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445화 (445/558)

제445화

웍센은 슬리피를 바라봤다.

단답이 아닌 길게 대꾸하고 있었다. 그만큼 사태가 심각하다는 뜻이리라.

“뭐가 잘 안되는 거 같은데.”

-예상 범위 안이에요.

가하란이 말했다.

“마음먹은 덕분인지 담담해졌다지만, 저것들이 덤벼들기 시작하면 머리가 하얗게 변하겠지. 이 나이에 이렇게 죽는 건 상상해 본 적도 없는데 말이야.”

둘러싼 마수들을 바라봤다.

금방이라도 덤빌 줄 알았는데 일정 거리를 둔 채 노려보고 있었다.

아니, 자세히 보니 자기들끼리 물어뜯고 난리도 아니었다.

뭐 하는 거지?

-과포화 상태에서 먹이를 던져주면 쟁탈전이 벌어져요. 지능이 없는 놈들일수록 이런 현상이 두드러지고요.

징글징글하게 많은 마수.

그리고 먹이.

웍센은 헛웃음을 흘렸다.

“말년에 마수 먹이가 되는구나.”

-대마수 전체가 도시로 향하는 게 아니라 일부만 움직였어요. 통솔력에 문제가 생겼다는 거죠. 지성 있는 놈들은 도시로 향했겠지만, 식탐이나 사냥 욕구에 충실한 놈들은 슬리피가 흘린 마나 파장에 눈이 돌아갔겠죠.

이 상황조차 계산해 둔 영역인 건가.

“저것들을 다 처리할 묘수는 언제쯤 볼 수 있는 거냐?”

-지형 변수가 발목을 붙잡네요. 마나 대역도 예상치를 벗어났고요. 연산이 끝날 때까지 시간이 좀 더 필요해요.

“가동하기만 하면 전부 제압할 수는 있고?”

거병의 고개가 돌아갔다. 전방에 있는 작은 마수가 아닌 뒤쪽에서 다가오는 거대 마수를 바라봤다.

-소형 개체도 영향을 받겠지만, 제가 노리는 건 거대 질량의 마수들이에요.

웍센은 이동 중인 거대 마수를 바라봤다. 무게가 어느 정도일지 가늠조차 안 되는 놈들.

15m에서 40m까지.

종류도 다양했다.

“지반을 무너트릴 작정이냐?”

당장 떠오르는 건 그것뿐이었다. 거대 질량을 노린다는 건 이용하겠다는 뜻처럼 들렸으니까.

웍센은 주변을 둘러봤다. 곳곳에 그라운드 제로가 남긴 균열이 보였다.

지반이 약한 곳을 타격한다면 지층 자체를 가라앉힐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요. 그건 불가능해요. 저만한 질량이 움직이고 있는데 땅이 버텨주고 있어요. 거병을 수백 대 폭사시키는 게 아니라면 지반을 허무는 건 불가능하겠죠.

“그러면?”

-디졸브 필드. 마나 공핍 영역을 생성할 겁니다. 뿌리로부터 올라오는 마나와 대기 상태에 머무는 마나 사이에 영역을 만들면…….

가하란이 입을 다물었다.

서로를 물어뜯던 마수들이 갑자기 얌전해진 것이다.

시선이 몰리고 있었다.

웍센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의지와 상관없이 떨리고 있었다.

맹렬한 살의가 몸을 뒤흔든다.

-정신을 차린 모양이네요.

거병이 양날 도끼를 손에 쥐었다. 전투태세에 돌입한 것이다.

웍센도 조종대를 잡았다. 도망칠 곳은 없지만, 뭐라도 붙잡고 있어야 안정될 것 같았다.

-진정해.

슬리피가 차창으로 다가와 말했다. 손에는 2m 크기의 삼지창이 들려 있었다.

끝이 뭉툭했다. 찌르는 용도가 아닌 듯하다.

-아빠. 닥이 이동 중이야. 현 위치에서는 필드 생성이 힘들대.

