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467화 (467/558)

제467화

“블루아이?”

낯익은 이름이라 생각하며 되뇔 때였다. 밀레나의 눈동자가 커지는 게 보였다.

“블루아이라고? 확실해?”

-네. 그 애가 말해줬어요. 아니, 말해 줬다기보단 슬쩍 훑어본 거지만. 그래도 허락은 맡았으니 잘못된 건 아니에요.

“어디 있어? 그라운드 제로 때 사라진 이후로 찾지 못했어.”

다급하게 묻는 밀레나였다.

블루아이.

떠올랐다. 필렌 엔첸세의 거병. 제국이 만들어낸 최고의 전략 병기 중 하나.

-그 애는 국경으로 가야 한다고 했어요. 볼로스였나? 거기에 파트너가 있다고.

“엄마를 찾으러 간 거야. 당시에 볼로스에 계셨으니까. 그래서? 블루아이는?”

-정확한 위치는 몰라요. 도중에 연결이 끊겼거든요.

마운이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그라운드 제로 당시 뿌리가 격동하며 마나가 분출된 건 알고 있죠?

“알지. 그날은 잊을 수가 없으니까.”

밀레나가 나직하게 말했다.

-아까도 설명했듯 당시 뒤엉킨 비트 사이를 오가며 지상의 기계들과 교류했어요. 하지만 저와 친구가 될 만한 녀석은 없었죠. 다들 멍청했거든요. 그런데 블루아이는 달랐어요. 제법 머리를 쓸 줄 아는 애였죠.

보라색 구체가 부르르 떨렸다.

-올에게 허락을 받았어요. 기억 단자에 남은 이미지를 벽에 투사할게요.

녹음이 진 숲이 사라졌다.

새빨갛게 물든 하늘과 지면을 뚫고 나온 붉은 선. 가라앉는 땅과 도망치는 사람들의 비명, 그리고 우뚝 선 거병 한 대.

“블루아이.”

밀레나가 말했다.

붉은 풍경과 대조되는 순백의 장갑. 이름 그대로 푸른색 시각 장치가 돋보이는 거병이 갈라진 대지를 밟으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게 당시 상황이에요. 폭주하듯 날뛴 마나가 블루아이의 마나 응축봉을 건드렸죠. 외부로부터 침투한 에너지원이라 역류를 일으켜 폭발, 혹은 융해될 뻔했지만…….

마운이 으스대며 말을 이었다.

-제 도움으로 역류를 억제했어요. 물론 그 친구의 내부 설계가 뛰어났기에 가능했죠. 파이프의 구조성이 조금만 떨어졌어도 펑!

벽에 투사된 거병이 숲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밀도 높은 마나에 노출되며 외장갑에서 불꽃이 튀고, 각 모듈 결착 부위에서도 연녹빛 증기가 새어 나왔다.

가시화된 마나였다.

-외부 감지 센서를 기반으로 제가 재구현한 거라 정확한 건 아니지만, 이런 상태였을 거예요. 저는 기체가 못 버틸 거라고 했지만 그 친구는 가야 한다고 했어요.

“저 뒤에 있는 산맥. 내가 아는 곳이 맞는다면 루빌라 북서부야. 본가 저택에서 60km 정도 떨어진 곳.”

“미개척지 지정 구역인 거 같은데.”

“맞아. 사람의 발길이 안 닿은 곳.”

붉은빛 속에 잠겼던 풍경이 사라지고 다시 회색 벽으로 돌아왔다.

-제가 확인한 건 여기까지예요. 측정할 수 없는 힘이 국경 지대에서 발생한 후, 비트는 안정화됐고 제 나들이는 끝났죠.

마운이 아쉽다는 목소리를 냈다.

밀레나가 마운에게 다시 부탁했다. 블루아이의 마지막 모습을 보여달라고.

회색 벽에 다시금 거병의 모습이 나타났다. 밀레나는 한동안 말없이 블루아이를 바라봤다.

“어릴 때부터 얘를 보며 자라왔어. 메인터넌스 작업 날이면 체임버로 기어들어 가 깨어난 블루아이와 얘기하곤 했지. 내게 기사란 꿈을 갖게 해준 애야.”

엔첸세 가문이 관리해 온 기체.

밀레나한테 블루아이는 특별한 거병이었을 것이다.

“찾을 수 있을 거야. 위치를 알아냈으니까.”

밀레나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필요하다면 위치 정보를 정리해서 드릴게요. 신호가 끊긴 지점이라 거기에 있다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정말 고마워.”

밀레나가 마운을 보며 말했다. 보라색 구체가 빠르게 원을 그렸다. 부끄럽다는 듯 실실 웃기도 했다.

