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2화
“분배소 간소화에 이어 배터리 용도 제한을…….”
설명이 끊겼다. 보좌진의 고개가 회의실 문을 향해 돌아갔다.
탄드라는 안경을 벗으며 손짓했다. 문이 열리고 비서가 잰걸음으로 다가왔다.
“잠깐 쉬죠.”
보좌진을 물린 후 비서가 건넨 파일을 열었다. 문서를 읽어 내린 후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라클 2소대장도 같은 의견인가요?”
“예. 제안서를 보지도 않고 물렸습니다. 이번 일은 조용히 묻어 두겠다고 했지만…….”
“이미 유단에게 말했겠죠.”
품속에 얌전히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탄드라는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쳤다.
“아리엘 의원 쪽에 선을 대볼까요?”
“그 친구도 욕심이 만만치 않아요. 유단을 억제하려고 늑대를 키울 순 없죠. 오라클 쪽을 다시 두드려봐요.”
“알겠습니다.”
비서가 나갔다.
탄드라는 식은 커피를 단숨에 마셨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너무 컸어.”
언제부터였을까. 유단을 보고 있으면 위기감이 들었다. 세력이 커지고 위치가 공고해져도 자식처럼 다룰 수 있는 애라고 여겼는데…….
창문을 활짝 열었다. 늦여름, 제법 시원한 바람이 창을 비집고 들어왔다.
“많이 올라왔네.”
둔 시내를 내려다봤다.
16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풍경이었다. 인생이 순탄했다면 지금도 교수실에 틀어박혀 유사 정령 학습 장치에 관한 연구를 진행했으리라.
하지만 그라운드 제로라는 예상 못 한 격변이 인생 플랜을 뒤집어 놓았다.
이제는 교수라 불리면 그런 적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낯설다.
탄드라 의원.
타리움 재정1부 책임자.
그토록 비난하던 정치인이 돼 정치 물결 한가운데서 나자빠지지 않도록 노력 중이었다.
“알렝 바르베.”
문득 그 이름이 떠올랐다. 고결했던 정치인. 극단적인 죽음으로 신념을 전파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탄드라는 눈물을 훔칠 정도였다.
그리고 지금.
탄드라는 존경하던 정치인과 정반대의 노선을 걷고 있었다.
인생은 역시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다고 후회하는 건 아니었다. 후회하기에는 너무 멀리 왔으니까.
외투를 챙겨 유단의 연구실로 향했다. 유단은 요즘 전용 연구실에 틀어박혀 사는 중이었다.
연구원들의 인사를 받으며 지하로 내려갔다. 출입 제한 구역이었으나 탄드라는 거침없이 발길을 옮겼다.
따라붙는 연구원을 흘깃 본 후 유단의 개인실 문을 열었다.
안에서 책을 읽던 유단이 웃으면서 일어섰다.
“어쩐 일이세요.”
“온 이유를 알고 있으면서 그런다.”
유단이 뒤따라온 연구원에게 손짓하자, 그제야 표정을 풀며 문을 닫았다.
“충성심이 대단하네. 내 얼굴을 분명 아는데도 계속 따라오더라.”
“그런 곳이니까요.”
“그런 곳.”
탄드라는 자조적으로 웃은 뒤 말했다.
“2소대장이 너한테 말했겠지?”
“예. 듣고 싶지 않았는데 말이 날아오더라고요. 커피는 설탕 없이…….”
“마시고 왔어.”
찬장에 손을 뻗던 유단이 머쓱하게 웃었다.
“급하셨나 보네요.”
맞은편에 앉은 유단을 살짝 노려봤다.
“오라클 창설자라는 건 인정해. 마법 거병의 운용법도 네가 만든 거니 애착심이 생기겠지. 하지만 총지휘권을 네가 틀어쥐고 있으면 분위기가 험악해져. 알고 있잖아?”
“네, 알고 있죠.”
“디온 사령관의 뒤를 이어 오른 케슨이 네 수족이라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야.”
“그걸 허락한 건 세잔 의원님과 탄드라 의원님이고요. 다른 의원분들을 설득해 주셨죠.”
“그게 편했으니까. 넌 우리와 특별한 관계니까.”
“의원님의 자식 같은, 그런 말 잘 듣는 아이요?”
탄드라는 벽면을 쓸어봤다. 난해한 제목의 서적이 줄지어 꽂혀 있었다.
“누가 너한테 바람을 불어넣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여태껏 잘 해왔잖니? 너는 둔이라는 거대한 도시를 위해 지식을 보태고, 나는 정치를, 세잔은 상업을.”
