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458화 (458/558)

제458화

“잘 오셨어요.”

“……무슨 일이에요?”

엔엔이 고개를 빼고 안쪽을 봤다.

식탁에 체스판이 놓여 있었다.

“엔엔 님, 체스 두실 줄 알죠?”

“알죠.”

“정말 잘됐네요.”

가하란이 손을 붙잡아 끌었다. 어어, 하는 사이 밀레나 맞은편에 앉게 됐다.

“둘이 두세요. 전 아침 준비해야 하니까.”

밀레나가 뭐라 말했지만 가하란은 듣지 않고 솥 앞에 섰다. 카트시가 기계 안구를 움직이며 말했다.

-음! 벌써부터 권태기!

눈을 얇게 뜬 밀레나가 무심한 손길로 기물을 정리했다.

격전을 치를 때처럼 날카로운 기운이 넘실댔다.

“밀레나?”

조심스럽게 이름을 불렀다.

“엔엔 님. 체스 잘 두시나요?”

“적당히 둘 줄 알죠.”

“잘됐네요. 저랑 한 게임 해요. 엔엔 님을 이기고 나서 리벤지해야 하니까.”

엔엔은 눈동자를 움직여 밀레나와 가하란을 번갈아 봤다.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체스를 두어야 할 것 같았다.

“불렛 룰 아시죠?”

“네. 30초 안에 두는 거 맞죠?”

“맞아요.”

기물을 순서대로 놓자마자 밀레나가 움직였다. 엔엔은 수를 읽으며 말했다.

“무슨 일 있었나요?”

“일이요?”

“화난 것처럼 보여서요.”

“화 안 났어요.”

난 거 같은데?

밀레나는 거침없이, 그러면서도 예리하게 빈틈을 찔러 들어왔다.

좋은 수였다. 포섭을 깔아두고 일곱 수 뒤에 나이트로 포문을 여는 정석적인 수.

-대충 보이네요.

카트시가 말했다. 엔엔도 동의했다.

십여 분간 말없이 기물만 움직였다.

빠르게 체스판 위를 오가던 밀레나의 손이 처음으로 멈췄다.

“잠깐만.”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27, 28, 29.

카트시가 초를 세자 밀레나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룩을 밀었다. 그 역시 좋은 수였다. 하지만 읽힌 수라는 점에서 아쉬운 수였다.

전세가 굳혀졌다. 뒤집을 수 없다는 걸 밀레나도 깨달았을 것이다.

반격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역시나 게임은 예상했던 대로 흘러갔다.

엔엔은 체크를 선언하고 손을 뗐다.

뚫어져라 체스판을 보던 밀레나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졌습니다.”

인간치고는 나쁘지 않은 실력이었다. 마침 쌉싸름한 냄새가 풍겨왔다. 기물을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는데, 손 하나가 불쑥 날아들었다.

“한 게임 더 해요.”

“네?”

“시간 괜찮으시죠?”

집념 어린 눈이었다. 밀레나와 오랫동안 붙어 다녔지만, 이토록 집착하는 눈빛은 처음이었다.

아차 싶어 가하란을 돌아봤다. 안도의 미소가 보였다.

“가하란하고 두는 게 어때요?”

“아니요! 일단 엔엔 님하고 둘게요. 방법이 보였어요. 한 게임만 더 하면 따라잡을 수 있을 거 같아요. 아닐 수도 있지만.”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가하란하고 몇 게임 했나요?”

“다섯 판? 얼마 안 했어요.”

그러자 가하란이 살짝 높아진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새벽 6시부터 지금까지, 한 눈도 안 팔고 계속 뒀어요. 쉬는 시간 없이 쭉 불렛 룰로.”

엔엔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며 밀레나를 바라봤다.

“엔엔 님.”

“네.”

“정리 다 해놨어요.”

정돈된 기물을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밀레나.”

“네?”

“솔직히 말하면 밀레나는 절 못 이겨요. 이건 으스대는 게 아니에요. 명백한 사실이니까.”

“그렇게까지 차이가 나는 건…….”

“첫 게임이었으니까요. 기풍을 가늠하는 게임. 정식 대국을 치르기 전에 담소를 나누며 가볍게 두는 게임.”

밀레나가 체스판과 가하란, 그리고 엔엔을 차례대로 바라봤다.

“왜 제 주변에는 체스 괴물들만 있는 거죠?”

“저야 오래 살았으니까요. 인간들의 오락은 대부분 즐겨봤어요. 한창 즐길 때는 170년 전 체스 마스터와 사흘 밤낮을 뒀죠. 그리고 한동안 안 두다가 40년 전 ‘준’의 초청을 받고 며칠간 뒀고요.”

“준이라면…… 준 대공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맞을 거예요. 그때는 대학교 명예 교수였지만.”

“당시 승부는…….”

“제가 조금 더 앞섰죠.”

“말도 안 돼.”

밀레나가 뚱한 얼굴로 턱을 괬다.

