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5화
실없는 웃음이 나올 정도로 낯선 광경이었다.
실내에 들어설 수 있는 작은 거병이 수십 개의 손가락을 이용해 뜨개질하고 있다니.
심지어 잘했다.
-잠깐만요.
거병이 털실 끝을 잘라 단단히 묶었다. 섬세한 동작이었다.
기계인형은 관절 움직임이 투박해 직조를 돕는다고 해도 베틀을 붙잡는 정도인데, 눈앞의 거병은 아기자기한 옷을 직접 만들었다.
근데 거병이란 명칭이 맞긴 한가? 작은데? 작은데 거병?
-이리 와.
문밖으로 손짓하자 송아지 한 마리가 걸어 들어왔다. 호기심 가득한 두 눈으로 방 안을 살피다가 이내 거병에게 다가섰다.
거병이 짠 옷을 송아지에게 입혔다.
-제가 돌보는 애라서요.
“그래?”
-가을에도 추위를 탄다고 해서 옷을 만들어 줬어요.
거병이 송아지 엉덩이를 살짝 밀었다. 송아지가 귀를 바짝 세우며 밖으로 뛰어나갔다.
-궁금한 게 많으실 테죠. 질문하세요. 대답해 드릴게요.
차분한 어투였다. 가하란과 같이 있던 해피, 그리고 슬리피와는 또 다른 아이였다.
“이름이 어떻게 돼?”
-닥. 그게 제 이름이에요.
닥, 작은 목소리로 불러본 후 미소를 지었다.
“트럭에 올라탄 것까지는 기억나는데, 그 뒤로 새카맣네. 어떻게 된 거야?”
-거기까지 기억하시는군요.
닥이 물이 담긴 컵을 가져다주었다. 수프를 담아도 될 정도로 큼지막한 잔이었다.
-사흘간 잠들어 계셨어요.
물을 마시다가 콜록 기침했다.
“사, 사흘?”
-예.
듣고 보니 척추를 기점으로 뻗어나가는 근육들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다리 쪽 상태도 말이 아니었다. 특히나 고관절이 뻑뻑해 당장에라도 일어나 풀고 싶었다.
-트럭 안에 잠들어 있는 밀레나 씨를 아빠가 옮겼어요. 여긴 정비소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집이에요. 외곽에 위치해서 편하게 가축을 기를 수 있죠.
염소와 닭의 울음, 간간이 오리의 꽥꽥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나 오래…….”
-마나 과사용으로 인한 체력 손실. 위험 수위는 아니었지만, 안정이 필요하다고 의술사가 말했어요.
“무리하긴 했지.”
비앙크를 이끌고 국경을 넘고, 지친 상태로 전투에 임했다. 카트시의 백업이 없었더라면 몇 번은 죽었으리라.
“마수는? 그 뒤 상황은 잘 마무리됐어?”
-예. 마수는 구심점을 잃고 흩어졌어요. 이전처럼 미개척지 주변으로 숨어든 거죠. 지금도 도시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마수가 있긴 하지만, 위협적이지는 않아요. 사냥꾼들이 처리하고 있으니 금방 해결되겠죠.
한숨이 절로 나왔다.
거대 마수를 허물어트린 필드가 아니었다면 도시는 괴멸했을 것이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걸 만들어냈어, 당시 상황을 되짚을 때였다.
촉감이 떠올랐다.
밀레나는 입술에 손을 댔다. 배시시 나오는 웃음을 머금은 채 질문했다.
“가하란은?”
-정비소에 있어요. 전용기 상태가 아주 안 좋거든요. 교체할 모듈도 없기에 오버홀 중이에요.
“해피가 고생이 많았지. 아, 물론 너희들도. 덕분에 우리가 살았어.”
닥이 털실 뭉치를 손에 든 채 말했다.
-우린 실패했어요. 아빠는 할 수 있을 거라며 우릴 믿어줬지만, 다중 연산에 한계가 찾아왔어요. 카트시 님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상황이 달라졌겠죠.
카트시 님.
굉장히 안 어울렸다. 카트시가 들었다면 뿌듯하게 웃으며 기계 안구를 하늘 높이 쳐들었을 것이다.
“가하란이 그래? 너희가 실패했다고?”
-아니요.
“그럼 아닌 거야. 그 필드를 만들어내기 위해 어떤 공식과 장치가 필요한지 나는 알지 못해. 알지 못하지만 너희가 없었더라면 애초에 성공하지 못했을 거야.”
-밀레나 씨는 다정하시네요. 슬리피와 다르게.
“슬리피가 왜?”
-화냈어요. 아빠를 위험하게 만들었다고. 우리를 향한 화이며, 자기 자신을 향한 화였죠. 한바탕 쏟아내고 지금까지 자고 있어요.
“잠이 많은 애구나.”
-자고 있을 때가 가장 예쁘기도 하고요.
밀레나는 닥의 손가락을 보았다. 얘기하는 사이에 스웨터 하나가 만들어졌다.
