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447화 (447/558)

제447화

-달아오른 두 남녀는 이내 발가락 사이에서부터 사근사근 올라오는 욕정을 참지 못하고, 바짝 붙어 입술을 탐하면서, 뜨겁게 돋아나는 감촉을 만끽하며…….

가하란은 뒤를 돌아봤다. 카트시가 기계 안구를 쭉 내뺀 채 중얼거리고 있었다.

-예전에 본 관능 소설이 갑자기 생각나서요. 여긴 저 혼자 고생할 테니까 두 분은 볼일 봐요. 노동은 기계의 몫이지. 인간들은 참 얄궂다니까요. 이런 상황에서도 눈에 정열의 꽃을 피우면서! 어!

가하란은 얼굴을 쓸어내리며 카트시 본체로 다가갔다.

“끝난 모양이네.”

-끝났죠. 켈트의 머리는 모든 걸 쓱싹 해 버리니까요. 그러니까 여기 상황은 신경 쓰지 말고 계속해요. 뭐, 침대라도 하나 놓아 드릴까요?

“정말 계속할까?”

-내가 아는 순진무구한 가하란은 죽었나 보네요. 슬퍼라. 그래도 괜찮아요.

살짝 미소 짓다가 따끔한 시선이 느껴져서 왼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웍센 선배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바라보는 중이었다. 옆에는 슬리피도 있었다. 표정이 없는 거병인데, 왜 감정이 보이는 거 같지?

“나도 못 본 척해주랴?”

“선배님까지 절 놀리시면 저 못 버텨요.”

“그럼 어쩔 수 없지.”

쿵!

지면이 흔들렸다. 높이 40m에 달하는 거대한 마수가 다가오고 있었다.

-서두르죠. 저게 오면 역으로 우리가 마나에 깔려 사라질 테니까.

가하란은 해피에 올라탔다. 체임버 덮개를 닫자마자 해피가 말했다.

-눈치껏 조용히 있었는데, 저 사람 맞죠?

“맞아. 내가 만나야 했던 사람.”

-축하해요! 꽃다발은 제가 만들게요. 약혼식은 언제 할 거예요? 어디서 살 예정이죠? 옆에 제 격납고도 만들어줄 거죠?

“하하, 나중에 말해줄게.”

-알겠어요. 근데 카트시 언니는 참 말이 많은 거 같아요. 지금도 안에서 계속 떠들고 있어요.

“너도 만만치 않은걸.”

-그래서 좋아요. 닥이 좀 조용히 하라고 계속 소리치고 있는데, 전 더 떠들고 싶은걸요! 아! 슬리피가 폭발했어요.

“얼른 시작해야겠네. 슬리피가 화내면 무서우니까.”

-배쉬플은 고정을 끝냈어요. 언제 시작하는지 굉장히 조심스럽게 물어보는데, 뭐라고 할까요?

가하란은 조종간을 잡으며 말했다.

“지금.”

* * *

“저건 뭐야.”

유단은 끈적하게 모여든 마나의 막을 바라봤다. 모든 걸 차단하는 에너지 덩어리.

이성을 잃은 작은 마수들조차 이제는 달려들지 않았다.

팔을 빙글빙글 돌리다가 있는 힘껏 뿌렸다. 떨어져 나간 살점이 장막에 부딪혔다.

소리도 없이 살점이 사라졌다.

거병의 외장갑도 날려버릴 힘이었는데.

“동쪽에는 오라클이 있듯, 서쪽에도 한가락 하는 놈들이 있나 보네. 게웰, 저거 치울 수 있겠어?”

-지하까지 힘이 이어지고 있다. 밑으로 뚫고 들어가는 건 힘들어.

“구석에서 쓸데없는 발악을 하네.”

-저 트레일러가 마나를 분사하고 있다. 위쪽을 눌러버리면 장막과 함께 찌부러지겠지. 내 신체에 손상이 가겠지만, 수복하면 그만이다.

“역시 든든해.”

처음 보는 방어 수단이었으나 위협적이지는 않았다. 게웰의 말대로 눌러버리면 그만이니까.

