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0화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꿉꿉한 숨을 내쉴 때였다. 곁으로 다가오는 사람이 있었다.
아리엘은 굳은 표정을 풀고 테인을 바라봤다.
“테인 경.”
“오랜만에 뵙습니다.”
“저희 둘 다 둔에 머물고 있는데 얼굴 보기가 힘드네요.”
인사를 마친 후 회의실 문을 바라봤다.
“뭐 하나 물어봐도 될까요?”
“말씀하시죠.”
“의원님, 아니, 시장님의 마음. 그 속내 좀 알 수 있을까요? 테인 경이라면 알고 계실 것 같은데.”
“글쎄요. 전 그분의 마음을 헤아려본 적이 없습니다. 지시받아 움직일 뿐이니까요.”
담담하게 말하는 테인이었다.
한쪽 눈을 씰룩이는 사이 회의실 문이 열리며 아르드헨이 걸어 나왔다.
“얘기 좀 하시죠.”
“얘기라면 회의실에서 다 하지 않았습니까?”
“안에서 못 하는 말이란 게 있으니까요.”
열린 문틈 사이로 유단이 보였다.
“알겠습니다. 앞장서시죠.”
아르드헨과 함께 복도 끝으로 향했다. 몇 걸음 떨어져 따라오던 테인이 복도 중앙에 멈춰 섰다. 테인이 버티고 서 있자, 복도를 오가던 사람들이 멈칫하며 길을 돌아갔다.
“정말 전쟁을 원하세요?”
잡담 나눌 사이도 아니니 본론부터 꺼냈다.
“다수가 원한다면 그렇게 되겠죠. 전 거기에 편승할 거고요.”
“그 다수를 대표하는 입장이시니 방향성을 정할 수 있겠죠.”
“원하는 바를 말하시죠.”
“잉여 자원을 미개척지 탐사에 쓸 수 있도록 힘을 보태주세요. 의원님께서 제 말에 동조해 주시면 다른 분들도 다 따라오겠죠.”
“그러죠.”
너무나도 쉽게 허락하는 아르드헨이었다. 의심될 정도로 담백해서 오히려 눈살이 찌푸려졌다.
“왜 그러시죠?”
“타협안도 없이 승낙하셨으니까요. 하나를 부탁드리면, 두 개를 달라고 하시는 분이 아르드헨 의원님이시잖아요.”
“제가 그렇게 악덕 상인처럼 굴었나요?”
“악덕 상인이 차라리 낫죠.”
“슬프군요. 저는 의원님께 잘 보이고 싶었는데.”
아르드헨이 낮은 목소리로 웃었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유단 학회장이 분배소 확장을 원하고 있습니다. 탄드라 교수와도 모종의 거래가 있었겠죠. 요즘 사이가 틀어진 것처럼 보여도, 원체 끈끈했던 두 분이니.”
“학회장에게 힘을 실어주고 무얼 얻으시려 한 거죠?”
“자리, 권력. 제가 움직이는 이유야 훤하지 않나요? 그걸 숨긴 적이 없는데요.”
“…….”
반박할 수 없었다. 대놓고 탐욕적인 인간이었으니까. 그렇기에 어지간한 인간들보다 솔직했다.
“강직한 정치 같은 건 없어요. 어디에나 선을 대놓아야죠. 학회장이 득세해 저한테 도움이 될 것 같으면 그쪽의 손을 들어줄 겁니다. 반대로 아리엘 의원이 군부를 틀어쥐어 세력 구도가 바뀔 것 같다면, 의원님 손을 들어줄 거고요.”
“그렇다는 건…….”
“의원님께서 상대해야 할 건 제가 아니라 학회장입니다. 학회장도 전쟁 자체를 원한다기보다, 아까 말했듯 전쟁을 통한 분배소 확장에 초점을 맞춘 것 같습니다. 인프라를 장악해 더 높은 곳에 오르겠다는 야욕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좋아요. 이야기가 쉬워졌네요.”
아르드헨이 손가락을 뚝 소리 나게 꺾었다.