“부대 내에서는 져본 적이 없어요. 어릴 때 쟤한테 계속 진 것 때문에 체스만큼은 손에서 놓지 않고 연습해 왔는데.”

“밀레나도 잘 두는 편이에요.”

“고마워요. 위로가 되진 않지만.”

떠드는 사이 가하란이 음식을 가져왔다. 처음 보는 형태의 음식이었다.

“이건 뭐죠?”

“아주 무시무시한 분에게 배운 음식이죠.”

“무시무시한 분?”

“용이요.”

“용?”

갸웃거리며 일단 포크를 들었다. 푹 찍어서 입에 넣었는데, 향신료 맛이 강렬했다.

“……내 취향은 아니에요.”

“그럴 것 같긴 했어요. 저도 처음 먹을 땐 낯설었거든요. 그쪽에 있을 땐 먹는 게 정말 중요했어요. 몇 안 되는 즐거움이라 온갖 것을 도전해 봤죠.”

“뭐, 아주 이상하지는 않네요.”

가하란의 말대로 먹다 보니 혀에 감기는 맛이었다.

-근데 두 사람 앞으로 계획이 뭐예요?

카트시가 말했다.

-한적하게 여기서 지내는 것도 나쁘진 않아요. 저는 가하란이 뭘 원하든 그게 옳다고 생각하니까.

엔엔도 포크를 놓으며 두 사람을 바라봤다. 가하란을 만나겠다는 단기적인 목표를 이뤘으니 이다음을 생각해 볼 때였다.

욕심 같아서는 가하란과 함께 마법 공학의 신기원을 열고 싶었다. 가하란이라면, 짜맞춤을 이용한 회로라면 특이점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가하란과 밀레나가 서로를 마주 봤다.

“생각해 둔 게 있어요.”

가하란이 입을 열었다.

-뭔가요?

“일단 둔으로 돌아갈 거야. 인사해야 할 사람들이 있으니까. 그리고 확인해야 할 일도.”

-확인이요? 아니, 그보다 언제 출발할 건가요?

“최대한 빨리. 필요한 장비는 이미 갖춰놨어. 대마수를 넘을 작정으로 준비한 건데, 이제는 사라졌으니 편하게 갈 수 있게 됐어.”

-바지런한 성격은 변하질 않았네요. 밀레나는요?

엔엔은 밀레나를 바라봤다.

“같이 가야지. 엔엔 님, 비앙크 상태는요?”

“기동하는 데 전혀 문제없어요. 밀레나 컨디션만 좋다면.”

“그러면 문제 될 건 없네요.”

카트시가 기계 안구를 식탁에 대며 말했다.

-오자마자 또 떠나다니.

“마무리 지어야 편히 쉴 수 있을 거 같아. 그러니 같이 고생 좀 해줘.”

-가하란의 부탁이라면 들어줘야죠.

가하란이 앞접시를 내밀며 말했다.

“일주일 후. 다시 국경을 넘을 겁니다.”

* * *

긴급회의.

타리움이 결성된 이후 명목상으로만 존재하던 긴급회의란 것이 시행됐다.

유단은 참석한 자들의 면면을 살폈다.

동부를 주무르는 인간들.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워낙 위급한 사안이라 질문은 이따가 받겠습니다.”

국경과 가까운 오펜시의 군부 담당이 보고서를 든 채 이동했다. 벽면에 붙여둔 대륙 지도 앞에서 담당자가 입을 열었다.

“국경 관리 3본부에서 지금 막 들어온 보고입니다. 앞에 놓아드린 보고서 2페이지를 보시면 됩니다.”

유단은 종이를 한 장 넘겼다. 인쇄된 그림 밑으로 짧은 글이 적혀 있었다.

읽자마자 눈이 찌푸려졌다.

“사진 촬영이 가능한 마법사를 대동해 이변 지역으로 침투, 그곳에서 얻어낸 것들입니다.”

“이게 정말…….”

곳곳에서 말들이 오갔다. 회의장이 소란스러워졌다.

“일단 이야기를 듣죠. 아직 할 말이 남으신 것 같은데.”

아르드헨이 입을 뗐다. 주변에 붙은 의원들이 금세 조용해졌다. 맞은편 의원들은 아리엘의 눈치를 보다가 입을 다물었다.

한눈에 들어오는 세력 구도였다.

군 담당자가 말을 이었다.

“대마수의 이동이 관측된 게 11시. 우리 측 관측대대가 탐색팀을 꾸려 움직인 게 11시 08분. 곧바로 국경 지대로 진입, 연합 도시의 라우스, 호네, 벨레 쪽으로 이동 중인 대마수를 확인했습니다.”

군 담당자가 지도에 표시했다.

“접경 지역 도시로 소형 마수들이 먼저 진격했고, 뒤이어 중대형 마수가 도시를 향해 진군했습니다.”

“진군?”

“예. 직접 두 눈으로 본 탐색대의 표현을 그대로 쓴 것입니다. 마수들은 지휘를 받은 군인처럼 질서정연하게 움직였다고 합니다. 물론 이탈해 숲으로 사라지는 마수도 절반 이상이었으나, 남은 마수들은 훈련된 군사 같았다고.”

