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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병공 진군가-456화 (456/558)

제456화

밀레나는 가만히 서서 가하란을 지켜봤다. 거병의 외장갑을 들어내며 안쪽을 살피고 있었다. 작은 거병은 손에 장비를 든 채 가하란 주변을 오가고 있었다.

“3번 렌치 줄래?”

체임버 안으로 몸을 집어넣고 이리저리 움직이던 가하란이 한숨을 쉬며 몸을 뺐다.

손에 들려 나온 부품이 새까맣게 타들어 간 상태였다.

“커퍼시 두 개랑 결착링 6mm 한 개, 그리고…….”

가하란이 고개를 돌렸다. 밀레나는 손을 들어 올려 흔들었다. 멍하니 바라보던 가하란이 장비를 던지듯 내려놓으며 달려왔다.

“몸은? 괜찮은 거야? 움직여도 돼?”

당황해 경직된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사람들이 왜 그렇게 말했는지 이해가 되네.”

“무슨 소리야?”

“그런 게 있어.”

밀레나는 목에 손을 얹고 가볍게 고개를 비틀었다.

“뻐근한 것 빼고는 다 좋아. 잠을 너무 오래 잤나 봐.”

“정말 문제없는 거야?”

“어릴 때를 생각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내가 말했었나? 혹한기 때는 반쯤 얼어서 이틀간 기절했다는 거. 그거에 비하면…….”

농담 삼아 이야기했는데, 가하란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밀레나는 머쓱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표정 좀 풀어. 누가 보면 사람 죽은 줄 알겠네. 나 멀쩡하고 아픈 곳 하나 없어. 못 믿겠으면 직접 확인해 볼래? 옷이라도 벗어줄까?”

“그래.”

옷가지를 잡고 들어 올리려다가 멈칫했다.

“네가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그제야 표정을 풀며 웃는 가하란이었다. 미간에 잡힌 주름이 사라졌다.

-가볍게 식사도 했고 여기까지 걸어오는 동안 특이 사항은 없었어요. 걱정 놓으셔도 돼요.

닥이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보다 얘가 더 침착하네.”

손을 뻗어 닥의 머리를 톡톡 건드렸다.

“밥은? 아직 안 먹었지?”

“어. 마무리하고 먹으려고.”

“그래? 그러면 마저 해. 기다릴 테니까.”

“아니야. 식사 먼저 하자.”

가하란이 작업복을 벗으려 했다.

“하던 거 마무리해. 기다린다고 큰일 나는 거 아니니까.”

가하란의 팔을 붙들고 거병 앞으로 끌고 갔다. 가까이서 보니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뜯겨나간 팔과 다리의 접합부는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교체 모듈이 없다고 하던데.”

“생산 라인이 갖춰진 게 아니라서.”

“하나하나 직접 만든 거야?”

“선배님과 같이 제작했어. 도움을 많이 주셨지.”

선배. 해더 트럭을 몰던 웍센을 떠올렸다.

“그분은 괜찮으셔? 옆에 탄 내가 기절해 있어서 많이 놀라셨겠네.”

“흔들어 깨워도 반응이 없어서 식은땀이 나셨대. 다들 놀랐지.”

-저도 놀랐어요!

거병의 고개가 들렸다. 해피의 인지 능력은 살아 있는 듯했다.

“안녕, 해피.”

-안녕하세요! 이제 다 나은 거죠?

“응.”

해피에게 다가갔다. 외장갑을 모두 떼어내 훤히 드러난 탈로스와 각종 장치가 눈에 들어온다.

“고생 많았어. 덕분에 가하란도 무사했고.”

-멋있게 싸우고 싶었는데 연습 부족이었어요. 모핑 데이터로 행동 제어하는 게 쉽지 않네요.

“연습하면 잘하게 될 거야.”

가하란의 손길이 묻어난 거병. 괜스레 정이 간다.

“나도 좀 도울까? 기초 정비라면 할 수 있는데.”

“누나는 앉아서 쉬고 있어. 괜찮다고 해도 무리할 필요는 없으니까.”

“고집부릴 때는 아닌 듯하니 얌전히 있어야겠네. 사실 내가 도움이 될 것 같지도 않고.”

정밀 공정 단계로 진입하면 도와줄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누군가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돌아보니 닥이 의자를 들고 있었다.

-이쪽에 앉으세요. 가까이 있으면 팁이 튈 수도 있고 위험해요.

“고마워.”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수리 과정을 지켜봤다. 공중에 뜬 허공 용로 안쪽에서 붉은 쇳물이 넘실댔다.

용로만으로 가공, 성형하는 건 장인들이나 할 수 있다고 하던데.

가하란이 손가락 끝을 살짝 움직이니 쇠들이 춤을 추며 형태를 다잡아 갔다.

작은 거병들이 거대한 틀을 들고 왔다. 안에 든 건 아마도 안정제일 것이다.

