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459화 (459/558)

제459화

“좀 무섭게 들리네요. 마치 전쟁이 필요하신 것 같아서.”

“그럴 리가요.”

“양국 모두 피해 복구가 끝나고 이제 겨우 자리를 잡았어요. 전쟁이라니, 저쪽도 그걸 바랄까요? 우리도?”

아리엘이 좌중을 쓸어 봤다.

“원하는 사람이야 없겠죠. 하지만 의원님. 약간 수정해야 할 부분이 있어서 첨언하겠습니다.”

의자에 기대며 말하는 아르드헨이었다.

“우선 양국이 아닙니다. 타리움은 정치 연합체로 엄연히 국가는 아니죠. 또한 허술한 만큼 좋은 먹잇감일 수 있죠. 지친 상대를 몰아붙이는 건 전술의 기본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사절단을 꾸려 의중을 파악해 봐야죠. 대마수가 해체된 지금 국경을 넘는 건 쉬울 테니까요.”

“그거 아십니까? 선전 포고 없이 일어난 전쟁이 셀 수 없이 많다는 거.”

“최악을 상정하고 대비하는 건 좋지만, 발상의 방향이 의심스러워서 동조하기 어렵네요.”

아리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로 사절단을 꾸리죠. 둔에서 협력해 주시면 편할 텐데, 어떤가요?”

“사절단을 꾸리는 거야 반대하지 않겠습니다.”

양 당파의 대표인 아리엘과 아르드헨이 의견 합치를 보았다. 둔 의회만 손을 보태면 다른 의원들은 군말 없이 따를 것이다.

“협조하겠습니다.”

말한 뒤 의원들의 얼굴을 살폈다.

대마수가 사라졌다.

급변한 상황이 인간들을 뒤흔들고 있었다. 누군가는 상권을, 누군가는 군권을, 누군가는 정치 구도를 생각 중일 것이다.

불씨가 커지고 있다.

유단은 대륙 지도 쪽으로 걸어갔다.

“두 분의 말씀을 종합하면 과하게 반응할 필요도,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이유도 없다는 거겠죠.”

군 담당자가 쳐놓은 동그라미를 가리켰다.

“제 의견을 덧붙이자면, 만약 이 마나 공백이 연합 도시의 작품이라면…… 우리는 무엇을 대비해도 늦을 겁니다.”

“그게 무슨 뜻이죠?”

아리엘이 물었다.

“마나를 어떤 식으로 증발시키는지, 범위는 어디까지인지, 지속력은 어느 정도인지. 무엇 하나 파악하지 못했으나 성능만큼은 확인했습니다. 아까도 말했다시피 이게 우리 영토에 펼쳐진다면 우린 그 옛날 검과 창에 의지해 싸우던 시절로 돌아가야 합니다.”

“…….”

중도파들도 난처한 침묵에 동참했다.

“사절단을 보내 의중을 파악한다. 좋습니다. 우린 인간이고 인간은 말을 통해 이해를 구할 수 있으니까요. 근데 만약 저쪽이 아르드헨 의원님 말대로 전쟁을 준비 중이라면, 우린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그걸 대비하는 게 학회의 일 아닙니까?”

의원 하나가 입을 열었다.

“학회는 마법 공학을 연구, 개발하는 곳이지 전쟁을 준비하는 곳이 아닙니다. 전쟁 물자 중 일부를 댈 수는 있으나 전쟁의 주체가 될 수는 없죠. 전쟁은…… 여러분의 몫 아닙니까?”

시선을 받은 건 타리움의 대표 도시 시장들이었다. 그중에서도 아리엘과 아르드헨이 주목을 받았다.

“전쟁. 솔직히 말하면 전 전쟁을 잘 모릅니다. 멀리서 얘기로만 들었죠. 우리가 제국이던 시절, 각 귀족들은 영토전을 치렀습니다. 한데…… 그 당시 영지를 소유했던 귀족 중 몇이나 이곳에 있죠?”

시선이 잠깐 분산됐다가 다시 아르드헨과 아리엘로 모여들었다.

