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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병공 진군가-464화 (464/558)

제464화

밑에서 올려다봤을 때는 그저 돌의 집합체였으나, 막상 오르고 나니 회색빛 돌보다는 푸릇한 수목이 더 많았다.

“위쪽은 이런 식으로 돼 있구나.”

밀레나는 고개를 내렸다. 날개를 접은 새가 머리를 앞뒤로 움직이며 걷고 있었다. 부리에 물린 낯선 벌레가 몸부림치다가 새 주둥이 속으로 사라졌다.

생태계가 갖춰져 있었다. 수목이 자란다는 건 물이 있다는 뜻. 지면에 손을 대봤다. 토질이 부드럽고 촉촉했다. 수원지는 어디일까?

“아름다워.”

엔엔은 반쯤 정신을 놓은 채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있었다. 엔엔이 뛸 때마다 새들이 날아올랐다. 작은 울음소리도 터져 나왔다.

낯선 방문자에 잔뜩 놀란 모양이다.

-애가 따로 없네요.

카트시가 한마디 했다. 엔엔의 배낭을 대신 멘 가하란이 살짝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잠깐만. 가야 할 곳이 있어.”

“가야 할 곳?”

“내가 있던 위상, 겹침 세계에서 벌어진 일이 이 시간대에서도 동일하게 이뤄졌다면…….”

말끝을 흐리며 앞으로 나아간다. 밀레나는 가하란의 뒤를 따르며 주변 환경을 살폈다.

하늘을 가릴 듯 높게 솟은 나무 옆으로 개울이 흘렀다. 개울 안에는 꼬리지느러미를 길게 늘어트린 물고기들이 줄지어 헤엄치고 있었다.

물에 손을 담가봤다. 한겨울 강처럼 차가웠다. 물고기들은 놀라 도망치지 않고 관심을 보이며 다가왔다.

“얘네들 겁이 없나 봐.”

물고기 머리를 톡 쳐준 후 다시 움직였다.

나무 키가 한순간 낮아지며 시야가 확 트였다.

저 멀리, 비죽 솟은 첨탑이 보였다.

저릿한 느낌이 들었다. 강렬한 마나 파장이었다. 가시화된 마나가 첨탑 주변으로 밀려들고 있었다. 구조물이 버티고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전송탑이야. 하늘석의 부유 장치를 유지하는 데 쓰여.”

“하긴. 이 커다란 걸 띄우려면 저 정도의 마나가 필요하겠지.”

하늘석에 군생하는 생명체들은 강렬한 마나에도 적응했는지, 첨탑에서 흘러나오는 파장에도 반응하지 않았다.

“쟤도 신났네.”

작은 원숭이, 루루도 나무 사이를 오가며 소리를 냈다. 익숙한 공간이라 그런지 거침없이 나아갔다.

“루루가 여길 좋아했어. 격납고에서 벗어나면 이곳으로 바로 달려왔지.”

날뛰던 루루가 가하란의 품 안으로 쏙 들어갔다.

“항상 그렇게 데리고 다녔어?”

“여기가 가장 편한가 봐.”

가하란이 걸음을 멈췄다.

“이쯤일 텐데.”

“뭘 찾고 있어?”

“가방. 사라졌을 수도 있지만, 남아 있다면 이 근처일 거야.”

가방이란 말에 주변을 둘러봤다. 빽빽하게 자란 풀 사이로 손을 집어넣고 좌우로 펼쳤다. 바닥을 기던 작은 곤충들이 삽시간에 땅속으로 숨어들었다.

“가방이라.”

풀 사이를 헤집고 다닐 때였다.

삭아서 구멍이 뚫린 가죽 가방이 눈에 들어왔다. 얼마만큼의 세월을 버텨낸 건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가하란! 이거인 거 같은데?”

가하란이 다가왔다. 조심스럽게 가방의 덮개를 들어냈다. 이름 모를 곤충의 둥지였는지 새하얀 유충이 꾸물꾸물 기어 나왔다.

“썩었으려나.”

가하란이 안쪽으로 손을 넣었다.

“이건…….”

손에 들려 나온 건 하얀색 덩어리였다.

“고치 같은데? 근데 끝에 뭐가 튀어나와 있어.”

고치를 벗겨내자 점액질로 된 껍질이 나왔고, 껍질마저 드러내니 자그마한 수첩이 나왔다.

“남아 있었네.”

마른 천으로 조심스럽게 수첩을 닦아내는 가하란이었다.

“별개의 세계라 공유되는 건 없다고 했지? 과거라 해도 지금 이 순간에 영향을 끼칠 수도 없고.”

“맞아.”

“그럼 그 수첩은…….”

“내가 남긴 게 아니야. 원래부터 이곳에 있었던 거지.”

“그분이구나. 하늘석에 오른 최초의 사람.”

가하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프렌트. 이 수첩의 주인이야. 덕분에 난 살아남을 수 있었어.”

가하란이 수첩을 넘기며 내용을 살폈다.

“내용도 그대로네.”

“중요한 거야?”

