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457화 (457/558)

제457화

좁다는 느낌과 함께 온기가 전해져 왔다. 낯설면서도 익숙한 살 내음에 살며시 눈을 떴다.

옅게 숨을 내쉬는 밀레나가 보였다. 평소에는 한 올 한 올 모아 뒤로 묶고 다니는 머리카락이 이마를 덮고 눈썹을 쓸며 눈가에서 치렁거렸다.

멀거니 바라보다가 검지로 머리카락을 살짝 치워냈다.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는 게 보였다.

몇 분을 넋 놓고 지켜보다가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커튼 사이로 보이는 바깥은 아직 어두웠다. 푸르스름한 새벽.

버릇이란 게 무섭다. 이 시간만 되면 눈이 떠지니까.

이불을 살짝 들추며 침대 밖으로 나올 때였다.

“……벌써 일어난 거야?”

밀레나가 말했다. 목이 잠겨 있었다.

“어쩌다 보니.”

“평소에도 이때 일어나?”

“어.”

“너무 이른 거 아니야?”

“새삼 느끼는 중이야.”

침대를 벗어나려는 몸을 밀레나가 잡아끌었다. 맞닿은 살의 감촉에 어색한 미소가 지어졌다.

“더 자.”

그 말을 남기고 눈을 감는 밀레나였다.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그새 잠든 것이다.

일어나 공방으로 가 유사 정령들의 학습 현황을 확인하고, 오전에 있을 작업에 맞춰 장비를 갖춰놔야 했다.

오후에는 해피의 몸을 마저 점검해야 하니 그것도 준비해야 하고.

해야 할 것들이 있지만…….

가하란은 침대에 파묻혀 있는 누나를 바라봤다. 더 자라는 한마디가 강력한 마법이 돼 온몸을 붙들었다.

도저히 벗어날 수가 없었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몽롱한 기운이 가시며 의식이 또렷해졌다.

꿈이 아닌 현실.

열렬히 바랐던 소망이 이뤄졌다. 다른 건 아무래도 좋을 정도로, 모든 의식이, 감각이 밀레나를 향해 있었다.

같은 음식을 먹고, 마주 보며 이야기하고, 몸을 섞고 잠들기 전에 실없는 얘기를 나누고.

갈망하던 평범함의 극치.

가하란은 밀레나의 목 아래로 조심스럽게 손을 찔러 넣었다. 살짝 움츠리던 밀레나가 몸을 옆으로 누웠다.

찔러 넣은 손으로 어깨를 당기고 천천히 등을 쓸어내렸다.

아늑했다.

더할 나위 없이 평온했다.

하지만 충족감과 비례해 걱정이 커지고 있었다.

로키.

유단의 몸을 강탈한 기계는 지금 타리움의 중심으로서 동부 대륙을 설계 중이었다.

로키의 목적이 무엇인지 지금도 알 수 없었다. 인간에게 감화돼 그저 보통의 삶을 사는 거라면, 걱정은 기우에 그칠 것이다.

어쩌면 본래의 유단보다 로키에게 맡겨두는 편이 인류에게 나을 수도 있다.

하지만 기억해야 할 건 그의 잔인한 성품이었다.

아니, 극도의 실용주의가 문제였다.

타인이라고는 하나 온정을 베푼 자를 죽였다. 일반적인 도덕률은 로키에게 적용되지 않는 것이다.

하긴, 인간의 몸을 빼앗은 시점에서 상식을 논하는 건 난센스였다.

알아야 한다.

로키가 바라는 게 무엇인지. 어떤 종착지를 갈망하며 움직이고 있는지.

로키가 계획한 미래에 인간 다수의 행복이 들어 있다면, 그를 도와야 할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라면…….

“찡그리는 거 안 어울려.”

고개를 내렸다. 눈을 반쯤 뜬 밀레나가 보였다.

“무슨 생각해?”

“그냥 이것저것.”

“그 이것저것이 뭔데.”

단어를 정리한 후 조심스럽게 말했다. 전후 사정이야 어젯밤 전부 설명했다. 핵심만 말하면 누나는 이해할 것이다.

“로키, 그쪽에서는 친구였다고 했지?”

“까칠하고 위험한 친구였지. 잠깐이라도 방심하면 내 몸을 빼앗으려고 하는 그런 애. 근데 덕분에 즐거웠어. 도움도 많이 받았고, 마지막에는…….”

로키의 작별 인사가 떠올랐다.

“본심을 말해줬다면 더 좋았을 텐데. 그 녀석의 목적이 무엇인지, 아직도 알 수 없어.”

