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461화 (461/558)

제461화

면전으로 날아드는 꼬리를 피한 후 뭉툭한 단검으로 타챠의 어깨를 노렸다.

탁!

시야 밖에서 날아든 창대가 단검을 쳐냈다. 손목이 시큰해졌다. 뒤로 물러서며 자세를 낮췄다.

두 발이 땅에 닿기 무섭게 창끝이 치고 들어왔다. 공기가 찢어지며 매서운 소리를 냈다.

창대가 볼을 스쳐 갔다. 맞았으면 두개골이 으스러지는 게 아니라 뚫렸을 것이다.

“감정이 실린 것 같은데요!”

“그럴 리가.”

밀레나는 타챠의 우측으로 돌아가 단검을 던졌다. 날아간 단검이 타챠의 시야를 어지럽히는 사이 왼쪽 무릎을 향해 달려들었다.

타닥!

한 바퀴 회전한 창이 단검을 쳐내고 공격로를 틀어막았다.

밀레나는 인상을 쓴 채 다시 물러섰다.

“안 보이지 않았어요?”

“살의로도 느낄 수 있다.”

“살의라뇨. 전 감정을 싣지 않았어요.”

“아닌 것 같던데?”

자세를 가다듬고 다음 전술을 생각할 때였다.

“밀레나!”

저 멀리서 엔엔이 외쳤다. 가하란도 함께였다.

“가봐라.”

타챠가 창대를 거뒀다.

“이따가 다시 해요. 몸도 풀렸겠다, 제 실력 제대로 보여드릴 테니.”

“도전은 언제든 환영이다.”

타챠가 움직이자 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작은 거병, 배쉬플도 이동했다. 모핑과 무브먼트를 위해 관찰 중이라고 하는데, 어떤 결과물이 나올지는 미지수였다.

-……나중에 봐요.

수줍게 인사하며 떠나는 배쉬플이었다. 타챠가 얼른 오라고 한 소리 하자 걸음이 빨라진다.

멀어지는 둘을 바라보며 작게 웃었다.

타챠가 관찰을 허락했다는 게 의외였다. 거병도 싫어하고 귀찮은 건 더더욱 질색하는 아저씨인데.

가하란이 설득한 걸까?

“무슨 일이에요?”

엔엔에게 다가서며 물었다. 말문을 연 건 가하란이었다.

“이거, 프레나한테 받았다고 들었는데.”

가하란이 내민 건 작은 브로치였다.

“맞아. 둔을 떠나기 전에 선물 받았어.”

표정을 보아하니 문제가 있는 듯했다.

“그냥 장식품 아니야?”

“현 마법 공학으로는 구현 불가능한 기술이 적용돼 있어.”

“기술이라니?”

“신호 발생기야. 완성품이 아니라 특정 대역의 마나를 이용해 신호만 발산할 뿐이지만.”

브로치를 넘겨받았다. 신호를 발산한다?

“5km 내라면 이걸 소지한 사람의 위치까지 확정할 수 있겠지만, 둔을 벗어났으니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겠지.”

“프레나는 날 위한 선물이라고 했어. 왜 이런 게…….”

“아무래도 유단하고 연관이 있는 거 같아. 가족이니까 이미…….”

밀레나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아니야. 네가 사라지고 난 후 유단을 수없이 조사했어. 그 과정에서 프레나와 유단 사이가 틀어졌다는 것도 확인했고. 둘은 명목상 가족일 뿐이지 최근까지도 왕래가 없었어.”

밀레나는 말을 멈추고 인상을 썼다.

“프레나는 날 의지했어. 나도 걜 동생으로 아꼈고. 근데 그게…….”

“아닐 수도 있어. 유단, 로키가 중간에 끼어든 것일 수도 있어.”

가하란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신경 써주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밀레나는 브로치를 내려다봤다.

“이걸 받은 날, 프레나는 내가 둔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이걸 준비했다고 했어.”

“누나.”

“우연이 겹치는 일은 없잖아. 아무래도 나한테 접근하기 위해 유단하고 관계를 끊은 척한 것 같아.”

브로치를 움켜쥐었다.

“뭐, 이해할 수 있어. 사람 속이며 만나는 거 흔하잖아? 근데 목적이 뭐야? 이렇게까지 해서 날 감시하려는 목적. 그걸 모르겠어. 아무리 생각해도 난 유단에게 가치가 없을 텐데.”

왜일까?

의문을 던지면서 과거를 되짚어 봐도 달리 떠오르는 건 없었다. 마찰이 몇 번 있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독립 부대와 오라클의 견해 차이로 인한 다툼이었다.

-사소한 이유라면 있긴 한데.

시야 밑에서 목소리가 올라왔다.

사족 보행기에 본체를 실은 카트시였다.

-유단하고 심하게 다툰 적 없죠?

“없어. 보는 것만으로도 짜증이 나서 얼굴 마주칠 일은 만들지도 않았으니까.”

-뒤를 캐고 있다는 걸 들킨 적은요?

“내가 하면 어설플 것 같아서 아리엘 언니한테 부탁했어. 발각될 일은 없었을 거야.”

