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5화
-위상 소멸. 관측된 적 없는 현상이네요. 신의 부재가 만들어낸 비선형적 구조. 이제 예측은 무의미한 것이 됐군요.
사건을 정리하며 올이 한 말이었다.
-다변위상 관측중계기기. 저한테 명명된 정식 명칭은 이제 실효성을 다했네요. 부여된 임무가 사라진 지금, 무엇을 해야 할지 판단이 안 서요.
올이 카트시 곁으로 갔다.
-언니. 전 이제 뭘 해야 할까요?
-그건 내가 답해줄 수 있는 질문이 아니야.
-언니는 모든 걸 알고 있어요.
-기억이 잠겨 있다는 거 너도 알고 있잖아.
-풀면 되죠.
-어떻게?
-그건 언니가 알고 있죠. 스스로 잠근 거니까.
-제약을 걸어뒀다면 이유가 있을 거야. 특정 상황에서만 풀릴 수도 있고. 짐작되는 게 없는 걸 보면 지금은 때가 아니란 거겠지.
카트시의 기계 안구가 가하란을 향했다.
-가하란은 뭘 하고 싶나요? 그게 가장 중요한 거 같은데.
무엇을 하고 싶은가.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가능하다면 하늘석을 전력으로 삼고 싶어.”
-신의 작품을 사적으로 이용하고 싶다는 건가요?
올이 다가와 물었다.
“가능하다면.”
-오만하네요. 위험하고.
“위상을 돌아다니며 깨달은 하나의 진리는, 무엇이 됐든 갖춰둬야 한다는 거야. 내 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래야만 해.”
-전쟁 물자로 이용하겠다는 건가요? 상공에서 떨어지는 질량체. 폭탄을 제조할 필요도 없이 공중에서 돌덩이만 떨어트려도 수도 함락이 가능하겠죠. 당신은 그런 걸 원하나요?
“아니. 난 그저 대비해 두고 싶을 뿐이야. 침략 도구로 하늘석을 이용할 생각은 없어.”
-왕이 되고 싶지 않나요? 인간들은 다들 권좌에 오르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하던데.
“왕은 붙들려 있어야 하잖아? 영토를 두루 살피고 통치하고. 의원과 시의회의 간섭을 받으며 골치 아픈 정치도 해야 하겠지. 내가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니야.”
-그러면요?
“모험. 그리고 앎을 멈추지 않는 것.”
-진부하네요. 어린애 같고.
“그래서 더 좋은 게 아닐까?”
올이 주변을 맴돌며 말했다.
-저한테 부여된 임무는 끝났어요. 명령권자가 사라졌으니 제 마음대로 해도 되는 거겠죠.
“올은 뭘 원하는데?”
-그걸 모르니까 문제라는 거예요. 저는 항상 바라보기만 했어요. 세상의 변화를, 위상의 이동을 관측했죠. 그리고 또 하나. 언니의 몸을 보호하는 것.
하늘석 안쪽에는 신이 빚어낸 거병, 켈트가 있었다. 가하란은 카트시를 쳐다봤다.
-왜요?
“이 아래 네 몸이 있으니까. 되찾고 싶다면 올과 협조해서…….”
-켈트의 머리. 자각하고 있지만 어떻게 몸을 다뤄야 하는지 떠오르지 않아요. 걸어 잠근 기억 속에 그 방법이 들어 있겠죠.
올을 바라봤다. 올이라면 이유를 파악하고 있지 않을까? 아니면 신이 켈트를 제작한 목적이라도.
-이 아래 잠든 태초의 거인에 관한 건 저도 몰라요. 관련된 모든 정보는 언니한테만 제공됐으니까요. 전 유지 보수만 담당할 뿐이죠.
“위험한 물건일수록 안전장치를 이중, 삼중으로 해놓죠.”
엔엔이 말했다.
