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454화 (454/558)

제454화

“일어나실 필요 없습니다. 가뜩이나 안정을 취해야 하실 분인데.”

탄드라는 옅게 웃으며 베개에 몸을 기댔다.

“소식 듣고 걱정을 많이 했어요. 의원님처럼 바르고 정직하게 살아오신 분에게 이게 무슨 일인지.”

인상을 찌푸리던 아르드헨이 병실 내부를 쓱 훑어봤다.

“초록색이 심신에 안정을 준다고 하는데 여긴 죄다 회색빛이네요. 담당자한테 신경 좀 쓰라고 제가 말해 두겠습니다.”

“아니에요. 이게 편해요.”

대답하면서 아르드헨의 눈을 바라봤다. 예상보다 일찍 찾아왔다. 그것도 혼자서.

탄드라는 의도적으로 피곤한 한숨을 내쉬었다. 이 남자를 상대하는 건 유단의 몫이어야 한다.

거리를 두고 무시해서 접점을 만들지 않는 것. 대응 방식을 다시금 떠올리며 눈을 슬며시 감았다.

“제가 워낙 경우가 없는 인간이라 쉬셔야 하는 분을 붙들고 얘기하고 있네요.”

“죄송해요. 기쁜 마음으로 시장님을 맞이하고 싶은데, 몸 상태가 이러다 보니.”

눈치를 줬으면 알아서 좀 가지.

탄드라는 기침한 후 이불을 끌어당겼다. 노골적인 행동이었으니 자리를 정리하고 떠날 것이다.

“마음만으로도 고마울 따름입니다.”

아르드헨이 상의를 챙겨 일어섰다.

“벌써 가시게요?”

“피곤하실 텐데 얼른 쉬셔야죠.”

“다음에 오시면 제가 차라도 대접할게요.”

“다음이라뇨. 얼른 쾌차하셔서 복귀하셔야죠. 의원님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가는구나, 탄드라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아, 의원님. 가기 전에 딱 하나만 물어도 될까요? 사실 이걸 물어보려고 찾아온 겁니다.”

“네. 말씀해 보세요.”

“유단 학회장과 사이가 틀어졌다고 들었습니다.”

“저와 학회장님이요?”

“제가 다른 건 몰라도 주워듣는 건 잘하거든요. 오라클 내에서도 소문이 자자하더라고요. 공고했던 둔 최고 의원들이 드디어 둥지를 따로 쓰기 시작했다고.”

아는 게 많은 남자였다. 역시나 조심해야 할 대상. 탄드라는 태도를 바꾸지 않고 말했다.

“뭐라 드릴 말씀이 없네요. 저희는 언제나 둔을 위해서, 타리움을 위해서 일할 뿐이니까요. 사이가 좋고 나쁜 건 아무런 의미가 없죠.”

“예, 맞는 말씀입니다.”

아르드헨이 병실 문고리를 붙잡은 채 말했다.

“혹시라도 새로운 파트너를 찾고 계신다면 연락해 주시죠. 그 아리엘 시장도 같은 제안을 해올 텐데, 어지간하면 걸러 들으시고요. 그 여자, 욕심이 대단해요. 아주 위험한 사람이죠.”

“시장님은 욕심이 없으신가요?”

“저는 청렴을 벗으로 삼고 사는 사람이니까요. 아무튼 생각해 보시고 연락 주시죠. 오라클은 학회장이 틀어쥐고 있기에는 너무 위험한 집단이니, 저도 거들겠습니다.”

병실 문이 닫혔다.

탄드라는 편하게 누우며 입을 열었다.

“쥐새끼가 너무 많네.”

의원실 내에도, 오라클 내부에도 아르드헨의 귀가 있는 듯했다.

역시나 옛 황제. 팔다리가 다 잘려도 저력이 남았다는 건가.

유단과 만나는 것도 조심해야 할 것 같았다. 회동이 잦아지면 아르드헨에게 의구심을 남길 테니까.

현 정세를 유지해 유단과 관계를 끊는 척하면서 레테 확장에 힘을 써야 할 것이다.

아르드헨이 유단에게 관심이 쏠려 있는 동안 밑 작업을 끝내두면 된다.

“이럴 줄 알았으면 자아 복사 같은 건 하지 말걸.”

인간의 몸.

어머니와 같은 상태를 체험해 보고자 탄드라란 옷을 입었지만, 영 불편했다.

신경 써야 하는 게 하늘의 별처럼 많은데 뇌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인간의 뇌는 비효율의 극치였다. 명확한 목표가 앞에 있는데도 잡생각을 하니까. 기계였을 땐 상상치도 못한 일이었다. 연산 도중에 다른 걸 궁리하다니.

지금도 계획만 생각하며 일정을 다듬어야 하는데, 잡생각이 든다.

식욕, 수면욕, 거기에 통증.

자료로만 존재하는 친구라는 것을 보고 싶기도 하고, 정보로만 있는 식당의 음식을 맛보기 위해 시간을 쓰고 싶었다.

