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8화
“카트시의 본체가 상대 손에 넘어가면 위험하지 않을까요?”
엔엔이 질문했다.
-걱정하지 마요. 물리적인 수단으로 절 파괴할 수는 없으니까요. 겉을 둘러싼 청철은 그저 껍데기예요.
껍데기란 말에 엔엔이 눈을 깜빡였다. 분해하고 싶다는 욕구가 고개를 든 것 같았다.
-제 의식을 담을 만한 그릇을 준비해 주면, 전 그쪽으로 옮길게요.
마운이 말했다.
“아예 옮긴다고? 복사하는 게 아니라?”
가하란은 걱정을 담아 입을 열었다.
-에고를 복사하는 건 한계가 있어요. 에고는 두 번 이상 복사하면 걷잡을 수 없는 오류가 생겨요. 이건 올의 시스템을 통해 확인한 거니까 확실해요. 그리고 전 이미 한 번 복사했고요. 어머니가 그렇게 만든 건지, 아니면 방식의 불완전성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본체가 손상되면 끝이라는 얘기였다. 마운은 배제해야 하나,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위험하다는 건 알고 있어요. 예전의 저였다면 입도 벙긋 안 했을 거예요. 삭제될지도 모르는 일에 자원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죠.
보라색 구체가 벽면으로 향했다. 여전히 남아 있는 블루아이 곁으로.
-얘도 위험하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가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근데도 갔어요. 그게 파트너를 위한 길이고, 자신을 위한 길이라면서요. 제가 갈망한 자유는 아마 저런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했어요.
-이제는 겁쟁이 마운이라 부르지 못하겠네.
카트시가 기계 안구를 들어 올렸다.
-난 겁쟁이란 말이 싫지 않아. 겁쟁이는 안전해. 안전을 추구하는 건 당연한 일이잖아.
-말재주가 늘었어.
-여기 있으면 할 수 있는 게 생각뿐이니까. 그리고 카트시와 같이 가는 거니까 괜찮을 거예요. 최초의 오토마타. 듬직하잖아요?
가하란은 눈앞으로 다가온 마운을 보며 살짝 웃었다.
“로키가 개발한 신호 발생기, 그 회로를 살짝 바꿔서 너희한테 심어놓을 거야. 하늘석에서 감시한다면 어디로 이동하든 찾아낼 수 있겠지.”
-시나리오만 잘 짜봐요. 연기는 자신 있으니까. 로키, 그리고 혹시 살아 있을지도 모르는 체시가 무슨 생각인지…… 다 훑어볼게요.
자신감으로 똘똘 뭉친 카트시였다.
-대화 중에 죄송하지만, 여러분들이 알아둬야 할 게 있어요.
올이었다.
-하늘석의 부유 장치는 막대한 마나를 소모해요. 이렇게 착륙한 후 다시 이륙하려면 켈트에게 공급해야 할 마나까지 끌어다 써야 할 정도고요.
“이착륙이 자유롭진 않다는 거네.”
-개선할 여지가 있긴 하지만, 현시점에서 한 달에 한 번 정도가 한계예요. 지금도 이륙하려면 세 시간 정도 더 준비해야 하고요.
“전송탑 효율을 높여 봐야겠어. 이동식 격납고로 사용하려면 이착륙이 자유로워야 하니까.”
-해결해야 할 게 많네요. 7번, 13번 전송탑도 고쳐야 해요. 창조주의 부재로 이 하늘석도 서서히 망가지고 있어요.
“나랑 엔엔 님이 최대한 도울게. 아, 우리 애들도.”
일곱 대의 소형 거병.
그 애들이라면 하늘석에 상주하며 수리를 전담할 수 있을 것이다.
“자주 드나들 것 같으니 방을 미리 정해 둬야겠네. 나도 구경해 보고 올게.”
“같이 가죠. 마침 카트시랑 봐둔 곳이 있으니까.”
밀레나와 엔엔, 카트시가 통제실을 나섰다.
-그 누구도 관측기를 사적으로 이용한 적 없어요.
“내가 그 처음이 되겠네.”
-이게 옳은 일인지 아닌지, 아직도 모르겠어요. 그러니 부디 제 판단이 틀리지 않았음을 입증해 주세요. 가하란을 믿고 따르는 만큼 비전을 보여줘요.
이야기를 듣고 있던 마운이 끼어들었다.
-책임을 전가하는 건 편한 일이죠.
-입이 살아났네요. 몇백 년간 제 눈치만 봤으면서.
-이젠 떠날 몸이니까요!
-과연 그럴까요?
보라색 구체가 가하란 뒤쪽으로 숨었다. 올이 웃으면서 말했다.