“옷 만드는 거 좋아해?”
-이러고 있으면 편해요. 그게 좋은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건 누굴 위한 옷이야?”
닥이 스웨터를 들고 다가왔다.
-선물이에요.
“정말?”
-아빠한테 소중한 사람은 우리한테도 소중해요.
“곧 쌀쌀해질 테니 그때 입으면 되겠네. 고마워.”
보들보들한 스웨터를 매만지고 있을 때였다. 툭툭, 창가에서 소리가 났다.
고개를 돌리니 에단이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안녕.”
“눈 떴네. 푹 잤어?”
“아주 푹 잤지. 사흘간 기절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나마 오늘 눈 떠서 다행이다.”
“왜?”
“오늘까지 못 일어나면 널 업고 도심지로 뛰어갈 기세였거든, 그놈이.”
그놈이란 말에 밀레나는 눈웃음 지었다.
“온 김에 전해줘. 아픈 데 없이 잘 일어났다고.”
“내가 무슨 싸구려 전령도 아니고. 멀쩡한 두 다리로 가서 네가 전해. 안 그래도 못 볼 걸 봐버려서 입맛이 뚝 떨어졌으니까.”
“이따가 한 번 더 보여줄까? 진하게.”
“없는 데서 해라, 없는 데서. 이러니 귀족들은 안 된다니까.”
에단이 휙 하고 무언가를 던졌다. 받고 보니 잘 구운 빵이었다.
“필렌 님이 개량한 밀로 만든 거야. 버터를 조금만 넣어도 부드럽지.”
“어머니께서?”
“사냥보다는 밭이 더 어울리시는 분이 됐어. 요 앞에서 모종 확인하고 계시니까 인사드려.”
에단이 손을 쓱 올리며 말했다.
“다시 봐서 좋다. 얼른 털고 일어나. 빌빌대는 거 너랑 안 어울리니까.”
“연약한 척 좀 해보려고 하는데, 좀 그런가?”
에단이 눈을 찌푸렸다.
“타챠 아저씨가 단식한다고 하면 넌 뭐라고 할래?”
“아저씨, 헛소리 그만 하세요.”
“내가 너한테 해주고 싶은 말이야.”
간다, 에단이 훌쩍 뛰어올라 사라졌다. 파란색 털실 뭉치를 만지작거리던 닥이 말했다.
-매일 같은 시간에 밀레나 씨 상태를 확인하러 왔어요. 걱정 가득한 얼굴로.
“잔걱정도 많아, 괜히 미안하게.”
이불을 들추고 바닥에 발을 댔다. 목 주변 근육부터 천천히 달랜 후 일어섰다.
내친김에 신체술도 살짝 사용했다. 퍼져 있던 마나가 반응하며 몸으로 몰려들었다.
-마나는 당분간 사용하지 마세요.
“그래야지. 지금은 잠깐 점검해 보느라 써봤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회색 옷을 입은 송아지가 콩콩 뛰어 눈앞을 지나갔다.
송아지가 듬성듬성 난 길쭉한 풀로 접근하자, 날카로운 음성이 날아들었다.
“너 그거 파먹으면 저녁 메뉴가 소고기 스테이크로 바뀔 거다.”
엄마였다. 말을 알아들었는지 송아지가 몸을 홱 돌리며 도망쳤다.
“막 세상에 태어난 애한테 그런 못된 말을 해?”
“태어난 순간부터 앞가림해야지. 어딜 귀중한 모종에 주둥이를 들이밀어.”
농모를 살짝 들어 올리는 필렌이었다. 까무잡잡한 피부가 먼저 눈에 들어오고, 이어서 짙어진 눈가와 입가의 주름이 보였다.
“왜? 네 엄마 얼굴 처음 보냐?”
“좋아서 본 건데.”
“좋아서 보긴. 온 김에 손이나 거들어.”
“나 환자야.”
“네가 환자면 세상천지에 환자 아닌 사람이 없겠다. 잔말 말고 장갑 끼고 여기 파리하게 난 싹 전부 뜯어내. 접목해도 이 형질은 변하지 않네.”
장갑을 끼고 말없이 변색된 잎을 뜯어냈다. 그렇게 3분 정도 잎을 골라낼 때였다.
“무슨 생각으로 국경을 넘은 거야.”
“어쩌겠어. 계속 기다릴 수 없으니 넘는 수밖에.”
“누구 딸 아니랄까 봐 대책 없기는.”
“피가 어디 가겠어?”
필렌이 모자를 벗어 밀레나의 머리에 얹었다. 괜찮다고 말했지만 엄마는 듣지 않았다.
“요 며칠간 죽을상이더라. 삭막한 얼굴로 발 동동 구르는 게 정신 사나워서 몇 번을 소리쳤는지.”
“가하란?”
“그럼 누구겠어. 의술사도 괜찮다 했고, 내가 봐도 괜찮은데 걔 혼자 앓더라.”
“엄마는 나 걱정도 안 됐어?”
