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462화 (462/558)

제462화

자리를 비웠던 울렉이 돌아왔다.

“안쪽으로 들어오세요.”

창구 옆 가림막을 밀고 안으로 들어섰다. 짧은 복도를 지나 높이가 낮은 문 앞에 도착했다.

“안에 계십니다. 전 업무를 봐야 해서 이만 가볼게요.”

울렉과 인사를 나눈 후 엔엔을 바라봤다.

“먼저 들어가세요. 초대받은 건 엔엔 님이시니.”

문을 연 뒤 옆으로 비켜섰다. 엔엔이 먼저 방으로 들어갔다.

“이게 얼마 만입니까.”

뺨에 새하얀 털이 난 머니페니가 자리에서 일어나 엔엔을 맞이했다.

은행을 수없이 찾아왔으나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머니페니였다.

“건강해 보이시네요.”

“뜨뜻한 곳에서 돈을 만지고 있으니 건강해질 수밖에요. 엔엔 님의 털은 전보다 더 풍성해지셨습니다. 빛깔도 아주 곱고요.”

서로를 치장하는 긴 인사를 나누는 동안 가하란은 방 안을 살폈다. 어디서 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달콤한 향이 났다. 기분 좋은 걸 넘어서 머리가 살짝 아플 정도로 향이 강했다.

벽면에는 안에 뭐가 들어 있을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쇠로 된 상자가 질서 정연하게 채워져 있었다. 이음새가 보이지 않는 상자.

“뒤에 있는 인간은…….”

“가하란입니다.”

“아하! 직원들을 통해 이름을 들었습니다. 아주 사적인 이유로 우리 은행에 도움을 주셨다고.”

“예. 바라는 게 있어 몇 번이고 은행을 찾아왔었죠.”

“이유가 보이는 친절을 우린 좋아합니다. 명확하거든요. 물론 그쪽이 보기에는 우리가 염치없이 받아먹는 것처럼 보였겠지만, 당신이 원하는 게 워낙 큰 것이라 들어줄 수 없었어요.”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부탁드린 거였고요.”

“뻔뻔함은 미덕이죠. 좋습니다.”

자신을 ‘가치 교환자’라 소개한 어스름달 운주가 자리를 권했다.

“차라도 대접해야겠으나, 두 분의 얼굴을 보아하니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야겠군요.”

운주가 엔엔을 응시했다.

“채무를 정리하러 오셨다고요?”

“네.”

“옆에 있는 인간의 요구로 상계하실 모양이군요.”

“가능할까요?”

“못할 것도 없죠. 10분. 그 정도면 개방해 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반입 반출, 그 무엇도 불가합니다. 맨몸으로 들어와 보고 맨몸으로 나가야 합니다. 어떻습니까?”

운주가 가하란을 바라보며 물었다.

원하던 것이었다.

“은행 지하에 있는 통신 장비에 잠시 접촉하는 것. 그거면 됩니다.”

살며시 웃는 운주였다.

“지하에 있는 게 통신 장비라는 걸 알고 있군요. 그걸 아는 인간은 극소수일 텐데.”

“이런저런 일을 겪다 우연히 알게 됐습니다.”

“대단한 비밀은 아니니 문제 될 건 없습니다. 하지만 접촉이라. 인간은 그걸 다룰 수 없어요. 만진다고 한들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을 겁니다. 엔엔 님, 정말 이걸로 상계하실 겁니까?”

엔엔이 망설임 없이 “네”라고 대답했다. 운주가 알겠다면서 일어섰다.

“잠시 기다리시죠.”

운주가 방을 나섰다.

“엔엔 님.”

무엇을 대가로 10분을 얻어낸 것인지 알아둬야 했다. 이건 빚이었으니까.

“사소한 거래가 있었어요. 잊고 살았고 설령 떠올렸다고 한들 되돌려 받을 생각은 없었죠.”

엔엔이 발톱으로 털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그러니 신경 쓰지 마요. 무엇보다 하늘석의 비밀을 알 수 있으니 저한테는 남는 장사예요.”

운주가 돌아왔다. 책상에 파일을 하나 내려놓고 펜을 준비했다.

“서명하시면 됩니다.”

엔엔이 두 장의 서류에 사인했다. 운주는 사인 된 서류 한 장을 파일에 끼워 넣고 벽면으로 걸어갔다.

질서 정연하게 놓여 있는 쇠 상자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단부에서 미끄러져 나온 상자에 이음새가 생기더니 상하로 벌어졌다.

운주가 파일을 넣고 돌아서자 상자들이 맞물리며 다시 평평한 벽을 이루었다.

“정기 연락 중이라 잠시 기다리셔야 합니다. 20분 후에 지하로 내려가시죠.”

“고맙습니다.”