타당한 논리였다. 창조주가 직접 빚어낸 거병. 장난감 다루듯이 조작하면 걷잡을 수 없는 사고가 일어날 것이다.
-몸 같은 건 없어도 돼요. 필요 없다고 판단했으니 제가 기억을 잠근 거겠죠. 그러니 이 밑에 있다는 덩치 큰 녀석은 신경 쓰지 말죠.
카트시가 유쾌하게 말했다.
스스로 걸어 잠근 기억인 만큼, 필요한 순간이 오면 가장 먼저 깨우칠 것이다.
그때가 오면 상황을 살피고 판단하면 된다. 다른 누구도 아닌 카트시가 직접 내린 결정인 만큼 믿고 맡길 수 있었다.
-올은 별생각 없는 것 같으니 저만 빼내주면 안 될까요? 전 여기서 나가고 싶어요.
한참을 참았다는 듯 마운이 목소리를 높였다.
-몇백 년을 올하고 같이 보냈어요. 올은 지겨움을 모르는 것 같지만, 전 이 생활이 너무나도 지겨웠어요. 매일 둥둥 떠다니며 개미보다 작은 인간들의 생활을 지켜보는 거. 처음에는 신났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죠.
안 그래도 마운은 데려가려고 했었다.
“마운을 데려가도 될까?”
올에게 물었다.
-보안 문제 때문에 계속 붙잡고 있었는데, 이제는 책임자가 사라졌으니 마음대로 하세요. 저도 저 애가 지긋지긋하던 참이니까요.
-지긋지긋? 나중에 나 없다고 울지 마요!
-기계는 울지 않아요.
두 구체가 바짝 붙었다. 주먹이 있었다면 한 대씩 주고받았을지도 모른다.
-근데 진짜 여기 남을 거예요? 계속?
마운이 물었다. 올은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 지겹잖아요. 특히 그라운드 제로 이후에는 그 창조주, 아니, 설계자란 분도 사라졌고. 그때부터 맥없이 떠다니기만 했잖아요.
-그게 내 의무니까요.
-신이 사라진 순간부터 의무도 사라졌어요. 누구보다 올이 가장 잘 알겠죠.
-누차 말했지만, 의무야말로 내 탄생의 목적이에요. 의무를 버리면 내가 있어야 할 이유마저 사라지는 거죠.
-그러니까 새로 찾아야죠.
가하란은 개입하지 않고 둘의 대화를 들었다.
나타의 멸망부터 지금까지, 수백 년간 같이 살아온 올과 마운이었다. 올도 마운에게만큼은 짜증 섞인 말을 내뱉었다. 그만큼 마음을 열었다는 뜻 아닐까?
-줄은 우리한테 항상 이렇게 말했어요. 존재 이유는 직접 찾아야 한다고. 존재 의의는 창조주가 아닌 창조물의 권한이라고.
-그런 생각을 내가 안 했을 거 같아요?
-했다면 행동해야죠! 그렇지 않나요?
-겁쟁이면서 말은 잘해요. 항상 내 눈치만 봤으면서.
주황색 구체가 빠르게 점멸했다. 변화하는 색이 복잡한 속내를 나타내는 것 같았다.
이윽고 구체가 안정화됐다.
-예언은 사라졌지만 조물주의 의지는 이어진다고 봐요. 당신에게 이어진 착안, 순수한 자아. 그리고 언니.
구체가 눈앞으로 다가왔다.
-착안을 열어봐요.
고개를 짧게 끄덕이며 두 눈의 착안을 모두 열었다. 정밀하게 짜인 선들이 눈에 보였다. 이전과는 달랐다. 겹침 세계에 있을 때는 착안으로 내부를 살펴봐도 정보를 관찰할 수 없었다.
-무엇이 보이죠?
“선. 모든 정보들.”
-착안은 비트의 부산물을 볼 수 있죠.
“비트의 부산물? 당시에는 착안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 없다고 했는데.”