“근데 이런 논의는 사실 쓸모가 없어요. 사절단이 모든 걸 결정할 겁니다. 연합 도시가 전쟁을 원하면 의원님도 전쟁을 준비하셔야 하니까요.”
“15년 전쟁은 합치가 이뤄졌기에 발생한 전쟁이었죠. 지금은 달라요.”
“그럴지도 모르죠.”
회의실에서 유단이 나오는 게 보였다. 그는 가볍게 묵례하고 2층으로 올라갔다.
“사절단이 돌아올 때까지, 다른 의원들을 자극하지 않아 주셨으면 해요. 연합 도시와의 전쟁 이전에 타리움 내전으로 골치 아파지는 건 싫으니까.”
“그것도 들어드리죠. 대신 미개척지 개간은 제 도시 남부부터 시작하는 거로.”
“……기어이 하나는 받아 가시네요.”
“공짜는 몸에 해로워요, 아리엘 의원님.”
아르드헨이 이만 가보겠다며 몸을 돌렸다.
“의원님. 학회장한테는 뭘 받기로 한 거죠? 그를 돕는 대가는 뭐죠?”
“따로 약속한 건 없습니다. 그저 투자 개념으로 접근한 겁니다. 재능 있는 친구잖아요?”
“그 투자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죽을 수도 있어요.”
“의원님.”
아르드헨이 고개만 살짝 돌리며 말했다.
“제가 선량한 인간이었다면 황제가 아닌 황자인 채로 죽었을 겁니다. 무엇보다 이미 내 말에 죽은 사람이 아주 많아요. 거기에 천 명이 더해진들, 만 명이 더해진들 그리 달라질 건 없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옛 황제는 시민을 위해 움직이는 사람이었어요. 시민에게 문자를 가르치도록 한 것도, 교육 시설을 개방한 것도, 자유 시민의 권한을 높인 것도 그 사람의 업적이었죠.”
황위를 위해 15년 전쟁을 일으키고, 아잔탄스 가를 성도에서 치워버린 잔인한 황제.
동시에 낮은 자들을 위해 의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각종 행정을 시행한 덕을 아는 황제.
“지금의 아르드헨은 어떤 사람이죠?”
“아리엘 의원. 게스할트 장군께서 가르쳐주지 않던가요? 군의 기본은 건강한 체력이다. 그렇다면 국가의 기본은 무엇일까요? 건강한 시민입니다. 나는 비루한 노예를 통치하고 싶은 게 아닙니다. 그건 무의미하죠. 내가 하고 싶은 건 강성한 국가를, 향상을 아는 인간들로 이뤄진 집단을 이끌고 싶은 것입니다.”
“강성해진 국민에게 잡아먹힌다는 생각은 안 해보셨나요?”
“약해지면 잡아먹히겠죠. 이미 한 번 잡아먹혔고요. 하지만 살아남았습니다. 많은 걸 배웠죠. 시민들은 분명 힘을 갖게 됐어요, 더욱 영민해졌죠. 힘의 통치가 아닌 인기의 통치. 세대가 바뀌었어요, 아리엘 의원. 난 시민이, 국민이 바라는 바를 이뤄주는 정치가가 될 겁니다.”
“희한한 말씀을 하시네요. 이끄는 게 아닌, 시민이 바라는 걸 들어주는 위정자라고요? 그건 철인이 아니에요.”
아르드헨이 기뻐하며 손뼉을 쳤다.
“그래요, 바로 그겁니다! 철인의 시대는 끝났어요. 미스터 리가 해준 말을 기억하세요. 이제는 인기와 투표, 그리고 우상의 시댑니다. 철인은 죽었어요. 물론 카리스마는 필요하지만.”
“미스터 리는 다른 계에서 온 사람이죠. 이곳 정세와는 맞지 않아요.”
“변할 겁니다. 분배소와 마전기. 그로 인해 노동 가치가 바뀌었고, 시간이 더 생겼으며, 그 시간을 자기에게 투자하는 시민이 늘어나고 있어요. 시대는 지금보다 더 급변할 겁니다. 아리엘 의원, 지금이라도 웃는 연습을 하세요. 이렇게.”
