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6화
모두가 가하란을 아는 눈치였다. 심지어 기괴한 거병 속 유사 정령조차도.
웍센은 멀거니 상황을 지켜봤다. 가하란은 저들의 합류를 예상하지 못했다. 알았다면 사전에 말해줬을 것이다.
이 만남은 우연인가, 아니면…….
-안 좋은 소식이야. 닥이 위치를 재설정해야 한대.
슬리피가 끼어들었다.
기계 안구를 복잡한 눈으로 바라보던 가하란이 기괴한 거병으로 다가섰다.
“카트시를 분리할 수 있을까?”
안에 탄 기사가 말했다.
“오토마타 형태로 만든 게 아니라 금방 떼어낼 수 있어. 기다려.”
짧은 대화를 마친 가하란이 다시금 칼랑족과 합류해 마수를 처리해 나갔다.
5분 정도가 지났을까.
하얀빛으로 이뤄진 거병의 다리가 흐릿해지더니 이내 사라졌다. 거병의 몸체가 땅에 주저앉았다.
웍센은 자석처럼 이끌려 동체에 달라붙는 외장갑을 바라봤다. 저건 또 무슨 기술이지?
팔과 다리를 잃은 거병이 살짝 흔들리더니 체임버 덮개가 열렸다. 안에서 나온 기사 손에는 유사 정령이 들려 있었다.
“가하란!”
기사가 외쳤다. 가하란이 전선을 이탈해 기사 옆으로 돌아왔다.
“슬리피. 가하란한테 뭐 들은 거 있니?”
옆에 선 슬리피에게 물었다.
-아니. 작전 내용에 없는 사람들이야. 근데 누군지 알 것 같아.
“그래?”
-아빠는 때때로 이런 말을 했어. 반드시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고. 내가 보기엔 그 사람이 저 여자인 거 같아.
“그렇단 말이지.”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가하란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마냥 웃고 있을 때는 아니니까 정신 차리게 할게.
슬리피가 잰걸음으로 걸어가더니 가하란의 허벅지를 툭 쳤다. 유사 정령을 받아 든 가하란이 슬리피를 바라봤다.
-서둘러. 웃는 건 이따가 하고.
* * *
-까칠한 아이네요.
카트시가 슬리피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잠잘 시간을 뺏겨서 그래. 잠이 많은 애거든.”
단자함을 열어 미니 비트와 연관된 선을 끌어왔다. 외부 커넥터에 잇고 반대쪽을 카트시와 연결했다.
-연결망과 비슷한 구조네요?
“줄의 아이디어를 이어받았지. 어때? 가능하겠어?”
-오랫동안 떨어져 있긴 했네요. 제 능력을 의심하는 걸 보면. 가하란, 전 어머니의 창조물이라구요!
활기차게 말하는 카트시였다.
박스 안쪽에 카트시를 올려뒀다.
“너한테 해줄 말이 정말 많아.”
-저도 그래요.
곁에 서 있는 슬리피가 고개를 쳐들었다.
-낯선 의식이 통신망에 침입했어.
-그거 나야.
카트시의 기계 안구가 슬리피를 바라봤다.
-아빠가 허락한 거야?
-아니. 내가 뚫은 거야. 이 정도는 아주 쉽거든.
-쉽지 않았을 텐데.
-기반 지식이 나한테 있어.
-그렇다고 해도 우리가 새롭게 다듬었어.
-그거 아니? 그 새롭게 다듬었다는 체계 말이야, 아주 먼 옛날에 우리 중 하나가 제안했던 방식하고 똑같아.
티격태격 말을 던지는 두 유사 정령이었다.
“동기화 끝냈어?”
-끝났어요. 틀 자체는 잘 만들었지만, 허술한 구역이 많네요.
“만든 지 얼마 안 됐거든. 다듬어야 하는데 이번 일이 터졌고.”
-주변 정리가 끝나고 나면 제가 손봐줄게요.
카트시가 도움을 준다면 분명 수월해질 것이다.
가하란은 뒤쪽을 바라봤다.