“지금 나한테는 중요하지 않아. 내용은 머릿속에 들어 있으니까. 다만, 부탁을 받아서 이걸 찾아야 했어.”

“부탁이라니?”

가하란이 수첩을 넘겨줬다.

“읽어봐.”

-만약 이 기록이 발견된다면, 부디 멜멜 클랜에 전해주길. 그리고 염치없는 부탁을 하나 더 하자면, 내 가족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전해주길. 내 이름은 벨 프렌트. 멜멜 클랜의 연구원이다.

힘이 느껴지는 필체였다. 하늘석에 최초로 오른 인간. 위대한 발견가의 이야기가 후대에 전해지지 않았다는 건…….

“돌아가셨어.”

“갑작스러운 사고는 아니겠지? 이렇게 내용을 남긴 걸 보면.”

“내려갈 방법이 없었어. 올라오는 건 전송 마법을 통해 가능했지만.”

“그러면 이분은…….”

가하란은 살며시 입을 다물었다. 애처로운 미소가 대답을 대신했다.

비극적인 결말을 구태여 들을 필요는 없었다. 가하란에게 수첩을 돌려줬다.

“가족분에게 전해드리자.”

“내가 있던 겹침 세계는 50년 정도 과거였어.”

“자제분이라면 살아 계시겠네. 근데 어떻게 찾지? 옛 성도는 반파돼 클랜 관련 자료는 대부분 사라졌을 텐데.”

“짐작되는 사람이 한 분 있긴 해. 아닐 수도 있지만.”

“누군데?”

“벨솔 교수님, 여전히 둔에 계시지?”

“교수님이라면 둔에 계셔. 오라클 쪽 거병 개발팀에서 연구를 진행 중이시고. 근데 벨솔 교수님은 성이 따로 없으신데. 여기 표기로 보면 벨 프렌트, 벨이 성이야.”

“누나 말대로 아닐 수도 있어. 연령대가 비슷하고 이름이 같기에 혹시 맞지 않을까, 기대해 보는 것뿐이야.”

“이름?”

“솔, 루나. 자제분들 이름이야.”

“잠깐만. 맞는 거 같은데?”

“맞다니?”

“벨루나. 벨솔 교수님의 동생분이야. 우연치고는 너무 딱 들어맞는데?”

“벨솔 교수님은 그렇다 치고, 벨루나라는 분은 어떻게 아는 거야?”

“협회 소속이거든. 이네빌이라는 분과 같이 활동 중이신데, 아! 구치 아저씨하고도 가깝고. 아저씨 기억해?”

“기억하지. 그분도 협회 소속이었구나.”

가하란은 수첩을 챙겼다.

“이건 돌아가서 해결하면 되고.”

고개를 돌리며 불룩 솟은 동산을 바라보는 가하란이었다. 직감적으로 알았다.

“저기야?”

“어. 내가 몇 년이나 시간을 보낸 곳.”

하늘석 위를 돌아다니던 엔엔도 합류했다.

야트막한 동산 앞에 서자마자 입이 벌어졌다. 육중한 철벽이 눈앞을 가로막았다. 견고한 골조가 동산을 마치 지붕처럼 떠받치고 있었다.

인간의 손끝에서 태어난 작품이 아니다. 보자마자 그런 느낌이 들었다.

“이것 보세요. 이 거대한 골조가 전부 쇠로 돼 있어요. 가벽처럼 마무리한 게 아니라 통짜로 만들어진 쇠라니. 게다가 천장으로 이어지는 모양새 역시…….”

엔엔이 감탄하며 입구를 살피는 사이, 가하란이 철벽 앞으로 걸어갔다.

“처음 여기에 왔을 때는 개방돼 있었어. 지금은 닫혀 있네.”

“어떻게 열어? 힘으로 들어 올리는 건 상상이 안 되는데.”

“부탁해 봐야지.”

가하란이 고개를 들었다.

“올! 약속한 대로 왔어. 카트시도 함께.”

그 순간 알 수 없는 감촉이 전신을 훑고 내려갔다. 마나 파장 같기도 했고, 전혀 다른 힘 같기도 했다.

엔엔이 털을 바짝 세우며 주변을 둘러봤다. 상당히 놀란 듯했다.

-거짓은 아니었네요.

위쪽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착안도 확인해야 하겠지?”

-방금 살펴봤어요. 신의 시점이 아주 잘 안착해 있더군요. 보통은 융화되지 않고 사라지기 마련인데.

육중한 소음과 함께 철벽이 움직였다. 흙먼지가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밀레나는 뒤로 떨어져 손부채로 먼지를 날려 보냈다.

-들어와요. 정말로 다른 위상에서 날 만났다면 입구는 알고 있겠죠?

가하란이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막다른 곳까지 걸어간 후 바닥을 가리켰다.

“여기가 입구야. 안에는 긴 복도가 있고 양옆으로 휴게실이라 부르는…….”

-검증은 필요 없는 듯하네요. 사실 착안을 확인했을 때 모든 의심은 거뒀지만.