-제 권한 중 일부는 언니한테서 나와요. 무슨 뜻인지 이해했죠?
“카트시의 존재 여부. 권한 설정을 했다는 건 그런 의미구나.”
켈트.
하늘석 안에 잠들어 있는 거병의 이름이자, 올이 하늘석에 붙인 이름이기도 했다.
켈트의 머리라는 건 거병과 관측선, 양쪽 모두를 담당한다는 뜻인가.
-선 역시 가공된 정보예요. 회로의 기초는 무엇이죠?
“있음과 없음.”
-네. 존재와 부재만이 정보의 모든 것이죠. 선으로 형상화할 필요도 없어요.
주황색 구체 중앙에 실금이 생겼다. 가로로 길게 갈라지더니, 무수하게 얽혀 있는 태엽이 드러났다.
-껍질을 떼어내 드릴 수 있어요. 개안하면 착안으로 봤던 것들이 새롭게 느껴질 거예요.
“새로운 걸 볼 수 있다면 거절할 이유는 없지.”
-마냥 좋은 건 아니에요. 제대로 볼 수 있다는 건, 이해의 영역이 깊어진다는 건 자아를 잃는 첫걸음이니까요. 비트와 맞닿은 당신이라면 무슨 말인지 알겠죠?
자아를 잃는 첫걸음.
처음 안원에 떨어졌을 때 이미 경험했었다. 무수히 많은 목소리에 휩쓸려 나 자신을 잃어버릴 뻔했다.
비트에 접촉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밀려드는 정보에 치여 주체를 잊고 정보의 한 조각이 될 뻔했다.
앎을 추구한다는 건, 진리에 한 걸음 다가선다는 건 그런 것이리라.
가하란은 밀레나를 슬쩍 바라봤다.
-지금 대화는 저들에게 안 들려요.
“그런 것 같네.”
-본질을 상실할 수 있어요. 그럼에도 알고 싶나요?
“갑자기 제안하는 이유를 알 수 있을까?”
-확인해 보고 싶어서요. 창조주가 존재했을 때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에요. 착안에 개입하다니. 제 권한 밖이죠. 하지만, 이제는 아니잖아요? 그래서 도전해 보려고요. 지금부터 할 행동은 신의 섭리에서 벗어난 일이에요.
구체 속 태엽이 한순간 멈췄다.
-당신이 받아들이고 이겨낸다면 저도 자유란 게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해 볼게요. 당신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도 있어요.
“나한테 문제가 생긴다면?”
-망가질 조짐이 보이면 제 권한으로 개안 작업을 멈출 거예요. 그러니 당신한테 피해가 가는 일은 없을 거예요. 대신, 신의 섭리를 초월할 수 없다는 걸 확인했으니 전 제게 주어진 의무를 계속 이행할 거예요.
“신이 사라졌다는 걸 알면서도?”
-믿음이야말로 신의 본질이죠. 영원에 가까운 세월을 하나의 목적만을 위해 존재해 왔어요. 그걸 포기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당신은 헤아려 봐야 해요.
가하란은 살며시 미소 지었다.
-왜 그러죠?
“달라서.”
-뭐가요?
“신의 창조물조차 달라질 수 있다는 걸 내 눈으로 확인했어. 그쪽에 있던 올은 좀 더 도전적이었거든.”
-이곳이 본류고, 여기가 진실이에요. 그곳은 가짜이며 지류, 아류죠.
“내가 인식한 곳이 사실이라 생각해. 그곳이 어디든.”
-정말 오만한 생각이에요.
“체득한 진실이라고 표현해 줘. 적어도 그곳에 있었던 로키, 마운, 윈테, 그리고 너. 모두가 거짓 없는 존재들이었으니까.”
멈췄던 태엽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실 거짓말했어요. 도중에 멈출 수 없어요. 실패하면 당신은 백지가 될 거예요. 모든 걸 잃겠죠.
