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450화 (450/558)

제450화

칼랑족의 신체 능력은 마나에 기인하지 않는다. 마나가 없어도 저들은 동지들처럼 날뛸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은 아니다.

신체술 없는 인간의 몸뚱이는 조악한 생체 구조물에 불과했다.

오직 마나만이 인간의 육신을 강화할 수 있다. 그게 정설이자 상식이고 이치였다.

그렇다면 저 힘은 무엇인가?

마나와 신체 사이,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인력이 작용하고 있었다.

떨어져 나가 사라져야 할 마나가 인식되지 않는 힘에 이끌려 인간에게 달라붙고 있었다.

마법 공학은 아니었다. 공학적 해결법이 있었다면 다른 방식으로 마나를 사용했을 것이다.

가하란이라는 개인이 구사하는 미지의 능력.

“다 비켜!”

유단이 달려들었다. 분노에 잠식돼 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인식하지 못한 것 같았다.

-유단!

뒤늦게 불렀으나 소용없었다.

달려든 유단이 가하란에게 근접한 순간.

서걱!

유단의 두 다리가 잘려 나갔다. 지탱할 다리를 잃은 몸이 바닥을 굴렀다.

게웰은 곧바로 몸을 날려 유단을 보호했다. 접근하던 가하란이 뒤로 물러섰다.

“……시발.”

-빨리 형태를 다잡아라.

“알고 있어!”

-인간의 모습을 고집하지 마라. 비효율적이다.

“시끄러워. 내가 말했지. 우리가 인간이라고.”

마나가 부족한 상황에서 몸을 복원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유단이 힘겹게 다리를 생성하는 동안, 다른 동지들이 가하란에게 달려들었다.

기묘했다.

약해졌다고는 하나, 느려졌다고는 하나 그래도 뛰어난 동지들이었다.

사방에서 날아드는 공격 중 하나 정도는 닿을 법도 한데, 모든 공격이 가하란을 빗겨나갔다.

마나를 붙드는 기괴한 힘.

몇 수를 내다보는 듯한 눈.

촤아악!

균열을 통해 공격하던 동지가 두 쪽으로 잘렸다. 마지막 순간까지 집중해서 인간의 미간을 노렸으나, 그마저도 허공을 갈랐다.

정말로 다 보이는 건가?

신체적 변화를 보고 대응하는 게 아니라, 의식을 읽어내는 건가?

마법은 개별적이고, 마법의 개수는 무한하다.

독특한 심상 세계를 구축한 인간이라면 놀라운 마법을 부리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게웰은 신체 일부를 늘어트려 돌멩이를 흡수했다. 체내로 받아들인 돌멩이를 전면으로 이동시킨 후, 단숨에 뿜어냈다.

면을 에워싼 공격이었다.

그리고, 가하란은 돌이 뿜어지기 전 고개를 틀어 이쪽을 바라봤다.

확신이 들었다.

읽히고 있다.

하지만 마나 파장은 없었다. 적어도 마나를 이용한 마법은 아니란 뜻이었다.

단순히 눈이 좋은 건가?

그것으로 설명될 수 있는 현상인가?

한 인간에 대한 평가가 초 단위로 변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저건, 저 앞에 있는 저 인간은 너무나도 위험하다.

“후우.”

가하란이 숨을 토해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인간이었다.

극도의 정신력을 요구하는 격전 속에서 금방 지친 것이다.

“달려들어! 죽일 수 있어!”

회복을 끝낸 유단이 몸을 일으켰다.

칼랑족은 어깨에 깊은 상처를 입고 물러났고, 가하란 역시 손도끼 하나를 잃은 채 뒷걸음질 쳤다.

승기가 찾아왔다.

정말 다행이었다. 불안한 변수였다. 남겨뒀으면 다음을 장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여기서 죽여야 한다.

직감이 들었다.

여기서 수많은 동지를 잃었으나, 저 인간을 죽인다면 손해 보는 게 아니다!

게웰이 몸의 형태를 바꾸며 가하란에게 뛰어들기 직전이었다.

싸늘한 공기가 몸을 훑었다.

달려들던 모든 동지가 멈췄다.

시선이 오른쪽으로 돌아갔다.

중형 마수들이 진을 치고 있는 곳.

온다.

콰아아앙!

붉은빛과 함께 분진이 솟구쳤다. 중소형 마수들의 살점이 민들레 씨처럼 뿌려졌다.

마나와 전혀 다른 힘.

강렬한 투지.

게웰은 힘겹게 말을 꺼냈다.

-가장 껄끄러운 자가 찾아왔다.

콰르릉!

투신(鬪神)이 붉은빛이 감도는 창대를 휘저으며 동지들을 갈랐다.

-온전치 않은 상태로 저걸 상대하는 건 무모한 짓이다. 난 몸을 빼겠다.

