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470화 (470/558)

제470화

“들은 대로 좀 복잡하네.”

이네빌이 불빛이 솟구치는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샬롯은 상처 입은 발로 지면을 툭툭 찼다. 통증이 완전히 사라졌다.

“빨리 가야 해. 그놈들 작정하고 왔어.”

오라클 거병에 베테랑 군인까지.

기습은 실패로 돌아갔으니 본대와 합류해 적의 공세를 막아내야 했다.

걷잡을 수 없이 상황이 악화된다면 아리엘만이라도 대피시켜야 하고.

“괜찮아. 아리엘은 죽지 않을 거야. 양측 모두 피해가 크긴 하겠지만.”

“양측 모두?”

오라클 거병이 진을 치고 있던 숲속에서 섬광이 터져 나왔다. 은은한 마나 파장이 몸을 휩쓸고 지나갔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이네빌을 바라봤다. 설명이 필요했다.

“사다리 정무관과 스토아의 유령들이야.”

“그게 무슨…….”

이네빌이 다가와 부축해 줬다. 움직일 수 있다고 말해도 고개를 저었다.

“통증을 완화한 거지 치료된 건 아니야. 그 상태로 무리해서 움직이면 상처가 벌어질 수도 있어.”

억지 부릴 때는 아닌 듯했다. 이네빌의 부축을 받으며 걸음을 뗐다.

“아르드헨이야?”

사다리 정무관과 스토아의 유령.

둘 다 제국이 멸망하면서 자취를 감춘 자들이었다. 황제 직속이었으나 그 누구도 흔적을 잡아내지 못했다.

“맞아. 이틀 늦은 것도 저쪽하고 시간을 맞추느라 그런 거야.”

“지원 병력을 붙여줄 거면 애초에 사절단에 참가시키지.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말했잖아. 양측 모두 피해가 클 거라고.”

“설마…….”

“사절단 구성 인원은 대부분 아리엘 측 사람들이지. 오라클 쪽은 아마 뜻이 맞은 타리움 의원들이 뒤에 있을 거고.”

“우릴 미끼로 써서 쥐새끼를 쳤다? 진짜 그 인간 마음에 안 들어. 그러다 아리엘이 죽게 되면?”

“그건 그것대로 나쁘지 않다고 생각할걸? 공석이 된 시장 자리. 그 역시 탐나는 물건이니까.”

“상종하기도 싫어.”

“알면서도 다들 곁에 두는 거잖아. 척지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아리엘도 마찬가지고.”

콰앙!

폭음이 나무 사이를 비집고 전해져 왔다. 한 박자 늦게 낙엽 섞인 먼지바람이 불어왔다.

연약해진 바람에게 부탁해 주변을 환기했다. 먼지가 가라앉으며 전방 시야가 트였다.

“박살이 났네.”

무슨 짓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트레일러 세 대가 반파돼 있었다.

오라클 부대를 운용하려면 거병에 마나를 공급해 줄 장치가 필수였다. 트레일러가 그 핵심 장치이고.

“원거리 사격은 불가능해졌어.”

육탄전으로 노선을 바꿨는지, 오라클 거병이 본대를 향해 뛰어가고 있었다.

백병전이라면 해볼 만했다. 율의 지휘를 받는 노련한 거병 기사들이라면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도 합류해야 해.”

“아니. 난 널 지키는 게 우선이야.”

이네빌이 말했다. 샬롯은 눈을 얇게 뜨며 이네빌을 쏘아봤다.

“언니가 보호하던 꼬마는 여기 없어.”

“그래서 그렇게 다쳤어?”

“그건!”

“우리가 합류 안 해도 괜찮아. 그들이 뒤쪽에서 도와주고 있으니까. 그리고 비비넬도 왔고.”

“비비넬도?”

본대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얇은 검을 들고 있는 검사가 보였다. 두려움을 제거당한 사람처럼 거병 옆을 비집고 들어가, 거병과 호흡을 맞추는 지원병을 가르고 있었다.

비비넬이었다.

“여전하네.”

부담스러워서 자주 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가문을 위해 일해준 사람이었다. 꼬일 대로 꼬여버린 ‘그 사건’이 없었다면 충실한 기사로서 가문을 지탱해 줬을 것이다.

쿠웅!

오라클 거병이 뒤로 물러서다가 넘어졌다. 사방으로 퍼져 있던 오라클 거병이 한데 뭉쳤다.

“물러날 것 같네.”

이네빌의 말대로 대열을 갖춰 후퇴하는 오라클 부대였다.