“……허.”

누군가의 긴 탄식이 회의장을 휩쓸었다.

훈련된 군사.

이게 뭘 의미하는 건지 이곳에 앉아 있는 인간들은 알아차렸을 것이다.

“탐색대의 말에 의하면 도시 함락은 기정사실이었다고 합니다.”

“도저히 막을 수 없는 파도와 같다.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현장에서 본 사람의 말이니.”

아르드헨이 보고서를 흔들었다.

군 담당자가 지도에 커다란 원을 그렸다.

“도시로 나아가던 마수들이 방향을 튼 게 13시 12분. 이 원 안으로 마수들이 몰려들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군 담당자가 말을 줄였다. 뒤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보고서에 모두 쓰여 있었다.

유단은 자신에게 쏠리는 시선을 바라봤다.

“학회장님. 이게 정녕 가능한 일입니까?”

“설명해 주시죠. 마나의 공백 상태. 이게 가능하다면 너무나도 큰 위험입니다.”

유단은 보고서를 덮으며 천천히 말했다.

“일단 재확인하겠습니다. 보고서에서는 일정 구역의 마나가 증발했고, 그 순간 마수들이 무너져 내렸다고 쓰여 있습니다.”

군 담당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타 마법적인 공격이 있었던 게 아니라 마나의 공백이 발생한 게 사실입니까?”

“제가 사실 여부를 확인시켜 드릴 순 없습니다. 현장을 확인한 탐색대가 이곳에 도착하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하니까요. 하지만, 탐색기와 마법사. 하나의 기계와 한 명의 유능한 탐색 마법사가 동시에 오류를 일으킬 가능성이 얼마일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유단은 눈을 살며시 내리깔았다.

“마나 공백. 이론상 가능은 합니다.”

소란이 멎었다. 좀 더 노골적인 시선이 날아들었다.

“할 수 있냐고 물으신다면, 아쉽게도 제 기술력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마나 공백 상태에서도 움직였다던 거병이겠죠. 그리고 또 하나.”

유단은 보고서 밑에 적혀 있던 글귀를 떠올렸다.

“거병과 같이 있었다는 칼랑족. 묘사된 바에 의하면 아무래도 지금은 사라져 버린 둔의 공방주 같습니다.”

“저 역시 같은 생각이에요.”

아리엘 의원이 말을 거들어줬다.

“칼랑족의 마법 공학은 우리보다 앞서 있다고 하죠. 그들은 마법을 기술적으로 활용하는 것에 특화돼 있고요. 만약 이 모든 게 사실이라면, 연합 도시 쪽으로 칼랑의 기술이 넘어간 것일 수도 있습니다.”

침묵이 깨졌다.

논의하는 목소리가 점점 커져나갔다. 유단은 생각을 정리한 후 입을 열었다.

불을 지펴야 할 때다.

“대마수가 사라졌습니다. 국경을 오가는 게 자유로워졌죠. 그걸 연합 도시가 해냈습니다. 군대가 아닌 소수의, 아니, 단 한 기의 거병과 트레일러로.”

경직된 동공들이 모여들었다.

유단은 미소를 감춘 채 말했다.

“연합 왕국과 제국의 15년 전쟁. 그리고 종전. 하지만 종전이 아닌 휴전이라는 걸 여기 계신 모두가 알 것입니다. 그라운드 제로란 거대한 재앙이 우릴 휩쓸었으나, 우린 극복하고 더 커다란 것들을 이뤄 냈습니다. 그리고 연합 도시 역시 마찬가지일 테죠.”

“……전쟁.”

누군가가 속삭이듯이 말했다.

“실험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연합 도시는 기술력을 확신했겠죠. 그다음에 무엇을 준비할까요?”

유단은 의원들을 바라봤다.

“집결 수도와의 핫라인이 끊긴 게 10년이 넘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옛 황제, 아르드헨을 바라보며 물었다.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각자 먹고 사는 게 바빠서 이웃을 신경 쓸 여력이 없었죠. 아! 물론 제게 그럴 권한도 이제는 없고요.”

아르드헨이 미소를 지었다.

“마나 공백. 전략 병기인 거병조차 무너져 내릴 겁니다. 신체술 역시 사용 불가하겠죠. 도시의 모든 인프라가 한순간 정지할 겁니다. 우린 처참한 패배를 맛보게 되겠죠.”

그때였다.

아리엘이 툭툭 회의실 탁자를 두드렸다.

“속단할 필요는 없죠. 연합 도시는 마수들의 침공을 방어했을 뿐이니까요. 전쟁으로 이어진다는 보장은 없죠.”

그러자 아르드헨이 말했다.

“아리엘 의원님. 근데 그거 아십니까? 제가 15년 전에 전쟁을 일으켰을 때 뭔가 대단한 명분이 있었던 건 아닙니다. 그냥 그렇다는 말입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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