곁을 지키던 동지 둘이 이탈했다.

몸을 가눌 수 있는 중형 마수들도 이를 드러내며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전투에 미친 자.

전쟁을 찾아다니며 죽기를 바라면서도 기어이 살아남는 괴물.

당대 타린족에서 가장 산에 가깝다는 자가 전선을 꿰뚫고 있었다.

대마수이던 시절에도 저것과 마주하는 건 꺼림칙한 일이었다.

뒤가 없는 전투를 벌인다면 타린족 전사를 죽일 수 있지만, 피해가 극심할 테니까.

무엇보다 저자는 공생을 이해하고 있었다.

이번 전투가 아니었다면, 싸움터에서 마주할 리 없는 존재였다.

지축이 흔들린다. 공기가 파르르 떨렸다.

이윽고 붉은 증기를 두른 전사가 거대한 창대를 땅에 꽂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내딛는 걸음 뒤로 동지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마나의 공백은 타린족 전사에게 아무런 문제가 아니었다. 저자는 감히 바라볼 수 없는 존재에게 사랑받고 있으니까.

-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도시를 지키는 쪽에 설 거라 예상했으니까.

“나도 오고 싶지 않았다. 여긴 덧없는 죽음만 쌓여 있으니까. 긍지가 없는 싸움. 전쟁이라 부를 수 없는 전쟁. 그저 앞만 보고 달릴 뿐인 무지한 자들의 혈전. 달갑지 않은 전장이나, 약속한 게 있어서 이렇게 찾아왔다.”

-약속이라면…….

게웰의 물음에 타린족 전사가 창대를 들어 가하란을 가리켰다.

“꼬마를 데려가겠다. 덤으로 꾀죄죄한 늑대도.”

대화가 이어지는 도중에도 뼈에 깃든 마나가 새어나가고 있었다.

대치만 해도 이쪽은 약해진다.

한계치를 넘어서면 형태도 유지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승패는 정해졌다. 타린족 전사가 합류한 순간 끝난 것이다.

본래의 힘을 발휘할 수 없는 동지들로는 전사를 막을 수 없다.

아니, 정면으로 맞붙는다면 가능성은 있다.

하지만 타린족 전사가 그걸 허용할까? 저자는 영리하다. 영광된 전투가 아닌 이상 거리를 두며 시간을 벌 것이다.

물러서야 한다.

흥분해서 날뛰던 동지들도 지금은 대열을 갖춰 섰다. 전투로 얻는 자극이 가시고 생존 욕구가 고개를 든 것이다.

지금이라면 설득할 수 있다.

-우린…….

말을 전하기 직전이었다.

유단이 돌진했다. 타린족 전사는 관심도 없다는 듯, 오로지 인간만 보고 달려들었다.

부풀어 오른 신체.

추진력에 쓴 마나가 대기 사이로 흩어지는 게 보였다.

생명을 깎아 만들어낸 힘이었다.

최후의 일격이 성공했다면 그나마 나았을 텐데.

카앙!

도끼날에 유단의 촉수가 튕겨 나갔다. 뒤이어 찌른 공격이 가하란의 왼팔을 꿰뚫었으나 치명상은 아니었다.

그리고.

유단은 힘을 짜내 접근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이, 씨발!”

허리가 갈린 유단이 바닥을 기었다. 인간의 형태를 계속 고집한 대가였다.

이제 형태를 다잡을 마나도 남지 않았는지 가죽이 진흙처럼 변해 흘러내렸다.

칼랑족이 뛰어들어 바닥을 기는 유단을 내리찍었다. 불편한 다리로도 저런 움직임이 가능하다니.

“아아아악!”

통각을 다스릴 여력마저 없는 듯했다. 고통 속에서 유단이 허우적거렸다.

동지들이 일시에 뒤로 물러섰다.

인간과 타린족 전사, 칼랑족 사이에 유단만 덩그러니 남았다.

-한껏 즐겼으니 이젠 돌아갈까?

-죽는 건 좀 그래. 화끈하게 죽는 것도 나쁘진 않은데, 컨디션이 좋을 때 다 쏟아내고 죽고 싶네. 지금은 뒤지면 아쉬울 거 같아.

-나도, 나도.

즐겁게 말하는 동지들이었다.

원시적 욕망을 채운 동지들은 미련이 없다는 듯 하나둘씩 자리를 떠났다.

중형 마수들도 지친 몸을 이끌며 거리를 벌렸다.

뿔뿔이 흩어진다.

애초에 결속력 따윈 없는 존재들이니까 이게 당연하다.

“이 새끼들아! 날 살려! 살리라고!”

유단의 비명이 대기 속으로 허무하게 흩어졌다.

모두가 떠났다.