“옛 황제와 옛 군부 이인자의 영애. 두 분을 제외하면 정통이라 부를 만한 귀족은 이곳에 없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라운드 제로 이후 많은 귀족들이 숙청당했으니까요.”

말을 끝내자마자 아르드헨이 크게 웃었다.

“하하하, 맞습니다. 많이 죽어 나갔죠. 저도 제 목 간수하느라 정말 힘들었습니다.”

“불쾌하게 들리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현실이 그런데 빙빙 돌려 말할 이유가 없죠. 자, 계속하시죠.”

유단은 의원들을 바라봤다.

“중앙 군부에 몸담았던 분들도 이 자리에 거의 없을 겁니다. 도시 국가의 권력은 유명 클랜, 상단에 의해 재구성됐으니까요. 아니면 저처럼 운 좋게 얻어걸린 학자거나.”

유단은 펜을 넘겨받아 지도에 빗금을 쳤다. ‘연합 도시’라 쓰인 글자 위에.

“돈으로 치르는 전쟁이 아닌 실질적인 전쟁. 사람의 목숨을 숫자로 보고 던져야 하는 전쟁. 우린 그걸 준비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전쟁에는 지휘관이 필요하죠.”

빗금 친 연합 도시를 원으로 둘러친 다음, 선을 길게 그어 타리움 중앙부가 있는 둔에 연결했다.

“저들이 마나 공백이라는 기술력을 앞세워 밀고 들어온다면, 장담컨대 둔은 삽시간에 밀릴 겁니다. 오라클의 마법 거병조차 마나의 도움 없이는 거대한 고철덩이니까요.”

“대비할 방법이 아예 없는 겁니까?”

반가운 질문이었다. 유단은 책상에 두 손을 올리며 인간들을 바라봤다.

“아예 없었다면 입을 열지 않았겠죠. 불의의 사고로 자리를 비운 탄드라 의원과 진행 중인 프로젝트가 하나 있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마나의 밀집도를 높이는 시스템입니다. 분배소의 전송량을 높이는 과정에서 얻게 된 부산물이죠.”

“밀집도를 올린다…….”

유단은 아르드헨을 슬쩍 바라봤다.

방향성만 맞는다면 방해할 생각이 없다는 듯 그는 미소를 머금은 채 지켜보는 중이었다.

“보고서에 따르면 일정 구역의 마나를 증발시켰다고 합니다. 비워낸 마나만큼 보충한다면, 어느 정도는 대비할 수 있겠죠.”

“효력을 장담할 수 있나요?”

“그걸 이 자리에서 말할 수 있다면 전 학자가 아닌 신이겠죠. 테스트해 봐야 합니다.”

짝 소리가 났다. 손뼉을 친 건 아르드헨이었다.

“추궁은 나중에 하고 일단 지원해 주는 게 어떻겠습니까? 다른 누구도 아닌 둔 학회장님이신데. 다들 알지 않습니까? 학회장님의 지식이 없었다면 우린 이 자리에 오지도 못했어요.”

반대하는 의견은 없었다. 반대하려면 대안을 제시해야 하는데, 저 인간들한테는 대안이란 게 없을 테니까.

“밀집도를 올리는 방식. 마나와 관련된 것이니 위험성이 크겠죠?”

“밀도에 따라 다릅니다. 가시화 단계에 진입할 정도로 밀도를 올리면 걱정하는 사태가 발생하겠으나, 사실 그 정도로 밀집하는 건 기술상 불가능합니다. 장비들이 못 버티니까요.”

적당한 사실과 적당한 거짓을 버무려 말하면 인간들은 알아챌 수 없다.

여기에 앉아 있는 그 누구도 마력선 짜맞춤을 이해하지 못할 테니까. 기술의 근간조차 모르는 자들이니 거짓을 섞는다고 한들 아무 문제 없다.

“전술 운용이 가능할 정도의 마나를 확보하는 것. 그걸 목표로 시스템을 연구, 확보해 보겠습니다. 분배소와 전송탑을 이용한 것이니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의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단은 아르드헨을 바라봤다. 위험한 인간이나, 지금 당장은 뜻이 일치했다.