벽면에 무수히 많은 선이 그어지더니 가하란의 온몸을 향해 빛이 떨어졌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가서려 하자 가하란이 괜찮다며 손을 들어 올렸다.

-권한 설정을 완료했어요. 신의 부재 이후 이곳을 찾은 첫 손님이네요. 그리고…….

눈앞에 주황색 구체가 생겨났다.

-언니, 오랜만이에요.

언니라 불린 건 카트시였다.

-가하란한테 얘기를 들었지만, 미안하게도 기억이 없어. 내가 걸어 잠가뒀거든.

-알아요. 언니가 지상에 내려갔을 때 모든 걸 두고 내려갔으니까요. 어디까지 기억해요?

-켈트의 머리라는 거. 하늘석에 관한 건 기억에 없어.

-중요한 건 남겨뒀네요. 그거면 됐어요. 언니는 여전히 언니니까.

바닥이 열리며 밑으로 내려가는 길이 생겨났다. 구체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가하란이 말한 것처럼 긴 복도 양옆으로 무수히 많은 문이 있었다.

“살펴봐도 될까요?”

엔엔이 구체, 올을 향해 질문했다.

-마음대로 해요. 그다지 볼 건 없지만.

엔엔이 내부를 살피는 사이, 올은 유유히 날아 앞으로 전진했다.

“그대로야.”

회색으로 칠해진 방에 들어서는 순간 가하란이 한 말이었다.

삭막한 공간.

가하란은 이런 곳에서 몇 년이나 버틴 거구나. 아무것도 없는 회색 벽을 바라볼 때였다.

빛이 감돌더니 순식간에 풍경이 바뀌었다. 주변 숲이 내려다보였다. 어슬렁거리는 동물들도 눈에 들어왔다.

밀레나는 놀라서 발밑을 내려다봤다. 발이 닿는 부분은 여전히 회색빛 벽이었다.

-바깥 풍경을 투영한 거예요. 놀라지 마세요.

주황색 구체가 눈앞에 오며 말했다.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꺼칠한 벽의 질감이 손끝에서 느껴졌다. 벽에 이토록 선명한 영상을 그려내다니.

오토마타를 이용한 영상 복원은 이처럼 깔끔하지 않았다. 흐리멍덩하고 중간중간 정보가 소실돼 안 보이는 곳도 있었다.

고도화된 마법 공학은 이런 것도 가능하구나.

-정말로 왔네요?

주황색 구체 옆에 보라색 구체가 생겨났다. 보라색 구체는 가하란 앞을 기웃거리다가 이내 카트시 앞으로 갔다.

-정말 카트시잖아!

-마운, 다시 보니 반갑네.

-어떻게 된 거야? 너랑 로키만 도중에 사라졌어. 어머니가 회수한 거야?

-그건 나도 모르겠어. 기능 정지 상태라 무엇 하나 남아 있지 않거든.

-그래, 그렇구나. 나타도 끝나고 모두가 사라진 줄 알았는데, 넌 남아 있었구나. 진짜 반가워. 눈물이 날 것 같아.

마운.

줄리어스의 아이.

밀레나는 이리저리 움직이는 보라색 구체를 주시했다. 선입견이란 게 이래서 무섭다. 로키라는 안 좋은 예가 있다 보니 마운 역시 의심이 된다.

로키처럼 인간을 도구로만 생각하는 유사 정령이라면…….

-아니란 걸 알지만, 그래도 정말 똑같네요.

마운이 눈앞으로 왔다. 밀레나는 표정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줄리어스랑 닮았다는 거지?”

-네! 어머니와 똑같아요. 그래서 말인데…….

보라색 구체가 점점 더 다가왔다.

-자장가를 불러줄 수 있나요?

“자장가?”

-어머니가 항상 불러주던 노래가 있어요. 저흰 그걸 들으며 언제나 잠이 들었죠. 그리워요, 그 노랫소리가.

“미안하지만 난 줄리어스가 아니야.”

보라색 구체가 부르르 떨었다.

-역시 안 되겠죠? 괜찮아요. 사실 예의 없는 부탁이란 건 알고 있어요. 전 진짜 괜찮아요! 진짜예요. 이렇게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한걸요? 전혀 슬프지 않아요. 정말로.

쏟아내는 말과 달리 목소리는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순간 미안해질 정도로.

“……반짝반짝 작은 별, 그거 맞지?”

-네!

밀레나는 벽으로 걸어간 후 아주 작은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반짝반짝 작은 별, 첫 소절을 끝내고 숨을 살짝 들이마실 때였다.

-아, 죄송해요. 이렇게 못 부를 줄은 몰랐어요. 그래도 고마워요!

그렇게 말하며 멀어지는 마운이었다.

밀레나는 눈을 깜빡거리다가 곁으로 다가온 가하란을 바라봤다. 가하란은 입을 가린 채 웃고 있었다.

“쟤하고 원수가 될 것 같아.”

“벌써 사이가 좋아졌네.”

“그렇게 보여? 아닐걸?”

눈을 씰룩이며 마운을 볼 때였다.

-인사는 끝냈으니 상황을 정리하죠.

올이 말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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