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9화
인간을 에워싸던 장막도 옅어졌다. 피해를 받은 건 저쪽도 마찬가지였다.
적아를 가리지 않는 환경 조성.
마나만 제거하면 승산이 있다고 생각한 건가?
-계산은 언제나 틀리는 법이지.
동지들이 일어서기 시작했다.
다량의 마나를 빼앗겼고, 지금도 사라지고 있으나 눈앞의 작은 인간을 없애는 건 가능했다.
처리하고 재정비하면 된다.
저쪽도 마나를 못 쓴다면 거병 역시 움직이지 못 하리라.
신체술도 봉인당했을 테니 순수한 육체 싸움이 될 테고, 그건 동지들이 앞서는 분야였다.
기회가 보인다면 체내 마나를 쥐어짜 내 필살의 일격도 가할 수 있다.
많은 걸 잃겠으나 저기 있는 인간을 처리하는 게 급선무였다.
형태를 다잡은 동지들이 앞으로 나설 때였다.
쿵!
장막 안쪽에 있는 거병이 움직였다. 몸체만 남은 기이한 거병을 트레일러 박스 위에 얹은 후 다시금 작은 동지들과 마주했다.
이내 장막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저 쇳덩이로 언제까지 방어할 수 있을까?
주변 모든 마나가 하늘로, 땅으로 빨려가 사라지고 있었다.
눈에도 보였다.
모든 마나가 증발하는 게.
거병 역시 곧 동력원을 잃고 쓰러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저 개새끼는 내 몫이야!”
흥분한 유단이 앞으로 나섰다. 급변하던 육체가 안정된 걸 보면 증발하는 마나를 다잡은 모양이다.
속전속결.
오래 끌면 좋을 게 없었다. 기기를 파괴한다고 해도 변화된 환경이 돌아온다는 보장이 없었다.
정리하고 이탈해야 한다.
동지들도 같은 생각인지 유단의 뒤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예상치 못한 대응에 심대한 타격을 입었으나 끝은 아니었다.
저 인간은 사소한 승리를 얻은 대가로 목숨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게웰이 붕괴 중인 육체를 결집하며 앞으로 이동할 때였다.
-멈춰.
동지 중 하나가 말했다. 마나 감각력이 뛰어나 주변 탐사에 앞장서는 동지였다.
-저 기계를 봐. 마나를 붙들고 있다. 우리처럼 말이야.
동지의 말을 들으며 다시금 거병과 트레일러를 확인했다.
대기로, 땅으로 이끌려 사라져야 할 마나가 거병과 트레일러 주위에 붙들려 있었다.
마나 밀도가 예상한 것만큼 낮아지지 않았다.
-움직인다.
해더 트럭의 바퀴가 맹렬하게 회전했다. 차체를 돌리는 순간 장막이 완전히 걷혔다.
“잡아!”
유단이 뛰쳐나갔다. 검게 변한 유단의 몸이 해더 트럭 정면을 덮치려는 순간, 칼랑족이 가로막았다.
타아앙!
격한 소리와 함께 유단이 튕겨 나왔다. 칼랑족도 뒤로 물러서며 자세를 정비했다.
“이 개같은!”
마나를 잃은 대가가 너무 컸다.
평소의 유단이었다면 단숨에 칼랑족의 머리를 따냈을 것이다.
증발하는 마나를 세심하게 컨트롤하며, 동시에 육체 변형도 막아야 했다.
전투에 총력을 기울이기 어려운 상태.
거병을 실은 해더 트럭이 마수들의 시체를 으깨며 나아간다.
측면을 노려보려 했으나 거병과 칼랑족이 공격을 전부 쳐냈다.
거병도 거병이지만, 칼랑족의 도구들이 가장 성가셨다. 배낭에 손을 집어넣을 때마다 괴상한 물건들이 튀어나왔다.
강렬한 빛을 분사해 시야를 차단하는 육면체, 순간적으로 방향 감각을 잃게 하는 작은 쇠침.
거기에 손바닥만 한 인형들이 소리 소문 없이 다가와 종이 쪼가리를 던지고 갔는데, 그 종이가 한순간 거대한 불길을 만들어내 동지를 집어삼켰다.
마나가 아닌 힘이었다.
형태는 닮았으나 출처가 다른 힘이었다.
“으아악! 저 새끼들이!”
분을 못 이긴 유단이 타들어 가는 신체를 잘라내며 외쳤다.
하지만 해더 트럭은 이미 전장을 이탈한 상태였다.
쫓아갈 수 없었다.