-그러면 가능성은 둘이죠. 첫 번째는 밀레나가 진실을 알고 있다는 걸 확신하고 감시한 것.

“진실?”

-덴스 교수의 사망 건이요. 유단, 아니지, 로키는 알고 있었어요. 사건의 진실을 아는 자가 한 명 있다는 걸. 덴스 교수가 임종 직전에 경고했을 테니까요.

밀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만큼은 아니지만 로키도 우수한 아이예요. 곧바로 정황을 살피고 정보를 취합해 가능성 있는 인물을 추려냈겠죠. 높은 확률로 가하란을 지목했을 거예요. 덴스 교수가 코마 상태에 빠지기 전, 마지막으로 만난 게 가하란이었으니까요.

“하지만 감시해야 할 대상이 실종 처리됐지.”

밀레나는 가하란을 보며 말했다.

-맞아요. 로키한테는 최고의 순간이었겠죠. 하지만 여전히 가능성을 생각했을 거예요. 그리고 당시 가하란의 집을 가장 많이 찾았던 건…….

“나.”

-의심하는 게 당연하죠. 관찰하고 싶었겠죠. 치부를 알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잠자코 듣던 가하란이 입을 열었다.

“로키라면 감시보다는 제거를 택했을 거야. 물론 교수의 임종 직후라면 힘들었겠지. 자신의 세력이 없을뿐더러, 당시에는 용의자 중 하나로 지목돼 수사를 받고 있었으니까.”

-그렇죠.

“하지만 지금은 달라. 동부의 실권을 쥐고 있는 사람 중 하나야. 게다가 누나는 외부 작전을 자주 나갔어. 기회는 몇 번이고 있었을 거야.”

섬뜩한 말이었다. 로키가 작정하고 사람을 써 입막음하려 했다면, 과연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그렇기에 두 번째 이유가 등장하죠. 거치적거리고 치우면 아주 편안할 인간을 내버려 둔 이유.

“뭔데?”

밀레나는 카트시의 안구를 붙잡으며 말했다.

-가하란. 밀레나의 얼굴을 잘 봐요.

가하란의 시선이 느껴졌다. 빤히 쳐다보는데, 처음에는 아무렇지 않았으나 몇 초간 지속되자 괜스레 부끄러워진다.

“봤어.”

-뭐 떠오르는 거 없어요?

“예쁘다는 거?”

-틈틈이 점수 따는 건 훌륭해요. 하지만 그거 말고 떠오르는 거요. 아니, 닮은 사람이라 하면 금방 생각나겠죠.

“…….”

가하란이 입술을 붙였다. 표정이 살짝 굳는 게 보였다.

“그게 연관이 있다고?”

-지금의 전 껍데기를 깬 상태라 그녀를 인식하는 방식이 바뀌었어요. 하지만 그녀의 아이들은 여전히 그녀를 맹목적으로 사랑하고 있죠. 이건 어쩔 수 없어요. 세상 그 자체인걸요? 낳아준 세상을 부정하는 것보다 사랑하는 게 쉽기도 하고.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언급된 ‘그녀’가 줄리어스라는 건 알지만, 그 사람이 지금 왜 등장하는 걸까?

-전 밀레나란 사람을 보죠. 그렇기에 그녀가 떠오르진 않아요. 하지만 단순히 외형만 따진다면…….

“그 정도로 닮은 거야?”

가하란이 물었다.

-네. 풍기는 분위기가 아주 비슷해요. 아! 물론 행동은 달라요. 줄리어스는 굼떴으니까요.

그러니까 내가 닮았다는 건가? 줄리어스랑? 그게 왜 감시당할 이유가 되는 거지?

“박제라도 하겠다는 거야, 뭐야.”

-그럴 수도 있겠네요.

“……정말로?”

-취향이란 건 변하니까요. 로키의 취향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지금은 알 수 없어요. 단순히 외모만 보존해 감상하고 싶다면, 밀레나를 박제하는 것도 한 방법이죠.

“난 농담으로 한 소리야.”

-전 진심으로 하는 소리예요. 줄리어스와 닮았다는 건 특별하니까요. 특별한 건 보관, 보존하고 싶어지죠.

가죽만 남은 몸이 로키 앞에 전시돼 있다고 생각하니 소름이 끼쳤다.

-어디까지나 그럴 수 있다는 거예요. 진짜 목적은 알 수 없어요. 가하란, 다른 위상에 있을 때 로키와 오랜 시간을 같이 보냈잖아요? 짐작되는 거 없나요?

시선이 가하란에게 옮겨졌다.

“아쉽지만 없어. 하지만 로키가 마지막에 한 말은 아직도 기억해.”

나는 결코 멈추지 않는다. 나는 도태되는 걸 가장 두려워한다. 그러니 날 설득하는 건 불가능하다.

가하란이 나지막하게 한 말이었다.

“설득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래 보이긴 해.”

밀레나는 유단의 껍질을 뒤집어쓴 로키를 떠올렸다.

“어쨌든 로키가 누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건 확실해. 로키의 목적 안에 누나가 포함돼 있으니…….”