시간이 더 필요한 걸까.

마수들이 거리를 좁혀왔다. 덩치 큰 놈들이 작은 마수를 짓밟으면서 전진했다.

더는 물러설 곳도 없다.

맞상대해야 한다.

“내가 뚫어보마. 아까처럼.”

-속도를 내기 힘들어요. 지금 전진하면 먹잇감이 되겠죠.

“가만히 있어도 죽는 건 마찬가지야.”

-버틸 수 있어요. 그 정도 장비는 가져왔으니까요.

거병이 트레일러로 다가와 박스 상단에 손을 찔러 넣었다.

구긍, 박스 상판이 들리더니 좌우로 살짝 벌어졌다.

슬리피가 손에 들고 있던 삼지창을 땅에 박아 넣었다. 커넥터를 트레일러 하단부에 연결한 후 뒤로 물러섰다.

“뭘 하는 거냐?”

-마나를 응집할 겁니다.

“응집?”

말이 끝나기 무섭게 격렬한 마나 파장이 시작됐다. 웍센은 발밑을 내려다봤다.

아찔한 감각이 전신을 쓸고 지나갔다. 이런 마나 파장은 처음이었다. 뒤늦게 현기증과 구토감이 찾아왔다.

-버텨주세요.

“이놈아, 이런 건 미리 말을 해야……”

웁, 속이 뒤집혔다. 올라오는 신물을 간신히 참아내며 박스를 바라봤다.

“……허.”

가시화된 마나가 박스 상단부를 통해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무차별적으로 뿌려진 마나가 지면에 내려앉았다.

땅이 지글지글 끓었다.

웍센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박스 카를 중심으로 반구형의 막이 형성됐다.

안쪽에서 나갈 수도, 바깥에서 들어올 수도 없을 것이다.

가시화된 마나에 닿으면 거병이든 마수든 형태를 잃고 녹아내릴 테니까.

“이걸 어떻게 제어한 거냐? 마나가 대기로 흩어지지 않고 일정한 상태로 머물다니.”

-머무는 게 아니에요. 마나는 계속 흩어지고 있어요. 단지 그보다 빠르게 공급할 뿐이죠.

웍센은 지면에 박힌 삼지창을 바라봤다. 아무래도 저 자그마한 철심을 통해 마나를 공급받는 것 같았다.

사실 마나야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특히 땅 밑에 있는 뿌리는 모든 것의 시작과 끝이라 할 정도로 막대한 힘을 담고 있었다.

워낙 거센 힘이기에 다룰 수 없을 뿐.

“믿기질 않는구나. 내구성 문제는 어떻게 해결한 것이냐? 이정도 양을 받아내고 있으면 중계기라 한들 단번에 녹아내려야 할 텐데.”

-임의로 제가 지정한 거지만, R3과 R32 대역의 마나는 특정 방식으로 유도하면 상충하는 성질이 있어요. 에너지 이동 시 발생하는 열은 그걸로 해결할 수 있어요. 물론…….

말하는 사이 노랗다 못해 하얗게 변해가는 삼지창이었다. 연결된 커넥터도 외피가 흐물흐물해지며 늘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다고 해도 버티는 데 한계가 있지만요.

슬리피가 움직였다. 또 다른 삼지창을 꺼내 지면에 박고 커넥터를 연결했다.

연결하자마자 기존에 연결돼 있던 커넥터가 완전히 녹아 사라졌다. 커넥터 단자도 불꽃이 팍 튀더니 새카맣게 변해버렸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박스에 단자가 몇 개 있는 거냐.”

-32개요.

“많이도 만들었구나. 하지만 이 속도라면…….”

-30분 정도가 한계겠죠. 그리고 고정기 역시 그 이상은 못 버텨요.

박스 상판이 고정기인 듯했다.

마나를 뿌려대는 장치.