주도권을 넘겨주면 원하는 바를 가져오리라.

“이건 어디까지나 방어책입니다. 아리엘 의원이 걱정하는 전쟁 기폭제가 될 일은 없으니 안심하시죠.”

“대비하는 것 자체를 반대하진 않아요. 도시 방어는 최우선 과제니까요.”

“탁월하신 말씀이십니다. 역시 게스할트 님의 총애를 받으신…….”

아리엘이 눈을 찡그리자 아르드헨이 웃으며 입을 다물었다.

“사절단과 방어 시스템 구축. 최대한 빨리 진행해 성과를 내죠. 사절단 인선은 어느 분이 맡으실 건가요?”

“여러분. 이 건은 아리엘 의원께 일임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데요.”

아르드헨이 말하자 대다수의 의원이 동의했다.

“알겠습니다. 인선은 제가 맡죠. 최대한 빨리 연합 도시로 가는 길을 뚫겠습니다. 평화 협정서를 받아오면 좋겠지만…….”

“그게 아닐 시에는 저희도 준비해야죠. 지긋지긋한 전쟁을.”

전쟁이란 말이 다시금 회의장을 휘감았다.

통합 사령실을 언제 꾸릴 것인지, 총지휘권은 누구에게 넘길 것인지, 옛 군부의 시스템을 그대로 답습할 것인지에 대한 여러 논의가 오갔다.

“허스. 그분에게 자리를 맡기는 건…….”

수염을 짧게 친 의원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말을 받은 건 아르드헨이었다.

“저도 그러고 싶은데, 그 친구는 거절할 겁니다. 무엇보다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 수도 없어요.”

“나라의 명운이 걸린 일일 수도 있는데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워낙 바빠서요. 그리고 그 친구는 나라를 위해 싸우지 않습니다. 예전이야 제 기를 좀 살려주려고 전장에 나섰지만, 이제는 아니거든요.”

“그렇다면 테인 경을…….”

“훌륭한 친구죠. 하지만 군대를 다룰 수 있는 그릇은 아닙니다. 부대 단위로 통솔하는 건 누구보다 잘하겠지만.”

중앙 군부 시절 활동했던 젊은 장수들의 이름도 언급됐다. 목록이 추려지자마자 보좌관들이 움직였다.

“언질 정도만 해두죠. 아직 확정된 건 아니니까.”

아리엘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더 논의할 게 있나요? 없으면 파하죠. 각자 준비해야 할 것도 많으실 텐데.”

“그럽시다. 탁상행정해 봤자 나오는 것도 없고.”

의원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벗어났다. 마지막까지 남은 건 아리엘과 아르드헨, 그리고 유단이었다.

“둘이 사전에 얘기가 된 건가요?”

아리엘이 곧바로 입을 열었다.

“저도 막 보고를 들은 겁니다. 사전에 무언가를 말할 건더기가 없죠.”

“그런 것치고는 두 분의 합이 아주 잘 맞던데요.”

“제가 학회장님과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긴 합니다. 아리엘 의원은 사람이 너무 무서워서 학회장님이 꺼리시겠지만.”

풋 하고 대놓고 웃는 아르드헨이었다.

“전쟁을 원하시나요?”

“필요하다면요. 의원님도 알지 않습니까. 오랫동안 묶여 있던 말들이 난리 치기 직전이라는 걸.”

“전쟁이 장난은 아닐 텐데요.”

“처참하죠. 무섭죠. 하지만 전쟁을 통해 얻는 것도 많을 겁니다. 정체된 자원들, 슬슬 돌릴 때가 되지 않았나요?”

아르드헨이 의자에서 일어나 지도로 향했다.

“그라운드 제로 이후 13년? 14년? 그 정도 된 거 같은데, 그간 우린 꽁꽁 싸매고 이 안에서 옹기종기 지냈죠.”

동부 타리움을 가리키는 아르드헨이었다.

“대재앙 전만 해도 제국 내에서 영토전이 계속 벌어졌어요. 승자와 패배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건 물자가 활발하게 이동한다는 거죠.”

유단은 옛 황제의 얼굴을 바라봤다.