도시에서 지원군이 올 것이다. 마나 증발 현상이 언제까지 유지되는지 알 수 없다는 게 가장 큰 위험 요소였다.
아니, 인간들은 이미 방비해 뒀을지도 모른다.
마나를 붙들고 있는 거병.
저런 거병들이 전장으로 밀고 들어오면 이곳에 모인 대다수의 마수가, 동지들이 생을 마감하게 될 것이다.
쉼터를 얻기 위한 투쟁은 다음으로 미뤄야 하나.
끝까지 싸우다 죽어야 할 필요는 없다. 어디까지나 살기 위한 싸움이었다.
-돌아가자.
게웰은 판단을 내렸다.
거병에 탄 작은 인간.
그 인간은 작은 승리가 아닌 완벽한 승리를 거머쥐었다.
인정해야 했다. 이건 소규모 전투뿐만 아니라 전쟁에서도 패배했다.
예상치 못한 사각에서 칼날이 들어왔다. 버티는 건 무의미하다. 덜어낼 것들은 덜어내고 다음을 준비하는 게 옳았다.
지성을 갖춘 동지 둘이 곁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열다섯의 다른 동지들은 유단 곁에 섰다.
게웰은 탄식을 삼켰다.
길리우드의 잔여 의식이 완전히 사라졌다. 지성을 갖췄으나 호전적인 동지들을 통제할 수 없게 됐다.
저들은 유단을 따를 것이다.
아니, 폭력을 따르는 것이다.
-게웰.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말이야, 우리한테는 이게 더 어울리는 거 같아.
동지가 온몸에 칼날을 두르며 달려 나갔다. 죽음으로 향하는 길목임에도 그의 눈은 환희로 가득 찼다.
촤아악!
거병의 도끼에 양분되는 순간에도 그는 즐거워하며 육체를 움직였다.
끼기긱, 콰드득!
거병의 오른팔이 으그러졌다. 구동계가 완전히 망가졌는지 오른팔이 움직이지 않았다.
거병이 물러서며 팔 모듈을 탈락시켜 버렸다.
쿵!
팔 하나만 남은 거병.
동지들이 낄낄 웃으며 나아간다.
폭력에 심취한 모습을 보고 있으니 애가 탄다.
이래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저들을 말로 설득할 수 없다.
-공생, 그리고 안식처를 얻는 게 우리의 목표다.
-아니! 그건 네 목표겠지.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야. 하지만 따분한 건 사실이잖아?
또다시 동지 하나가 달려 나간다.
칼랑족이 발톱을 부러트리며 일격을 날렸다. 날뛰던 칼랑족이 발을 절뚝거리기 시작했다. 목숨을 담보로 한 공격에 다리를 가격당한 것이다.
기세가 바뀌었다. 상태가 지속된다면 전투에서는 승리할 것이다.
하지만 이다음은?
게웰은 집단의 중요성을 이해했다. 인간처럼 군집을 이뤄 세력을 갖추고, 세력을 기반으로 협상을 이뤄내려 했다.
주변을 둘러봤다.
동지들의 시체가 쌓여간다.
저 멀리 인간들의 시체도 그득했으나 인간의 숫자는 여전히 많다.
마수들이, 동지들이 지금처럼 다시 뭉치는 날이 올까?
길리우드의 힘 없이, 자신의 통솔 없이 모일 수 있을까?
격돌 전에 등을 돌린 동지들이 현명했던 걸까. 인간들이 오지 않는 미개척지로 돌아가 간간이 인간을 사냥하며 살았어야 했을까.
땅의 주인이 된다.
다른 지상의 지성체들처럼 권리를 누려보고 싶었다. 그뿐이었다.
카가강!
동지의 목숨 하나가 또 꺼졌다. 목숨의 대가는 거병의 왼발이었다.
기동력을 상실한 거병이 나무처럼 땅에 박혔다. 이제 못 움직일 것이다.
칼랑족이 불편한 다리를 이끌며 거병 옆에 섰다.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키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동지들이 환호했다.
수년 만에 느껴보는, 전투가 주는 강렬한 자극에 눈이 돌아가 버린 것이다.
아니, 이게 동지들의 본모습이다.
탓해서는 안 된다. 잘못된 게 아니니까. 그저 아쉬울 뿐이었다.
전력을 보강해 훗날을 기약한다는 옵션이 동지들 머릿속에는 없었다.
있더라도 당장 피 맛을 보는 게 더 중요하다고 여길 것이다.
그렇다면.
-피해를 최소화한다.
게웰도 참전했다.
도시로 진격하는 건 어떻게 해서든 막을 것이다. 저 둘을 제물 삼아 동지들의 갈증을 풀어주고 발길을 돌린다.