슈우우, 형을 갖춘 쇠가 안정제 안으로 들어갔다. 엄청난 열기와 함께 미세한 쇳가루가 사방으로 튀었다.

닥이 도톰한 천을 펼쳐 앞을 가려주었다. 밀레나는 눈을 깜빡이다가 작게 웃었다.

“고마워.”

-뭘요.

소리가 잦아들자 닥이 천을 치웠다. 안정제 안에서 나온 쇠를 물에 담근 후 다시 용로 안쪽으로 이동시켰다.

작업을 지켜보다가 슬쩍 가하란의 얼굴을 바라봤다. 발갛게 달아오른 뺨이 보였다. 땀이 흉터를 훑으며 흘러내렸다.

어디서 얻은 상처일까.

이제는 아프지 않겠지.

“일어났구나.”

웍센이었다. 밀레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인사했다. 걱정을 끼쳐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아찔하긴 했지. 안 그래도 안색이 좋지 않았는데 도착하고 나니 의식이 없었으니까.”

“체력에는 자신이 있었는데 이번 여행은 저한테도 무리였나 봐요.”

“국경을 넘었다지? 그게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인가. 하여튼 대단해.”

“좀 무식하게 돌진했죠.”

웍센이 껄껄 웃었다.

“경황이 없어서 그땐 못 물었는데, 정말 저 녀석 만나려고 그 길을 헤쳐 온 건가?”

“거짓말 같지만 진짜예요.”

“어떻게 알고? 저놈이 틈에서 돌아온 건 1년 전쯤이고, 그 사이 국경이 틀어막혀 편지고 뭐고 아무것도 왕복할 수 없었는데.”

밀레나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감이요.”

“감?”

“네.”

“……저놈도 저놈이지만, 자네도 만만치 않군. 뭐, 잘 어울리네.”

어울린다는 말이 참 듣기 좋았다. 그사이 잠깐 사라졌던 닥이 또 의자를 들고 왔다. 정말 바지런한 친구였다.

“고맙구나.”

웍센도 옆에 앉았다.

“다른 놈들은 모르겠지만, 닥은 내 손주 삼을 수 있지. 싹싹하고 눈치 빠르고 머리도 좋고.”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봐봐, 얼마나 예뻐. 그에 비하면 저저…….”

작업을 돕던 작은 거병, 슬리피가 쿵쿵거리며 다가왔다.

-할아버지. 놀지 말고 일해.

“이놈아, 이제 막 왔다. 숨 좀 돌리자.”

-나도 일어나기 싫은데 방금 일어났어. 그러니까 일해.

“그게 뭔 상관이냐?”

-아무튼 일해. 빨리 끝내야 또 쉴 수 있어.

웍센의 옷깃을 붙잡아 당기는 슬리피였다. 웍센이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일어섰다. 손주에게 어쩔 수 없이 져주는 조부모 같았다.

“쉬고 있게. 괜히 움직이다가 또 기절하지 말고.”

“저 그렇게 허약한 사람 아니에요.”

웍센이 두툼한 내열 장갑을 끼며 가하란 옆으로 갔다. 두 사람이 쇠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집게 형틀을 쥐고 쇳물을 붓고. 평생 합을 맞춰온 파트너처럼 척하면 척, 장비를 다루는 움직임에 군더더기가 없었다.

가하란이 이동하면 웍센이 빈자리를 채웠고, 웍센이 부품을 들고 빠지면 가하란이 기다렸다는 듯이 빈 곳에 무언가를 채워 넣었다.

“단짝이 따로 없네.”

해피의 오른쪽 어깻죽지에 길쭉한 쇠막대기가 여러 개 박혔다. 구동계 핵심 부품이 결착되더니 이리저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뻑뻑한데요?

“수치를 말해줘. 추상적인 네 의견 말고.”

-0.3, 3.4. 그리고 축 조정이 필요해요. 원래 쓰던 게 아니라서 그런 걸까요? 뭔가 불편한데.

“무게가 실리면 달라질 거야. 지금은 매뉴얼에 맞춰서 확인해 줘.”

-네!

테스트용인 듯한 거병의 팔이 부착됐다. 해피가 오른팔을 빙글빙글 돌렸다.

-오오! 좋아요.

“점검 항목 1번에 모든 수치를 저장해 둬. 몇 개 더 테스트해 보고 값을 정해보게.”

해피가 밀레나를 바라보며 손을 흔들었다. 밀레나도 웃으며 인사해 줬다.

십여 분간 같은 동작을 반복하며 팔을 움직이던 해피가 축 늘어졌다.

가하란과 웍센이 같이 걸어왔다.

“끝났어. 배고프지?”

“조금.”

밀레나는 슬쩍 웍센을 바라봤다.

“같이 식사하실래요?”

웍센이 눈썹을 씰룩였다.

“눈치 없는 늙은이가 돼서 두 사람 사이에 끼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슬리피한테 잔소리 들을 것 같으니 난 빠지마.”