“제가 더 고맙죠. 이제야 발 뻗고 잘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시다시피 우리 머니페니들은 빚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니까요.”

“전 빚이라고 생각한 적 없어요.”

“압니다. 그래도 빚은 빚이죠.”

기다리는 동안 즐기라면서 다과를 내오는 운주였다. 방 안에 감도는 향만큼이나 달콤한 차였다.

“사랑스러운 꿀차죠. 감정과랑도 잘 어울리고요.”

“여전히 단 걸 좋아하시네요.”

“입이라도 달아야 삶을 버티죠.”

작은 접시에 올려진 감정과를 입에 넣었다. 잇몸이 아릴 정도로 달았다.

“인간한테는 조금 달 수도 있겠네요.”

“아, 네.”

꿀꺽 삼키고 차로 입을 헹궜다. 정과에 비하면 꿀차는 맹물에 가까웠다.

“가하란. 이렇게 얼굴 본 것도 인연인데, 저한테 맡길 물건이 있을까요?”

“맡길 물건이요?”

“이를테면 지금 당장에는 필요 없으나 가치가 있는 것들. 그런 걸 제게 주시면 동등한 가치의 돈을 내어드릴 수 있습니다. 돈이 싫다면 물건도 좋고요.”

“아쉽게도 가지고 있는 물건이 없어서요.”

“사소한 거라도 좋습니다. 엔엔 님이 신경 쓰실 정도라면 훗날 좋은 거래처가 될 테니까요. 자잘한 거라도 계약을 터두면 인연이 길게 이어지는 법이죠. 적어도 우린 그렇게 생각합니다.”

가치 있는 물건.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위상을 오가는 동안 대부분의 것들을 남기고 왔으니까. 아주 잠깐 카트시의 가격이 궁금했으나 실행에 옮길 생각은 없었다.

“지식이나 정보도 거래 대상이 되나요?”

“물론입니다. 문서화할 수 있는 거라면 그 무엇이든 가능하죠. 뭐 떠오르는 거라도 있나요?”

가하란은 종이와 펜을 넘겨받았다.

평면상에 짜맞춤의 개요를 풀어 썼다. 온갖 선이 중첩된 상태에 놓였다.

“이것도 가치 평가가 될까요?”

“……음.”

운주가 안경을 쓰고 침착한 얼굴로 종이를 훑었다.

“무언가의 회로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네요. 제가 판별할 수 있는 물건은 아닌 듯합니다. 정식으로 의뢰를 넣어서 산정해 볼까요?”

“아닙니다. 살짝 궁금해서 물어본 거니까요.”

“알아볼 수는 없지만 뭔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종이를 내려놓는 운주였다.

“불가해한 것은 제 기준에서 이실론 은화 한 개를 드릴 수 있습니다. 아니면 제가 아끼는 감정과 한 상자를 드릴 수도 있고요. 사실 가치 판단이 안 서면 교환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나, 엔엔 님과 함께 오신 인간이니.”

“마음에 드셨다면 선물로 드릴게요.”

“선물이라니. 우린 그런 걸 받지 않아요. 뭐든 정당한 값을 치러야죠.”

가하란은 웃으며 말했다.

“둔에 있는 머니페니도 같은 말을 했어요. 친할수록 돈 계산은 철저하게, 선물은 투명하게.”

“둔이라. 그곳 친우들과는 오래전에 얼굴을 봤었죠. 다들 잘 지내고 있던가요?”

“저도 예전에 얼굴을 봐서 지금 어떻게 지내는지 알 수가 없네요. 하지만 머니페니들은 사막에서도 얼음을 찾아낸다고 하니 잘 지내고 있을 겁니다.”

“그렇죠! 트릿은 어디서든 필요한 걸 창출하고 발견하니까요.”

껄껄 웃던 운주가 포크로 정과를 콕 찍어 내밀었다. 마음에 들었으니 하나 더 먹으라는 표정으로.

가하란은 씰룩이는 미소를 지은 후 정과를 받았다. 쓴 약을 삼키듯 정과를 입에 넣은 후 얼른 씹어서 삼켰다. 단맛이 목구멍을 치고 내려가는 게 느껴졌다.

“대마수가 사라졌다는 소식 들으셨죠? 이제 왕래가 활발해질 테니 저도 둔에 가 봐야겠군요. 동쪽의 친우들이 잘 지내고 있는지, 얼굴을 봐야겠어요.”

“이곳의 통신 장비로는 둔하고 연락할 수 없는 거겠죠?”

“아쉽게도 규율이 맺어진 곳 외에는 전송이 불가능합니다. 500년 전쯤에는 온 대륙에 소식을 전할 수 있었다고 들었는데, 천재지변을 기점으로 연결이 끊겼어요.”

비트로 연결된 통신이 끊길 정도의 천재지변. 떠오르는 게 하나 있었다.