끝난 건가, 한숨 돌릴 때였다.

바람이 비명을 질렀다. 고개가 뒤로 돌아가기도 전에 이네빌의 검이 움직였다.

따앙!

볼트를 튕겨낸 검신이 매섭게 흔들렸다.

이네빌이 발을 굴렀다. 사냥감을 낚아채 다시 공중으로 오르는 매처럼 나무 위에 있는 저격수를 향해 뛰어들었다.

샬롯은 손을 크게 흔들었다. 도망치려는 저격수의 발을 바람으로 붙들었다.

윽 하는 짧은 탄식과 함께 저격수의 몸이 기울어졌다.

그리고 검이 궤적을 그렸다.

분리된 저격수의 목과 몸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네빌은 나무 위에서 주변을 훑어본 후 지면으로 내려왔다.

“어떻게 안 거야? 바람보다 더 빨리 알아챈 거 같은데.”

다가온 이네빌을 향해 물었다.

“훈련하다 보면 늘어. 총수님의 검은 예고도 없이 날아드니까.”

아.

단번에 이해가 됐다.

이네빌이 누구와 함께 여행했는지 잠시 잊고 있었다.

“구치 아저씨는 요즘 어때?”

“쉬고 계셔. 최근 고민이 많아지신 것 같기도 해.”

“왜?”

“얼마 전에 오랜 지인을 만났는데, 상대방이 한참을 못 알아봤대. 기억 속에 있는 얼굴에서 변하질 않았으니까.”

“그럴만하지.”

“나도 몇 년 후면 그 아저씨보다 늙어 보이겠지.”

“나도 그렇게 되겠네.”

“그래서 걱정이 많은 것 같아. 자기한테 내려진 불로가 축복인지, 아니면 저주인지 모르겠다고.”

“오래 살면 좋은 거지, 뭐. 구치 아저씨는 걱정이 많아서 탈이야. 다음에 만나면 내가 위로해 줘야겠어.”

상황이 정리된 탓일까, 마음이 놓이며 실없는 소리가 나왔다.

어수선한 본대를 바라보며 걸음을 뗄 때였다. 숲 이곳저곳에서 사람들이 튀어나왔다. 바람들조차 제대로 감지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네빌은 알고 있었는지 시선을 정면에 선 남자한테 고정했다.

“우리 일은 끝났습니다. 나머진 그쪽이 정리하시죠.”

“옛 황제님께 잘 전해주세요. 차라리 직접 손을 써서 머릿수를 줄이라고.”

“전하기야 하겠지만, 그분이 말을 들을까요? 푸른사자의 의중은 누구도 알 수 없으니까요.”

손에 반짝이는 장갑을 낀 남자가 고갯짓으로 인사를 남긴 후 사라졌다. 다른 자들도 남자의 뒤를 따라갔다.

사다리 정무관, 그리고 스토아의 유령.

“저 사람들을 이용하면 의원들 제거하는 건 일도 아닐 텐데, 아르드헨은 대체 무슨 꿍꿍이일까?”

“고집, 아집. 어쩌면 나름의 정당성. 근데 그 인간을 이해하려 들지 마. 형제를 숙청하고 황제에 오른 사람을 이해하려 들려면 머리만 아파.”

“욕심 덩어리. 랜더 아저씨는 그 인간이 뭐 좋다고 친구 하는 건지.”

“우리가 모르는 일면이 있겠지. 근데 그거 알아? 네가 그렇게 싫어하는 황제의 가장 가까운 검이 총수님이었다는 거.”

“랜더 아저씨는 타당한 이유가 있었으니까 검을 빌려줬을 거야. 미치광이 황제처럼 자기 욕심 때문에 쓰는 일은 없을 거라고. 우리 아빠처럼…….”

말을 그만뒀다.

들춰봤자 남는 건 아픔과 후회뿐이니까. 이네빌도 눈치챘는지 화제를 바꿨다.

“산카 님은 여전히 대답이 없으셔?”

“없어. 조용하기만 해. 멀어질 거라 말은 했지만, 이렇게 갑자기 사라질 줄은 몰랐어.”

샬롯은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사실 엄청 편해. 잔소리를 안 들어도 되고, 바람을 마음껏 써도 되니까. 산카가 옆에 있어봐. 이거 해선 안 된다, 저거 해선 안 된다. 오늘 같은 경우도 위험하니까 물러서라 어쩌고저쩌고.”

주절주절 떠들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 했는데 기운이 점점 빠져나갔다.

“……내가 싫어진 걸까?”