웍센이 물끄러미 가하란을 바라봤다.

“이놈아, 예의상 너도 한 번 권유해야지.”

“전 선배님의 의견을 언제나 존중하니까요.”

“쯧쯧, 매정한 것. 밥 먹고 와라. 나도 좀 쉬어야겠다.”

작은 거병들과 함께 공방으로 들어가는 웍센이었다.

“갈까?”

몸을 돌리려 할 때였다. 장갑을 낀 손이 손목을 살며시 붙들었다.

밀레나는 말없이 웃고 그 손을 붙잡았다.

조용히 길을 걸었다. 묻고 싶은 것도, 들어야 할 것도 많았는데 지금은 말보다는 같이 있는 시간에 집중하고 싶었다.

그렇게 5분쯤 걸었을 때였다.

“저쪽에서 많은 일이 있었어.”

저쪽.

가하란은 시선을 앞으로 던지며 말했다. 그가 바라보고 있는 건 길가에 있는 나무가 아닌, 그 너머에 있는 무엇이리라.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들려줘.”

“지루할 텐데.”

“시간은 많아.”

밀레나는 붙잡고 있는 손을 내려다봤다. 전투 중일 때도, 작업이 끝난 지금도 얇은 장갑을 끼고 있다.

“아, 이거.”

가하란이 주저하는 모습을 보였다.

“봐도 될까?”

“보기 좋은 상태가 아니라.”

처연한 웃음이었다. 밀레나는 손을 들어 가하란의 볼을 가볍게 만졌다. 화상 자국이 남아 있는 볼.

“여기처럼?”

“그거보다 조금 더 안 좋아.”

가하란이 천천히 장갑을 벗었다.

일그러진 손이 보였다. 심한 화상으로 인해 살결이 말리고, 어떤 곳은 이상할 정도로 반질거렸다.

“만져선 안 될 걸 만지니까 이렇게 되더라.”

“많이 아팠겠네.”

“기절할 뻔했지.”

밀레나는 흉으로 뒤덮인 손을 살며시 감싸 쥐었다.

“후유증은?”

“없어. 신경도 무사하고 근육도 문제없어. 난 운이 좋은 거 같아.”

“운이 좋은 사람은 그런 곳에 혼자 가지 않아.”

“그러니까 좋은 거지. 나만 고생하면 되는 거니까.”

밀레나는 고개를 살짝 들었다. 예전에는 어깨선 아래에 얼굴이 있었는데, 이제는 시선 위쪽에 얼굴이 있었다.

“미안해. 이 말을 꼭 하고 싶었어.”

“누나가 왜 미안해.”

“나 때문이었으니까. 네가 그렇게 된 게.”

가하란이 살짝 웃었다.

“설마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던 거야?”

“그럼 잊고 살아? 네가 날 구하고 사라졌는데, 그걸?”

가하란이 우뚝 멈춰 섰다. 코를 비비다가 귀 뒤쪽을 몇 번 매만지더니, 턱을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눈가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

밀레나는 당황해 말을 걸었다.

“왜 그래.”

“사실 두려웠어.”

“뭐가?”

“시간이 너무 흘렀으니까. 이쪽에 있는 사람들은 날 죽었다고 여겼을 거야. 그게 당연하지. 언제까지 슬퍼할 수는 없으니까. 그렇게 잊히고 이내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상태에서…… 내가 있을 곳이 없을까 봐.”

약한 모습이었다.

안 믿길 정도로 커버린 남자. 거대한 마수들에게 둘러싸인 상황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고 끝까지 자신의 계획을 믿고 있던 사내.

반가움과 동시에 느꼈던 약간의 낯섦. 고개를 든 채 살짝 울먹이는 모습을 보자 한순간 간극이 사라졌다.

“아직 애구나, 너.”

밀레나는 가하란에게 다가갔다. 떨고 있는 남자의 목에 손을 올린 후 말했다.

“근데 나도 애였어. 나도 무서웠어. 네가 죽었다고 생각하는데. 시간이 지나고 계속 잊어야지, 잊어야지 했는데 못 잊었어.”

“…….”

“근데 애여서 다행이야. 잊지 않아서 다행이야. 이렇게 돌아왔잖아? 이렇게 만났잖아?”

밀레나는 가하란의 손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가자. 이럴 땐 밥을 먹어야 해.”

그 말에 가하란이 웃음을 터트렸다.

“밥이 이럴 때 필요한 거였어?”

“몰랐어? 원래 허기지면 예민해지는 법이야. 얼른 가서 그릇에 잔뜩 스튜를 푸자. 마음껏 먹고 질리도록 얘기하고. 듣고 싶은 얘기가 너무 많아.”

끌려오던 가하란이 이내 성큼 앞서나갔다.

당겨지는 느낌.

나쁘지 않았다.

“도중에 재미없다고 하지 마. 정말 기니까.”

“얼마든지.”

웃으면서 그의 뒤를 따라갔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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