“물어보는 수밖에 없겠네.”

“그게 가장 편하긴 한데, 그 뒤에 벌어질 일들을 생각하니 머리가 아파. 솔직히 말하면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싶기도 해.”

손을 뻗어 밀레나의 얼굴과 목, 그리고 어깨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붙어 있는 순간조차 살결이 애타게 그리워진다.

“내버려 둬도 잘하지 않을까? 내가 혼자 괜한 걱정을 하는 게 아닐까? 애초에 걱정할 필요가 있을까? 지금껏 잘해왔는데, 앞으로도 잘하겠지.”

주절주절 내뱉을 때였다.

“가하란.”

“음?”

“모른 척 살 수 있는 사람이 있고, 아닌 사람이 있어. 그리고 내가 보기에 넌 모른 척하면서 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나도 무시하면서 잘 살 수 있어. 누나가 생각하는 것처럼 성실하지 않으니까.”

밀레나가 작게 웃었다.

“나도 똑같은 생각을 했어. 유단을 저렇게 내버려 둬도 되는 건가? 친부나 다름없는 교수를 죽인 인간을 방치해 둬도 되는 걸까?”

“누나는 어떤 결론을 내렸어?”

“계속 지켜봤어. 몇 년 동안 뒤를 캐내면서 수상쩍은 부분이 있나 살펴봤지. 근데 아무것도 없었어. 깔끔했지. 문제가 있다고 한들 책잡을 수 없는 위치기도 했고.”

숨을 잠시 고른 후 밀레나가 다시 말했다.

“답답해서 믿을 수 있는 사람들한테 슬쩍 얘기해 보기도 했지. 총무님, 아, 칼리고 단장님 기억하지?”

“기억하지.”

“그분한테도 물어볼 기회가 있었어. 사적 이익을 위해 살인까지 저지른 자가 상류층에 떡하니 버티고 있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누나가 눈웃음을 지었다.

“아저씨가 뭐라고 얘기해 줬는데?”

“웃었어. 그 인간 뒤통수치려는 거면 열과 성을 다해 도와줄 테니 말만 하라면서.”

“그 인간?”

밀레나의 눈동자가 천장을 향했다.

“뜻이 맞아 같이 활동하는 사람들이 있어. 커다란 정의, 뭐 그런 걸 위해 움직이는 사람들이지. 그 안에는 아르드헨 시장, 옛 황제도 있고.”

“협회. 아저씨는 아르드헨 시장을 떠올렸구나.”

“웃기지? 바로 옆에 유단과 비슷한 사람이 있었어. 시장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야. 다들 자기 이익을 위해 움직이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로키도 그냥 보통의 인간이란 건가.”

정의로운 심판자.

그런 걸 꿈꾸는 건 아니었다. 그저 일상을, 이 생활을 지켜내기 위한 약간의 노력을 하고 싶을 뿐.

“난 로키가 사람들 틈에 섞여 사람같이 행동하다가 사람처럼 죽고 싶은 거라면…… 난 내버려 두고 싶어.”

“그러려면 만나서 얘기를 해봐야겠네?”

“결론은 그렇게 되는 건가.”

가하란은 죽은 게웰과 사라진 유단을 떠올렸다.

“동부 타리움에 있는 유단의 몸은 로키가 차지했어. 그리고 본래 유단은 마수인 게웰과 함께 있었고.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런 상황이 됐는지도 파악해야 해. 만약 로키가 의도한 것이고, 그로 인해 마수가 움직인 거라면…….”

생각의 가지가 무수히 갈리며 뻗어나갈 때였다. 밀레나의 손이 허벅지에 닿았다.

“알지 못하는 걸 너무 상상하지 마. 답은 의외로 간결할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말한 후 꼼지락거리며 이불 속으로 파고드는 밀레나였다.

“그 말도 맞네.”

생각을 접고 베개에 머리를 댈 때였다. 밀레나가 뚱한 얼굴로 눈을 떴다.

“잠 다 달아났네.”

“……미안.”

“나도 이때쯤 일어나긴 해. 작전 나가면 대부분 이른 아침에 움직이니까.”

침대 밖으로 나온 밀레나가 옷을 챙겨 입었다. 뭘 하는지 유심히 지켜봤는데, 맞은편 책장으로 걸어가더니 서랍을 열었다.

꺼내 든 건 체스판이었다.

“……거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

“닥한테 물어봤지.”

선물 받은 아이처럼 해맑게 웃으며 이불 위에 체스판을 펼쳤다.

“그때도 말했지만, 이젠 너도 쉽게 이길 수 없을걸?”