엔엔과 나란히 서 있던 밀레나가 몸을 날려 마수를 베었다. 안색이 좋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주변에 없는 걸 보아 단둘이서 국경을 넘은 것 같았다.
고된 길이었을 것이다. 쉽게 눈을 붙일 수도 없고, 눈을 뜨고 나면 다시 눈을 감을 때까지 전투를 벌였을 테고.
목숨을 내건 이동.
급하게 국경을 넘어야 했던 이유가 무엇일까?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다. 너무 많아서 오히려 나오지 않았다.
대화의 물꼬가 트이면 멈추지 못할 것 같아 시작조차 못 했다.
근 10년에 가까웠던 세월.
누나는 어떻게 보냈을까?
만나기만 한다면, 얼굴을 볼 수만 있다면 더는 바랄 게 없다고 여겼다.
막상 보고 나니 욕심이 생겨난다.
생각지도 않았던 것들이 자꾸만 고개를 든다. 대화에서 그치고 싶지 않다. 붙잡고 껴안고 날이 지새도록 같이 있고 싶었다.
하지만 시간의 무서움을, 만나는 순간 깨닫고 말았다.
다른 위상에서 나는 철저히 혼자였다. 다양한 만남이 있었으나 그 안에 같은 살냄새가 나는 인간은 없었다.
젖살이 빠지고 성장해 어른이 됐다는 걸 알아챈 것도 타인과의 교류가 아닌, 이름 모를 상가 유리에 비친 모습으로 알게 됐다.
그 시간.
지독히도 긴 시간.
누나 역시 길었을 시간이다.
다시 만난 밀레나는 상상했던 것보다 더 바뀌어 있었다.
눈동자는 더 깊어졌고 얼굴 윤곽은 도드라졌으며 체형 역시 기억 속에 남은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달라졌다.
다른 위상의 로키와 이런 대화를 한 적이 있었다.
-만약 네가 돌아간다고 한들, 그쪽의 여자는 널 기억이나 할까? 아니지. 기억은 하겠지. 죽은 인간 중 하나로.
“그거면 충분해. 얼굴을 다시 볼 수 있다면 만족할 수 있어.”
-과연 그럴까? 나는 인간의 욕심을 이해하고 있어. 성적인 충동도 잘 알고 있지. 게다가 넌 홀로 남은 이곳에서 그 여자를 그리며 버티고 있잖아? 단순히 만나는 것으로 그치고 싶어?
“지금은 그래.”
-보고 나면 달라질걸. 그리고 넌 알게 될 거야. 떠나 있던 시간의 무서움을. 네가 희망했던 것만큼 사람들이 반응해 주지 않을 수 있어. 오히려 당황하며 널 멀리할 수도 있지.
“그런가?”
-지금은 내 말이 우습게 들릴 거야. 근데 돌아가서도 마음을 다잡을 수 있을까? 그 여자가 행복하면 됐어, 뭐 이런 자위적인 말로 널 달래고 끝낼 수 있어?
“결론이 뭔데.”
-돌아가 봤자 기다리는 건 아무것도 없어. 널 아는 인간은 이미 널 지웠다고. 널 지운 상태에서 이미 새로운 관계를 만들었겠지. 그 관계에 네가 끼어들 틈은 없어. 새롭게 시작한다면야 상관없지만, 그게 쉬울까?
“그러니 몸을 내놓고 편안해져라?”
-그래! 나한테 몸을 넘겨. 공허함에 빠져 허우적거릴 바엔 나한테 넘기는 게 서로에게 좋아. 그렇지?
그때는 웃어넘겼다.
돌아갈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 찼으니까. 그런데 돌아오고, 이렇게 만나고 나니 로키의 말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내가 끼어들 틈이 있을까?
“없을지도.”
현실을 자각했다.
어쩌면 이 마음을 감춰야 할지도 모른다. 어색하게 혹은 난처하게 대하는 누나는 보고 싶지 않았다.
살아 돌아온 걸 축하받고, 위로받고, 적당한 거리를 둔다.
