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9화
“문제를 외부로 돌린다. 뻔한 수작이지만, 그만큼 잘 먹히니까. 제발 우리 의원님들이 정신을 차려줬으면 하는데.”
율은 아리엘의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제국이 몰락하고 클랜과 시민을 중심으로 도시 국가가 재편성됐을 때만 해도 혼란이 길게 이어질 줄 알았다.
하지만 분배소와 마전기의 등장이 모든 걸 바꿔 놓았다.
시의회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마전기의 필요성과 편의성을 알렸고, 사람들은 손쉽게 이용할 수 있는 마나에서 미래를 발견했다.
기계인형의 보급, 마법 공학의 대중화.
그라운드 제로가 지면에 새긴 상처는 여전했으나 사람들의 마음은 빠르게 아물었다.
기술의 힘으로, 지식의 힘으로.
10년.
혼란은 잠식됐고 평화가 눌러앉았다. 그리고 늘 그래왔다는 듯 평화가 분쟁을 야기했다.
아리엘이 사절단을 꾸린다고 했을 때 소속 의원들은 올 게 왔다는 얼굴이었다.
분배소 이권, 도시 확충, 거병 개발 인력.
한때는 안전을 위해 긴밀하게 관계를 유지했던 도시들이 이제는 과거에 영토전을 벌이던 때처럼 경계하기 시작했다.
타리움의 중재가 없었더라면 몇몇 도시는 전면전을 벌였을 것이다.
소규모 전쟁을 생각할 만큼 여건이 나아진 것이다. 빼앗아 몸집을 불려야겠다는 욕심이 고개를 들 정도로 여유가 생긴 것이다.
“분명 시민을 중심으로 시의회가 구성됐을 때 다들 이렇게 말했잖아. ‘쓸데없는 분쟁의 역사는 오늘로 끝났다. 야욕으로 똘똘 뭉친 귀족과 달리 우리는 함께하는 가치를 알고 있다.’”
율은 성도에서 울려 퍼지던 목소리를 떠올렸다. 주먹을 불끈 쥐고 단상에서 외치던 남자를.
“그랬었지.”
아리엘이 살짝 웃었다.
“달라진 건 없어. 권력의 주체가 바뀌었을 뿐. 아니, 그다지 바뀌지도 않았지. 나만 해도 옛 귀족의 잔재니까.”
“언니는 다르지.”
“과연 다를까? 나 또한 욕심이 나서 사절단을 꾸린 거야. 너도 알고 있잖아.”
“남이 포장해 줄 땐 그냥 고개를 끄덕이면 돼.”
매서운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머지않아 겨울이 들이닥칠 것이다.
“언니. 만약 연합 도시가 정말로 전쟁을 준비 중이라면 그땐 어쩔 생각이야?”
“설득해 봐야지. 정 안되면 협박도 해보고.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전쟁은 아니야. 그들이 진정으로 전쟁을 준비 중이었다면, 그런 식으로 신기술을 유출했을 리 없어. 우리에게 대응 시간을 너무나도 많이 주게 되니까.”
신기술이란 말에 율은 침음을 삼켰다. 연합 도시 국경 지대에서 목격된 마나 증발 현상.
“연합 도시의 기술이 아니라면 마나를 지워버린 그 장치, 그건 누가 개발한 걸까? 그런 건 국가 단위의 사업일 텐데.”
“그게 골치 아프다는 거야. 우리가 모르는 소규모 단체, 혹은 개인의 힘일 수도 있으니까.”
개인의 힘.
율은 한 사람이 어떤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지 알고 있었다.
성도를 구한 마스터 아낙스만 해도 일반인이 보기에는 인지를 초월한 자였다.
그런 아낙스보다 위 단계에 있는 것이 총수와 마도사였다. 무력이 아닌 다른 종류의 힘까지 생각하면 동부 대륙만 해도 초월자라 불릴 이들이 몇 명이나 있었다.
연합 도시라고 없을까?
기적의 산물이라 부를 만한, 인지를 뛰어넘은 자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덴스 교수가 분배소와 마전기의 기틀을 잡아 시대를 바꿨듯, 연합 도시에서도 기술로 기적을 이뤄낸 자가 나타난 것이리라.
마나 증발 현상을 만들어낸 자가 국가 단체에 소속된 게 아니라 개별적으로 활동 중이라면?
머리가 복잡해졌다.
변수가 워낙 많았다.
“연합 도시도 많이 바뀌었겠지?”
“우리만큼이나 변했을지도 몰라. 총무님을 통해 가끔 소식이 전해지긴 하는데, 대부분 변방의 내용이라 도움은 안 되고.”
아리엘이 한숨을 내쉴 때였다.
날카로운 매의 울음이 천막을 비집고 들어왔다. 율은 아리엘과 눈빛을 교환한 후 곧바로 밖으로 나왔다.
랍파 세 명이 한데 뭉쳐 있는 게 보였다. 그들은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들고 있었다.
