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8화
발치에서 발버둥 치는 마수의 머리를 발로 밟았다. 흐느적대던 마수의 몸이 금세 뻣뻣해지더니 이내 녹기 시작했다.
“홀린 것 같군.”
타챠는 창대를 거세게 털었다.
소란이 잦아들었다.
노도처럼 밀려들던 마수의 공세도 멈췄고, 뒤쪽에서 들려오던 폭음도 멎었다.
-저쪽으로 다 몰려가는 거 같은데.
날렵한 형태의 거병이 다가왔다. 필렌의 전용기였다.
-재정비해서 다시 오려는 걸까?
“기세는 저쪽에 있었다. 멈출 이유가 없는데 멈췄지.”
상황을 확인하고 싶어도 거리가 멀었다. 랍파들의 매도 일정 거리 이상은 접근하지 못했다.
“아저씨.”
에단이 격한 숨을 몰아쉬며 옆에 섰다.
“전황은?”
“볼 수 있는 데까지 봐봤는데, 마수들이 무언가를 둘러싸고 있어.”
“무언가?”
“거병 같기는 한데, 자세한 건 모르겠어. 다오의 눈으로도 안 보여. 더 가까이 가면 공격당할 테니 그럴 수도 없고.”
“게웰도 예상치 못한 일이라는 거군.”
어쨌든 호재였다.
덕분에 시간을 벌었으니까.
방위군과 함께 전선을 다지고 진지를 구축하면 인근 도시에서 지원이 올 때까지 버틸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이리되고 마는 건가.”
게웰은 신중한 자였다. 소통의 의미를 아는 자였다. 더디더라도 타협점을 찾아낼 수 있을 거라 여겼는데…….
“아저씨. 마수는 게웰 같은 놈만 있는 게 아니잖아요. 인간도 그렇듯, 저쪽도 뭔가 문제가 있겠죠.”
타챠는 주변을 둘러봤다. 반파된 거병과 죽은 인간들, 그리고 마수의 시체.
삶은 투쟁이고 패배하기 위해 살아간다고 하지만, 이런 무참한 죽음은 보기 싫었다.
휩쓸려 사라지는 생.
딱하기 그지없었다.
인간도, 마수도.
용병들과 대화를 주고받던 필렌이 체임버 덮개를 열며 몸을 내밀었다.
“도마뱀 씨, 가하란 못 봤어?”
“가하란?”
“대열에 합류해 있다가 잠깐 이탈한 거 같은데, 주변에 안 보이네.”
“그러고 보니 뛰쳐나간 거병이 한 대 있었다. 용병단 마크는 없었던 것 같고.”
“이쪽에서 기동 중인 거병은 우리뿐이니 그거 가하란 맞겠네. 근데…… 뛰쳐나갔다고? 어디로?”
타챠는 눈을 찌푸리며 창을 들었다.
“저기.”
드넓은 평야를 가리켰다.
마수들로 우글거리는 곳.
타챠는 필렌과 눈길을 주고받았다. 이어서 에단을 바라봤다.
“아니겠죠, 설마.”
에단이 불안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높게 날고 있는 다오가 날카로운 울음을 내며 하늘을 갈랐다.
“다시 보고 올게요.”
“무리할 필요는 없다. 네 짝의 안전이 더 중요하다.”
에단은 말을 듣지 않고 출발했다.
가하란은 무모하긴 하지만 생각이 없는 꼬마는 아니었다. 이유가 있으니 적진 한복판으로 들어갔을 터.
“만약 저곳에 갇혀 있다면, 구출할 수 있을까?”
“뚫어낼 수는 있다. 하지만 생환은 장담 못 한다. 난 살아올 수 있으나 다른 자들의 목숨까지 보장할 수는 없으니까.”
필렌이 고개를 살짝 내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눈빛이 예리해졌다.
“낮은 확률에 우리 애들 목숨을 걸 수는 없지. 그러니, 내가 직접 가는 수밖에.”
“저 안에 들어가려면 주변 정리는 해둬라. 그 쇳덩어리도 금방 고철로 변할 테니.”
“나 살려줄 수 있어?”
“글쎄.”
“자신감 없는 도마뱀 씨는 매력 없는데.”
“인간들은 원래 내 매력을 모르지.”
타챠는 창대로 땅을 찍으며 기다렸다. 얼마 후 에단이 돌아왔다. 얼굴이 창백했다. 심력을 많이 썼는지 왼쪽 눈의 실핏줄이 터져 있었다.