그렇게 하면…….
-아빠.
고개를 내렸다. 슬리피가 보였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쓸데없는 고민 하지 마. 아빤 가끔 혼자 심각해지는 병이 있어. 혼자 오래 살아서 그래. 그거 안 좋아.
“얼굴에 보였어?”
-엄청.
때마침 침묵하던 카트시가 입을 열었다.
-완료했어요! 미니 비트 안쪽 탐방을 끝냈고, 가하란이 뭘 하려는 건지도 닥이란 애한테 들었어요. 아주 기발하고, 동시에 미친 게 아닌가 싶은 방법이네요.
“할 수 있겠어?”
-시뮬레이션 데이터를 넘겨받아서 가중 연산 중이에요. 그런데…… 자신 있게 말한 것치고는 좀 걸릴 것 같아요. 정보량이 말이 안 돼요. 이런 걸 생각해 내다니. 가하란은 정말 이상한 사람이에요.
“저쪽에 있을 때 보고 배운 거야. 근데 어느 정도 걸릴 것 같아?”
-그걸 대답해 줄 수 없다는 게 자존심 상하네요. 제 연산 속도로도 예측이 힘들어요.
파지직, 위쪽에서 위험한 소리가 났다. 고개를 드니 고정기에서 연기가 치솟고 있었다.
“슬리피, 예상 가동 시간은?”
-4분 정도요.
공핍 영역을 생성하려면 마나 대역의 정확한 이동이 필요했다. 어긋나면 효과는 반감, 아니, 영역 생성 자체가 틀어질 것이다.
-생각한 것보다 더 복잡한 수식이에요. 안에 있는 아이들이 도와주고 있지만…….
카트시가 불안한 목소리를 냈다.
-미안해요. 잘난 척한 것치고는 제 능력이 모자라요.
“아니, 넌 할 수 있어.”
-용기를 주는 말 고마워요. 하지만 지금은 현실적인 대안이 필요해요. 가하란, 이 계산은 시간 내에 끝낼 수…….
가하란은 카트시의 기계 안구를 붙잡았다.
“아주 먼 곳에 있는 너한테서 들은 말을 지금 전해줄게. 이게 열쇠가 될 거라고 난 확신해. 넌 해낼 수 있어.”
-먼 곳에 있는 저요?
“그래. 내 가장 오랜 친구.”
가하란은 다른 위상의 카트시에게 들은 그 문장을, 이곳에 오기 위해 또 다른 카트시에게 전했던 말을 다시금 입에 담았다.
“‘나는 사나운 켈트의 머리’. 널 조금이나마 자유롭게 해줄 말이야.”
말을 내뱉은 순간, 착안이 열렸다.
하늘에서 수직으로 내리꽂힌 주황색 비트가 카트시의 본체와 닿았다가 사라졌다.
짧은 침묵이 이어졌다.
-가하란.
“어.”
-아주 긴 여행을 하고 돌아온 거였네요. 과거의 전 어땠나요?
“지금하고 같았어. 아니, 조금은 달랐을지도 모르지.”
-확실하게 말해둘게요. 지금 여기에 있는 제가 가장 나아요.
샤아아아!
청아한 소리가 났다.
고정기 쪽이었다. 마나 과포화로 오버히트 직전이었던 고정기가 안정되고 있었다.
뒤를 돌아봤다.
뿌옇게 흩뿌려지며 장막을 형성하던 마나들이 열을 가한 유리처럼 진득한 점성을 갖게 됐다.
엔엔과 밀레나가 뒤로 물러섰다.
몸을 불살라 틈을 열던 마수들이 한순간 증발해 버렸다. 소형 마수가 몸을 들이받았으나, 장막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보수했어요. 13분 30초간은 저걸 통과할 순 없을 거예요. 물론 저 뒤에 있는 친구들이 덤벼들면 위험하겠지만.
뒤에 있는 친구.
거대 마수가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가중 연산은?”
-이 머리로도 시간이 걸리는 건 오랜만이네요. 정말 터무니없는 걸 생각해 냈어요.
