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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병공 진군가-463화 (463/558)

제463화

은행에서 업무를 보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하지만 경비원과 트릿족은 이변을 느꼈는지 서로 눈빛을 주고받고 있었다.

“저기.”

가하란이 말을 붙였던 트릿족에게 다가갔다.

“방금 느낀 그거, 지하실에서 올라온 거 같은데요.”

“지금 알아보고 있어요. 근데 크게 걱정하지는 마세요. 여긴 은행이고 여기서 문제가 생길 일은…….”

트릿족이 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밀레나도 창구 뒤편, 지하로 내려가는 입구를 바라봤다.

“가하란!”

가하란이 엔엔 등에 업혀서 올라오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는데 어정쩡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눈길이 가하란의 손으로 향했다.

빨갛게 익은 손이 보였다.

창구 안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트릿족이 막아섰다. 허락 없이 들어오면 큰 문제가 될 수 있다면서.

“기다려요. 머니페니는 손님에게 해를 가하지 않으니까.”

“무슨 상황인지 알려줄 수는 있죠? 부탁드릴게요.”

“네. 지금 가볼게요.”

통신 장비라는 게 사람 손을 저 지경으로 만들 정도로 위험한 물건인가?

가하란은 아무 문제 없다는 듯이 말했었다. 통신 장비를 보기만 하면 해결될 문제라고도 했고.

자리를 비운 트릿족이 돌아왔다.

“들어오세요.”

초조한 마음을 다스리며 트릿족을 따라갔다. 창구 안쪽으로 들어가 2층으로 올라갔다. 복도에 트릿족이 모여 있었다. 덩치가 아주 작았다. 어린 트릿족인 걸까.

“잠깐만요.”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방 안에 누워 있는 가하란이 보였다. 엔엔도 곁에 있었다.

다가가 가하란의 상태를 확인했다. 정신을 잃은 건 아니라 눈이 마주치자마자 몸을 일으키려 했다.

“누워 있어.”

가하란의 어깨를 누른 후 엔엔을 바라봤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갑자기 왜…….”

방 밖에서 구경 중이던 작은 트릿족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뒤이어 나타난, 볼에 하얀 털이 난 트릿족이 엔엔과 가하란을 향해 고개를 숙인 후 문을 닫았다.

“가하란이 비트에 접촉했어요. 설명으로 들었을 땐 이 정도일 줄은…….”

“비트요?”

모든 정보가 집결된 라인.

통신 장비는 비트에 접촉하기 위한 수단이었던 걸까.

밀레나는 붉게 익은 가하란의 손을 봤다. 이야기로 들은 것과 실제로 본 것의 괴리감이 눈을 찌푸리게 했다.

“크게 문제 될 건 없다고 했잖아.”

다그치듯이 말해버렸다.

얼마나 아플까. 붙잡아 주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알아야 할 게 있었어. 비트가 아니면 접근할 수 없는 정보기도 했고.”

“왜 제대로 설명 안 했어.”

“말했으면 걱정했을 테니까.”

고통으로 씰룩이던 가하란의 눈가가 이내 둥글게 휘었다.

“여전히 아프긴 하네. 내성이 생기지 않았을까, 살짝 기대했는데. 하하.”

“이렇게 무리하면서까지…….”

더 말하면 잔소리가 될 것 같아서 입을 다물었다. 철렁했던 가슴이 겨우 진정됐다.

“괜찮아. 통증에는 익숙해졌어.”

“익숙해졌다고 안 아픈 건 아니잖아.”

“버틸 만해.”

밀레나는 눈을 찌푸리며 가하란의 손을 살짝 건드렸다. 가하란이 으, 하고 신음을 내뱉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버틸 만하긴!”

“그렇다고 찔러볼 필요는 없잖아.”

“……그건 미안해. 그래도 앞으론 말 좀 해. 말없이 이러는 게 더 괴로우니까.”

“다음부터는 꼭 말할게.”

알고 있다. 가하란은 위험한 순간이 오면 또다시 괜찮다는 말만 할 것이다.

“얼음물이라도 가져올까?”

“화상처럼 보이지만 열감만 있는 건 아니야. 실제로 열로 인해 이렇게 된 것도 아니고.”

가하란이 손목을 살짝 잡아보라고 말했다. 조심스럽게 손목을 쥐었다.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이거 왜 이래?”

“온갖 에너지가 충돌해서 그래. 비트의 정보는 열량으로만 설명할 수 없는 에너지의 집합체니까.”

“그 위험한 걸 맨손으로 잡아야 해? 보호 장구를 쓰면 안 돼?”

“피부에 닿아야 해. 그래도 처음 접촉했을 때보다는 나아. 물집이 생기면서 부르트진 않았잖아?”