“분명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덕분에 제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이른 시간에 준비를 마칠 수 있게 됐고요.”
“준비?”
유단은 대답하지 않고 미소로 뭉뚱그렸다.
“딴 맘 생기는 거 이해해. 남자가 욕심을 갖는 건 당연한 거니까. 하지만 모든 걸 너 혼자 감당할 수 있겠니? 우리와 척을 지면 네가 이룩한 것들이 하루아침에 무너질 수도 있어.”
탄드라는 유단 옆에 앉았다. 유단의 왼손을 살며시 쥐며 말했다.
“과욕은 널 다치게 할 거다. 타리움 내에서도 얘기가 나오고 있어. 구세주란 허울 좋은 명성도 방패가 될 수 없단다.”
“절 지켜 주시겠다는 거군요.”
“그래. 넌 정치와 어울리지 않아. 좋아하지도 않겠지. 난 네가 원하는 걸 잘 알고 있단다. 언제든 도움을 줄 수도 있고.”
“제가 뭘 하면 될까요?”
“오라클의 작전 권한을 분산해서 나눈다면 소란도 잦아들 거다. 타리움의 핵심 의원들도 납득하겠지. 특히 아르드헨은 받은 만큼 돌려주는 남자야. 그가 원하는 걸 주면 둔에게도 큰 선물이 오겠지.”
“제가 오라클을 포기하면 다들 편해지겠군요.”
탄드라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포기라니. 더 큰 가치를 위한 투자라고 생각해. 힘의 균형이 어그러지면 분쟁이 일어나기 마련이란다. 타리움은 아직 흩어져선 안 돼. 너도 잘 알잖니?”
유단의 어깨를 살며시 다독인 후 떨어졌다.
알아듣게 설명했다.
이래도 포기를 못 한다면 그땐 다른 수단을 강구해야 한다. 강제적인 방법을.
“알겠습니다. 의원님을 따르죠.”
너무나도 쉽게 수락하는 유단이었다. 맥이 탁 풀릴 정도로.
“사석에서 의원님을 못 뵌 지 1년 정도 된 것 같네요.”
유단이 말했다.
“그렇게 됐나? 하긴, 얼굴이야 다른 자리서 많이 보긴 했어도 이렇게 사석에서 보는 건 오래간만이네.”
“옛 생각이 갑자기 나네요. 제가 연구생으로 교수님 연구소에서 일할 때요.”
옛이야기가 갑갑했던 공기를 바꾸었다. 탄드라도 옅게 웃었다.
“정말 옛날 일이 됐네. 사실 나도 여기 오기 전에 예전 일을 떠올렸어. 사람 일이라는 게 정말 알 수가 없네. 내가 의원직을 맡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으니까.”
“저 역시 이 자리에 앉게 될 줄은 꿈에도 못 꿨습니다. 의원님 덕이 컸죠.”
상냥한 눈빛이었다.
어쩌면 괜한 오해가 아니었을까?
만나서 얘기하면 쉽게 풀릴 일이었는데.
그래, 아직은 품 안에 있는 애다.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고 갈 수 있는 애.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의원님이 언제 찾아올지, 내심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정말로?”
“예. 예전처럼 편하게 얘기도 하고 술친구도 하고. 언젠가부터 거리가 멀어진 것 같아 아쉬웠거든요.”
“내가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 네 마음을 읽지 못했네. 그토록 오래 알고 지내 왔는데도 말이야.”
“그래서 약간 심술을 부려봤어요. 이렇게 하면 의원님이 찾아올 거라 생각했으니까.”
하는 행동이 귀여웠다.
유단이 작은 잔에 술을 따라서 왔다.
“마침 잘 오셨어요. 보여드리고 싶은 게 있었거든요.”
“그래?”
술을 입에 털어 넣고 일어섰다.
유단이 책장 앞에 섰다. 그러자 책장이 비스듬히 열리며 안쪽으로 들어가는 문이 나타났다.
기계적인 조작을 한 것도 아니고, 마나 파장도 느껴지지 않았다. 근데 책장이 반응해서 열리다니.
“재미난 장치네.”
“안쪽에는 더 재미난 것들이 있죠.”
유단을 따라 걸었다.
이곳은 학회의 연구소가 아닌 유단이 개인적으로 설립한 연구소였다.
대외적으로야 오라클 운영에 필요한 각종 마법 공학을 연구 중이라고 되어 있지만, 안쪽에서는 전혀 다른 연구가 진행 중이었다.
영원히 늙지 않는, 새로운 사람으로 계속 태어날 수 있는 기적의 기술.
“디온 님은 잘 계시지?”
