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1화
-밀레나, 제가 그렇게 못 미더워요?
“믿어. 믿지만…….”
밀레나는 해더 트럭에서 내려 가하란이 있는 방향을 바라봤다.
남아서 돕겠다고 했으나 카트시가 말렸다. 신체술을 쓸 수 없게 될 거라면서.
카트시의 말대로 디졸브 필드로 인해 공핍 영역이 생성되자마자 마나를 통제할 수 없게 됐다.
감각된 마나가 강한 힘에 이끌려 흩어지더니 이내 사라진 것이다.
어디에나 존재해야 할 마나가 사라졌다. 마나의 부재. 누구도 상상해 보지 못한 일이 가하란 손끝에서 펼쳐졌다.
“대체 어떻게 한 거지?”
-마나는 한 데 뒤엉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들여다보면 각 대역으로 나뉘어 있어요. 그 안에는 자석의 같은 극처럼 상극인 녀석도 있고, 다른 극처럼 끌어당기는 녀석도 있죠.
카트시가 기계 안구를 길게 빼며 말했다.
-r8 대역에 부하를 걸면 순간적으로 그 대역의 밀도가 낮아지죠. 지속적으로 부하를 걸면 연쇄 작용이 일어나 범위가 점점 확산되고 어느 순간 마나가 흐르지 않는 얇은 층이 형성돼요. 그게 공핍의 시작이고, 거기서 안정화를…….
밀레나는 곁으로 다가온 기계 안구를 살며시 밀어냈다.
“내 표정 보여?”
-네. 전혀 이해 못 하겠다는 얼굴이네요.
“그걸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 거 같아?”
-없겠죠. 개요 정도는 알아먹어도 실사용이 가능한 건 한 명뿐이니까. 애초에 보통 사람이라면 이런 발상을 못 해요. 단절을 이용해 억제하려 들다니.
이야기를 들으며 눈을 좁혔다.
거대한 마수들이 한순간 쓰러지기 시작했다. 시작된 것이다. 가하란의 말대로 마나가 사라지니 비대한 육체가 족쇄가 됐다.
-금방 끝낼 거예요. 이런 환경에서 무적에 가까운 아군이 있으니.
누굴 의미하는 건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붉은빛이 마수 사이를 뚫고 지나갔다.
위대한 산의 전사.
“나랑 대련했을 때는 힘을 절반도 안 꺼낸 것 같네. 아니, 절반이 뭐야.”
산의 영령을 두르고 전진하는 타챠. 두려움을 모른 채 달려들던 마수들조차 타챠를 피해 몸을 틀기 시작했다.
보는 순간 깨달았다.
싸움이 끝났다는 걸.
“말년에 별 해괴한 경험을 다 하는군.”
해더 트럭에서 내린 노인, 웍센이 허리를 펴며 말했다.
“운전 실력이 대단하시던데요.”
“젊었을 때 지겹도록 몰았으니까. 낮에는 쇠 만지고 밤에는 자재 운반하고.”
곁으로 다가온 웍센이 분진이 솟구치는 방향을 바라봤다.
“어린 후배가 자주 한 말이 있지.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고.”
“그랬나요.”
“내 눈이 틀린 게 아니라면 그게 자네인 거 같네만.”
“맞을 거예요. 아니라고 하면 할 말 없지만.”
웍센이 낮게 웃었다.
“아, 그리고 이건 내 짐작이네만 르완의 우두머리하고는…….”
“어머니예요.”
“역시나. 어디서 많이 본 눈매더라니.”
대화하는 사이 뒤쪽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정비팀을 대동한 거병이 쿵쿵 소리를 내며 다가오고 있었다.
르완의 마크가 선명하게 보였다.
앞장서 있는 건 너무나도 반가운 엄마의 전용기, 베타였다.
-왔어?
몇 년 만에 보는 엄마의 인사였다.
“응, 왔어.”
-다친 곳은?
“조금 피곤한 거 빼고는 없어.”
-어떤 상황인지는 알고 있지?
밀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베타의 체임버 덮개가 열렸다. 얼굴을 마주한 엄마가 물끄러미 바라만 봤다.
“왜?”
“가하란은 만났어?”
“얼굴만 잠깐 봤어.”
“이제 너보다 커.”
“세월이 얼만데.”
먼 곳에서 들려오던 소음이 멎었다. 붉은빛도 사라졌다.
크고 작은 마수들이 뿔뿔이 흩어져 사라지고 있었다.
끝난 것이다.
짧고 강렬했던 전투가.
-마나 밀도 확인하면서 전진해! 영역 안에서 무리하게 기동하면 바로 셧다운이야.
르완의 거병들이 앞장섰다.
지나가면서 한 번씩 체임버 덮개를 열고 얼굴을 내비쳤다. 밀레나는 반가운 삼촌들과 눈인사하며 미소를 지었다.