겉에 칠해놓은 방수제가 녹고 있었다. 안쪽이 살짝 드러났는데, 쇠에 붉은빛이 감돌고 있었다.

“금적철을 대체 얼마나 쓴 게냐.”

-필렌 님께 부탁해서 최대한 끌어다 썼어요.

“이런 미친. 저 쇳덩이 하나로 거병 몇 대는 찍어낼 수 있겠다!”

-그래도 돈 낭비는 아니었어요. 이렇게 버티고 있으니까.

“그, 그렇지.”

웍센은 주변을 둘러봤다. 경계하던 마수 한 마리가 기어이 마나의 장막을 향해 달려들었다.

취이익, 마나를 머금은 마수의 육체조차 가시화된 마나에 닿으니 별수 없었다.

붉게 익고 이내 녹아내렸다.

그게 시작이었다.

둘러싼 작은 마수들이 괴성을 질렀다.

몸을 틀어 도망치려 하는 놈들도 보였으나, 뒤쪽에서 중형 마수들이 밀고 들어오니 끼어서 움직이질 못했다.

밀리고, 밀리고.

이내 수십 마리의 마수가 장막에 닿기 시작했다.

퀴에엑!

역한 소리와 냄새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작은 마수들이 장막에 짓이겨지며 사라져 갔지만, 주변을 둘러싼 마수는 여전히 많았다.

아니, 더 늘어난 기분이었다.

게다가.

저 멀리 떨어져 있던 초대형 마수가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왔다.

“이 장막은…….”

질문을 던지기도 전에 문제점을 두 눈으로 확인했다.

작은 마수가 녹아내리는 동안 흩뿌려진 마나에 틈이 생겼다.

가하란의 말대로 장막은 고정된 게 아니었다. 산개하는 양보다 많은 양을 지속해서 공급하고 있을 뿐.

공급에 방해가 생기면 장막이 열리고 말 것이다.

위험은 예상보다 일찍 찾아왔다.

작은 마수가 틈새를 뚫고 들어왔다.

체임버가 열렸다.

뛰쳐나온 가하란이 단숨에 마수의 몸통을 갈랐다.

웍센은 눈만 깜빡거렸다. 순둥이처럼 쇠만 만지작거리던 놈이 아니었다.

체액이 묻은 도끼를 힘껏 털어내며 주변을 훑는 모습은 노련미로도 설명할 수 없는, 경지를 넘은 사냥꾼 같아 보였다.

틈이 벌어질 때마다 가하란이 움직였다. 거병은 쓰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하긴, 자칫 잘못해서 장막 상단에 거병이 닿기라도 하면 바로 녹아버릴 테니까.

치이익.

슬리피가 달아오른 삼지창을 치워내고 새것을 땅에 꽂았다.

“나도 도우마.”

트럭에서 내리려 할 때였다. 슬리피가 문을 틀어막았다.

-할아버지는 거기 있는 게 돕는 거야.

“…….”

-상처받지 마. 할아버진 해야 할 몫을 다 했어.

가하란이 주변을 뛰어다니며 마수를 처리하는 사이, 슬리피는 박스에 올라가 무언가를 만졌다.

인간이 싸우고 거병이 정비한다.

뭔가 바뀐 것 같지만 신경 쓸 일은 아닌 듯했다.

-아빠. 저기.

슬리피가 장막 바깥쪽을 가리켰다.

중형 마수들이 몸을 돌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마수 때문에 시야가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거병?”

가하란이 트럭 위에 올라서며 말했다. 웍센은 반가움에 소리쳤다.

“도시 쪽에서 지원이 온 거냐?”

“아니요. 좀 특이한 거병이에요. 팔다리 부분이…… 형상화한 마나로 돼 있어요. 올이 보여준 기술과 흡사해요. 아니, 마법인가?”

올?

묻고 싶은 게 많았으나 그럴 여유가 없었다. 가하란이 지상으로 내려와 마수를 처리했다.

