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6화
있음과 없음.
존재와 부존재.
착안으로 본 세계는 더 이상 선이 아니었다. 점멸하는 작은 점들의 집합체였다.
순간 구역질이 치밀었다.
가하란은 착안을 닫으며 눈을 감았다. 안구와 눈꺼풀 사이에서 진동이 일었다. 수천 마리의 개미가 안구를 밟으며 움직이는 느낌이었다.
불쾌한 감각에 두 손으로 눈을 지그시 눌렀다.
-제대로 본다는 건 심각한 괴리감을 낳죠.
올의 목소리를 들으며 숨을 가다듬었다. 불안한 떨림이 서서히 사라졌다.
-어때요?
“살면서 이렇게 불쾌했던 적은 처음이야.”
-이질감도 차차 적응되겠죠. 인내. 그게 당신의 본질이자 능력이니까요.
“인내? 난 그렇게 참을성이 좋지 않아.”
-아니요! 착안을 연 시점에서 이미 증명된 거예요. 신의 안배, 신이 남긴 선물은 쉽게 얻을 수 없어요. 대가가 필요하죠. 감당할 수 없는 정보는 그 자체로 고통이에요. 아니, 고통이란 말도 너무 온화하네요.
“당시에는 죽도록 아팠지만 죽지는 않았어. 버틸 만한 고통이란 뜻이겠지.”
-아닐걸요?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놓아버렸을 거예요. 순응하면 편해지니까. 정보의 바다에 몸을 던지는 순간 나를 잃고, 나를 잃으면 고통도 사라지죠. 하지만 당신은 그러지 않았어. 지독하게 버텨냈죠. 그래요, 당신은 지독한 인종이에요.
천천히 눈을 떴다. 익히 봐왔던 풍경이 망막에 맺혔다. 형태는 그대로인데 이상하게 낯설었다.
“처음 착안을 열었을 때는 그저 신비로웠는데, 지금은 끔찍할 뿐이야.”
-돌이킬 수 없어요. 선물 상자를 열어 버렸으니까요. 그것도 자신의 의지로. 이제 감당하는 것 외에는 선택지가 없으니 잘 이겨내 봐요. 당신이라면 가능할 테니.
“창조주란 분이 참 짓궂네. 시련 같은 건 안 줘도 될 텐데.”
-방금 전에도 말했지만 신은 시련을 준 게 아니에요. 당신이 그걸 찾아서 마주한 거지.
뺨을 툭툭 쳤다. 올의 말대로 돌이킬 수 없게 됐다. 남은 건 늘 해왔던 것처럼 적응할 뿐이다.
“말이 나온 김에 묻는 건데, 외계에 대해 아는 게 있어?”
-전혀요. 바깥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어요. 창조주조차 정확한 건 몰랐을 거예요. 그분도 외계 중 한 곳에서 나와 이 모든 걸 창조했으니까요.
신조차 파악하지 못한 걸 지금 신경 쓸 필요는 없겠지. 가하란은 당면한 문제에 집중했다.
“그래서 올은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당분간 당신의 의견을 따르려고요. 창조주께서 지상의 지성체들에게 무엇을 기대했는지, 당신을 따라다니면서 알아보려고요.
“계속 따라다니는 건 부담스러운데.”
-이미 결정된 사안이에요. 번복은 없어요. 무엇보다 당신을 지켜봐야 언니의 상태도 알 수 있으니까요. 전 언니를 보좌해야 해요. 신이 사라진 지금, 제가 우선해야 할 건 언니니까요.
밀레나와 엔엔이 통제실로 돌아왔다.
-앞으로 여러분의 눈이 돼줄게요. 필요하다면 여러분을 싣고 여기저기 돌아다닐 수도 있고요.
“공중에서 이동 가능한 거점. 제가 꿈꾸던 것 중 하나예요. 여기서 공방을 세워도 될까요?”
엔엔이 흥분하며 말했다. 첨단의 마법 공학에 둘러싸인 엔엔은 이곳이야말로 천국이라며 웃음을 주체하지 못했다.
-객실을 활용하는 거라면 상관없어요. 하지만 접근 금지 구역은 꼭 지켜줘야 해요. 새카맣게 탄 시체를 치우는 건 번거로우니까요.
올이 말했다.
“가하란. 다시 둘러보고 올게요.”
회색 털을 휘날리며 통제실을 뛰쳐나가는 엔엔이었다.
“엔엔 님은 여기 눌러앉을 생각인가 봐.”
“그러게.”
가하란은 바닥을 내려다봤다.
“이 밑에 있는 카트시의 몸, 한번 볼 수 있을까?”
-그건 제 능력 밖이에요. 접근 권한을 가진 건…….
주황색 구체가 바닥에 놓인 배낭, 정확히는 배낭에 결착된 카트시에게 향했다.
-언니의 재량이니까요.
켈트의 주인.
카트시의 기계 안구가 움직였다.
-하늘석에 관한 자료는 내 머릿속에 없어. 어떻게 해야 접근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고.