“연애에 관해서는 나한테 다 물어봐라! 내가 다른 건 몰라도 그건 빠삭하니까.”
“하우스 삼촌, 두 번이나 이혼하신 분한테 듣고 싶진 않아요.”
“에헤이!”
격하게 손을 흔든 뒤 체임버 덮개를 닫는 하우스였다.
-우리도 가요. 필드가 해제됐으니 이동해도 돼요.
카트시의 안구가 하늘을 바라봤다. 밀레나도 고개를 들었다.
총천연색의 마나가 실크로 된 커튼처럼 하늘 전체에 드리워져 있었다. 살랑살랑 흔들리던 마나가 이내 색감을 잃고 대기로 녹아들기 시작했다.
밀레나는 주먹을 가볍게 쥐었다. 사라졌던 마나가 다시금 느껴졌다.
-애들 회수해야 해.
박스에 타고 있는 자그마한 거병이 말했다. 이름이 슬리피라고 했던가.
-그리고.
슬리피가 가까이 오라는 듯이 손짓했다. 밀레나는 갸웃거리며 다가갔다.
-아빠가 괜찮은지 물어보래.
“나?”
-어.
“난 괜찮아. 가하란은?”
-아빠도 괜찮아.
“그쪽 상황은 어때? 잘 마무리됐어?”
-끝났어.
얘기하던 슬리피가 고개를 들었다. 표정이 없는, 쇠로 주조한 얼굴에서 어째서인지 감정이 느껴졌다.
-그만할래. 둘이 만나서 얘기해.
귀찮다는 듯이 다시 박스로 올라가는 슬리피였다. 밀레나는 작게 웃었다.
-애가 버릇이 없네요.
카트시가 말했다.
“왜? 귀여운데. 그리고 카트시에 비하면 예의 바른 거 같은데?”
-저게요? 그럴 리가요. 전 살아 있는 매너 그 자체라고요.
“아닐걸?”
해더 트럭에 올라탄 웍센이 고개를 내밀었다.
“슬리피 말대로 애들 회수하러 갈 건데, 자넨 어쩔 텐가?”
“저도 갈게요. 비앙크도 실려 있으니.”
“가하란한테 안 가고?”
“금방 볼 텐데요, 뭐. 저쪽은 어머니가 정리할 테니, 우르르 몰려가 봤자 인력 낭비죠.”
해더 트럭이 움직였다.
평지를 가르며 한참 달리자 자그마한 거병이 보였다. 우산살처럼 생긴 기계를 든 채 천천히 걷고 있었다.
-무서웠어.
거병이 작게 말하며 박스에 올라탔다. 카트시처럼 개성이 도드라지는 애들이었다.
그렇게 총 여섯 대의 작은 거병이 박스에 실렸다.
“저쪽도 끝난 것 같구나.”
웍센이 운전대를 돌렸다. 마수의 시체를 해체 중인 작업반을 지나 반파된 거병 앞에 도착했다.
가하란이 거병 앞에 서서 이곳저곳 살피는 중이었다.
“해피라고 했지?”
밀레나가 뒤쪽에 서며 말했다. 가하란이 고개를 살짝 돌렸다.
-네! 해피 맞아요! 멋진 이름이죠?
주저앉아 있는 거병이 말했다. 발랄한 목소리였다.
“성격이 좋은 애야.”
가하란이 외장갑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말했다. 밀레나도 우그러진 외장갑에 손을 올렸다.
“직접 제작한 거야?”
“탈로스부터 각 모듈까지. 액상 근육도 손대고 싶었는데 노하우가 부족해서 기존의 걸 썼어.”
“그토록 노래를 부르더니, 정말로 해냈네.”
“노래를 부른 적은 없어.”
“정말? 난 몇 번이나 들은 거 같은데. 아! 거병을 만들고 싶어, 내 꿈은 커다란 거병을 만드는 거야!”
적당한 멜로디에 대충 가사를 얹어서 불렀다. 가하란이 이가 드러나도록 웃었다.
“누나.”
“왜?”
“아쉽게도 가극 배우는 못 하겠네. 노래가 살짝 어설퍼.”
“이 정도면 잘하는 거지.”
조금 떨어져 있던 가하란의 손이 다가오더니, 이내 포개졌다.
밀레나는 손등에 오른 가하란의 손을 바라봤다.
“이상하네. 그때 기억나?”
“그때라니?”
“너한테 춤 가르쳐줄 때.”
“아, 기억나. 어릴 때였지.”
“그땐 진짜 작았는데 말이야. 내가 이렇게 쥐면 손 안에 다 들어올 정도로.”
손을 뒤집어 가하란의 손을 움켜쥐었다.
“근데 이제는 나보다 크네.”
“정말 그러네.”
“굶고 다니진 않았나 봐.”