게웰은 바닥을 기는 유단을 바라봤다. 시선이 마주쳤다. 형태를 잃었으나 애타는 눈동자만큼은 남아 있었다.

“돌아가라.”

타린족 전사가 창으로 먼 곳을 가리켰다. 마지막 배려라는 게 느껴졌다.

-거기 있는 애를 돌려받고 싶다.

“불가하다.”

-너희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겠다. 조용한 곳으로 돌아가 너희의 생이 끝나는 날까지 기다리겠다.

전사의 눈이 깊어졌다.

“너는 말의 무게를 이해하고 있다. 네 말은 신용할 수 있지. 하지만 이놈은 아니다.”

으드득.

창이 유단의 몸을 뚫었다. 유단이 몸부림치며 괴성을 질렀다.

“이건 네가 제어할 수 없는 놈이다.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약속의 의미를 모를 테지. 여기서 처리하겠다.”

-내가 책임지고 붙잡겠다.

“이번 사태 역시 네가 바란 건 아닐 테지. 하지만 일어났다.”

게웰은 주변을 둘러봤다.

시체만 널브러져 있는 대지.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머리가 말했다. 조용히 물러나 숲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인간이 미개척지를 밀고 들어올 그날을 대비해야 한다고.

시선이 유단에게 꽂혔다.

유단은 내게 무엇인가.

동지, 전우, 어쩌면 적, 어쩌면 기생충.

심상 세계가 완전히 분리된 상태라 유단이 죽는다고 해도 피해를 받지 않는다. 여기서 물러나면 육체를 온전히 보전할 수 있었다.

-그 애를 돌려줬으면 한다.

“불가하다. 내 대답은 변하지 않는다.”

-그렇군.

게웰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드넓고 드넓다.

세상을 처음 인식했을 때, 세상은 드넓고 나는 초라하게 혼자였다. 아득하게 펼쳐진 땅을 통해 외로움을 배웠고, 외로움을 희석하기 위해 작은 친구들을 불러 모았다.

관계를 넓혀가는 사이 친구가 아닌 것들도 섞여 들어왔다. 유단은 적이자 친구였다. 동시에 내면의 이해자였으며 완벽한 타인이었다.

떨쳐내려면 너무나도 쉽게 떨쳐낼 수 있는 존재. 동시에 실타래처럼 엮여 끊어낼 수 없는 존재.

생각이 멎었을 때 게웰은 움직이고 있었다.

생명의 원천, 뼈에 녹아든 모든 마나를 일시에 풀어냈다.

삽시간에 비대해진 몸으로 유단이 있는 곳을 덮쳤다. 산의 전사와 칼랑족, 인간이 뒤로 훌쩍 물러섰다.

-도망쳐라. 모든 걸 덜어내고 최소한의 것만 챙겨서.

“뭐?”

-어서!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유단이 탈피했다. 자그마한 뼈에 팔다리만 붙였다. 손바닥보다 작은 크기.

유단은 허겁지겁 살 안쪽을 헤집고 전진해 균열 사이로 뛰어들었다.

뒤조차 돌아보지 않았다. 너는 어떻게 하려고, 라고 되묻지도 않았다.

그저 주어진 기회에 기뻐하며 도망칠 뿐이었다.

-이렇게 될 거라고 예상은 했지.

슬프지도 씁쓸하지도 않았다.

원해서 한 일이니까.

촤아아악!

살점을 비집고 창이 들어왔다. 타린족 전사의 창끝은 너무나도 뜨거웠다.

온몸이 비명을 질렀다.

아니, 일부러 더 크게 질렀다.

도망 중인 유단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부풀었던 몸이 순식간에 조직력을 잃었다. 마나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증발했다.

고작 1분.

게웰은 초라해진 자신의 몸을 내려다봤다. 30cm도 안 되는 자그마한 크기.

처음 눈을 떴을 때, 하늘을 올려다봤을 때 그 크기.

“이럴 가치가 없는 놈이라는 걸 가장 잘 알고 있을 텐데.”

-알고 있다. 그 애는 비겁하지. 유치하고 생각이 짧다. 욕심은 깊은데 신중하지 못해. 그렇지만, 난 그 애가 살았으면 한다.

“원한다면 숲으로 돌려보내 주겠다.”

몸의 감각이 서서히 사라졌다.

-아니. 내가 할 일은 끝났다.

게웰은 마지막 힘을 짜내 주변을 탐색했다. 유단의 냄새가 나지 않았다.

균열 사이로 무사히 도망친 것 같았다.

흐릿해지는 시야로 인간을 바라봤다.

-그 아이를 놓아줄 수 있을까?

인간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겠지.

세상은 드넓고, 나는 다시 초라해졌다. 뼈에 남은 한 줌의 마나가 빠져나가는 걸 느끼며, 게웰은 호흡을 멈췄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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