분배소와 마전기.

혁신은 풍요를 가져왔다.

그리고 풍요는 잉여 자원을 낳았다.

“클랜에서 찍어내는 거병들. 마수 토벌조차 요즘에는 뜸해졌다고 하죠? 잡으려면 미개척지까지 치고 들어가야 하는데, 아직은 어렵고. 둔 연구 단지 쪽 가보셨나요? 지금은 연구 단지가 아니라 생산을 끝마치지 못한 거병의 무덤이 됐어요. 수요가 공급을 못 따라가요.”

아르드헨이 유단을 바라봤다.

“둔의 학회장님이시니 잘 아시겠죠. 적정한 소비와 소모가 이뤄지지 못하면 사회는 정체됩니다. 유명한 클랜들도 재정 상황이 안 좋다고 들었습니다. 이 상황이 지속되면 어떻게 될까요?”

“제작자가 손을 놓겠죠. 이제는 국책 사업도 아닌 만큼 지원금을 끌어올 데도 없고요.”

“맞습니다. 유능한 장인들이 일선을 떠나게 되겠죠. 그다음은? 한순간에 공백이 찾아올 겁니다. 지금과 같은 시기에 양질의 거병이 없다? 누군가가 아주 좋아할 얘기군요.”

가만히 듣고 있던 아리엘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도시 간 내전이라면 저도 생각은 해뒀어요. 준비하고 있는 시장이 있다는 것도 들었고.”

“잘 아시네요. 타리움은 언제 분열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어차피 우린 도시 국가니까요. 인프라를 완벽히 갖춘 상태에서 인구도 포화됐고, 잉여 자원도 생겨났습니다. 이젠 소모할 때죠.”

“하지만 전쟁은 규모가 달라요.”

“크니까 좋은 게 아닐까요? 격정의 시대가 찾아와야 사람들은 지도자를 원하게 되니까요.”

“……예전부터 생각한 거지만 당신은 정말 정치를 해선 안 될 사람이에요.”

“하지만 태어난 게 황족인데 어쩌겠습니까? 하늘의 뜻을 이어받아서 해 먹어야지.”

“허스 님 곁에 당신 같은 사람이 있다는 게 정말 이해할 수 없네요.”

“사람 사는 게 뭐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고고한 정의에 인생을 바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저처럼 사욕에 환장해 밀고 나가는 사람도 있고.”

아르드헨이 빙긋 웃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입니까?”

“지금 제가 제일 열받는 게 무엇인지 아나요?”

“압니다. 저와 바라보는 방향이 비슷하다는 거겠죠. 그러니 이렇게 남아서 얘기하고 있고. 학회장님 역시 그러시겠죠?”

유단은 어깨를 으쓱였다.

“전 실험에 필요한 지원금을 원할 뿐입니다. 아까도 말했듯, 저한테 전쟁은 너무나도 먼 얘기거든요.”

“그럼요, 그럼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랑 아리엘 의원이 돈 줄기를 잡아끌어다 학회 앞에 대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지켜보던 아리엘이 말했다.

“소비와 소모는 찬성해요. 하지만 방식은 찬성할 수 없어요.”

“도시끼리 싸우든, 연합 도시와 싸우든 결국 일어나게 될 겁니다.”

“미개척지로 시선을 돌려야 해요.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가정하에.”

“그것도 나쁘진 않죠.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연합 도시의 의중 아니겠습니까? 그들이 전쟁을 원하면 우린 선택권이 없어요.”

“저쪽도 우리와 같은 인간이에요.”

“다 같이 미친놈들이다?”

아리엘은 대꾸하는 것조차 미련하다고 생각했는지, 인사를 남기고 떠났다.

아르드헨이 싱글벙글 웃으며 그 뒤를 쫓아갔다.

문을 나서기 전 옛 황제가 말했다.

“아리엘 의원의 말이 옳긴 해요. 뭐든 ‘적당히’가 중요합니다. 학회장님, 기억하세요. 적당히 하는 게 중요하다.”

“예. 적당히 해야죠.”

닫히는 문을 바라보며 눈웃음 지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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