그때였다. 종이끼리 스치는 듯한 얕은 소리가 나더니, 통제실 바닥에 얇은 선이 생겼다.
이음새가 좌우로 벌어지며 색이 다른 바닥이 나타났다.
-나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언니가 한 거예요. 실행하고자 하는 의지. 그게 켈트의 권한이니까요.
올이 말했다. 저 발판 위에 서라고.
배낭을 든 채 발판 위로 올라갔다. 밀레나도 옆에 섰다.
바닥이 부드럽게 아래로 꺼졌다. 오, 하는 감탄이 절로 입 밖으로 나왔다.
내려가면서 생각했다. 엔엔이 자리에 있었으면 아마 기절하지 않았을까, 하고.
-여기예요.
발판이 멈췄다.
빛마저 잡아먹을 어둠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꽉 붙잡은 손의 감촉만 느껴질 뿐.
-눈을 살짝 감는 게 좋을 거예요. 눈부실 테니까.
번개가 내려치듯 불빛이 튀었다. 가하란은 눈을 찡그린 채 정면을 바라봤다.
“…….”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무릎을 모은 채 웅크리고 누워 있는 거인이 보였다. 거대한 몸체와 달리 아기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자줏빛이 도는 피부는 강철처럼 보이기도 했고, 거친 가죽처럼 느껴지기도 했으며, 언뜻 사람의 피부와도 비슷해 보였다.
얼굴은 둥그스름했다. 하지만 사람처럼 체모와 눈코입이 있는 건 아니었다.
윤곽이라 부를 만한 미묘한 굴곡이 있긴 했으나 전체적으로 보면 그저 둥근 형태였다.
마치, 사람이란 형태를 빚기 이전의 원물 같은 느낌.
웅크린 몸 곳곳에 거대한 돌기가 솟아나 있었다. 돌기는 천장과 바닥, 벽면에서 이어져 나온 선과 연결돼 있었다.
커넥터와 유사한 장치일까?
하늘석이 흡수하는 막대한 마나의 대부분이 켈트를 유지하는 것에 들어간다고 했다.
미동조차 하지 않는 저 거인이 거병 수백, 수천 대의 에너지를 삼키고 있는 것이다.
-흠.
카트시가 입을 뗐다.
-기억에 남아 있는 것보다 더 못생겼네요. 좀 더 우아한 느낌이었는데.
감상평을 듣자마자 헛웃음이 나왔다. 압도돼 입도 벙긋 못하고 있었는데, 카트시는 별 감흥도 없는 듯했다.
“뭐 떠오른 게 있어?”
가하란이 질문했다.
-아니요, 전혀요. 켈트의 머리였다는 것과 저게 제 몸이었다는 게 더 확실해졌을 뿐, 그거 외에는 생각나는 게 없어요.
“접촉하면 좀 달라질까?”
-가하란이 원한다면 해볼게요. 하지만 이렇게까지 접근했는데 기억 단자에 변화가 없는 걸 보면…….
올의 도움을 받아 카트시 본체에 커넥터를 연결했다.
잠시 후 카트시가 입을 열었다.
-거절당했어요.
“거절당해?”
-네. 교류해 보려고 했는데 단절당했어요. 재미있네요. 머리가 기껏 찾아왔는데 인사도 안 하는 몸이라니.
“무리해서 깨울 필요는 없겠지. 카트시가 기억을 걸어 잠근 이유도 있을 테고.”
하늘석이란 껍질로 둘러싸 공중에서 보관 중인 거인.
격리한 것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을 터였다.
-어쩌면 잠들어 있는 게 가장 이상적인 상태일 수도 있어요.
가하란은 웅크린 채 누워 있는 거인 가까이 다가섰다. 은은한 열기가 느껴졌다.
연한 자줏빛 피부 사이로 가느다란 빛줄기가 쉼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만져봐도 될까?”
-외부 접촉은 문제없어요.
손바닥으로 거인의 피부를 만졌다. 정제된 철처럼 단단했으나 힘주어 누르면 살짝 들어갈 것 같았다.
곁으로 다가온 밀레나도 거인에 손을 댔다.
“차가운 건지 뜨거운 건지 모르겠어. 감촉도 희한하고.”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물질은 아닌 것 같아.”
“이런 게 예전에는 움직였다는 거지? 그것도 카트시가 직접.”
고개를 들었다. 저 위에 놓여 있는 머리가 보인다. 눈코입 없이 매끈하게 다듬어져 있는 얼굴.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커다란 세 개의 눈이 얼굴에 생겨났다.
“저기.”
변화를 알리는 순간, 거짓말처럼 눈이 사라졌다. 밀레나가 의아해하며 되물었다.
“왜 그래?”
“눈이 있었어.”
“눈?”
다시금 얼굴을 뜯어보는 밀레나였다.
“날 보고 있었어.”
“깨어난 걸까?”
“모르겠어. 카트시의 접촉을 거부했다는 건, 의식이 있다는 건데.”
눈동자가 마주쳤을 때 순간적으로 몸이 굳었다. 태풍과 마주한 느낌이었다. 인간의 모든 역량을 동원해도 어찌할 수 없는 자연재해.