씩 웃으며 말하는 가하란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웃음이 나와?”

“우는 소리 내도 돌봐줄 사람이 없어서 그런가, 아플 땐 괜히 웃게 되더라.”

아득한 시간을 혼자 보낸 아이.

밀레나는 땀에 젖은 가하란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후유증은 없는 거지?”

“없을 거야.”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이는 가하란이었다.

“통증은 여전하지만 접촉 시간은 늘어났어. 처음 비트를 만졌을 때는 밀려드는 정보에 정신이 없었는데, 지금은 어느 정도 분별도 돼.”

가하란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손이 이 지경이 됐는데 만족하다니. 뚝심이 좋다고 해야 할지, 철이 없다고 해야 할지.

“앞으론 조심할게. 그러니까 너무 무섭게 바라보지 마.”

“앞날이 걱정된다. 내 말 절대 안 들을 거지?”

“나 말 잘 들어.”

가하란이 몸을 일으켰다. 좀 더 누워 있으라고 해도 고개만 저을 뿐이었다.

“말을 잘 듣는다고?”

“……필요할 땐 들을게.”

가하란이 손을 내려다봤다.

“접촉 후 외력으로 손을 보호해 봤는데, 효과가 꽤 있어. 단련하면 더 나아지겠지.”

밀레나는 엔엔에게 고개를 돌렸다.

“어떤 상황이었어요? 비트에 접촉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상상이 되질 않아요.”

“가하란이 통신 장비 위쪽으로 손을 뻗었고 곧이어 강한 에너지가 흘러나왔어요. 저도 가하란이 무얼 건드린 건지 모르겠어요. 그렇게 1분 정도 서 있다가 무언가에 치이듯 튕겨 나왔고요.”

지하실에 같이 있었다면 반사적으로 가하란을 붙잡았을 것이다.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내버려 둘 수 없으니까.

“가하란. 저도 비트를 만져볼 수 있을까요?”

엔엔이 얼굴을 들이밀며 말했다. 호기심으로 가득한 눈동자였다.

“저를 매개 삼아 비트에 접촉할 수는 있어요. 하지만 위험해요. 로키조차 자아가 날아갈 뻔했으니까요.”

“유사 정령의 회로가 망가질 정도라면…….”

“제어할 수 있게 되면 그때 말씀드릴게요. 근데 시간이 오래 걸릴 거예요. 안 될 수도 있고요. 너무나도 방대한 정보량이라 그걸 통제한다는 게 어떤 것인지, 저도 상상이 안 돼요.”

“기다릴게요. 그때가 오길.”

가하란이 밀레나에게 시선을 옮겼다.

“기대했던 것보다 일이 더 잘 풀렸어. 착륙까지 이틀 정도 걸린다고 하니 그때까지만 기다리면 돼.”

“착륙이라니?”

가하란이 손을 들어 창문을 가리켰다. 새파란 가을 하늘이 보였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

눈을 살짝 찌푸렸다. 머나먼 상공에 점 하나가 찍혀 있었다. 새는 아니다. 새라기엔 너무 크니까.

“하늘석?”

“내려올 거야.”

“뭐?”

놀란 눈으로 바라봤다.

이야기야 듣긴 했다. 하늘석에 올라가 올과 마운을 만나고, 드래곤과 같이 생활했다고.

“위로 올라가는 게 아니라, 저게 내려온다고? 그게 돼?”

하늘석이 땅에 내려왔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저건 태양처럼 하늘에 박혀 있는 물체니까.

“아니요. 하늘석은 오래전 지상에 내려온 적이 있어요. 조사하려고 모든 수단을 동원했지만 실패했죠.”

엔엔이 대답했다.

“그보다 정말 하늘석이 내려오는 건가요? 저도 하늘석에 갈 수 있는 거고요?”

이토록 격양된 엔엔은 처음 봤다. 윤기 나는 회색 털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그럼요. 하지만 인원은 제한해야 해요. 하늘석에 관한 걸 외부에 알릴 수 없으니까요.”

“물론이죠!”

가하란이 다시금 창문을 바라봤다.

“올과 마운, 둘 다 성격이 그대로일지 아니면 다를지. 조금 걱정이 되긴 해.”

밀레나는 가하란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곳에서 겪은 일은 기억 못 하겠지만, 그래도 셋이서 잘 지냈다며?”

“좋은 친구들이었어.”

“그럼 걱정하지 마. 이번에도 마음이 맞을 테니까.”

올과 마운.

신의 작품과 줄리어스의 작품.

“카트시도 데려갈 거지?”

“어. 기억을 되찾는 데 도움이 될 거야.”

“최초의 오토마타. 아직도 믿기질 않아. 그 수다스러운 애가 모든 유사 정령의 시초라니.”

“귀하신 몸이야. 잘 대해줘.”