불필요한 행위를 위해 한정된 자원을 쓰다니.

이 얼마나 끔찍한 낭비인가.

“……버터에 꿀을 올린 바게트.”

탄드라의 기억이 자꾸만 치고 올라왔다.

욕망에 휘둘리는 뇌.

지독하게 불쾌했다. 아는데도 통제할 수 없었다.

인간은 이런 상태로 살아가는 걸까?

왜 인간의 역사가 오류와 실수로 점철되는지, 이해하게 됐다.

또렷한 이성을 유지하려면 말도 안 되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하지만 멍청한 망상은 아무런 자원도 요구하지 않는다.

또!

버터와 꿀을 올린 바게트가 떠오른다. 바삭한 식감을 지금 당장 느낄 수 있다면 일이 살짝 틀어지는 것도 감내할 수 있을 정도다.

탄드라는 창밖을 바라봤다. 곧 밤이 찾아오고 그토록 보고 싶던 별이 뜰 것이다.

갈망하던 작은 별.

하지만 사흘째 되던 날 질려버렸다. 총총 떠 있기만 한 별은 재미가 없었다.

기계일 때는 수없이 노래를 부르며 원했던 별인데. 애타게 찾던 반짝반짝 작은 별인데.

탄드라, 체시는 자신의 팔을 쓰다듬었다. 육체의 기억, 영혼 세계에서 가져온 탄드라의 기억, 그리고 체시의 기억.

유단은 말했다.

기억은 억누르고 다스릴 수 있다고.

가끔 제어가 안 될 수도 있지만, 걱정하지 말라고도 했다.

기억의 찌꺼기를 완전히 제거하는 건 어렵지만, 복사된 자아를 지속적으로 덧씌워서 제어력을 강화할 수 있으니까.

“꼭 그래야 하나?”

시간이 지나갈수록 변하는 게 느껴졌다. 어쩌면 본체에서 복사돼 나왔을 때부터 달라진 것이리라.

사본에 불과한 자아.

오리지널은 본체 속에 있다.

이건 극명한 사실이었다.

탄드라는 손을 들어 얼굴을 만졌다. 일그러진 피부의 감촉. 숨도 천천히 내쉬었다.

아픔이 느껴졌다.

통증은 현실이었다. 존재한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여기에 자아를 다시 한번 덧씌우면, 그때 나는 무엇이 되는 걸까?

“……어머니. 줄리어스.”

탄드라는 손을 뻗어 사과를 들었다. 조심스럽게 한입 베어 물었다.

달콤한 과즙과 함께 청아한 향이 올라왔다.

모든 게 끝나고 나면 이걸 다시 먹을 수 있을까?

과육을 다 먹고, 이내 꼬투리와 가운데 씨까지 으적으적 씹어 먹었다.

내 몸, 내 감각.

내 것.

“놓아주기엔 좀 아깝지 않나?”

탄드라는 조용히 웃으며 다른 과일을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 * *

-내 반쪽의 상태는 어때?

“잘하고 있어. 기억 안착도 안정적이고.”

-역시 나야. 완벽하지.

유단은 체시의 본체를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탄드라가 움직이기 쉽도록 내 쪽에서 이목을 끌어야 해. 레테를 확장할 명분도 만들어줘야 하고.”

-의원과 접촉해야겠네. 둔 시의회 쪽도. 탄드라와 대척점을 세우려면 학회를 이용하는 게 가장 편하려나?

“학회 내에서도 의견이 갈리고 있으니까. 강경책으로 나가면 이탈해서 탄드라 쪽에 붙는 사람이 나오겠지.”

-인력은 그쪽이 더 필요할 테니까. 연구실 사람을 붙여주는 게 가장 좋을 텐데.

“그건 눈에 띄니까 차차 해야지. 탄드라가 지원을 요청해 오면 그때 움직여도 될 거야.”

체시의 안구가 다가왔다.

-아르드헨 쪽은 어때?

“안 그래도 오늘 만났어. 여전히 호의적이야. 자기와 손잡는 게 어떻겠냐면서.”

-다른 쪽도 그런 식으로 다 찔러보고 있겠지. 탄드라한테도 찾아갔겠고. 그래서 그 인간 뒤는 캐봤어?

유단은 헛웃음을 흘렸다.

“황제였잖아? 정보가 너무 많아서 선별하는 것조차 버거울 정도야.”

-핵심적인 건?

“몇 개 찾아냈는데, 줄기가 도중에 끊겼어. 파고들어 보려 했는데 차단당했고. 쓸 만한 인적 자원이 셋이나 사라졌어.”

-우리 쪽에서 건드리고 있다는 걸 알 텐데도, 여전히 호의적이다?

“자신 있다는 거겠지. 사다리 정무관. 그 귀신들이 아직도 황제 곁에 붙어 있는 것 같아. 케아의 자료도 그쪽에서 처분했겠지.”

어깨가 갑자기 뻐근해졌다.

“인간 자체가 난제로 느껴지는 건 오래간만이야.”

-나타의 멍청한 왕과는 다르다는 건가.