“나타 왕조가 멸망하던 시기인가요?”

“오! 잘 아시는군요. 인간들한테는 거의 잊힌 역사나 다름없는데.”

다른 위상에 있었을 때 마운은 나타의 멸망, 그리고 체시에 대해 말해주었다.

-어머니가 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체시는 미쳐 버렸어요. 아니, 원래 그런 애였죠. 체시는 잠든 우리를 하나씩 처리했어요. 인간의 손을 빌려서! 저는 잠들어 있는 척하며 그 과정을 모두 지켜봤어요. 그리고 겨우 탈출할 수 있었죠.

체시가 어떤 방법을 써서 왕조를 멸망시켰는지는 알 수 없었다. 마운이 본 건 어느 날 거대한 폭발과 함께 나타 전역이 용암과 흙먼지에 휩쓸려 사라졌다는 현상뿐이니까.

융성했던 거대한 왕국을 단숨에 삭제시킨 사건.

“최근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죠. 그라운드 제로. 인간과 협동해 만든 대륙 전역의 은행들이 마비돼 버렸죠. 계좌 연동하느라 진땀 뺀 걸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합니다.”

“둔에 있는 머니페니들도 성도 시스템을 복구하느라 애를 썼다고 들었어요.”

“거기나 여기나 고생깨나 했겠죠. 끔찍해요, 끔찍해.”

볼을 부풀리며 혀를 차는 운주였다. 걸걸한 목소리와 달리 외형은 푸근하기만 했다. 머니페니들이 자루를 든 채 거리를 걸으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흐뭇하게 웃으며 바라보곤 했었지.

이야기하다 보니 문득 생각나는 게 있었다. 가하란은 품 안에 손을 넣었다. 위상을 오갈 때도 항상 지니고 다닌 작은 주머니.

안에는 증조부에게 받은 반지, 협회 배지를 비롯해 의미 있는 물건들이 들어 있었다.

“이거.”

과거에 트릿족한테 받은 구리 동전이었다. 당시에 쓰이던 상인회 동전과는 생김새가 전혀 달라 쓰지 않고 간직하고 있었다.

“오호, 이걸 갖고 있다니.”

“초콜릿 대금으로 받은 겁니다.”

“초콜릿 대금이요?”

짧은 일화를 털어놓았다. 운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둔의 친우들에게 인정을 받으셨군요. 괜찮다면 이걸 맡기시겠습니까?”

“이걸요?”

“트릿의 온정은 다른 친우들이 거두는 게 도리거든요. 이것 역시 마음의 빚이라 처리해 두는 편이 낫고요. 집결 수도가 보장하는 삼대 상인회에서 발급한 금화 백 장, 어떻습니까?”

말도 안 되는 거금이었다.

“동전에 그만한 가치가 있는 건가요?”

“그럼요. 선의는 비싸게 치러야죠. 그리고 나중에 제가 둔의 친우들에게 생색내는 겁니다. 남는 장사죠.”

가하란은 웃으면서 동전을 품에 넣었다.

“그런 거라면 맡겨 둘 수 없죠.”

“아쉽군요.”

운주가 시계를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시죠. 시간이 됐습니다.”

운주를 따라 창구로 나왔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밀레나가 눈짓을 줬다.

금방 갈게, 입만 벙긋거린 후 운주와 함께 지하실로 내려갔다.

다른 위상에서 본 은행 지하실과 구조가 똑같았다. 몸을 숙여 낮은 문을 통과하니 분주하게 서류 작업 중인 트릿족들이 보였다.

“여깁니다.”

운주가 통신 장비 앞에 멈춰 섰다.

가하란은 착안을 열었다. 주황색 비트가 가느다랗게 천장을 뚫고 내려와 연결돼 있었다.

간만에 붙잡으려니 진땀이 난다.

“두 분 다 물러서 계세요. 무슨 일이 생겨도 절 붙잡으시면 안 됩니다.”

“그 비트라는 걸 만질 생각인가요?”

“네. 잘 되길 기도해 주세요. 위상이 다른 만큼 상황도 다를 테니.”

장갑을 벗었다. 엔엔이 손을 보더니 정말 괜찮겠냐고 다시금 물었다.

“아프지만 참을 만해요. 아마도.”

숨을 고르고 비트 앞으로 걸어갔다.

운주의 표정이 굳는 게 보였다. 무언가 벌어질 것임을 직감한 모양이다.

“고장 나지는 않을 거예요.”

숨을 크게 들이마신 후 손을 뻗어 비트를 쥐었다.

* * *

밀레나는 움찔하며 창구 너머를 보았다. 동행할 수 있는 건 한 사람뿐이라는 말에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은행 바닥 쪽에서 이상한 기류가 뿜어졌다.

마나 파장은 아니었다.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파동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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