기분 나쁠 정도로 환하게 웃는 아르드헨이었다.
“시민이 원하는 바를 들어주는 정치가가 될 거라고 하셨죠?”
“네. 명목상으로는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더더욱 전쟁은 안 되겠네요. 피 흘리길 원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
“그건 뚜껑을 열어봐야 알겠죠. 언젠가는 모두가 시민이 되겠지만, 지금은 참정권, 투표권을 쥐고 있는 사람만 시민으로 보니까요. 그들은 아마 전쟁을 원할지도 모릅니다. 대다수가 돈줄의 주인이니까요.”
아르드헨이 시계를 쳐다본 후 고개를 살짝 숙였다.
“가 봐야겠네요. 선약이 있어서.”
“사절단 출발 후 다시 찾아뵙도록 하죠.”
“그러시죠. 아, 근데 그 사절단 말인데…… 도중에 증발하지 않도록 잘 관리하셔야 할 겁니다.”
“증발이요?”
“말했잖습니까. 전쟁을 원하는 이들도 있다고. 연합 도시로 떠난 사절단이 돌아오지 않는다. 전쟁의 명분은 그거로 충분하죠.”
“그 정도로 미친 자들이…….”
아리엘은 중간에 말을 삼켰다.
눈앞에 있는 남자만 해도 반쯤 미친 사람이었으니까.
“증발하지 않도록 규모를 늘려야겠네요.”
“그래야 할 겁니다.”
“제가 직접 참여하면 좀 더 낫겠군요.”
“훨씬 그림이 좋겠죠.”
“의원님도 그걸 원하시는 것 같고요.”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가는 길에 죽어준다면 더욱 좋겠고요.”
“그런 험악한 말을. 그렇게까지 바란 적은 없습니다. 파트너가 될지도 모르는 사람인데.”
“안 된다면 치우겠다는 말로 들리네요.”
“의원님, 저는 항상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아리엘은 미간을 모았다.
“허스 님께서 왜 의원님 같은 분을 모셨는지, 전 전혀 모르겠네요.”
“그 친구는 절 모신 게 아닙니다. 서로서로 이용해 먹은 거죠. 그 친구가 절 위해 칼을 쓰면, 전 그 친구를 위해 안전한 집을 제공해 줬죠. 그뿐입니다.”
안전한 집.
아리엘은 입술을 붙였다. 모르는 것에 대해 논할 수 없었다. 황제와 총수, 둘 사이에는 많은 이야기가 있을 테니까.
“허스 님…… 협회장께서 참전하지 않는다는 건 확실한가요?”
“의원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그 친구는 팔이 닿는 범위만 지킵니다. 나서지 않아요.”
“정말로 전쟁이 일어난다면 그분의 힘이 절실해질 거예요.”
“아리엘 의원.”
아르드헨이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인간의 일은 인간이 정리합시다. 고단한 친구 등 떠밀지 말고.”
그 옛날, 감히 바라볼 수 없는 위치에서 최고 원로들을 상대하던 시절의 눈빛이었다.
하지만 냉철한 눈도 잠시, 이내 얄팍한 미소를 짓는 아르드헨이었다.
“이미 부려먹을 대로 부려먹은 인간이 이런 말 하니 웃기긴 하네요. 그 친구가 저만 보면 질색하는 것도 이해가 됩니다.”
하하, 웃으면서 떠나가는 아르드헨이었다.
“의원님.”
돌아보니 율이 서 있었다.
“내용은 들었지?”
“들었습니다.”
“사절단 바로 꾸릴 거야. 국경 너머에 있는 필렌 님께 먼저 연락을 취해야겠어.”
“준비하겠습니다.”
“피곤하네. 늑대들 사이에서 장단 맞추려니까.”
“의원님도 늑대시니 괜찮습니다.”
“……맞아. 남 말할 처지는 아니지. 대단한 정의감 때문에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개간이 우리 시에 도움이 되니까 노선을 그쪽으로 정했을 뿐.”