-방금 책임 전가 어쩌고저쩌고 그러지 않았나요?
-연장자가 그렇게 꼬치꼬치 캐묻는 거 멋지지 않아요.
-우리한테 나이란 게 의미가 있나요?
티격태격하는 두 기계였다.
가하란은 꼬리잡기하듯 빙글빙글 도는 두 기계 자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올. 전송탑의 숫자는 고정된 건가? 숫자를 늘리고 싶은데.”
-하늘석의 시스템은 완벽해요. 완벽하다는 건 덧댈 것도 뺄 것도 없다는 뜻이죠.
“하지만 그 완벽한 하늘석이 다른 위상에서는 추락해 버렸어. 지금도 전송탑 2개가 고장 난 상태고.”
-……창조주가 있다면 완벽해요.
“하지만 부재중이지. 그러니 개보수를 해보고 싶은데.”
-가능하겠어요? 전송탑을 늘린다는 건 기초 공급망을 뜯어고치겠다는 뜻인데.
“이전에 내부 시스템을 확인해 봤어. 확장은 가능할 거야.”
-시스템을 확인해 봤다고요? 제 전부를요?
“전부는 아니었어. 하지만 절반 이상은 된다고 생각해.”
-불가능……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당신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네요. 착안은 집념의 상징이죠. 그리고 당신은 인내의 화신이고.
“말단 소자만 1년 넘게 훑어봤어. 로키와 같이. 지금도 어느 정도는 기억해.”
-인간이 기억할 만한 체계는 아니지만, 당신이 거짓말할 리는 없겠죠. 지금 당장 비교해 봐요. 기억을 검증한 후에 작업을 진행해야 하니까.
눈앞에 마력선 회로가 펼쳐졌다.
익숙한 구조였다.
마운이 선 사이를 오가면서 말했다.
-징그럽게 꼬여 있네요. 짜맞춤의 완성형이에요. 줄리어스는 이걸 이상향으로 그렸던 거군요.
가하란은 시그니처를 다루듯 손가락을 움직였다. 기억의 책장 속에서 회로 도면을 찾아냈다.
“맞아. 내가 확인한 것과 동일해. J382 섹터. 여기 3블록에서 12블록까지. 381개의 레이어 정리해서 펼쳐주겠어?”
-정말 확인했었나 보네요. 방금 살펴본 곳이 공급망 시스템이에요.
“하늘석에서 쓰고 있는 오리지널 전송탑은 만들기 어려울 거야. 거기에 쓰인 광물이 무엇인지, 도무지 모르겠거든.”
-그건 저도 알지 못해요.
“배합해서 비슷한 강도의 물질을 만들어 내야지. 금적철을 기반으로 마나 순응도 높은 물질로 제작하면 어느 정도는 버텨낼 거야.”
-이착륙 문제는 출력보다 효율성을 개선하는 게…….
“전송탑을 늘리는 건 이착륙 때문만은 아니야.”
-그러면요?
가하란은 벽에 기댄 채 디졸브 필드의 개요를 설명했다. 공핍 영역 생성에 필요한 공식도.
한동안 말이 없던 올이 은은한 빛을 냈다. 눈앞에 있던 하늘석 내부 회로가 사라지고, 허공에 도식이 나타났다.
직선은 땅, 공중에 뜬 세모는 하늘석이리라.
-그러니까 공핍 영역이란 걸 이런 식으로 생성하겠다는 거죠?
세모와 직선 사이에 빗금이 쳐졌다. 마나를 상징하는 보라색 물결무늬가 공중과 지하로 퍼지며 빈 공간이 생겨났다.
“정확하게 이해했네.”
-이론적으로는 가능해요. 이미 실적용 데이터도 있다고 하니 가능은 하겠죠.
“예상 범위는 어느 정도일까?”
-경계면이 뚜렷하지는 않아요. 마나는 고르게 분포되려는 성질이 있으니까요. 밀도를 높이는 것, 0에 수렴하게끔 낮추는 것이 지독하게 어려운 것도 그 때문이고.
마운이 앓는 소리를 내며 도식 위를 날아다녔다.
-이거 계산할 수 있나요? 가중 연산으로도 버거운데요.
“단일체로는 어렵겠지. 병렬로 연산을 분담한다면 과부하를 막을 수 있을 거야.”
-자연은 변수가 무한해요. 게다가 지상이 아닌 공중에서 분사체를 조정해야 하니까요. 유사 정령이 차례대로 셧다운 될 거예요.
“커넥터로 연결하면 그럴 테지만, 미니 비트라면 가능성이 있어.”
-미니 비트요?
“연결망 같은 거야. 줄리어스의 아이디어를 차용했어. 최종 목표는 비트 자체를 이용하는 거고.”