“저쪽도 버러지만 있는 건 아니네.”

방책에서 수비하던 거병들이 한곳에 모이고 있었다. 용병 놈들이었다.

방위군도 저 멀리서 대열을 갖추는 게 보였다. 도심지에서 벌어진 테러는 어느 정도 정리한 모양이다.

사소한 변수가 몇 개 생겼으나 달라지는 건 없을 것이다.

곧이어 벌어질 학살을 떠올리며 흥겹게 웃을 때였다. 장막 안쪽에서 서성대는 놈들이 눈에 들어왔다.

곧 죽을 벌레들이라 제대로 확인 안 했는데, 지금 보니 아는 얼굴이 하나 보였다.

둔의 공방주.

칼랑족 엔엔이 왜 저기에 있지?

전선을 휘젓던 괴상한 거병은 저놈의 작품인가?

시선을 옮겼다. 늙은이와 작은 거병이 보였다.

그 옆으로 남녀가 서 있었다. 여자는 뒤돌아 서 있어서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유단은 턱을 매만졌다. 사내놈 쪽에 눈길이 간다. 낯설면서도 익숙한 듯한 기이한 느낌이다.

아니, 불쾌하다. 왜 이렇게 더러운 기분이 들까?

때마침 여자가 고개를 돌렸다.

“풋.”

작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징글징글한 면상이었다.

밀레나 엔첸세.

나와 게웰을 죽음 직전까지 몰아넣었던 그날부터 국경에 칩거하기 전까지 아주 질리도록 봐온 여자였다.

저 여자 손에 죽어나간 동지가 몇이었더라?

“게웰. 학살자가 저기 있네.”

-나도 확인했다.

“저년만큼은 쉽게 죽여선 안 돼.”

-아니. 오히려 깔끔하게 처리해야 한다.

“아이씨, 네 말이 맞긴 하지만 저년을 곱게 보내주면 내 속이 뒤틀린단 말이지. 마수로 만들어서 시내에 던져 놓고 싶은데, 안 될까?”

-따로 빼내는 건 어렵다. 한 번에 처리할 거니까.

쿠우웅, 게웰이 움직였다. 육중한 몸이 나아간다. 서른 개의 각기 다른 형태의 발이 지면을 두드렸다.

“그래. 어쩔 수 없지. 아쉽지만 그게 편하니까. 대신!”

유단은 가볍게 발을 찼다.

40m를 수직 낙하해 지면에 닿았다. 퍽 소리와 함께 발밑에 있던 작은 마수 한 마리가 으깨졌다.

“미안. 그러게 피했어야지.”

발바닥에 묻은 체액을 툭툭 털어낸 후 장막으로 걸어갔다.

그사이 남자가 거병에 올라탔다. 거병 손에는 희한하게 생긴 쇳덩이가 들려 있었다.

“반갑네, 반가워. 어? 이런 곳에서 만나고 말이야.”

피부 조직을 움직여 인간 시절 입었던 옷을 만들어냈다. 질감도 구현해 내고 싶었으나 잘 기억나지 않아 대충 형태만 잡았다.

장막 안쪽의 인간들이 고개를 홱 돌렸다.

유단은 득실대는 마수들을 향해 비키라는 손짓을 했다. 머리가 있는 놈들은 알아서 길을 터줬으나, 장막 근처에 있는 작은 놈들은 이빨을 드러내며 덤벼들었다.

“게웰의 목소리가 닿지 않나 보네. 대체 얼마나 멍청하면 말귀를 못 알아듣는 거야.”

촤아악!

양 측면에서 달려든 마수 일곱 마리를 찢어버렸다. 양팔에서 돋아난 촉수가 놈들을 잘게 다진 후 삼켜버렸다.

역겨운 맛이 올라왔다. 유단은 퉤 하고 침을 뱉었다.

“요즘 들어 내 입맛이 까다로워진 것 같아.”

장막 앞에 서서 밀레나를 바라봤다.

“밀레나, 나 기억해? 이 목소리 정도는 기억할 법한데.”

밀레나가 표정을 굳히며 다가왔다.

