하늘석의 이상 행보가 심히 걱정된 모양이다.

이대로 관심이 하늘석 쪽으로 기울면 좋을 텐데.

저공 비행하며 도심지로 날아가는 하늘석을 바라볼 때였다.

지면을 긁는 바퀴 소리가 들렸다. 안 좋은 예감에 고개를 돌렸다. 멀리서 해더 트럭이 굴러오고 있었다.

“저희가 노력할 수 있게 됐군요.”

레치가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앞으로 나섰다. 필렌은 레치의 어깨를 붙잡았다.

“구금은 꿈도 꾸지 마요. 불합리하다고 판단되면 그땐 정말 작은 전쟁을 치러야 할 겁니다.”

“그 판단은 누가 하죠?”

“나.”

필렌은 눈을 얇게 뜨며 레치를 응시했다.

“그 또한 노력해 보죠.”

해더 트럭이 정비소 앞에서 멈췄다. 문이 열리고 가하란이 내려왔다.

좌우로 밀려든 도시 관료들을 신경 쓰지도 않은 채 곧장 필렌 앞으로 걸어왔다.

레치가 앞을 막으며 손을 내밀었다.

“가하란 씨 맞으십니까?”

가하란이 레치를 바라보며 말했다.

“예, 맞습니다. 레치 씨.”

레치의 표정이 굳는 게 보였다.

“필렌 님께 먼저 인사를 올려야 해서 그러는데, 잠시 기다려 주시겠어요?”

“……그러시죠.”

필렌은 가하란과 아직 트럭에 타고 있는 밀레나를 번갈아 봤다.

“어떻게 안 거니? 우리 애들하고 못 만났을 텐데.”

“사흘 전에 주변 움직임이 이상하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래서 엔엔 님을 통해 상황을 알아봤죠.”

“엔엔 님?”

“예. 이곳 머니페니와 친분이 있으세요. 그리고 머니페니는 국가 중추와 닿아 있죠.”

필렌은 웃음을 지었다.

다 알고도 온 것이다. 대비가 끝났다는 의미이고.

“갔던 일은?”

“잘 정리했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드는 가하란이었다. 시선이 닿는 곳에 하늘석이 있었다.

“설마…….”

“자세한 건 저분들 돌려보내고 설명해 드릴게요.”

“말로 타이를 순 없을 거다. 자기 일 똑바로 하는 인간이거든.”

“하하, 정 안 되면 빌어봐야죠.”

가하란이 레치를 향해 걸었다. 필렌은 거병 옆에서 대기 중인 하우스에게 눈짓을 줬다. 슬쩍 장비를 챙기던 부하들이 손을 놓았다.

일단 지켜보면 되겠지.

* * *

레치는 남자, 가하란의 손을 바라봤다. 장갑을 낀 채 악수를 청하는 건 어느 나라 예의일까. 동부에서도 이러진 않을 텐데.

“죄송합니다. 손이 흉해서.”

눈빛을 읽었는지 가하란이 장갑을 벗었다. 레치는 흠칫했다. 불로 짓이긴 듯한 손이 나타났다.

“제가 실례했습니다.”

곧바로 사과하고 가하란의 손을 붙잡았다.

“위성 도시 통합 관리부 3팀의 레치입니다. 제가 방문한 이유는…….”

“알고 있습니다. 접경 지역에서 발생한 현상 때문이겠죠.”

“다수의 목격자에 의하면 당시 현장에는 가하란 씨의 기체와 저기 있는 해더 트럭 및 트레일러가 있었다고 합니다. 우연은 아니었겠죠.”

“그럼에도 우연이라 한다면 전 어떤 대우를 받게 될까요?”

“아주 긴 조사가 진행될 것입니다. 다른 곳도 아닌 자국 내에서 발생한 위험 현상입니다. 국가 안보와 직결된 만큼 조사가 다소 거칠 수도 있겠죠.”

“거부권은 없겠죠?”

“거부하셔도 됩니다. 그렇게 되면 저희는 강제로 집행할 뿐입니다.”

“명목뿐인 거부권이군요.”

레치는 트레일러를 바라봤다. 정체불명의 몸통뿐인 거병, 그리고 이쪽을 바라보며 이리저리 몸을 틀고 있는 거병.

초소형 거병은 트레일러 안에 있는 걸까?

“기술 유출은 없었습니다. 모두 독자적으로 개발한 것이니까요.”

“그 또한 알고는 있습니다. 하지만 당국의 제조 시설을 사용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그 과정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을지도 모르죠.”

“있었을지도 모른다. 무서운 말씀을 하시네요.”

콰아앙!

대화 도중 들려온 폭음에 레치는 얼굴을 굳히며 고개를 돌렸다.

설마 필렌이 움직인 걸까?

하지만 필렌은 어깨만 으쓱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시야에 들어온 용병들도 별다른 움직임이 없다.

그렇다면 어디서?

“내가 내 식당에 가겠다는데 왜 막는지 모르겠군.”

쿵, 소리와 함께 거병 팔 한 쪽이 레치 발 앞에 떨어졌다. 통합 관리부 소속 거병.

레치는 터벅터벅 걸어오는 자를 바라봤다.

거대한 창, 반짝이는 비늘, 성질이 더러워 보이는 눈, 그리고 축 늘어진 꼬리.

“꺼져라.”

산의 전사가 창대로 바닥을 찍으며 말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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