건물 밖으로 나오자마자, 율이 빡빡하게 두르고 있던 넥타이를 풀었다.
“갑갑한 걸 왜 차고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어.”
“이젠 좀 익숙해져.”
“언니처럼?”
걸으면서 율이 준 명단을 훑었다.
“사절단이 공격당할 수도 있어.”
“믿을 만한 사람들한테 제안해 볼게.”
“최대한 많이, 그리고 빨리. 상황 봐서 나도 참가할 거야.”
“위험하지 않겠어?”
“위험한 만큼 건질 것도 있으니까.”
서류를 다시 율에게 넘기며 말했다.
“케트론 의원과 약속 잡아줘. 학회장을 틀어막든, 설득하든 어쨌든 그쪽부터 해결해야 하니까.”
* * *
“비앙크.”
가하란은 독특한 구조의 거병을 바라봤다. 마나 형상화를 이룩한 거병. 단기 분사로 추진력을 얻는 것과 달리, 올의 시스템처럼 마나를 장기간 물질화해 사용했다.
“안에 있는 레거시가 핵심이에요. 아주 독특한 물건이죠.”
엔엔이 체임버 덮개를 열었다.
가하란은 안쪽으로 들어가 오토마타가 있을 후면 하단부를 확인했다.
들었던 대로 오토마타 대신 독특한 회로와 함께 비앙크가 놓여 있었다.
“카트시가 연산을 담당했기에 가동할 수 있었어요. 기존에 쓰던 유사 정령은 오버플로가 자주 일어나는 문제가 있었거든요.”
“여기에 사용된 건 마법 공학보다는 마법에 가깝네요. 회로의 있음과 없음의 설계가 제멋대로예요.”
“칼랑의 마법이죠. 예전에 공방에서 본 인형 기억나죠?”
“예. 그러고 보니 그것과 닮았네요.”
착안을 열어 회로를 살폈으나 제대로 된 정보를 얻어낼 수는 없었다. 선으로 화한다 한들 패턴을 읽어내지 못하면 쓸모가 없다.
가하란은 비앙크를 손에 쥐었다.
“길리우드가 이걸 사용했다는 거군요.”
착안으로 들여다봐도 형태가 무너지지 않았다. 해석 불가능한 물건. 하늘석과 마찬가지로 ‘이해’ 바깥에 존재하는 것이리라.
“누나는 이걸 몇 달이 넘게 가동한 거고요?”
“맞아요.”
“쓰러진 것에서 그친 게 다행일 정도네요. 구조는 파악할 수 없지만, 마전기를 잡아먹는 양만 봐도 위험하다는 건 알 수 있어요.”
비앙크를 재설치한 후 체임버 밖으로 나오려 할 때였다. 체임버 바닥에 검 한 자루가 있었다.
“이건 뭐죠?”
검을 들어 올렸다. 투박한 검. 손잡이를 붙잡았는데 이질감이 느껴졌다. 맞지 않은 옷을 입었을 때처럼 불편하다.
“그건 모르겠네요.”
밀레나가 쓰기에는 검신이 길었다. 급하게 예비용으로 챙긴 걸까?
검을 내려놓고 조종간 쪽을 바라봤다. 가느다란 끈에 매달린 작은 브로치가 보였다. 검은색 고양이 모양.
괜스레 웃음이 나왔다.
이런 게 취향인가?
손에 올리고 잠시 바라볼 때였다.
느낌이 이상했다. 어딘가 모르게 익숙한 감각이 든다.
왼쪽 착안을 열고 브로치를 살폈다.
“……엔엔 님.”
“네?”
“이 브로치, 출처를 아시나요?”
“그거라면 알고 있어요. 프레나, 그 아이가 선물한 거예요.”
“프레나?”
가하란은 착안을 닫은 후 브로치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살짝 힘을 주어 끈에서 떼어냈다.
“가하란. 무슨 문제가 있나요?”
“지금 당장 문제가 될 일은 아니에요. 하지만 좀 알아봐야겠어요.”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