장막을 하나 두고 마주 보는 꼴이 됐다.

“그 얼굴.”

밀레나가 말했다.

“아하하, 이 얼굴? 오해하지 마. 원래 내 얼굴이니까. 유단이란 이름도 원래부터 내 거였고. 타리움에 있는 그 새끼가 빼앗아 간 거지만, 뭐 옛날 일이니 상관없으려나?”

촉수를 몇 가닥 뽑아내 장막을 어루만졌다. 강성을 극한까지 올렸음에도 마나의 장벽에 닿자마자 녹아내렸다.

“따끔해라. 기술도 좋아, 이런 걸 만들어내고.”

밀레나가 손에 쥔 단검을 들어 올렸다.

“그 목소리, 기억나네. 게웰 안에 있던 놈. 맞지?”

“영광이네, 기억해 주고. 그 뒤로도 널 참 지겹게 만났지. 넌 모르겠지만.”

“내가 썰어버린 마수들 중에 네 친구들이 있었나 보네? 친구들이 죽을 때 넌 멀리서 구경만 했겠고.”

“예쁘장한 얼굴로 왜 그렇게 사납게 말해, 응? 가슴 아프게. 우리가 보통 사이야? 어?”

단숨에 촉수를 뽑아내 밀레나의 얼굴 쪽으로 날려 보냈다.

촤아아아, 치이익!

스무 가닥의 촉수가 밀레나의 얼굴 앞에서 녹아내렸다.

“아쉽네. 이게 아니었으면 직접 얼굴에 구멍을 내주는 건데.”

“나도 아쉽네. 그 목을 내가 잘라줄 수 있는데.”

“내 목을? 그건 힘들걸. 난 온전한 인간이 됐거든. 연약한 너희들과 달리.”

“인간? 그 몰골이 어딜 봐서 인간이라는 거지?”

“명칭이야 살아남는 쪽이 대충 정할 수 있잖아. 그러니까 오늘부터 내가 인간의 표본인 거야. 너희는 역사서에서나 찾아보게 될 열등한 종이 되는 거고. 이참에 마수라고 불러줄까?”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게 귀여운 맛이 없었다. 그래서 더 마음에 들지만.

저 당돌한 얼굴이 죽기 직전에는 어떻게 변할까?

“내가 꼭 네 시체를 찾아내서 그 얼굴 가죽을 얇게 포 뜬 다음에 내가 쓰고 다녀줄게. 좋지?”

“할 수 있겠어? 어려울 텐데.”

“걱정 마. 나 손재주 좋아.”

밀레나가 한 걸음 다가왔다.

“네가 정말 유단이라면, 타리움에 있는 그 유단은 뭐지?”

“살아남게 되면 가서 직접 물어봐. 아주 장대한 스토리가 있으니까. 거기서 나온다면 말이지.”

웃음이 절로 나왔다.

“나야 마음 같아서는 이 장막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려주고 싶지만, 내 친구가 서두르자고 하네.”

뒤를 돌아봤다. 게웰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으깨지기 싫으면 이거 치우고 도망쳐. 그게 살 확률이 높으니까.”

-걱정해 줘서 고마워, 형. 근데 괜찮아.

거병 쪽에서 난 목소리였다.

유단은 눈을 얇게 뜨며 거병을 바라봤다.

“형? 넉살이 좋은 친구네. 초면에 바로 형이라니. 아우 삼아줄 테니까 너도 이쪽으로 넘어올래? 마침 발 받침이 하나 필요해졌는데.”

-초면이라니. 어릴 때 자주 봤잖아. 기억 안 나?

“어릴 때? 뭔 개소리를 하는 건지. 시간 버는 중이야? 얼마든지 그렇게 해. 나 인정 많은 사람이야. 곧 뒈질 놈들의 발악 정도는 지켜봐 줄 수 있어.”

거병이 몸을 틀었다.

체임버 쪽이 열리며 남자가 얼굴을 드러냈다.

“과정은 알 수 없지만, 그런 모습이 됐구나.”

유단은 삐뚜름하게 남자를 쳐다봤다.