“하는 거 봐서.”

웃음을 머금으며 하늘석을 바라봤다.

“기대되네. 항상 머리 위에 있던 게 땅으로 내려온다니까.”

* * *

-왼쪽으로! 왼쪽!

해피가 요란하게 외쳤다. 가하란은 운전대를 잡고 방향을 돌렸다.

끼익 소리와 함께 차체가 흔들렸다.

“누나, 괜찮아?”

“끄떡없어. 그보다 진짜 내려오고 있네.”

밀레나가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점점 가까워지고 있어. 그나저나 정말 크네.”

“나도 처음 봤을 땐 어이가 없었어. 저런 게 떠다니다니.”

방향을 고정한 채 속도를 올렸다.

하늘석을 따라 이동하길 네 시간.

국경을 가로지르는 긴 강을 따라 인적이 아예 없는 숲으로 들어섰다.

미개척지와 맞닿아 있는 위험한 공간이었으나,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고도가 급격히 낮아지고 있어요. 여기 착륙할 건가 봐요!”

엔엔이 외쳤다. 해더 트럭과 같은 속도로 뛰다가 이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가하란도 트럭을 멈췄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자마자, 짙은 그림자가 몸을 덮었다.

후우우웅.

몸을 짓누를 것 같은 바람이 불어왔다. 이마에 손을 대며 고개를 들었다.

머리를 스치듯이 지나간 하늘석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착륙했다.

“이번엔 추락이 아니라 다행이야.”

다른 위상에서 겪었던 일을 떠올리자 한숨이 절로 나왔다. 트레일러에서 몸을 일으킨 해피가 주변을 살폈다.

-하늘석 때문인지 주변 탐지가 안 돼요. 마수가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어요.

“교란 시스템 때문일 거야. 내부 설계가 안 된 거병은 접근하면 안 되니까 여기서 대기해.”

-잘 지키고 있을게요. 그리고 카트시 이모! 하늘석에서 본 것들 저한테도 보여주세요. 기대하고 있을게요.

손을 흔드는 해피를 뒤로한 채 하늘석으로 다가갔다. 고개를 꺾어도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돌.

“그쪽에 있을 땐 공간 이동으로 하늘석에 올라갔다고 했지?”

밀레나가 질문했다.

“아찔한 경험이었어. 땅이 아닌 공중에 전송됐으니까.”

“방법만 알면 아무 데서나 하늘석에 오를 수 있는 거야?”

“아닐 거야. 특별한 장소였거든. 용의 안식처가 그 밑에 있었어. 윈테 님의 힘이 전송에 영향을 끼친 거겠지.”

밀레나가 고개를 저었다.

“하늘석만으로도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데, 거기에 드래곤까지. 너 정말 거기서 뭘 하고 다닌 거야.”

“그러게. 경험한 나조차 이해가 안 돼.”

지나간 일이니 웃으며 말할 수 있었다. 당시에는 눈앞이 캄캄해질 정도로 위급한 일이었지만.

-줄사다리 같은 것도 없고, 저기까지 가려면…….

엔엔이 멘 배낭에서 카트시의 기계 안구가 튀어나왔다.

“신체술로 올라가야 해.”

가하란은 밀레나를 바라봤다.

“누나, 가능하겠어?”

“절벽을 오르는 것쯤이야 어릴 때도 수없이 했어. 그보다 넌…….”

“신체술은 못 쓰지만, 비슷한 건 쓸 수 있어.”

의족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먼저 올라갈게요!”

엔엔이 발을 굴렀다. 회색 털을 휘날리며 자그마한 늑대가 절벽을 뛰어 올라갔다.

“나도 간만에 몸 풀어야겠네.”

밀레나의 몸에서 은은한 마나 파장이 일어났다. 곧이어 도움닫기와 함께 날렵하게 절벽을 오르는 밀레나였다.

가하란은 둘을 바라보다가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배터리를 꺼냈다.

뒤꿈치를 툭툭 쳐 카트리지 덮개를 열고 배터리를 박아 넣었다.

“해피! 다녀올게!”

뒤에서 대기 중인 해피에게 외친 후, 의족으로 땅을 박찼다.

* * *

“잡을 만한 곳이…….”

손끝 감각에 의지하며 위쪽으로 올라갈 때였다. 밀레나는 고개를 왼쪽으로 돌렸다.

펑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절벽을 스치듯이 올라갔다.

“…….”

훌쩍 올라간 가하란이 다시금 발을 굴렀다. 형상화된 마나를 박차고 시원하게 올라간다.

“날아다니는 수준이네.”

실없는 웃음을 흘린 후 붙들어 둔 마나를 단숨에 풀어냈다. 한순간 발달한 근력으로 절벽을 단숨에 올라갔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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