“지금은 깊은 잠에 빠지셨어요. 가끔 깨워서 보고만 드리고 있죠.”
“나도 언젠가 그렇게 되는 거겠지?”
“영혼을 타인의 육체에 안착시키는 법이 곧 완성될 겁니다. 의원님은 기다림 없이 새로운 몸을 얻으실 테니 염려 놓으세요.”
꿈이 코앞까지 왔다.
역시 이 아이는 정치와 어울리지 않았다. 위정자와 수 싸움할 시간에 연구에 몰두하는 것이 인류적으로 도움이 되니까.
“그날이 오면 내가 가장 먼저 실험대에 오를게.”
안 그래도 요즘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쉰이 넘어가고 나니 피부부터가 늘어졌다. 탄력에 도움이 된다는 온갖 것에 손을 대도 소용이 없었다.
외모에 도움이 되는 마법도 한시적일 뿐. 게다가 늙으면서 얻게 되는 자잘한 병들은 마법으로도 어찌할 수 없었다.
가장 위대한 마법은 시간이니까.
하지만 젊은 육신을 얻게 된다면 모든 게 해결된다. 양녀를 들여 몸을 옮기게 되면 권력을 이어받는 것도 손쉬워진다.
훗날 영혼 안착이 보편화되면 남들을 속일 필요도 없게 될 것이다.
무한한 삶.
마침표 없는 삶을 살다 보면 분명 지루해지는 날이 오겠지만, 그건 그때 가서 고민해 볼 일이었다.
지금은 그저 젊어지고 싶었다.
“이쪽으로.”
유단을 따라 ‘J-1’이라 적힌 방으로 들어갔다. 투명한 유리 벽 안쪽에 여자가 누워 있었다.
“이건…….”
“영혼 세계의 일시적 구현. 저는 한시적 영혼 세계라 부르고 있죠. 1년 전만 해도 2주 정도 붙들어 두는 게 전부였지만, 지금은 많이 개선됐죠.”
“영혼 세계?”
탄드라는 유리 벽 안에 누워 있는 여자를 바라봤다. 유단이 벽을 툭툭 치자 여자가 눈을 번쩍 떴다.
그녀는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주변을 훑다가 이내 유리 벽으로 기어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목소리가 들리지는 않았다. 방음이 완벽했다.
탄드라는 여자의 눈을 바라봤다. 실험동물 같아 재미있었다.
“이 여자는 뭐지?”
“기억, 그러니까 영혼 세계의 일부를 이전받은 상태예요.”
“그렇다는 건…….”
“몸을 팔지도 못하는 부랑자였으나 지금 저 여자 안에는 다른 사람의 기억이 들어가 있죠. 상충하는 과정에서 기억 혼란이 일어나겠지만, 곧 본래 자아를 잃게 될 겁니다.”
“우리가 겪어야 할 영혼 안착의 과정이구나. 하지만 비어 있는 인간을 쓴다면 저런 부작용은 없겠지?”
“비어낸다고 해도 몸의 기억이란 게 남아 있어요. 심상 세계, 영혼 세계와 달리 몸이 품고 있는 정보들. 그것들마저 완벽하게 긁어내면 좋겠지만 쉽지 않죠.”
벽 가까이 다가온 여자가 한순간 움찔했다. 헛것을 본 것처럼 경기를 일으키더니 이내 손톱을 세워 유리 벽을 무참히 긁었다.
손톱이 으깨지며 핏물이 투명한 벽을 더럽혔다.
“대체 뭘 보고 있는 걸까.”
무릎을 굽혀 여자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묘한 안도감이 전해진다. 벽 하나일 뿐이지만 저 너머에 있는 여자와 나는 완전히 다르다.
그녀는 실험용 동물이고, 나는 그녀의 희생을 바탕으로 영생을 누리게 될 것이다.
“미안하면서도 고맙네.”
손바닥을 펼쳐 유리 벽에 가져다 댔다. 여자가 얼굴을 들이밀며 뭐라고 외쳤다.
“살려달라고 하는 걸까?”
“궁금하시면 한번 들어 보실래요?”
“조금 궁금하긴 하네. 아, 근데 누구의 기억을 이어받은 거야? 성공 여부를 알려면 특정 인물의 기억을 넣어서 확인해야 하잖아.”
“역시 잘 알고 계시네요.”
유단이 왼쪽으로 걸어가 벽에 손을 댔다. 잘 보이지 않았던 이음새가 짙어지며 유리 벽이 안쪽으로 밀려 들어갔다.
“신체 접촉이 일어나도 위험하지는 않습니다. 위해를 가할 만큼 기력이 남아 있지도 않으니까요.”
유단이 단조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