“왜 자꾸 아는 척이야. 정들게.”

“몸을 이루는 정보가 복잡하네. 인간도 아니고 마수도 아니고. 기구한 삶이야. 형이나 나나, 참 긴 길을 돌아왔어.”

“친해지고 싶으면 내려서 거길 나와. 안쪽에서 씨불이지 말고.”

남자가 딱하다는 듯이 얼굴을 찌푸렸다.

뒤통수가 얼얼해졌다. 화가 나기 이전에 어이가 없었다. 저건 뭔데 저러지?

이쯤 되니 호기심이 생긴다.

“날 정말 알아?”

“섭섭하게 이럴 거야? 그보다 그때 본 게 형이었구나. 난 그게 서쪽의 불청객, 게웰인 줄 알았는데.”

“언제적 일을 말하는 거야? 어?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 봐. 그 입 찢어버리기 전에.”

“게웰이 폭발하던 날, 내가 다른 위상으로 튕겨 나간 날. 형도 기억하잖아. 안에서 날 만났으니까.”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웃음이 지어지지 않았다.

장막에 닿을 듯이 다가가 거병 안에 탄 인간을 올려다봤다.

얼굴에 옅은 흉터가 있는 남자.

본 적이 없는데, 익숙하다는 느낌이 서서히 들기 시작했다.

아니.

난 이놈을 알고 있다.

이놈이 말한 게 사실이라면…….

“너 설마 가하란이냐?”

“이제야 알아보는 거야? 섭섭하게.”

하, 하하. 굳었던 표정이 풀어지며 웃음이 새어 나왔다.

얼굴을 장막에 들이밀었다. 화끈한 열감과 함께 얼굴 표면이 녹아내렸으나 상관없었다.

“그래, 그 얼굴. 이제야 알겠네. 이 좆같은 새끼. 살아 있었네? 애비 따라 같이 뒤졌다고 생각했는데.”

“형 덕분에 긴 여행을 하고 왔어.”

“내 덕분? 그래? 덕을 봤으면 선물도 사 왔어야지.”

“안 그래도 사 왔어.”

거병이 손에 든 쇳덩이를 치켜들었다.

“오늘 아주 날이네. 엿같은 연놈을 한 번에 쓸어버릴 수 있으니까. 그래, 긴 여행에서 돌아왔으니 이제 좀 쉬자.”

가하란이 옅게 미소 지었다.

“로키한테 빼앗긴 몸은 이제 포기한 거야?”

순간 냉정함을 잃을 뻔했다.

유단은 장막에서 떨어지며 가하란을 노려봤다.

“재미난 걸 알고 있네. 어디서 들었어?”

“본인한테서 들었어. 근데 정말 성공했네. 하긴, 형이 로키를 수 싸움에서 이길 정도로 영리하진 않으니까.”

“이 개새끼가!”

쾅!

장막을 두들겼다.

“손 다쳐. 형은 그걸 부술 능력이 안 돼.”

“그래, 아가리 계속 놀려. 네가 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니까. 로키에 관한 걸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상관없어. 어차피 그놈도 곧 죽을 거니까.”

유단은 뒤를 돌아봤다.

게웰이 거대한 발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지면을 지탱하는 스물아홉 개의 발도 곧 장막을 향해 떨어질 것이다.

“그만 꺼져.”

어찌 됐든 승자는 나였다.

체임버의 덮개가 닫혔다. 동시에 거병이 두 팔을 들어 올렸다.

뒤에 있는 소형 거병이 해더 트럭 쪽으로 달려가 무언가를 만지더니, 이내 “됐어”라고 외쳤다.

-형. 거병의 최고 난제가 뭔지 알아? 바로 무게야. 생각하면 그 거대한 쇳덩이가 두 발로 버티는 게 말이 안 돼. 그걸 가능케 하는 건 공학이 아닌 마법, 마나의 힘이고.

“나 가르치니? 나한테 배우던 네가?”

-그래서 말인데, 만약 마나의 도움이 없다면, 그 거대한 질량을 어떻게 떠받들 수 있을까?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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