“열심히 챙겨 먹었지. 그쪽에서는 먹는 게 몇 안 되는 낙이었거든. 별의별 재료를 다 써서 온갖 걸 만들어 먹었어.”
“밀리언 씨한테 배운 요리 기술이 더 늘었겠네.”
“아저씨 따라가려면 멀었지만, 나름 자신 있는 요리가 있긴 해.”
“뭔데?”
“돼지 앞다리로 만든 튀김.”
“별로일 거 같은데.”
“먹어보면 생각이 달라질걸?”
밀레나는 시선을 옮겨 가하란의 눈을 바라봤다. 탁한 하늘을 품은 눈동자. 어릴 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색이었다.
“언제 해줄 건데?”
“시간이 조금 걸리는데, 기다릴 수 있어?”
“기다리는 동안 체스 한 게임 어때?”
가하란이 한쪽 입술을 살며시 들어 올리면서 손을 뺐다.
“안 될걸.”
“왜? 네가 몰라서 그러는데, 나 실력 많이 늘었어.”
“그래도 안 될걸.”
“요리는 먹어야 아는 거고, 게임은 해봐야 아는 거지.”
“어릴 때도 비슷한 말 하지 않았던가?”
가하란의 눈을 응시하며 말할 때였다.
-체스라면 나도 낄래요! 나 잘해요. 엄청 잘해요.
하나 남은 팔을 격하게 움직이며 말하는 해피였다.
“가만히 있어. 그나마 멀쩡한 모듈마저 다 망가지기 전에.”
-알겠어요. 근데 껴도 되는 거죠? 체스라면 자신 있어요. 아빠도 나한테는 안 될걸요?
“정비 끝나고 나면 들어줄 테니까 얌전히 있어.”
얌전히 있으란 말에 그대로 트레일러 위에 눕는 해피였다. 트럭에 끌려 견인되던 해피가 손을 치켜들더니 “꼭이요”라고 외쳤다.
밀레나는 멀어져 가는 해피를 보며 웃었다.
“귀엽네.”
“신기하지? 따로 지시한 적도 없는데 저런 성격을 갖추게 됐어. 다른 애들도 마찬가지고. 개성이란 게 차별성에 기반하다 보니 자기들끼리 얘기하면서 갈리게 된 거 같아.”
밀레나는 입을 다문 채 가하란을 바라봤다. 유사 정령 인격에 대해 혼자 떠들기 시작했다. 초기 입력값은 알 수 있으나, 내부 심화 연산 과정은 파악할 수 없어 어쩌고저쩌고.
“몸만 컸네.”
애라는 생각이 들어 가볍게 웃을 때였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옆구리를 지나 허리 뒤쪽에 손이 닿았다. 어, 하는 사이 가하란이 다가온 것이었다.
눈이 가까웠다. 코가 맞닿을 정도였고, 입술 역시 가까웠다. 숨소리가 짧게 교차했다.
다가오던 얼굴이 멈칫했다.
복잡한 눈동자였다. 저질렀으나 중간에 이성이 번쩍 눈을 뜬 것 같았다.
헤매는 눈이 웃겼다. 아니, 사랑스러웠다.
“말을 바꿔야겠네. 애는 아니네.”
저쪽에서 한걸음 와줬으면, 이쪽에서도 한 걸음 나아가야 한다.
시작은 가하란이, 끝맺음은 내가.
가볍게 포개진 입술 사이로 애처로운 숨이 잠시 머물렀다가 흩어졌다.
얼굴을 떨어트리며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떨어지기 무섭게 멀게만 느껴졌던 온갖 소음이 귀를 때렸다.
가하란이 눈을 깜빡이다가 이내 말갛게 웃었다.
“사람 많은데.”
“아는 애가 그랬어?”
“애는 아니니까.”
“뭐, 다들 자기 할 일 하느라 바쁘니까. 신경 쓰는 사람도 없고.”
밀레나는 주변을 돌아봤다. 이동 중인 해더 트럭과 거병. 무수히 쌓인 마수 사체와 그걸 정리 중인 사람들.
“무드는 없네.”
“근데 난 이런 풍경이 익숙해.”
“너나 나나, 정말 문제다. 나도 이런 환경이 익숙하니까.”
작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같이 웃던 가하란이 휘청거렸다. 전투로 인한 피로가 뒤늦게 찾아온 듯했다.
곁으로 다가가 어깨를 빌려줬다.
가하란과 같이 웍센이 있는 트럭으로 걸어가는데, 하늘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매 한 마리가 주변을 맴돌다가 멀어지고 있었다.
“저건…….”
밀레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발견했다.
저 멀리서 못 볼 걸 봤다는 듯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는 녀석을.
“둘이서 아주 지랄을 해라! 지랄을! 칵, 퉤퉤!”
에단이 멀리서 외치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