가하란은 거병에 눈길을 주며 말했다.

“뒤엉킨 비트를 통해 지상의 기계와 교류했다고 했지?”

-네.

“그렇다면 블루아이와 교류한 게 마지막이었겠네. 그라운드 제로 이후 마나 분포도가 안정화됐으니까.”

보라색 구체가 좌우로 흔들렸다.

-마지막은 아니었어요. 9년 전에 둔 주변의 비트가 제멋대로 날뛸 때가 있었는데, 그럴 때면 기계인형의 몸을 잠깐 빌리기도 했죠.

“둔?”

-네.

가하란은 눈가를 매만졌다.

혹시 자신과 관련이 있는 걸까. 하지만 기억을 되짚어 봐도 비트와 연관된 특이한 사건은 없었다.

“기계인형의 몸을 빌렸다고 했지?”

밀레나가 말했다.

-네. 단순한 회로를 가진 애들은 금방 조종할 수 있거든요. 몸이 없다 보니 그 친구들을 통해 잠깐이나마 해방감을 만끽하는 거죠. 그래서 하늘석이 둔 위를 지나갈 때면 항상 기대했어요. 또 연결되지 않을까, 하고.

“한 번 본 적이 있어. 망가진 기계인형이 일어서더니 정교한 움직임을 보였어. 정밀하게 제작된 기계가 아니었는데도 말이야.”

-저였을 가능성이 있어요. 어디서 봤죠?

“테일 여관 앞. 둔 거리 번호는 BF-423. 꽤 오랫동안 머물던 곳이라 기억해.”

-거기서 본 거라면 제가 확실해요. 데이터가 남아 있어요. 자신이 관리하는 기계의 스펙도 모르던 멍청한 인간 남성이 옆에 있었죠. 관절이 고장 났다는 것도 모르고 일만 시키고 있었어요.

“내가 본 게 맞네. 그때 가하란하고 같이 있었어.”

“나도 있었다고?”

언제였을까. 기억을 되짚고 있을 때 밀레나가 말했다.

“‘만약에 누나와 가까운 사람이 죄를 저질렀다면, 누나는 어떻게 할 거야?’ 그날 네가 나한테 던진 질문이야. 유단에 관한 것이었겠지.”

“아, 그때구나.”

선명하게 떠오른다.

“하늘석이 낮게 날던 날이었어.”

“갑자기 머리가 아프다면서 눈 쪽을 매만지기도 했었고.”

“그랬던 것 같기도 해. 근데 누나는 그걸 다 기억하네.”

“네 표정이 워낙 안 좋았으니까. 지금 와서 생각하면 안 좋을 만해. 남에게 밝힐 수 없는 비밀은 속을 아프게 긁으니까.”

마운이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만약 가하란으로 인한 간섭이라면 연구할 가치가 있어요.

“어떤 식으로 접근할 건지 말해줘. 나도 도울게.”

-좋죠. 비트 안을 자유롭게 떠돌아다닐 수 있게 된다면, 그것만큼 행복한 것도 없으니. 무엇보다 비트 안쪽은 안전해요. 그곳으로 도망치면 그 누구도 절 잡을 수 없으니까요! 그 무시무시한 체시조차.

체시.

나타 왕조를 지도상에서 지워버린 유사 정령.

“체시에 관해 아는 걸 전부 말해줄 수 있겠어? 다른 위상의 너한테 듣기는 했는데, 다른 것이 있나 점검해 보려고.”

-좋아요. 저도 다른 위상의 제가 어떤 정보를 가졌는지 확인해 보고 싶었거든요.

마운의 설명이 이어졌다.

서른두 개의 유사 정령 유폐, 줄리어스의 증발, 연구실로 옮겨진 서른 대의 유사 정령.

-로키와 카트시. 둘을 구해낸 건 어머니의 솜씨였겠죠. 당시에는 이해할 수 없었어요. 로키야 유능하니까 연구 목적으로 빼냈다 쳐도, 카트시는 이해되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최초의 오토마타였으니까. 줄리어스도 그걸 알고 있었고.”

-그러니까요. 그 독특한 카트시가 우리의 시초라니. 지금도 안 믿겨요. 아무튼 제 얘기는 여기까지예요. 미치광이 체시가 우리 모두를 죽였고, 전 겨우겨우 탈출할 수 있었죠.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무지막지한 일이 벌어졌고요.

“다른 위상에 있던 마운이 말해준 것과 일치해.”

-사건의 연속성은 유지되나 보네요. 로키는 살아 있다고 했죠? 체시도 살아남았나요?

“모르겠어. 로키는 확인했지만 체시는 들어본 적 없어.”

왕조를 멸망시킨 광기의 유사 정령은 용암 속에 파묻힌 걸까. 그럴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면…….