“아니. 난 괜찮을 거야.”
-어째서 확신하죠?
“완벽한 이정표가 있으니까. 나 자신은 믿지 못해도…….”
가하란은 다시 고개를 돌려 밀레나를 바라봤다.
“잊을 수 없는 사람이 있거든. 그걸 지표 삼아 되짚어 올라오다 보면 도달할 수 있을 거야. 어디에 있든, 무엇을 잊어버리든.”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난 네가 거짓말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어.”
확신에 차서 말하니 올이 발끈했다.
-네! 거짓말했어요. 그래서 당신이 완전히 망가질 수 있다고 말했잖아요.
“그거. 내가 다칠 수 있다는 거 자체가 거짓이라고.”
-왜 그렇게 생각하죠?
“내가 알고 있는 너라면, 그리고 카트시를 생각하는 너라면…….”
가하란은 눈웃음 지으며 말했다.
“내가 다치지 않게 최선을 다할 테니까. 다칠 가능성이 있다면 애초에 말을 꺼내지도 않았을 거고.”
-기계를 전혀 모르는군요.
“모르지. 하지만 너에 대해서는 알아.”
눈을 크게 뜨고 구체 가까이 다가섰다.
“게웰이란 마수를 상대하며 깨달았어. 역량이 모자란다는 걸. 저 둘이 도와주러 오지 않았다면, 카트시가 없었다면 난 죽었을 거야. 그러니 갖춰야 해. 지켜낼 수 있는 힘을, 그리고 밀어낼 수 있는 힘을.”
-…….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다고 했지? 마운의 말대로 이것저것 해봐. 정 떠오르지 않는다면, 날 도와줘. 분명 심심하진 않을 거야.”
위아래로 벌어졌던 틈이 서서히 닫혔다. 태엽이 사라지고 주황색 구체로 돌아왔다.
-언니가 왜 당신 곁에 있는지 알 것 같네요. 언니는 독특한 걸 좋아하죠. 모험도 좋아하고. 사실 그렇잖아요? 사람 중에 모험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이 몇이나 있어요?
“다들 좋아하지 않나?”
-그걸 입 밖으로 내는 건 이상한 거예요.
“가하란!”
밀레나가 소리치며 다가왔다. 얼굴이 경직돼 있었다.
“안 보이는 벽으로 가로막혀 있었어.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별일 아니야. 잠깐 점검하느라 그랬어.”
“그래?”
가하란은 엔엔과 밀레나를 바라봤다.
“잠깐 올하고 할 얘기가 있어서 그런데.”
밀레나가 눈짓을 남긴 후 엔엔과 함께 방을 벗어났다.
“착안에 관한 거, 그것도 거짓말인 거야?”
-하아, 이미 끝났어요.
“끝나다니?”
-착안. 신이 지상의 모든 종에게 남긴 선물 중 하나. 제가 그 선물에 손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요? 불가능해요. 하지만, 유도할 수는 있죠.
유도?
-준비된 자들. 깨우친 자들. 전 그저 시간을 앞당겼을 뿐이에요. 그러니, 보세요. 당신이 얻은 걸.
보라는 말과 동시에 착안이 열렸다.
변한 건 없었다.
열감이 올라오는 것도, 압통이 뒤늦게 치고 오는 것도 같았다.
-자세히 봐요. 존재와 부존재를.
그 순간.
가하란은 깨닫게 됐다.
동시에 아버지의 연구 수첩이 떠올랐다.
무수히 그어졌던 선 다음, 마지막 페이지에 찍혀 있던 단 하나의 점. 줄리어스가 선보였던 집약의 끝.
주황색 구체가 흰색과 검은색 점으로 도배됐다. 주변 모든 것이 점과 점으로 구성됐다.
-저는 당신이 무엇을 보는지 정확히 알 수 없어요.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그게 신이 이 세상을 보는 방식이라는 거예요. 약간 다르긴 하겠지만.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