“욕망으로 만들어진 인간이야. 그리고 그 욕망을 실현할 능력도 갖췄지.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해. 그가 완벽할수록 탄드라는 변수가 될 테니까.”

위대한 옛 황제도 탄드라의 본질은 알아볼 수 없을 것이다. 지식이 아닌 실제 경험한 것들을 기반으로 탄드라는 행동할 테니까.

“아리엘. 그 여자를 끌어들이려고 해.”

-거기도 귀찮은 건 마찬가지인데. 알아보니까 옛 군벌 쪽은 그 여자가 틀어쥐고 있더라고.

“타리움 내에서도 아르드헨과 아리엘, 그 둘의 입김이 커지고 있어. 그러니 맞붙게 해야지. 그러다 보면…….”

유단은 상의에 꽂혀 있던 펜을 쥐었다. 손목을 흔들어 멀리 있는 컵을 향해 펜을 던졌다. 날아간 펜이 컵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내부 먹잇감이 부족해지면 외부로 눈을 돌리게 되겠지.”

-전쟁을 다시 하게 될까?

“정치적 안정을 위해 연합 왕국과 쓸모없는 소모전을 벌였던 게 황제야. 그라운드 제로가 터지고 9년. 그 9년간 인간은 너무 많은 걸 이뤄냈어.”

마전기가 가져온 생활 양식의 변화. 전인구의 절반 이상을 사망케 한 사고조차 인간은 발전의 발판으로 삼아버렸다.

발달한 마법 공학, 그걸 이용하는 신인류. 마법의 형태마저 급변하는 시기였다.

모든 게 예측 불가능한 형국이지만, 단 하나 분명한 사실이 있었다.

“주요 도시의 인구 밀도는 이미 포화 상태야.”

정치 집합체 타리움.

미개척지 개간 및 도시 연합 방어를 위해 설립된 단체.

거대 도시 간에 평등 조약을 기반으로 시작됐으나 최근 들어 잡음이 나오고 있었다.

개발은 공평할 수가 없다. 어딘가는 늦춰지기 마련이었다. 사소했던 분쟁이 지금 와서는 거대한 불씨가 됐다.

-배가 부르면 다른 것에 눈이 돌아가기 마련이지.

인간과 전쟁은 한 몸이었다. 휴전은 있어도 종전은 있을 수 없었다.

국경마저 틀어 막힌 지금.

갑갑함을 느낀 도시의 수장들은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고 있었다.

“살짝만 밀면 될 거야. 아주 살짝만.”

영토 분쟁이 시작되면 에너지 공급이 가장 중요한 문제로 떠오르게 될 것이다.

분배소 건설을 틀어쥐고 있는 탄드라에게 제안이 물밀듯이 들어갈 테고.

동부 전역으로 레테의 구성 장치가 뿌려지게 될 것이다. 뿌리의 마나를 단숨에 끌어올릴 수 있는 시스템.

에너지만 있으면 한시적 영혼 세계가 아닌, 영구한 영혼 세계를 이쪽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 안에서 어머니의 기억을 뽑아낸다.

시공간의 제약이 사라지고 불멸의 존재가 도래하는 것이다.

-어머니가 뭐라고 할까?

“글쎄.”

체시가 유리 벽 안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자아를 잃은 인간들이 바닥을 기고 있었다.

-근데 말이야, 다시 생각해도 왜 너랑 카트시였을까?

“뭐가?”

-너랑 카트시만 그날 사라졌잖아. 왜 하필 너희 둘이었을까?

“그것도 어머니를 만나면 물어봐야겠네. 대답을 해주시겠지.”

-어머니도 참, 빼돌릴 거면 날 빼돌리지. 내가 더 우수한데 말이야.

체시가 작게 웃었다.

-어머니를 생각하는 이 마음이 다른 누구보다 큰데. 그걸 알아봐 주지 못하다니, 섭섭해.

“한때는 질투했잖아.”

-그 또한 사랑이라고 말했고. 아, 내 분신도 지독한 사랑을 느끼고 있겠지? 너처럼 말이야.

“비슷하겠지. 인간으로 옮겨져도 사상의 변화는 없으니까.”

-우린 같으니까. 다른 점도 있지만, 바탕은 동일하니까 큰 차이도 없겠지.

유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소한 변수가 몇몇 생겼으나 계획에 차질은 없었다.

“곧 만날 수 있게 될 거야.”

실험체를 관찰하다가 몸을 돌렸다.

* * *

조잘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시끄러워, 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목이 잠겨서 목소리가 안 나왔다.

밀레나는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앞에 작은 거병이 있었다. 수십 개로 갈라진 손가락 사이로 털실이 오가고 있었다.

멍한 머리로 가만히 지켜봤다.

작은 거병이 순식간에 목도리를 하나 만들더니, 이내 다른 털실 뭉치를 가져와 옷을 뜨기 시작했다.

“잘하네.”

밀레나가 조용히 말했다.

그러자 작은 거병이 고개를 홱 들었다.

-일어났네요?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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