“볼 수 있는 데까지 보고 왔어요. 안에 있는 건 가하란의 거병 맞아요.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버티는 중이고. 그리고 칼랑족과 이상한 거병도 한 대 같이 있어요.”
“이상한 거병?”
“팔다리가 없어요. 몸뚱이만 덩그러니 있는데, 고장 난 건지 뭔지 잘 모르겠어요.”
후웅.
타챠는 창대를 뽑아내 크게 휘둘렀다. 식었던 몸에 다시금 열기가 감돌았다.
“버티고 있다면 손을 보태줄 수 있지.”
“같이 가.”
필렌이 거병을 끌며 옆에 붙었다. 타챠는 뒤를 슬쩍 본 후 턱짓으로 용병들을 가리켰다.
“자리를 지켜라. 각자 해야 할 일이 따로 있는 거니까.”
“내 자식을 구해준 애야. 그 빚 겨우 갚을 수 있게 됐어.”
“죽음은 갚은 게 아니다.”
“누가 죽는대? 늙긴 했어도 이런 곳에서 죽을 정도로 낡진 않았어.”
체임버 덮개가 내려왔다.
결의를 다진 인간은 막을 수 없다. 타챠는 창대를 어깨에 이며 몸을 돌렸다.
“위험할 것 같으면 먼저 몸을 빼라.”
-내 걱정 말고 가하란부터 챙겨.
수천 마리의 마수.
덧없는 죽음이 계속 쌓여나갈 것이다. 전사들의 대결이 아닌 일방적인 학살. 그 업은 언젠가 이 몸뚱이에 내려앉을 것이다.
바라던 죽음의 형태는 아니나, 오랜 친우가 남긴 부탁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그 아이를 챙겨주게.”
타챠는 위대한 랍파이자, 가장 높은 곳에서 본 자, 핀들론의 유언을 되새김질했다.
“말이란 참으로 무겁군.”
죽음은 두렵지 않으나, 위대한 대전사와 다시 못 겨룬다는 점은 두려웠다.
부디 덧없는 끝이 아닌 찬란한 패배 속에서 끝날 수 있길.
“따라와라.”
적진을 향해 일직선으로 내달릴 때였다.
-자, 잠깐만요!
쿵쿵거리며 자그마한 거병이 앞을 가로막았다. 가하란한테 얘기는 들었지,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타, 타, 타챠 님 맞으신가요?
“그렇다.”
-다행이다. 저, 저, 저기 전할 말이 있어요.
“이따가 듣겠다. 지금은…….”
-아빠가, 아니, 가하란이 반드시 타챠 님에게 전하라고 했어요. 무, 무시하면 안 돼요.
“꼬마가?”
걸음을 멈추고 거병을 노려봤다. 거병이 고개를 틀더니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저, 저기…….
“말을 해라.”
-너무 똑바로 보시면 제가 부끄러워서…….
타챠는 창대로 거병의 팔을 쳐내고 고개를 강제로 틀어버렸다.
“노닥거릴 시간 없다. 당장 말해라.”
-아, 알겠어요!
거병이 떠듬떠듬 말하기 시작했다. 곁에 있는 필렌과 에단도 같이 들었다.
이야기를 듣고 나서 타챠는 창대를 치웠다. 거병이 허리를 숙이며 숨을 몰아쉬었다.
기이한 기계였다. 생명 활동을 하지 않으면서 숨 쉬는 모양은 따라 하고 있다. 가하란이 의도한 건가, 아니면…….
“정말 가능한 거야?”
에단이 작은 거병에게 다가섰다.
-네, 네. 시뮬레이션은 완벽해요. 카트시 누나가 도와줬어요. 정말 환상적인 연산이었어요.
“카트시?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된다는 거지?”
-네!
터무니없는 말이었다.
타챠는 시선을 먼 곳으로 던졌다.
거대한 마수들이 뭉쳐 있었다. 진격을 막아내려면 도시 단위의 방위 시설이 필요하다.
그걸, 아무것도 없는 평지에서 해낸다?
-곧 시작될 거예요. 성공하면 무엇보다 타챠 님이 중요하다고 했어요.
“꼬마가 전한 말은 그게 전부냐?”
-네, 네. 아니. 마지막으로 한 말이 있어요.
“뭐지?”
-퀸이 날뛸 수 있도록 준비해 뒀으니 마음껏 날뛰어 주세요.
“퀸이라.”
작은 거병이 몸을 홱 돌렸다.
-시작됐어요! 디졸브 필드 생성. 공핍 영역이 펼쳐질 거예요!