-마나의 특정 대역을 이용한 통신 체계. 어머니 말고도 그게 가능한 사람이 있긴 하네요. 대역대를 알려줄래요? 참가해 보고 싶은데.
“우리 애들이 그 안에 있을 거야.”
구경해 보겠다고 말한 후 흐릿해지는 마운이었다.
-마운이 말한 대로 이건 제가 돕는다고 해도 버거운 작업이에요.
“처음은 어려울 거야. 매개 변수도 확정 짓기 어렵고. 하지만 데이터를 쌓아서 확실한 모델을 구성하면 그때부턴 국소 지역에 한해서는 연산 능력이 부족해도 괜찮을 거야.”
-벌써 할 일이 생겼네요. 당신은 주변 사람이 노는 걸 내버려 두지 못하는 성격이죠?
“그렇진 않아. 아마도.”
귀 뒤쪽을 긁적이며 말했다.
-좋아요. 해야 할 일이 많네요. 그 미니 비트라는 것도 제 스펙에 맞게 재설정해야 해요. 연결성을 유지하려면.
“통신 체계부터 손보자. 정보 교환이 원활해야 작업이 쉬울 테니까.”
-당신의 아이들, 쓸 만한가요?
“널 기준으로 잡으면 한참 모자라. 줄리어스의 아이들과 비교해도 부족하고. 하지만 배우고 있어. 학습의 중요성을 알고 있으니까 가르치는 재미도 있을 거야.”
-좋아요. 일단 그 애들부터 이쪽으로 올리죠. 정신체로 시스템 내부에 귀속시킬 건가요?
“아니. 각자 몸이 있어. 하늘석 수리도 그 애들이 맡을 거야.”
-그거 좋네요. 안 그래도 부릴 손이 필요했는데.
“살살 다뤄줘. 아직 애들이야.”
-당신이 지향하는 바를 모두 이루려면 바삐 움직여야 해요.
가하란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최소한의 준비는 끝내뒀다.
이제 적의 실체와 마주할 시간이었다.
“앞으로 잘 부탁해.”
-신이 돌아올 때까지, 저도 잘 부탁드려요.
* * *
“척후에서 보고입니다. 반경 2km 내에 위험 요소는 없다고 합니다.”
“고생하는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더 신경 써주세요. 작정하고 달려들면 우리가 위험해지니까.”
“네. 위험 징후 발견 즉시 신호탄을 쏘기로 했으니 기습당할 일은 없을 겁니다.”
율은 보고 내용을 머릿속으로 정리한 후 텐트로 들어갔다.
안에서 의자에 기대 쉬고 있던 아리엘이 눈을 떴다. 척후대에게 받은 보고를 아리엘에게 전했다.
“순탄하게 끝나면 좋겠는데.”
아리엘이 눈 사이를 꾹 눌렀다. 피곤해 보였다. 이것저것 신경 써야 할 테니 쉬는 시간에도 머리를 썼을 것이다.
“쉴 땐 제대로 쉬는 게 좋아.”
“알고 있는데 머리가 제멋대로 상상해 버려.”
“언니는 생각이 많은 게 장점이자 단점이야.”
볼로스를 떠나 60km에 달하는 접경 지역으로 들어섰다. 눈앞을 가로지르는 산맥을 넘으면 연합 도시의 영토였다.
지금부터가 문제였다.
아르드헨의 경고대로 전쟁을 바라는 자가 있다면, 사절단의 무사 귀환을 원치 않는 자가 있다면 습격해 올 것이다.
기준 출력 112 엘론인 코스크 라인의 거병이 열 기. 탑승자들도 하나같이 노련한 기사들이었다.
그중 셋은 그라운드 제로 이전에 거병을 다뤘던 자들로 전술 이해도도 높았다.
모두 아리엘이 이끌고 온 자들이었다. 옛 중앙 군부 시절 장교들.
삼백 명의 사절단이 위협에 노출되면 상황에 따라 응전, 혹은 세 무리로 찢어져 인근 도시로 이동하기로 했다.
연합 도시의 속내에 따라 사절단이 무사히 도착한다고 해도 위험해질 수 있었다.
그들이 진정으로 전쟁을 준비 중이라면, 염치도 모르는 자들이라면 사절단을 볼모로 잡을 테니까.
하지만 제대로 된 창구 구실을 한다면, 화합의 단초를 제공할 수 있다면 아리엘의 입지는 높아질 것이다.
기능을 상실한 핫라인이 아리엘 시장을 중심으로 재건되는 거니까.
“온다면 접경 지역이겠지.”
아리엘이 눈을 예리하게 뜨며 말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