“내가 너한테 다른 건 몰라도 몸 하난 제대로 물려줬잖니. 아주 튼튼한 몸을.”
“그건 부정할 수가 없네.”
잎을 똑 떼어내려 할 때였다. 엄마의 손이 날아들어 손등을 찰싹 때렸다.
“왜?”
“그건 새싹. 딱 보면 모르겠어?”
“썩은 거 아니야?”
입술을 비죽 내밀며 자세히 살펴봤다. 잎맥이 푸르스름한 게 떼어내라고 가르쳐준 잎과는 조금 달랐다.
“지금 보니까 다르네.”
일어서서 주변을 돌아봤다. 익숙하면서도 조금씩 형태가 다른 식물들이 무수히 심겨 있었다.
“이거 다 엄마가 한 거야?”
“다른 사람들한테도 도움을 받았지. 이쪽 방면으론 지식이 모자라니까. 그래도 나름 이것저것 해보면서 알아가는 중이다.”
“이걸로 뭘 하는 건데?”
“작물을 개량하면 좁은 면적에서도 다량의 수확물을 얻을 수 있지. 그게 뭘 의미하는지, 너라면 잘 알 테고.”
필렌이 허리를 툭툭 치며 일어섰다.
“속은?”
“멀쩡해. 에단이 준 빵도 먹었는데 뒤틀리진 않아.”
“그럼 밥부터 먹자.”
주방 솥에서 스튜가 뭉근하게 끓고 있었다. 닭과 토마토, 그리고 양파. 몸살이 나면 항상 먹던 그거였다.
“설마 엄마가 한 거야?”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봤다. 엄마와 요리. 연관성이 전혀 없는 두 단어였다.
“의심하지 말고 맛이나 봐. 여기서 배운 게 많으니까.”
바로 숟가락을 들었다. 한입 떠먹으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간이 완벽했다. 풍미도 좋고.
“가서 데려와.”
“응?”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 내버려 두고 혼자 먹겠다는 건 아니겠지?”
밀레나는 머쓱하게 웃으며 그릇을 내려놓았다.
“눈치 안 줘도 데려오려 했어.”
“퍽이나. 난 먼저 먹고 갈 테니까 둘이 알아서 해결해. 빵도 있으니까 찍어 먹고.”
“같이 먹지.”
“내가 불편해. 젊은 애들끼리 알아서 잘 놀아.”
작게 하품한 필렌이 신문을 들고 식탁으로 향했다. 밀레나는 문밖으로 나와 말했다.
“고마워, 엄마.”
됐다는 듯 손을 휘휘 젓는 필렌이었다.
-정비소까지 안내할게요.
닥이 옆으로 오며 말했다. 대화를 다 들은 모양이다.
“멀지 않다고 했지?”
-도보로 10분 정도 거리예요. 금방이죠.
앞장서는 닥을 따라 움직였다. 인적이 드문 길. 주인 없는 개들만 오가던 길에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드문드문 세워진 격납고와 늘어선 거병들. 쇠 두드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이쪽이에요.
닥이 가리킨 곳에 반가운 거병들이 서 있었다. 르완 용병의 마크가 새겨진 거병들.
“밀레나!”
괄괄한 목소리와 함께 얀스가 달려왔다. 두 팔을 활짝 벌려 꽉 껴안는데, 가슴이 답답할 정도였다.
“어, 언니.”
“미안. 반가워서.”
얀스가 뒤로 물러섰다.
“얼굴 야윈 것 봐.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내가 그래서 일찍 눈을 떴잖아. 언니 마음 편하게 해주려고.”
얀스 뒤쪽에 자그마한 아이가 보였다. 편지로만 접한 비일과 얀스의 딸, 딜라.
“안녕.”
손을 흔들자 딜라가 얀스 뒤에 숨었다.
“낯가림이 심해. 근데 친해지면 금방 까불거리니까 조심해.”
“친해지도록 노력해 봐야겠네요.”
얀스가 딜라를 안은 후 턱짓으로 작은 건물을 가리켰다.
“저기가 가하란 공방. 창고였는데 어느 순간부터 걔 전용 공방이 됐어.”
“가하란 찾고 있다는 말 안 했는데.”
“그래서 다른 사람 찾아서 여길 왔다고?”
“……그건 또 아니지만.”
“얼른 가봐. 너 일어난 걸 봐야 걔 얼굴이 펴질 테니까.”
밀레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대체 얼마나 구기고 다녔으면 엄마도 그렇고, 다들 그런 소리를 해?”
“말도 마. 너 트럭에서 기절한 채 내려왔을 때 아주 그냥 난리가 났으니까. 솔직히 놀랐어. 당황하지 않는 애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얀스를 지나쳐 몇 걸음 걷다가 뒤를 돌아봤다. 얀스의 어깨 너머로 고개만 살짝 내민 딜라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저쪽으로 가면…….
“잠깐만.”
밀레나는 손을 내밀었다. 움직이던 닥이 멈춰 섰다.
조금 떨어진 곳에 가하란이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