몸을 훑는 기이한 감각에 고개를 내렸다.
서서히, 하지만 확실하게 차단되고 있었다. 뿌리에서 올라와야 할 마나가 느껴지지 않았다.
대기에 넘실거려야 할 마나도 연결성을 잃으며 퍼져나갔다.
키이잉, 쿠웅.
옆을 돌아봤다. 필렌의 거병이 한쪽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체임버 덮개가 열렸다.
“설명만 들었을 땐 가능한가 싶었는데, 바로 이렇게 되네.”
필렌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고장 난 거냐?”
“도마뱀 씨, 거병은 그렇게 쉽게 고장 안 나. 근데 동력원을 잃으면 어쩔 수 없지. 액상 근육의 마전기 분사량이 기준치를 넘어섰어.”
“알기 쉽게 설명해라.”
“물을 가득 담아둔 통에 구멍이 잔뜩 뚫렸어. 누수를 막고 싶어도 막을 수 없을 정도로. 마전기라 잔량 유지한 채 잠시나마 버틸 수 있지만, 순수한 마나로만 움직이는 것들은…….”
필렌의 눈동자가 움직였다.
저 멀리 떨어진 곳.
거대한 마수들이 휘청거리는 게 보였다.
-아. 영역권 안쪽이었네요.
자그마한 거병도 주저앉았다.
-포집의 한계치를 웃돌아요. 아, 몸이 무거워요. 잠깐만…… 쉴게요…….
조용해졌다.
타챠는 필렌을 바라봤다.
“신체술은?”
“안 돼. 주변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 공핍. 정말로 마나가 사라졌어.”
“거병 예상 운용 시간은?”
“아쉽게도 10분이 끝이야. 움직이기 시작하면 더 빠르게 소모되겠지.”
타챠는 고개를 끄덕인 후 몸을 돌렸다.
“돌아가라.”
“도마뱀 씨는?”
“마나가 없으면 불편하긴 하지. 하지만 산의 전사에게 내려진 축복은 마나가 아니다.”
단련된 육체.
그리고.
“영령께서 굽어살피실 테니.”
창대를 움켜쥔 채 전진했다.
* * *
형태를 유지할 수가 없었다.
게웰은 몸을 짓누르는 강대한 충격에 정신을 잃을 뻔했다.
뼈대가 허물어져 간다. 거대한 몸이 비명을 지르며 잘게 부서지기 시작했다.
-안 돼, 안 돼!
-벗어나야 해!
지성 있는 동지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금세 깨달았다. 비대한 몸을 버리고 작은 개체로 돌아갔다.
쿠우우궁.
몸을 지탱하던 마나를, 뼈에 응축된 마나를 보이지 않는 손이 사정없이 잡아당기고 있었다.
마나가 소멸했다.
시작이자 끝, 어디에나 존재해야 할 힘의 근원이 사라졌다.
게웰은 바닥을 내려다봤다.
소형 개체들이 흐느적대며 쓰러지는 게 보였다.
작은 동지들은 몸에 담고 있는 마나가 적었다. 절대량이 적은 만큼 급속도로 빠져나가는 마나에 대처하지 못하고 기력을 잃은 것이다.
마수는 다른 생명체와 달리 섭식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운 편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혹은 변질될 때부터 뼈에 마나가 쌓이고 그걸 에너지원 삼아 움직이니까.
게웰은 투명해져 가는 장막 안쪽을 바라봤다.
인간들이 보인다.
저들에게 마나는 생존에 반드시 필요한 요소가 아니었다. 유용하게 쓰는 도구일 뿐, 마나가 없다고 해서 죽는 건 아니니까.
“게웰!”
유단이 고함을 치며 물러서는 게 보였다. 형태가 제멋대로 일그러지고 있었다.
-흥분하지 말고 체내에 남은 마나를 붙잡아라. 증발을 최대한 막아.
이성 있는 동지들은 이미 방법을 깨달아 행하고 있었다. 끓어버린 물처럼 증발하는 마나를 통제 가능한 마나로 끌어당겼다.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마나가 소모되는 끔찍한 상황.
하지만 육체가 완전히 붕괴하는 건 막을 수 있었다.
몸이 내려앉았다.
게웰은 작아진 몸뚱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소형 마수는 대부분 쓰러졌다.
하지만 중형 마수들은 버티고 있었다.
-저걸 제거해야 한다.
장막을 만들어내는 트레일러.
그게 모든 장치의 핵심인 것 같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