“무슨 일이죠?”
율이 다가가 물었다.
“……짝이 갈 수 없는 하늘로 돌아갔습니다.”
랍파와 교감하는 매는 쉽게 죽지 않는다. 폭풍 속에서도 날개를 펴고 바람을 가르며 날 정도니까.
매가 죽었다는 건…….
“대비해야 합니다. 남동부 4km 근방. 척후대도 불러들여야 합니다.”
랍파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먼 밤하늘에 노란빛이 반짝였다. 빛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솟아올랐으며 서서히 가까워졌다.
“습격에 대비해!”
* * *
기분 나쁜 느낌이었다.
샬롯은 강하게 손짓해 전방으로 바람을 날려 보냈다. 숲을 헤집고 들어간 바람이 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안 좋아.”
율과 아리엘이 있을 천막을 바라봤다. 거병들이 편제대로 움직여 수비 대형을 갖추고 있었다.
“언제 오는 거야!”
고개를 돌려 어둠 저편을 바라봤다. 일정대로라면 이틀 전에 합류했어야 했다. 그런데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도중에 문제가 생긴 걸까?
하필 이럴 때?
“샬롯!”
율이었다. 긴장한 채 숲을 바라본다.
“느낌이 안 좋아. 척후대 신호탄도 끊겼어. 랍파들도 마찬가지고.”
“이동 경로를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어.”
“그래서 못 빼는 거야?”
“지금 움직이면 오히려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 작정하고 덤벼드는 놈들이야. 퇴로는 계산해 뒀겠지.”
다시금 바람에게 속삭였다.
바람들이 와들와들 떨면서 전진했다. 숲으로 진입한 바람들이 아무런 얘기도 전해주지 않은 채 사라졌다.
“정령술도 대비해 놨어.”
매가 신호탄이 터지던 곳으로 날아갔다. 샬롯도 매의 비행을 눈으로 좇았다.
동시에 숲에서 낯선 매가 날아올랐다.
적군의 랍파다.
하늘로 손을 들어 올리고 바람을 쏘아 보냈다.
쏴아아, 밀려 나간 바람이 매를 뒤흔들었으나 매는 추락하지 않고 더 높은 곳으로 날아갔다.
손이 닿지 않는 거리였다.
서로의 위치를 확정한 상태.
그 순간.
샬롯은 고개를 틀었다. 바람이 갈라지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조심해!”
외치기 무섭게 보랏빛 섬광이 대기를 갈랐다. 일직선으로 쏘아진 빛은 열풍을 남긴 채 사라졌다.
휘청거리는 몸을 부여잡으며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
도열해 있던 거병 다섯 기가 녹아내리고 있었다. 체임버의 형태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장거리 마나 방출.”
샬롯이 이를 악물며 숲을 바라봤다. 시뻘겋게 타들어 가는 나무 저편에 묵빛 쇠막대기를 든 거병이 보였다.
오라클.
타리움의 최강 병력이라 할 수 있는 마법 거병 부대였다.
“최대 사거리는 600m였을 텐데.”
율이 얼굴을 찌푸린 채 말했다.
“전원 대피! 작전 C로 전환한다!”
율이 외침과 동시에 사람들이 흩어졌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후미를 붙잡히면 위험하겠으나 오라클을 상대로 위치를 고수하는 건 자살행위였다.
“최대한 막아볼게!”
율을 등지고 앞으로 뛰쳐나갔다.
어둠은 공평하다. 적의 시계도 줄어들었으니 단독 행동하면 발각되지 않을 것이다.
몸에 바람을 두르고 적진으로 진입했다. 녹아서 쓸 수 없게 된 포신을 내려놓고 재정비 중인 거병이 보였다.
시선을 뒤쪽으로 던졌다. 해더 트럭과 트레일러가 일곱, 케미럴 라인으로 보이는 거병이 서른 대.
이런 미친.
욕을 속으로 삼켰다.
말이 안 되는 전력이었다. 단 한 명의 도주자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하지만 사방으로 나뉘어 도주한다면 전부 쫓아갈 수 없을 텐데?
“감별 완료했습니다. 수신 상태 양호합니다. 추적 시작할까요?”
“3팀, 4팀은 바로 이동하고 우린 계획한 대로 전방에서 압박한다. 목표 제거가 최우선, 다른 생존자가 생긴다고 해도 목표만 제거하면 별문제 없다.”
감별? 수신 상태 양호?
뭔지는 모르겠으나 추적이란 말을 쓴 걸 보면 아리엘의 위치를 확정한 듯했다.
위험하다.
샬롯은 머리가 핑 돌 정도로 바람을 끌어모았다. 산카가 자취를 감춘 지금, 오라클의 거병을 단숨에 치워낼 순 없었다.
게다가 후방에 배치된 트레일러에서 바람이 질색하는 힘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직접 타격하는 건 힘들다.