크기가 작은 마수들이 계속해서 장막 안쪽으로 기어들어 왔다.

장막 안쪽에 마수의 시체가 하나둘 쌓여나갔다.

특이한 거병은 아군인가, 적군인가.

쿠우웅!

측면에서 폭음이 일었다. 빛의 기둥이 바닥에 꽂히더니, 이내 무언가가 날아들었다.

바닥에 꽂힌 건 거병의 팔이었다.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조금 전 저 팔은 5m 정도 늘어났었다.

가능한 건가?

물리적 실체가 없는데도 거병을 지탱할 수 있는 건가?

아니, 형상화했으니 실체가 있는 건가? 가하란이 보여준 마나 파장이 공간을 점유하는 것과 같은 이치인가?

머리가 핑핑 돌았다.

이해할 수 없는 문명의 산물들이 한곳으로 집결했다.

그리고.

“가하란!”

특이하게 생긴 거병의 체임버 덮개가 열렸다.

안에서 나온 건 스무 살 초중반으로 보이는 여자였다.

연붉은 눈동자가 가장 먼저 보였다. 어디서 많이 본 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윽고 거병 옆으로 회색빛 털 뭉치가 내려앉았다.

덩치가 좀 작지만 늑대를 닮은 외관. 칼랑족이었다. 격전을 치렀는지 온몸에 오물이 묻어 있었다.

장막 안쪽에서 분주히 움직이던 가하란이 우뚝 멈춰 섰다.

손도끼를 늘어트리며 천천히 걷더니, 이내 머리카락이 휘날릴 정도로 달려서 장막 앞까지 왔다.

“…….”

가하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주 보는 여자애 또한 입을 열지 않았다.

카아아악!

말 없는 인사가 짧게 끝났다.

마수들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체임버 덮개가 닫혔고, 정체 모를 거병은 빛의 팔을 휘두르며 마수를 갈라버렸다.

웍센은 입을 벌렸다.

자유자재로 형태가 변하는 거병 모듈이라니.

“가하란! 이 마나층, 언제까지 유지되는 건가요?”

칼랑족이 소리쳤다.

“지금 거둘게요!”

흩뿌려지던 총천연색 마나가 한순간에 사라졌다. 거병과 칼랑족이 안쪽으로 들어왔다.

마수들도 따라서 진입했지만, 곧바로 생성된 장막에 대다수가 갈려나갔다.

가하란과 칼랑족이 춤추듯 장막 안쪽을 뛰어다녔다.

도끼가 휘둘러질 때마다 마수가 드러누웠고, 발톱이 긁고 지나가면 분해돼 널브러졌다.

뛰어난 전력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마수는 많았고, 코앞까지 도달한 거대 마수까지 생각하면 턱없이 부족한 인원이었다.

-헤어질 때도 그렇고, 넌 항상 위험한 곳에 있더라!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가하란이 싱긋 웃었다.

웍센은 눈을 깜빡이며 까마득한 후배를 바라봤다. 쑥스러워하는 모습이었다.

공방에 있을 때는 세상 만물을 이해했다는 것처럼 달관한 표정이더니…….

“무책임하게 여기 있을 리는 없고, 방법이 뭐죠?”

칼랑족이 가하란에게 걸어오며 물었다.

“조금 더 버텨야 해요. 역분사체가 세팅될 때까지 조금만 더.”

“도울게요. 뭘 하면 되죠?”

“엔엔 님이 도울 수 없어요. 이건 통신망 내 정교한 연산이 필요한 거라 유사 정령이 아니면……”

“그거라면 도울 수 있어요.”

엔엔이라 불린 칼랑족이 기괴한 거병을 바라봤다.

그와 동시에 체임버 덮개가 열리며 기계 안구가 길게 빠져나왔다.

-가하란. 거기 있는 애들보단 제가 나을 거예요. 뭘 계산하면 될까요?

정체 모를 유사 정령이 뱀처럼 커넥터를 흔들며 말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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