“잠깐만. 둘이 말하는 체시 말인데, 나도 그 이름을 알고 있거든?”

밀레나가 입을 열었다.

“체시를 안다고? 누나가 어떻게?”

“나뿐만이 아니야. 타리움과 관련된 부대, 특히 오라클과 연관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이름을 모를 수 없어.”

눈을 살짝 찡그리며 말을 잇는 밀레나였다.

“유단의 전용 기체. 그 기체의 이름이 체시야.”

우연일까?

가하란은 마운에게 말을 걸었다.

“로키와 체시, 둘 사이는 어땠지?”

-우리 중 가장 뛰어난 둘이었어요. 둘은 매일 티격태격하면서도 다양한 의견을 나눴죠. 연결망 내에서도 둘은 특별했어요. 따로 공간을 만들어 이것저것 실험했으니까요.

떠올랐다는 듯 아, 하며 마운이 덧붙였다.

-블랙 킹과 화이트 킹. 우리끼리 한 내기에서 둘이 얻어낸 이름이에요.

추모의 의미로 기체에 이름을 붙인 것인가. 아니면…….

“만약 체시가 생존했고 로키와 합류했다면, 지금 타리움은…….”

밀레나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미치광이 체시라면 그 대폭발에서도 살아남았을지도 몰라요. 그 애는 특별하거든요. 로키가 가장 처음 거짓말을 발견했지만, 그 거짓말을 누구보다 잘 이해한 게 체시였어요. 지하 연구소에서도 얼마나 능숙하게 거짓말을 쓰던지. 인간들이 죄다 속아 넘어가서 자멸했잖아요.

로키만큼이나 위험한 유사 정령이었다. 아니, 피해 규모로 보면 로키와 비교할 수도 없었다.

로키는 인간을 정신체로 만들어 사망에 이르게 했다. 사람을 죽였으나 연구라는 당위성은 남아 있었다.

하지만 체시는 어떠한가.

줄리어스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계획적인 복수를 준비했다.

그리고 나타 왕조를 끝내버렸다.

체시가 여전히 살아 있고, 내부에 인간 혐오가 남아 있다면 더 큰 문제를 불러올 것이다.

“체시와 로키, 둘이서 했다는 실험이 뭐였어?”

-공동 연구를 여러 가지 했어요. 하지만 대부분 우리한테 알려주지 않았죠. 몇몇 개는 효율 테스트를 위해 공개하긴 했는데, 그중 하나가 요격과 장거리 마나 분사였어요.

마운의 설명을 듣는 순간 밀레나의 표정이 변했다.

“체시는 장거리 마나 타격이 가능한 특수 마법 거병이야.”

아무래도 최악을 대비해야 할 것 같았다.

일을 주도한 게 로키가 아닌 체시라면, 설득은 물 건너간 것일 수도 있다.

“최대한 빨리 로키를 만나 봐야겠어.”

“거짓을 아는 유사 정령이야. 아니, 이제는 인간이지. 속내를 밝힐 리 없으니 우리가 알아내야 할 텐데.”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밀레나였다.

“우린 안 되겠지. 로키의 신용을 얻을 수 없으니까. 하지만…….”

시선을 마운에게 던졌다. 보라색 구체가 우뚝 멈춰 섰다.

-아! 무슨 생각인지 알겠네요. 로키의 속마음을 떠보라는 거죠? 체시가 있는지도.

“어려운 부탁인 건 알지만 해주겠어?”

-솔직히 말하면 무서워서 싫어요. 전 위험해지는 거 질색이거든요. 근데, 체시가 살아 있고 또다시 그 일을 되풀이할 생각이라면…….

한참을 고민하던 마운이 작게 말했다.

-두렵지만 도울게요. 저는요, 그냥 아늑하게 살고 싶어요. 그럭저럭 괜찮은 기계 몸을 빌려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밤이 되면 별을 구경하고. 그냥 그렇게 살고 싶어요. 근데 체시가 모든 걸 밀어버리면 그 평범한 것들조차 사라지게 되겠죠.

“고마워.”

-그리고 카트시를 붙여줄 거잖아요? 전 다 알고 있어요.

“맞아. 하지만 카트시 혼자보단 네가 곁에 있는 게 나을 것 같아서.”

-하나보단 둘이 낫긴 하죠. 무엇보다 제 유용함을 로키도 알고 있을 테고요. 도움이 된다고 여기면 손을 내밀겠죠.

엔엔과 함께 전송탑을 살피던 카트시가 돌아왔다.

가하란은 방금 나눈 대화와 앞으로의 일을 설명했다.

“마운과 카트시의 정보를 흘리면 그쪽에서 접근할 거예요.”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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