그러니!
있는 힘껏 지면을 긁었다.
콰드드득, 바람이 땅을 뒤집어 버렸다. 나무들이 쓰러지며 길을 봉쇄했다.
“마나 분포도에 변화는 없습니다! 정령술사입니다!”
“샬롯이란 년이겠지. 대응팀 움직이고, 나머진 예정대로 진행한다.”
트레일러에서 기분 나쁜 힘이 분출됐다. 몸에 타격이 오는 건 아니었으나, 끈적거리며 달라붙는 느낌이었다.
설마?
위기를 감지한 순간 볼트가 날아들었다. 고목을 뚫어버릴 정도로 강력한 화살이 연속적으로 쏘아졌다.
쏴악!
몸 주변의 바람들이 단숨에 흩어졌다. 샬롯은 최대 속력으로 전장에서 벗어났다.
접근할 수가 없었다.
적을 식별하는 능력이 탁월했다.
윽, 허벅지 쪽에서 뜨거운 열기가 올라왔다. 정신없이 후퇴하느라 눈치채지 못했는데,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화살에 맞은 건 아니었다. 화살에 부서진 돌 파편이 튄 걸까? 부상의 원인은 알 수 없었다.
몸을 휘감았던 바람이 서서히 떠나갔다. 지면에 발이 닿았고, 체중이 실리는 순간 비명이 입을 비집고 나왔다.
생각보다 심한 상처였다.
방향을 틀었다. 본대로 이끌 수는 없었다.
“아픈 건 싫은데.”
허벅지를 꾹 누르며 비상용 패치를 붙였다. 진통 성분이 순식간에 스며들며 통증이 완화됐다. 패치에 중독되는 인간이 있으니 조심하라던 의술사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본대를 지휘하는 건 율이었다. 전략 담당관의 조언이 필요한데.
콰아앙!
폭음이 일어났다. 빌어먹을 오라클이 대놓고 마나를 방출한 것 같았다.
다 죽일 거니 숨길 필요도 없다는 건가?
“학회장, 이 미친 새끼.”
물론 학회장이 짓이 아닐 수도 있었다. 다른 의원과 손을 잡은 오라클 간부가 힘을 빌려줬을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어차피 책임자가 학회장이니, 학회장이 개새끼인 건 변함없다.
관리를 어떻게 한 거야!
“예산 증액을 그렇게 원하더니, 뒤로 저런 걸 만들려고 그랬나?”
습격을 예상했고 대비도 했다.
하지만 오라클 부대가, 그것도 대거병용 장비를 완벽하게 갖춘 오라클 부대가 튀어나올 줄이야.
“아니 어쩌면…….”
이건 학회장의 의사가 아니라, 타리움 전체의 의사일지도 모른다.
아리엘이 죽고 나면 스파우 도시는 붕 뜨게 될 거고, 그걸 나눠 먹는 건 이웃에 있는 의원들일 테니까.
만약 그렇다면.
“아르드헨이 진짜 죽일 놈이지.”
머리가 멍해진다.
통증이 사라지는 대신 머리가 멍청해지는 걸까?
부상 부위를 어루만지며 다시 움직였다. 아직 힘을 쓸 수 있었다. 놈들의 뒤를 노린다. 술래잡기라면 자신 있으니까.
쐐애액, 섬뜩한 파공음이 귀를 때렸다.
몸이 앞으로 쏠렸다. 낮아진 머리 위로 볼트가 지나갔다. 바람이 밀어주지 않았다면 머리가 뚫렸을 것이다.
“이쪽.”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숨통이 조여왔다. 마수를 상대하는 것과 인간을 상대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게다가 상대는 베테랑이었다.
인간 사냥꾼들.
위치를 숨길 수 없었다. 조금 전 트레일러에서 흘러나오던 불쾌한 힘이 여전히 몸에 달라붙어 있는 걸까?
어쩌지.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숨이 가빠왔다. 이런 식으로 죽고 싶지는 않았는데.
“산카.”
작게 불러봤으나 역시 대답이 없었다. 작별 인사도 못 하는 걸까?
그때였다.
“기습이다! 조심해!”
추적자들이 오히려 소리를 내며 뭉치기 시작했다. 샬롯은 나무에 기댄 채 고개만 살짝 뺐다.
어둠 사이에서 튀어나온 그림자가 적들을 베어 넘겼다.
망설임 없는 검술이었다.
볼트가 쏘아졌으나 그림자를 맞추진 못했다.
마지막 적군이 풀썩 쓰러졌다.
그림자가 검을 휙휙 털면서 다가왔다. 날뛰던 바람들이 얌전해졌다.
얼굴은 보이지 않으나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익숙한 냄새.
“늦은 거 아니야?”
샬롯은 안도의 한숨을 섞어 말했다.
“미안해. 일이 좀 있었어.”
이네빌이 검집에 검을 꽂아 넣으며 말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