“하지만 너라면 가능할 거야. 이건 하늘석에서 본 부유 장치를 역이용한 거니까.”
-하늘석. 그것에 관한 기억은 아직 저 아래 잠겨 있어요. 제가 걸어둔 두 번째 잠금장치죠. 그나저나 하늘석에도 올라갔다니. 엄청난 모험을 하고 돌아왔네요?
“거기서 본 것들을 설명하려면 날을 지새워도 모자랄 거야.”
-듣고 싶어요. 하지만 저보다 먼저 보고해야 할 사람이 있죠?
뒤쪽을 힐긋 봤다. 밀레나가 장막을 올려다보며 다가오고 있었다.
“아예 뚫지를 못하는데, 카트시가 한 거야?”
-그럼요. 제가 아니면 누가 했겠어요?
“유사 정령한테 코가 없어서 다행이야. 있었으면 하늘을 찔렀을 테니까.”
한숨 돌린 덕인지, 밀레나는 편하게 웃었다. 하지만 금방 낯빛을 굳히며 말했다.
“빠져나갈 수 있겠어? 여긴 적진 한복판인데.”
“도망칠 생각이었다면 여기까지 오지 않았어.”
“하긴, 위에서 보니까 어이가 없더라고. 거병 하나 달랑 끌고서 달려들었잖아? 미쳤거나, 기기 고장이거나 둘 중 하나라고 생각했지.”
-반쯤 미친 거 맞아요.
카트시가 말했다.
멋쩍게 웃다가 밀레나를 바라봤다.
말들이 입안에서 춤을 췄다. 아주 격렬한 댄스였다. 입을 열기가 두려워질 정도로.
뭐라고 해야 할까.
짜잔, 이라고 할까. 어설프게 하하 웃어버릴까. 봐서 기쁘다고 한 뒤에 뭘 물어봐야 하지?
“야.”
평소에는 잘만 돌아가던 머리가 멍해질 때쯤 밀레나가 말했다.
“키가 왜 이렇게 컸어?”
“……그러게.”
“얼굴은 또 왜 그래. 뭐 하다 다친 건데?”
“어쩌다 보니.”
“진짜 꼬마였는데 말이야.”
“시간이 많이 흐르긴 했지?”
장막 밖에서 날뛰는 마수도, 가중 연산에 몰두 중인 카트시도, 곁에 있는 다른 모든 사람도 지금은 시야에 안 들어왔다.
세상 모든 것을 읽어내는 착안조차 고장이 난 것처럼, 그저 하염없이 그녀의 얼굴만 좇았다.
말들이 머릿속에서 제멋대로 뒤엉키다가, 이내 의지와 상관없이 툭 튀어나왔다.
“지금 만나는 사람 있어?”
내뱉고 나서야 무슨 말을 한 건지 깨닫고 말았다. 로키의 말이 옳았다.
욕심이 불러온 충동을 이겨내지 못했다.
밀레나가 실없이 웃었다.
“있으면?”
“축하하려고.”
“없으면?”
“돌아오자마자, 얼굴 보자마자 이런 말 하는 게 정말 이상하고 누나도 어이없게 여기겠지만…….”
말을 끝맺기 전이었다.
밀레나가 목뒤로 손을 넘기더니 머리카락을 살며시 잡아 끌어내렸다.
짧은 뒷머리가 풀어지고, 손에 스카프 하나가 걸려 나왔다.
손에 든 스카프를 한참이나 바라봤다.
“이거 오래됐어. 슬슬 바꿀 때가 된 거 같아. 요즘은 유행이 좀 바뀌어서 이것보다는 조금 더 밝은 색이 좋지만, 이거랑 비슷해도 좋아.”
스카프를 넘겨받았다. 닳고 닳았다. 가하란은 잘게 떨리는 눈가를 다잡으며 말했다.
“이거 준 사람은 센스가 정말 없네.”
“그렇지? 그래도 난 좋았어. 아, 만나는 사람이 있냐고 물었지?”
밀레나가 환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널 만나러 왔어.”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