“카트시 말대로 이건 잠들어 있는 게 가장 좋을 것 같아.”
온몸에 내려앉은 소름을 털어내며 출입구로 걸어갔다.
거인은 처음 마주했을 때와 같이 침묵으로 배웅했다.
통제실로 올라오니 엔엔이 기다리고 있었다. 밑에서 태고의 거인을 봤다는 말에 경악하며 다시 내려가자고 부추겼다.
-귀찮지만 제가 다녀올게요. 올, 도와줘.
카트시와 엔엔이 지하로 내려갔다. 요란한 외침이 밑에서부터 올라왔다.
“말도 안 되는 걸 봐서 그런가, 얼떨떨하네.”
밀레나가 곁으로 다가왔다.
“가하란, 근데 하늘석으로 뭘 할 생각이야?”
“올과 하늘석은 중계소 역할을 맡고 있어.”
“중계소?”
“비트의 중심점. 이곳을 통하면 비트에 쉽게 접근할 수 있어. 카트시가 있으니 연구도 수월해질 테고.”
“그렇다는 건…….”
“처음에는 단편적인 정보 전송이 전부겠지. 하지만 개발하다 보면 연결망처럼 사용할 수 있을 거야. 온갖 정보를 순식간에 전송하는 거지. 무엇보다 중요한 건, 에너지도 정보라는 점이야.”
가하란은 주머니에서 소형 배터리를 꺼냈다.
“분배소에서 커넥터를 이용해 배터리에 마나를 보충한다. 이게 기존 메커니즘이야. 하지만 비트를 이용할 수 있게 된다면 마나 변환을 거치지 않고 바로 에너지원으로 삼을 수 있어. 분배소 없이도 세상 어디서나 에너지를 공급받을 수 있지.”
“마나 포집이 한 단계 발전하는 거네?”
가하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효율은 비교할 수 없게 될 거야. 지금이야 유사 정령과 작은 거병을 기동하는 수준이지만, 비트를 통해 마나를 전송할 수 있게 되면…….”
가하란은 벽면을 통해 투영된 바깥세상을 바라봤다.
“소형화된 거병뿐만 아니라 소형화 이전의 거병까지도 운용할 수 있을 거야. 마나 응축봉이 없어도 돼. 그저 비트를 수신할 장치만 있으면 되니까.”
생각이 밀려들었다. 목표가 뚜렷해지니 괜스레 흥분된다.
“물론 단기간에 이룰 수는 없을 거야. 비트에 접촉하는 것부터가 난제니까.”
밀레나가 화상으로 일그러진 손을 붙잡더니 살짝 들어 올렸다.
“도전하는 건 좋아. 하지만 다치진 마. 아프지도 말고.”
“버거운 주문인데.”
“말 잘 듣겠다며?”
“그랬었지.”
탁한 한숨을 내쉬는 밀레나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마법 공학을 공부할 걸 그랬어. 그랬다면 너한테 도움이 됐을 텐데.”
“마법 공학이 세상의 전부는 아니야. 누나는 누나가 할 수 있는 걸 하면 돼.”
“그게 뭐가 됐든 부탁만 해. 최대한 해볼 테니까.”
웃는 밀레나를 보고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솟았다. 논리와 계산도 웃음 앞에서는 무력했다.
“여기서 죽는다고 해도 여한이 없을 거예요.”
지하에서 올라온 엔엔이 한 말이었다. 눈이 반쯤 풀려 있었다.
“엔엔 님께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비트와 연관된 것이에요.”
“기꺼이 도와줄게요. 이곳에서 연구 개발할 수만 있다면 그게 무엇이 됐든 할 테니 주저 없이 말해요.”
“자세한 건 이따가 설명해 드릴게요. 송전탑 구조를 확인해 봐야 견적이 나올 것 같아요.”
“밖에 있는 탑 말하는 거죠? 말이 나온 김에 먼저 가서 보고 있을게요.”
엔엔이 통제실을 빠져나갔다.
-갑자기 걱정이 되네요. 하늘석을 분해하는 게 아닐까, 하고.
올이 걱정을 담아 말했다.
“그러고도 남을 분이니 옆에서 잘 지켜봐 줘.”
-조심해야겠네요.
주황색 구체가 흐릿해지더니 이내 사라졌다. 아무래도 엔엔을 감시하러 떠난 듯했다.
-저기.
보라색 구체, 마운이 눈앞에 솟아났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엔첸세가 성인가요?
밀레나를 향한 질문이었다.
“아니. 성이 아니라 가문명.”
-아하. 그럼 맞나 보네요.
“무슨 소리야?”
-한동안 연결됐던 애가 있거든요. 마나 대분출, 그러니까 그라운드 제로 때 이어졌어요. 비트가 불안정해져서 제가 쉽게 이용할 수 있었거든요.
“저기,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해 줄래?”
마운이 좌우로 짧게 움직인 후 말을 이었다.
-오토마타와 만났어요. 블루아이. 그 애는 자기 이름이 블루아이라고 했고요.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