가하란의 눈동자가 살며시 떨렸다. 무슨 말을 꺼낼 건지 예상이 됐다.

“미리 말해 두겠는데 여기서 기다릴 생각은 없어.”

“그럴 것 같더라.”

“여기가 더 안전하란 법도 없고. 그 브로치, 너만 찾아낼 수 있는 거잖아? 네 곁이 가장 안전해 보이는데, 틀렸어?”

“아니. 누나 말이 맞아. 다른 건 몰라도 이런 기술적인 간섭은 내가 차단할 수 있으니까.”

가하란이 브로치를 넘겨받더니 손가락으로 가볍게 짓눌렀다. 고양이가 반으로 접혔다.

“일정을 바꿔야겠어. 로키가 연결망에 근접했다는 걸 알게 됐으니 대비를 좀 더 해야지.”

“출발일을 미루게?”

“어.”

“어느 정도? 한 달?”

“아니. 일주일만 더.”

“괜찮겠어?”

“둔에 넘어가서 확인하려 했던 것들을 여기서 처리하려고. 머니페니들을 설득해야겠어.”

엔엔이 입을 열었다.

“머니페니에게 부탁할 게 있나요?”

“지하 통신 설비에 접근해야 해요. 카트시를 이용해 비트에 접촉해 보려 했지만, 안 됐거든요. 은행 지하에 있는 통신 장비라면 가능할 거예요.”

“통신 장비? 그런 게 있나요?”

“네.”

엔엔의 눈이 반짝였다.

“그걸로 뭘 할 생각이죠? 둔에 연락을 넣을 건가요?”

“가능하다면 전하고 싶지만, 그것보다 우선시해야 할 게 있어요.”

“혹시 하늘석인가요? 어제 가하란이 말해준 하늘석과 연락했다는 방식이…….”

가하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엔엔이 흥분하며 가하란의 팔을 붙잡았다.

“어서 가죠! 하늘석의 비밀을 실제로 볼 수 있다니. 머뭇거릴 시간이 없어요.”

“엔엔 님, 진정하세요. 이곳 머니페니들과 접점이 없어서 설득하기 어려울 거예요. 저도 계속해서 부탁드리고 있는데, 마음을 열지 않거든요.”

“그거라면 내가 해결해 줄 수 있어요.”

자그마한 엔엔에게 질질 끌려가는 가하란이었다. 밀레나는 카트시를 바라봤다.

“집 좀 봐줘.”

-네, 그래요. 저 털북숭이 눈 돌아간 거 말리려면 밀레나도 필요할 테니.

카트시를 뒤로한 채 둘을 따라갔다.

* * *

“제가 먼저 가볼게요. 꽤 친해지긴 해서.”

은행 창구에 있는 트릿족에게 다가갔다. 어스름달 울렉. 이름을 되새김질하며 말을 걸었다.

“머니페니, 오랜만이에요.”

“성실한 가하란이군요. 업무를 보러 왔나요? 아니면 티타임? 뭐가 됐든 환영해요.”

“차도 좋지만 저번에 말씀드린…….”

트릿족이 볼을 부풀렸다. 귀여운 얼굴과 달리 검정 눈동자는 사나워졌다.

“성실한 가하란. 난 당신이란 인간을 좋아해요. 아니, 우리 은행의 모든 머니페니들은 당신을 좋아해요. 당신이 만들어준 편리한 도구들 덕분에 업무 부담도 줄었고요.”

가하란은 트릿족 뒤로 천천히 움직이고 있는 자루를 바라봤다. 기계인형이 나르는 중이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예요. 지하실은 개방할 수 없어요. 거긴 머니페니, 아니, 부의 트릿이 아닌 이상 들어갈 수 없어요. 들어가서도 안 되고.”

“역시 힘든가요?”

“다른 부탁이라면 뭐든 들어줄게요. 아! 돈 빌려달라는 건 빼고.”

가하란은 뒤쪽을 돌아봤다. 엔엔에게 눈짓을 주니 재빨리 다가왔다.

“오우, 칼랑의 후예시군요. 아름다운 털만큼이나 빛나는 지성을 갖추셨겠군요.”

“고마워요. 당신의 부푼 볼도 대단한 재력을 상징하는 것 같아 보기 좋네요.”

쑥스럽게 웃는 울렉이었다.

하지만 금방 미소를 거두며 시선을 옮겼다.

“보아하니 같이 오신 것 같은데, 설마…….”

“어스름달 운주. 근방에서 은행을 맡고 있을 텐데, 알고 있나요?”

“그분이라면 알고 있죠. 여기 계시기도 하고.”

“볼 수 있을까요? 칼랑의 엔엔이 채무를 정리하러 왔다고 하면 알아들으실 거예요.”

채무란 말에 머니페니가 벌떡 일어나 짧은 발을 움직여 뒤쪽으로 사라졌다.

다른 창구를 맡은 사람들이 흘깃 이쪽을 바라봤다.

“괜찮은 거죠? 놀란 표정이었는데.”

“괜찮을 거예요. 아마도.”

엔엔이 웃으며 말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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