“했던 말을 그대로 되풀이할게. 나는 체스만큼은 질 수 없어. 그쪽에 있을 때 내 유일한 놀잇감이었거든. 로키도, 올도 나랑 둘 때면 둘 중 하나였어. 지거나, 무승부거나.”

“체스 결과는 아무도 모르는 거야. 그렇게 자신만만하면 내기 하나 걸까?”

“얼마든지.”

밀레나가 기물을 세우며 말했다.

“아침밥. 근사하게 차려주기.”

“내가 이기면 누나가 해주는 밥을 먹어야 하는 건가?”

“그렇지.”

“이기든 지든 난 손해인 거네?”

“그러면 이렇게 하자. 이겨도 네가 만들고, 져도 네가 해. 됐지? 이만큼 공평한 내기도 없을 거야.”

웃으면서 말하는 누나를 보고 있으니 “아니”라는 말이 나오질 않았다. 공평하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단판.”

“왜! 승부는 단판보다는 세 판이지.”

“누나, 그거 너무 자주 쓴 레퍼토리야. 세 판이 다섯 판, 일곱 판…….”

“진짜 세 판. 불렛 룰로.”

“30초였지?”

말하기 무섭게, 밀레나가 폰을 밀어 넣었다.

“긴장해. 지금의 난 그때랑은 다르니까.”

* * *

“구현 장치에 문제는 없고.”

엔엔은 비앙크의 외장갑을 결합한 후 어깨를 주물렀다.

-어때요?

“전반적인 시스템은 괜찮은데, 레거시의 반응도가 낮아졌어요.”

-이제 이걸 다룰 수 있는 건 밀레나뿐이네요?

“다른 인간의 심상 세계로는 반응하지 않겠죠. 설령 깨어난다고 해도 폭주할 테고.”

-잘 다루면 괜찮은 애니 문제가 될 건 없어요.

“카트시가 제어하면 그렇겠죠. 하지만 다른 유사 정령으로 대체하면 밀레나의 부담이 높아지겠죠.”

-가하란하고 차차 얘기해 봐야죠. 유용한 도구라도 사용자한테 부담이 된다면 안 쓰는 게 나으니.

방수포를 펼쳐 비앙크를 덮은 후 카트시를 바라봤다.

“근데 어쩐 일로 저한테 부탁한 거죠?”

-부탁? 아, 같이 점검할 게 있다고 시간 내달라고 한 거요?

“네.”

-젊은 애들 노는데 눈치껏 빠져줘야죠. 둘이서 하고 싶은 말이 많을 테니까요.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눈치 없이 막 두 사람 찾아간 건 아니죠? 적어도 며칠은 둘이 놀게 내버려 둬야 해요.

“…….”

엔엔은 대답하지 않고 눈동자를 돌렸다.

-설마 방해한 건 아니죠?

“방해라니. 어젯밤에 잠깐 찾아가서…….”

-이러니까 털북숭이들은 안 된다고! 섬세하지 못해요. 둘이 눈치 주지 않던가요?

“반갑게 맞아줬어요.”

-둘 다 착해 빠져서는. 눈치를 잔뜩 줘야 알아먹는 생물이 있다는 걸 그 둘도 깨달아야 해요.

“그렇게까지 눈치 없지는 않아요. 워낙 반가운 마음에…….”

-저도 참고 있거든요? 가하란한테 들어야 할 말이 얼마나 많은데!

기계 안구가 성난 황소의 꼬리처럼 어지럽게 움직였다. 엔엔은 기침을 작게 한 후 입을 열었다.

“말이 나온 김에 가볼까요?”

-지금요? 이 아침에?

“10시잖아요.”

-……좋은 생각이에요. 이틀 놀게 내버려 뒀으면 할 만큼 다 한 거지. 이제 가하란을 되찾아 와야겠어요.

“되찾을 것까지야.”

-얼른 가죠!

카트시를 들고 정비소를 벗어났다. 곧게 뻗은 길을 따라 얼마간 걷다 보니 기묘한 작물과 함께 솟아 있는 집이 보였다.

놀라며 나자빠지는 송아지에게 미안한 눈길을 보낸 후 집 문을 두들겼다.

소식이 없었다. 다시 똑똑. 안에서 인기척이 들리는데 나오는 사람은 없었다.

그때였다.

“아니야, 아니야! 그대로 있어. 움직이지 마. 도망갈 생각 말고 빨리 기물 잡아.”

밀레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어서 다급한 발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가하란이 퀭한 눈을 한 채 맥없는 미소를 지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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