“아닐 거야. 그 누구보다 널 생각하는 분이니까. 이유가 있겠지.”

샬롯은 눈앞으로 바짝 다가온 산맥을 바라봤다. 저 너머에 연합 도시가 있다.

“밀레나 언니는 잘 도착했을까? 잘 도착했겠지? 언니라면 분명 저 너머에서 잘 지내고 있을 거야.”

밀레나가 둔을 떠난 지도 1년 가까이 됐다. 가하란을 찾겠다는 뜬금없는 선언. 몇 번이고 설득해 붙잡으려 했으나 언니의 마음을 돌리지 못했다.

“그 사람에 대해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칼리고 씨 말대로라면 앞가림은 할 테니 괜찮겠지.”

“뭐가 됐든 언니가 무사했으면 좋겠어.”

이네빌과 함께 본대에 도착했다.

사람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부상자를 한데 모아 관리했고, 시신은 수습해 유품을 거두었다.

“…….”

샬롯은 차갑게 식은 수행원 얼굴에 손을 댔다. 입에 맞을 거라며 수시로 간식을 주던 사람이었다.

“친한 사람이야?”

이네빌이 곁에서 물었다.

“친하다고 해야 할지, 그렇게 친하진 않다고 해야 할지.”

사람들이 시신 옆으로 다가왔다. 들것에 실린 시신이 균열 아래로 사라졌다.

시신을 수습해 가족에게 인도할 정도로 여유롭지 못한 상황이었다.

“샬롯!”

율이 다가왔다. 꼴이 말이 아니었다. 여기저기 상처를 입었는데, 당장에라도 누워서 쉬어야 할 것 같았다.

“괜찮아?”

“나보다는 언니를 더 신경 써야 할 것 같은데?”

“이 정도는 익숙해. 훈련받을 땐 이것보다 더했어.”

“스콜라는 대체 뭐 하는 곳이야?”

율이 살짝 웃은 뒤 이네빌과 시선을 교환했다.

“인식표 없던 그 사람들, 이네빌 씨가 데려온 건가요?”

“제가 데려온 건 아니에요.”

이네빌이 조력자에 대해 설명했다. 듣자마자 율이 얼굴을 찌푸렸다.

“이걸 빚이라 생각할 정도로 염치없는 인간은 아니겠죠?”

“아르드헨이라면 그러고도 남겠죠.”

“일단 시장님께 전해야겠네요.”

샬롯은 근처 군의관에게 피해 정도를 물었다.

사망 110, 부상 80.

중증 부상자 수는 절반에 가까운 38명.

복귀 부대가 꾸려질 것이다.

사다리 정무관이 물러난 걸 보면 2차 습격은 없을 테지.

정비 중인 거병으로 시선을 던졌다. 완파된 거병이 여섯 기였다. 첫 기습 공격에 손도 못 쓰고 당한 것이 컸다.

마수를 사냥하던 마나포에 직접 당해보니 치가 떨렸다. 전쟁 양상을 완전히 바꿔버릴 병기였다.

질량으로 밀어붙이던 거대 병기 시대는 완전히 끝난 건가.

적이 규모를 최소화한 상태라 다행이지, 만약 발사포가 다섯 대 이상 갖춰졌다면…….

“정비를 마치는 대로 바로 출발할 겁니다. 복귀 부대는 소른 대령이 담당할 겁니다.”

아리엘이었다.

다들 예상했다는 듯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성과가 있어야 할 텐데.”

샬롯은 난자된 천막을 보며 말했다.

위험을 감수하고 오른 길이었다.

무엇이 됐든 거머쥐고 돌아가야 할 것이다.

한시적이라도 평화 협정을 맺을 수 있다면 전쟁광들이 날뛰는 걸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내부 문제야 이후에 조율하면 될 일이고.

“진짜 지긋지긋해.”

샬롯은 전장의 냄새를 바람으로 밀어낸 후 작업 중인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 * *

그림자가 모종을 가렸다.

필렌은 혀를 짧게 차고 고개를 들었다.

집결 수도의 엠블럼을 보란 듯이 어깨에 찬 남자가 방긋 웃고 있었다.

“없다니까 그러네. 말귀가 이렇게 어두워서 국정은 어떻게 보나 몰라.”

썩은 싹을 툭 쳐내며 말했다.

“누차 말씀드렸지만, 공식 보고서가 저희한테 도착했습니다. 다수의 목격담 역시 전해 들었고요.”

“그래요.”

필렌은 몸을 일으켰다. 마주 선 남자가 자신의 수염을 매만지며 더욱 짙게 웃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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