유단은 그나마 말이 통하니, 유단을 통해 설득하면 아직 가능성은 남아 있었다.
“기어 나오지 그래? 그 안에 탄 채로 죽는 것도 나쁘진 않지만.”
유단은 마음껏 광기를 배출하고 있었다. 평소에는 잘 눌러오던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다.
거병 안에 탄 인간.
가하란이라고 했던가.
열등감의 원천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흥분할 줄은 몰랐다.
차라리 잘 됐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서 처리하고 끝맺음 하면 다음 작전까지 얌전하게 굴 테니까.
쿠웅.
체임버 덮개가 열렸다. 밖으로 나온 가하란은 당황하는 기색 없이 거병의 측면으로 걸어갔다.
지켜보는 동지들이 쉽사리 움직이지 못했다. 기사가 내렸음에도 반파된 거병이 한 손으로 양날 도끼를 든 채 경계했기 때문이다.
기계에 불과한데, 기백이 느껴졌다. 동지들도 느꼈기에 지켜보고 있는 것이리라.
가하란이 수납함에서 손도끼를 꺼냈다. 양손에 하나씩 들고 동지들과 대치했다.
흔들리지 않는 눈이었다. 죽음을 각오한, 반쯤 포기한 눈이 아니었다.
저 인간은 살아서 돌아갈 생각인가?
“보니까 의견이 갈린 것 같은데, 이쯤에서 끝내는 건 어떤가요?”
가하란이 말했다. 게웰은 직감적으로 알았다. 자신에게 말하는 중이라는 걸.
-늦었다. 동지들은 너희의 피와 살을 원한다.
“여기서 죽을 순 없어요.”
-안다. 하지만 결정된 사항이다. 이번 전쟁은 너의 승리다. 희생자는 나왔으나 거점을 지켜냈으니. 우린 시간을 잃었다. 재정비까지 얼마나 걸릴지 예측조차 되지 않아.
“그거 안 됐군요.”
-그러니 널 데려가야 한다.
가하란이 양손을 힘차게 뿌리며 앞으로 나섰다.
정면에서 맞붙을 심산이다. 도발적인 행동이 동지들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저건 내 먹이야!
-아니. 내 장난감이야!
앞장서 있던 동지 둘이 달려들었다. 같은 곳을 노렸는지 동선이 얽혀 서로 부딪치다가, 이내 양옆으로 찢어졌다.
순식간에 양 측면을 점유한 동지들이 동시에 짓쳐 들었다.
끝이다.
신체술을 쓰지 못하는 인간은 마수 한 마리조차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
칼랑족이 엄호하려 했으나 다른 동지가 달려들고 있었다.
다수의 이점을 활용한다.
인간들이 말하는 정당한 승부 같은 건 있을 수 없다. 동지들에게 정당한 건 이겨서 살아남는 거니까.
“가하란!”
칼랑족의 외침이 대기를 흔들 때였다.
이변이 일어났다.
샛노랗게 달아오른 도끼가 좌우로 춤췄다. 내지른 동지의 팔이 갈리고, 머리가 잘리기까지 한 호흡도 걸리지 않았다.
털썩, 왼쪽에서 달려들던 동지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기쁨에 찬 얼굴로 죽어버렸다.
동지의 피가 가하란에게 쏟아졌다.
인간에게 치명적인 피.
피부가 부글부글 끓으며 비명을 질러야 하는데, 가하란은 아무렇지 않게 얼굴에 튄 피를 닦아냈다.
이상했다.
신체술을 사용할 수 없을 텐데 기이할 정도로 빠르고, 체액이 몸에 닿았는데도 피해가 없었다.
무엇보다 대응이 비정상적으로 빨랐다.
공격 의도를 품고 먼저 움직인 건 동지였으나, 공격 루트를 선점하고 기다리고 있던 건 도끼였다.
멈춰 있는 도끼를 향해 동지가 뛰어든 꼴이었다.
-잡아당기고 있다.
동지가 말했다. 무엇을 당기고 있는지, 게웰도 곧 알게 됐다.
거병 쪽에서 흘러나온 마나, 마전기가 대기로 흩어지는 과정에서 가하란에게 달라붙었다.
붙들린 마나가 꼼작도 못 했다.
마나 밀도가 점점 상승하고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게웰 역시 증발하는 마나를 붙들고 있었으나, 조금씩 누수가 일어나고 있었다.
다른 동지들도 마찬가지였다.
증발을 완벽하게 억제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저건 무슨 원리지?
이치에서 벗어난 힘이 개입하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